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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21일
서해안 고속도로 완전 개통
공사기간 11년, 총사업비 4조 7천여억원
이 들어간 서해안고속도로가 무안-군산
구간 개통으로 인천에서 목포까지 전 구
간의 공사를 끝내고 2001년 12월 21일
준공식을 갖는다.(항공촬영)
21일 오후 서남권의 새 역사(歷史)를 여
는 2가지 행사가 잇달아 열렸다. 전남도
청이 옮겨갈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에선
새청사 기공식이, 도로공사 서김제영업
소 광장에선 서해안고속도로 완전개통식
이 이어졌다.
한국도로공사는 서해안고속도로(인천~
목포·353㎞)의 최종 구간인 군산~무안
(114㎞·왕복 4차로) 구간을 21일 오후
5시 개통한다고 밝혔다. 서해안고속도로
는 이에 따라 총 4조7857억원을 들인
11년 공사의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이번 전구간 개통으로 과거 8시간 걸리
던 인천~목포 간 주행이 4시간으로 줄어
드는 등 서해안권 교통이 크게 편리해졌
다. 이날 두 현장에선 “서남권시대가 열
렸다”, “서남해지도가 바뀐다”는 말들이
머뭇거림 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낙후’와 ‘소외’의 대명사로 불려졌던 목
포를 중심으로 한 서남권의 발전을 기약
하는 현장이었다.
인천과 목포를 연결하는 353km의 서해
안고속도로 개통에 거는 서남권의 기대
는 매우 크다. 물류비용의 절감으로 인한
기업들의 투자유치가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이미 조성된 대불산업단지 등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남도는 대불산단을 자유무역지
역으로 지정할 계획.
이와 함께 관광객유발효과와 농·수산물
공산품의 유통폭이 커져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예상된다.
▶2011년 3·4共 핵심 실세… 길전식 前 의원 별세
▶2001년 박찬호,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계약
박찬호가 입단식이 끝난 뒤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 기자들의
질문에 웃으면서 대답하고 있다.
▶2001년 언론인 송건호씨 별세
▶2001년 투안쿠 사예드 시라주딘,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선출
▶1999년 유럽연합, 중국에 인권개선과
사형제도 폐지 촉구
▶1999년 통일농구 북한 방문단, 서울도착
▶1991년 벨로루시 독립
▶1991년 그루지야,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우크라이나,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몰도바 독립1991년아르메니아 독립
▶1991년 아제르바이잔 독립
▶1991년 투르크메니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카자흐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우즈베키스탄, 소련으로부터 독립
▶1991년 소련 11개공화국,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소련 공식 소멸
옛 소련,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해체됐다. 소련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묶여 있던 우크라이나·아르메니아·우즈베키스탄 등 소수 민족 국가들이 독립해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함으로써 소련이 공식 소멸된 것이다.
이날 소련 내 11개 공화국 대표들은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회동, 92년 1월1일부로 CIS를 창설한다는 알마아타 선언을 채택했다.
소련의 인구·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러시아’라는 옛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소련의 해체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래 인위적으로 통합돼 있던 소수 민족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독립성 회복에 대한 염원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소련의 러시아 민족 중심 정책에 대한 반감도 컸다. 그러나 직접적인 계기는 그 4개월 전인 같은해 8월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소련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소련의 정국이 혼란을 빚게 된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독립’의 깃발이 내걸리자 70여년 간 이어져 온 소련 제국은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소수 민족들은 독립을 쟁취했으나 새로운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다. 소련이라는 단단한 울타리가 사라진 자리에 느슨하나마 국가연합을 구성한 것은 그 같은 ‘홀로 서기’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기도 했다.
▶1988년 팬암기 영국 상공에서 폭발. 269명 사망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 103편 보잉기가 198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 상공 10Km 지점에서 폭발했다. 이 폭발로 승무원과 승객 258명 전원과 폭발지점에 있는 마을 주민 11명이 사망했다. 폭발원인은 플라스틱 폭탄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비행전에 헬싱키주재 미대사관에 익명의 협박전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일상적인 협박으로 무시되었고 사건후에도 자신들의 범행이라고 주장하는 두곳의 범행성명이 있었다. 1988년 7월의 미군함에 의한 이란 여객기 추락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명과 1986년 미국의 리비아 폭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성명이었다. 1990년에 미국은 2명의 리비아인를 범인으로 지목, 리비아에 범인 인도를 요청했지만 리비아는 이를 거부했다.
