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예불을 하고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출가한 수행자들을 위해 30분 동안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위치에서 나름대로의 희망이나 포부를 갖고 살아야 해요. 개인은 길거리에 핀 한 포기 풀꽃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지만, 세상을 위해서는 원대한 꿈을 갖고 사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은 쁘리앙카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인도의 암베드카르는 천민 출신이었지만 영국에 유학해서 닥터가 되고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인도 불가촉천민들의 해방과 불교 발전을 위한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인도에서는 계급의 차별보다 더 심한 차별이 여성 차별이에요. 그래서 쁘리앙카도 여성 해방이라는 큰 꿈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성 해방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겠다. 그리고 그 일을 부처님의 법에 근거해서 평화적으로 하겠다.’
부처님은 마음의 평화를 위한 활동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모순과 신앙적 부정의에 맞서셨어요. 당시에는 부정의가 바로 카스트라고 하는 계급 차별과 여성에 대한 성 차별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천민 우파리의 출가를 허락함으로 해서 계급 차별을 부정하셨습니다. 또 여성의 출가를 허용함으로 해서 성 차별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런데 26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인도에서는 아직 계급 차별과 성 차별이 제대로 극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암베드카르라고 하는 위대한 분이 출현해서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동시에 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을 했어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독립운동을 할 때 암베드카르는 이런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인도의 지배계층 입장에서는 독립만 되면 되지만, 인도의 천민들 입장에서는 영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으나 높은 카스트들로부터 지배를 받으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러니 나라의 독립뿐만 아니라 계급의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만이 불가촉천민들에게는 희망이다.’
간디가 인도 내부의 모순은 일단 좀 뒤로 하고 나라의 독립에 집중하는 입장이었다면, 암베드카르는 나라의 독립은 물론이고 계급의 해방이 없는 나라의 독립은 결국 기득권자들에게만 이익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간디에 가려 있긴 하지만 암베드카르는 간디에 버금가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계급해방 운동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신앙도 달랐어요. 간디는 힌두교 신앙을 가졌고, 암베드카르는 마지막에 불교로 개종해서 인도 신불교 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인도에는 여성 해방을 위한 위대한 선구자는 없어요.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이나 서양 문화의 입장에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인도에는 이런 원을 세운 사람이 필요합니다.
‘인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인도 문화 속에서 여성 해방을 한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하겠다. 지금처럼 차별받고 고통받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 내가 평생을 바치겠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얼마나 큰 성과가 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자기 삶의 방향을 그렇게 정하고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면 갈수록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작은 일에 집착해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쁘리앙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경력이 앞으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신분이 높은 상태에서 고등 교육까지 받았는데도 그것을 내려놓고 천민들을 위한 교육에 힘쓰고 자기를 헌신한 지금까지의 경력은 이런 주장을 펼치고 활동을 하는 데 아주 유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성과가 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수백 년, 수천 년을 내다보고 씨앗을 심는다는 목표를 갖고 임해야 합니다.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이 목표를 너무 깊게 생각하면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의기가 막히고 부담이 되거든요. 그렇게 하지 말고, 한 알의 씨앗을 뿌린다는 생각으로 한 발을 내딛는 게 매우 필요합니다.
자꾸 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한국은 민주화도 되어 있고, 경제도 개발되어 있고, 여성들도 어느 정도 평등하고, 정토회도 있으니까 참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인도는 아무것도 되어 있는 게 없고 나 혼자구나’ 이렇게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곳 한국에 있는 행자들은 그런 큰 뜻을 품어도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딱히 할 게 없구나. 뭘 하더라도 지나 놓고 보면 풀 한 포기 났다가 죽은 수준밖에 안 되겠구나. 그러나 인도는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운데서 삶이 빛날 수 있겠다.’
어둡기 때문에 한 자루의 촛불이 빛이 나지, 대낮이라면 한 자루의 촛불은 있으나 마나 합니다. 불리한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또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자기는 물론 남한테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한국 사회에서 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을 위하되 주변 나라들이나 세계에는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도 이익이고 세계를 위해서도 이익이 돼야 해요. 그게 바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내는 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일을 해야 합니다. 쁘리앙카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이런 포부를 한 번 가져 보세요.
‘한국이 이렇게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결국 인간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만 갖고는 행복해질 수가 없구나. 나는 마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니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이 법을 한국 사회에 보편화시켜야겠다. 이는 앞으로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을 위해서도 굉장히 유익하다. 내가 그 일을 한 번 해봐야 하겠다.’
나에게 우울증이 있거나, 신체장애가 있거나, 내가 학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일을 못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면 더 빛이 납니다. 제가 외국 유학을 다녀와서 박사가 되었거나 경력이 화려해서 이런 활동을 한다면 ‘아, 저분은 처음부터 우리하고 달랐다’ 이런 말을 들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아무런 경력이 없잖아요. 유학을 간 것도 아니고, 대학을 간 것도 아니고, 그저 농사짓다가 올라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런 법륜 스님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게 뭐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가장 불리한 것이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항상 여러분이 알고 계셔야 합니다.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불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쁘리앙카는 가장 불리한 조건이기 때문에 가장 큰 꿈을 꿀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개인적인 시비를 갖고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면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보면 좀 한심해요. 자기 인생을 길거리의 풀 같이 생각하라니까 풀 같이 생각해서 그렇게 한심하게 보내는지는 모르겠어요. (모두 웃음) 풀은 그렇게 한심하게 굴지 않아요. 자기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어요. 설령 발에 밟힌다 하더라도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쾌활하게 임할 때 여러분의 인생이 위대해집니다.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괴롭히는 일만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 점이 우리에게 큰 장점이 되기도 해요.
수행자는 자기 마음에 대해서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도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함부로 비판하거나 함부로 반대하면 안 돼요. 이쪽 집회에도 참석해보고, 저쪽 집회에도 참석해보고, 반대하는 사람 목소리도 귀담아 들어보세요. 그렇게 현장 확인을 해서 ‘아, 신문에서 볼 때는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가서 보니 그들의 주장에도 정당한 부분이 있구나’ 이렇게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또 최종적인 결론이 나면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저 비판만 하면서 가만히 있어도 안 돼요. ‘이 문제는 행동이 필요하구나. 언제든지 가서 머리수 하나라도 보태야겠다’ 이런 자세도 필요합니다.
수행자는 자기의 상태에 대해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듯이 세상에 대해서도 늘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혼란스럽더라도 늘 이렇게 바른 자세를 가지고 정진을 놓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전에는 치과와 이비인후과를 다녀왔습니다. 강연을 다니며 점점 목이 부었는데 강연이 계속 있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곧 INEB 대회에 가기 위해 인도로 떠나기 때문에 오늘은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병원을 다녀온 뒤 서울 시내에서 사회원로들을 만나 현 시국에 대해 의논한 후 오후 3시에 청주로 출발했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하기 전 청주에 살고 있는 실상화 보살님을 잠깐 찾아뵈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정토회 초기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간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연세가 92세이셔서 지금은 법당에 자주 오지 못하십니다. 요즘은 하루 종일 집에 혼자 계실 때가 많습니다. 스님은 청주에 강연이 있을 때마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보살님을 찾아뵙습니다.
스님이 집에 도착하자 보살님은 너무나 기뻐하며 스님을 얼싸안았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나눈 후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보살님은 지난 5월에 찾아뵜을 때 보다 눈이 더욱 안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귀도 잘 안 들리는 보살님을 위해 스님은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어요.”
“눈도 잘 안 보인다면서 눈이 빠지면 어떡해요?”(웃음)
달력에는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가 되어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눈이 안 보이나 몰라. 아주 답답해 못살겠어요.”
“눈을 뜨지 말고 아예 감아버리세요. 90년을 썼으니까 그런 거예요.”
“혼자 사는 게 힘들어서 정토회 가서 살면 좋겠다니까 오라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아. 스님한테 폐만 될 거 같아요.”
“옛날에 많이 썼잖아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수행자가 뭘 그렇게 생각해요.”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해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스님은 원고를 교정했습니다. 보살님은 함께 간 행자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정토회에 짐이 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하며 걱정하시다가 다른 할머니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보살이 얼굴이 찌그러져 있어. 아들들이 아주 나빠. 아들들이 엄마를 잘 안 돌봐서 그래.”
원고 교정을 마치고 강연장으로 출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보살님께 한 가지 당부를 드렸습니다.