▶1983년 문교부, 학원사태 제적생 복교허용
▶1983년 일본, 보이지않는 미사일 개발에 착수
▶1981년 중국, 광개토대왕비를 1급 보물로 선정
▶1980년 미국 극작가 마르크스 코널리 사망
▶1979년 최규하 10대 대통령 취임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
▶1977년 소련, 에너지광선무기 개발
▶1975년 아랍게릴라, 빈 소재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를 습격, 각국 대표 수십명 인질 난동
▶1974년 중앙일보와 TBC 합병(주식회사 중앙일보 동양방송으로 상호변경)
▶1972년 동-서독 관계정상화 기본조약 조인
▶1971년 유엔 사무총장에 쿠르트 발트하임 선출
▶1970년 백두진 제19대 국무총리 취임
▶1968년 경인고속도로 - 경수고속도로 개통
▶1968년 미국 아폴로8호 발사
▶1967년 박정희 대통령 호주방문,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1965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29세의 청년 곽태영으로부터 피습
▶1963년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광원 123명 서독에 첫 파견 (20일 결단식, 21일 출발)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일할 우리나라 광부 123명이 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 광부들 얼굴에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약속한 월급은 162달러50센트(기본급). 1인당 GNP가 87달러(62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실업률이 8.1%(63년)에 달하고,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 54개(61년)밖에 안 돼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원파견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분명 돌파구였다. 중졸 이상의 학력과 20세 이상 30세 미만 그리고 탄광근무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는데, 몰려든 지원자가 2874명이었다. 8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한 사람은 367명.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20%나 됐다. 합격자는 20일간의 탄광훈련, 20일간의 독일어강습을 거친 후 다시 서독 현지에서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아야 했다.
힘들게 작업장을 배정받았지만 작업도 간단치 않았다. 지하 1000미터에서 뿜어나오는 30도의 지열과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작업도구로 3년 뒤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번 이상 골절상을 경험했다. 우려했던 탄광사고도 이듬해 1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 돌에 깔려 죽거나 탄차에 부딪혀 현장에서 죽는 사고들이 일어났다.
1964년 12월 차관을 구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 광원과 1964년 11월부터 파견된 간호사를 찾아 위로의 말을 하다가 “조국이 가난해서…”라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때는 장내가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견된 광부는 1978년 서독정부가 광부수입을 중단할 때까지 줄잡아 7800명이나 됐다.
▶1962년 미국-영국, NATO 핵군 창설 합의
▶1961년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
▶1961년 모이세 촘베, 통일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콩고 분열에 종지부
▶1961년 최인규 곽영주 임화수 등 사형 집행
▶1961년 케네디, 맥밀란 버뮤다서 회담. 베를린전략 합의
▶1958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
▶1954년 미국의 테니스선수 크리스 에버트 출생
▶1951년 중국, UN 휴전안 거부
▶1946년 일본 남해도 시코쿠해역에서 진도 8.0의 진도 발생 1,400명 사망 실종, 가옥피해 13000여호
▶1940년`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 사망
▶ 193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상영
월트 디즈니 -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1부
http://www.youtube.com/watch?v=mzly-017KLk
월트 디즈니 -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2부
http://www.youtube.com/watch?v=WDzpuPkLHhg
1937년 12월 21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가 로스앤젤레서의 케세이 서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백 5십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용으로 만들어진 이 만화영화는 지금까지도 영화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품 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후 5년간 월트는 <피노키오(Pinocchio)>, <환타지아(Fantasia)>,<덤보(Dombo)>, <밤비(Bambi)>와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들을 완성시켰고, 디즈니의 LA 버뱅크 스튜디오가 건설되던 1940년에 이르러서는 미술가, 애니메이터들, 스토리작가 그리고 기술자들로 이루어진 그 직원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이 스튜지오에서 월트의 평생에 걸친 총 81편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1937년 미국의 영화배우 제인 폰다 출생
제인 폰다[ Jane Fonda ] Lady Jayne Seymour Fonda
제인 폰다는 전설적인 스타 배우 헨리 폰다와 뉴욕 사교계의 명사 프랜시스 세이무어 브로코의 딸이다. 그녀는 1960년대에 「바바렐라(1968)」의 우주복 패션처럼 노출이 심하고 페티시즘적인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일련의 섹시한 금발 아가씨 역할을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맨발로 공원을(1967)」에서 가벼운 코미디를 훌륭하게 소화하고 「뻔뻔한 딕과 제인(1977)」에서 냉소적이고도 영리한 역할을 흥미롭게 표현한 폰다는, 자신의 치솟는 활기를 눌러가면서 「그들은 말을 쏘았다(1969)」와 「클루트(1971)」, 「줄리아(1977)」, 「귀향(1978)」, 「황금연못(1981)」 등의 작품에서 아카데미상을 노린 것 같은 더욱 무겁고 드라마틱한 역할들에 전력을 쏟았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항상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그녀는 정치적 급진주의자였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맹렬히 비난하여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0년대에는 운동 강사가 되어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이라는 책과 비디오테이프로 에어로빅 열풍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13세 때부터 37세 때까지 이상식욕 항진이라는 섭식장애를 앓았음을 털어놓았다. 결혼과 이혼을 세 번씩 했는데 상대는 감독 로제 바딤과 정치인 탐 헤이든, CNN 창립자 테트 터너였다. 이 모든 일이 그녀의 연기 평가에 대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경향이 있었다.