“보살님, 수행자로서 하면 안 될 말을 하시는 게 있어요.”
“아휴. 그런데 내가 정토회 가서 살면 쓸데도 없는데 스님한테 짐만 되고 미안해서 어떡해.”
“그것도 해야 할 말이 아니에요.”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살까요?”
“아니에요.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데 수련원에 와서 같이 살면, 남 이야기를 안 해야 돼요.”
“안 했어요.”
“아까 했잖아요. 어떤 보살 아들이 어쩌고 저쩌고.”
“이제 안 할게요.”
“노인들이 그런 말 하면 서로 싸워요.”
“저에게 이야기 잘해주셨어요. 명심할게요.”
“딴 이야기는 다 해도 돼요. 법륜스님 욕도 해도 돼요.”
“왜 스님을 욕해?”(웃음)
보살님은 흔쾌하게 받아들이며 합장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천 사백 여명이 모였습니다.
강연 전에 판소리를 26년째 해오고 있는 소리꾼 서동율 님이 흥부가 중 박 타는 대목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박을 타거들랑은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쌀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抱恨)이로구나. 시르렁 실건 톱질이야! 실건 실건 실건 실건 실건 뚝딱!"
구성진 소리에 객석에서도 어깨가 들썩들썩합니다. 공연이 끝나자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천사백 명이 치는 박수 소리와 함께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세월이 변하니까 충청도 사람 기질도 변하나 봐요. 충청도 사람은 이렇게 고함을 안 지르잖아요.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웃음)
스님이 웃으며 말하자 더욱더 큰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흥부가 재미있었죠?”
가난한 흥부 이야기는 배고팠던 북한 사람들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누구라도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하고, 누구라도 아프면 치료받아야 하고, 어떤 아이라도 제때에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와 민족, 인종, 종교, 정치를 떠나서 우리가 지원을 해야 합니다. 흥부가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더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여느 때보다 웃음과 박수가 넘쳤는데요. 특히 박수를 많이 받은 질문자와 대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질문자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사는 걸까요
“직설적으로 얘기해도 돼요? 아니면 부드럽게 얘기할까요?”
“그냥 대놓고 얘기해주십시오.”
“질문자는 지금 정신질환이에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지금 받고 있습니다.”
“그래요, 잘했어요. 치료받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병원에 가라고 하면 엄청나게 충격받을까 봐 조심스럽게 얘기했는데, 다행입니다.
질문자는 병원에 가서 꾸준히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약 복용을 중간에 끊으면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자살할 위험이 매우 높아요. 스님의 눈에는 ‘아, 지금 같은 생각을 계속한다면 종착지는 죽는 것이겠구나’ 이렇게 딱 보입니다. 그러니 약을 꼭 먹어야 해요. 약을 먹으면 이런 생각은 하더라도 행동까지는 안 해요. 그런데 약을 끊으면 행동을 해버릴 위험이 있어요. 첫째, 치료를 받고 약을 꼭 먹어야 해요.
둘째, 질문자의 말이 맞아요. 이 우주는 무한히 넓고, 지구도 이 우주에서는 티끌 같은 존재예요. 하물며 지구에 있는 나 같은 존재는 말할 것도 없겠죠.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나의 100년이라는 것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찰나에 불과하고 티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가치도 없어요. ‘아, 그렇게 의미가 없다면 죽어야지’ 하지만 ‘죽어야지’ 할 가치도 없다니까요. 가만히 있어도 죽는데 무엇 때문에 미리 죽어요? 어차피 죽는데요. (모두 웃음)
‘굳이 죽을 가치도 없는 게 인생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만한 이유도 없다.’
제 얘기의 요점은 이거예요.”
“예, 그래서 살고 있습니다.” (모두 박수)
“그래서 저절로 죽을 때까지 그냥 살면 돼요. 지금 죽으나 100년 후에 죽으나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니까요. 100년까지 꼭 살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지금 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꼭 살아야 할 이유도 없듯이 꼭 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어요. 질문자가 이걸 제대로 깨달았으면 죽겠다는 생각도 안 하고, 화도 안 내고, 짜증도 안 낼 거예요. 인생은 짜증 낼 만한 가치가 없고, 괴로워할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 죽어야 할 만한 가치도 없어요.