「만사형통(1972)」에서 장 뤽 고다르와 함께 작업을 했고 「스틸야드 블루스(1973)」 같은 예술영화에도 이따금 출연했지만, 폰다의 좌파적 성향은 「차이나 신드롬(1979)」과 「일렉트릭 호스맨(1979)」, 「나인 투 파이브(1980)」 같은 깔끔하고 재미있으면서도 진보적인 영화들을 통해 스크린에 반영되었다. 「스탠리와 아이리스(1990)」 같은 진지한 영화에서 구식 스타일의 인물들을 연기한 후 은퇴를 선언했으나, 「퍼펙트 웨딩 (2005)」의 유명해지고 싶은 어머니 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것은 매춘 분야에 관한 한 어느 정도의 전문지식을 안겨준다."
영화 귀향 Coming Home 1978 (제인폰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1918년 유엔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 출생
▶1917년 무용수 에글레프스키 출생
▶1917년 프랑스 모단느서 군용차 탈선, 550명 사망
▶1917년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 출생
▶1913년 낱말맞추기(crossword puzzle) 뉴욕 월드지에 첫 등장
▶1906년 영국, 노동쟁의법 제정
▶1905년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조선통감으로 임명
▶ 1898년 퀴리부부, 라듐 발견
▶1892년 미국의 프로 골프선수 월터 헤이건 출생
▶1890년 미국의 유전학자 조셉 멀러 출생
▶1885년 한일, 부산구설해저전선 조관속약(條款續約) 체결
▶1879년 스탈린 출생
▶1878년 그리스도전도회, 구세군으로 개칭
▶1872년 미국 소설가 알버트 터휸 출생
▶1860년 미국 여성 이온주의 조직 하다사의 창설자 햄머스 졸드 출생
▶1820년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 출생
▶1795년 독일 역사학자 랑케 출생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미국 도착
메이플라워號
1620년 12월 21일 102명의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아메리카의 매사추세츠 연안에 도착했다.
이들은 그 해 9월 16일 영국 남서단 데번의 항구 도시 플리머스를 출발했었다. 고향을 잊을 수 없었던 이 이주민들은 자신들이 내착한 '신세계'의 이 새로운 정착지에도 플리머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이 곳에 뉴잉글랜드 최초의 백인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주자들 가운데 성인 남자 전원은 플리머스에 상륙하기 전에 선실에서 자주적 식민지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를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메이플라워 서약서'를 체결했는데, 이 청교도적 사회계약은 플리머스 식민지의 기본법이 되었고, 그 이후 미국의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메이플라워호는 이듬해 봄까지 플리머스항에 머물러 있다가 4월 5일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102명의 청교도 가운데 35명은 그보다 얼마 전 본국에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레이덴으로 이주했던 청교도 급진파였다. 이들은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더 풍요로운 삶을 찾아 아예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를 찾았다. 이들이 초석을 놓은 미국 민주주의는 최근의 대통령 선거에서 조금 기우뚱거린 바 있다.
이 첫 정착민들은 처음에는 '올드 카머스'라고 불렸다가 얼마 뒤에는 '포어파더스'라고 불렸다. 지금처럼 '필그림 파더스(순례시조ㆍ巡禮始祖) '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이들이 도착한 지 2세기 후의 일이다.
1820년에 있었던 플리머스 도착 200주년 기념식에서 저명한 변호사이자 웅변가 대니얼 웹스터가 이들을 '필그림 파더스'라고 부른 뒤로 이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미국 플리머스에는 필그림 파더스의 기념비가 세워져있고 그 근처에 메이플라워호의 실물 모형이 있다.
▶1431년 유효통, 약용식물 정리한 `향약채집월령` 편찬
▶1375년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 사망
https://youtu.be/EI6nRnk9fdk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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