‘죽겠다’ 하는 말은 죽어야 할 만한 목적이 있으니까 죽는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인생은 죽어야 할 만한 가치도 없어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냥 나무 한 그루가 자라서 살다가 때가 되면 시드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이렇게 자라 봐야 누구 하나 봐주지도 않는데 살면 뭐하나’ 이러고 확 죽어버리는 나무 봤어요?” (모두 웃음)
“못 봤습니다.”
“다람쥐가 가을에 도토리를 많이 주워서 땅굴 파고 넣어뒀는데 사람이 그걸 빼갔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며 머리를 돌에 처박고 죽는 거 봤어요?” (모두 웃음)
“못 봤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굳이 죽을 가치도 없어요. 다람쥐는 그냥 도토리가 있으면 주워 모으고, 사람이 훔쳐가 버리면 다른 걸 또 주워 먹으면서 겨울을 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겨울에 굶어 죽으면 죽고, 안 굶어 죽고 살면 내년 봄에도 살면 돼요.
그러니 죽을 생각 하지 마세요. 인생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인생은 죽을 만한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나무가 자라고, 토끼가 산에서 뛰놀듯이, 그냥 살면 됩니다. 호랑이한테 잡혀 먹히면 그때 가서 죽으면 돼요. 교통사고가 나서 죽든, 병이 나서 죽든, 그건 그때 가서 죽으면 되니까 일부러 죽을 가치가 전혀 없어요.
마찬가지로 울 가치도 없고, 웃을 가치도 없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면 좀 울면 돼요. 안 울어야 할 만한 가치도 없기 때문이에요.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면 좀 내도 돼요. 꼭 화를 안 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화를 낼 가치도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음이 못 받아들여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여기 올 가치도 없는 것 아닙니까?”
“네, 그런데 안 올 가치도 없잖아요.” (모두 웃음)
“그래서 왔어요. 궁금해서요. 그런데 어차피 죽으면 무상하잖아요. 백만 원도 가치 없고, 1억 도 가치 없잖아요. 머리로는 그걸 아는데, 마음은 그렇게 안 돼서 제가 여기 온 거예요.”
“마음이 그렇게 안 되니까 백만 원이라도 벌어야죠.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지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버는 데까지 벌면 돼요.
그런데 1000만 원 벌고 싶지만 100만 원 벌려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100만 원 벌고 싶지만 50만 원 벌려도 만족해야 하고, 소고기국밥 먹고 싶지만 국수 먹어도 만족해야 해요. 못 먹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어떤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를 욕심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목표는 세우되,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인 거예요.”
“그럼 열심히 살 이유도 없나요?”
“없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좀 깨달은 것 같더니 아직 못 깨달았네요. (모두 웃음) 토끼가 열심히 살아요, 그냥 살아요?”
“그냥 꼴리는 대로 살죠.”
“소가 풀을 뜯을 때 부지런히 열심히 뜯어요, 그냥 뜯어요?”
“그냥 입가는 대로 먹죠.” (모두 웃음)
“그래요. 그렇다고 막 먹기 싫어서 게으름 피우면서 뜯어요, 그냥 뜯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죠.”
“그래요. 그렇게 살면 돼요. ‘여기 와야지’, ‘여기 오지 말아야지’ 이러지 마세요. 그냥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오면 돼요. 일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사나요?”
“그건 미쳐서 그래요. (모두 웃음) 그래서 스님이 인생은 그렇게 열심히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지금 이렇게 법문을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예요. 미쳐 있다가 정신 차리려고 여기 온 거란 말이에요.” (모두 박수)
“그러면 저도 그냥 꼴리는 대로 살면 돼요?”
“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예쁘다고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만지면 돼요, 안 돼요?”
“당연히 그러진 않죠. 저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는 거예요.”
“인생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데, 다만 다섯 가지만 지키면 돼요.
첫째, 성질난다고 남을 때리면 안 돼요. 둘째,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훔치면 안 돼요. 셋째, 다른 사람을 강제로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면 안 돼요. 넷째, 욕설하거나 거짓말하면 안 돼요. 다섯째, 술을 먹는 건 괜찮지만 취하거나 행패 부리면 안 돼요.
이 다섯 가지 빼고는 질문자 말대로 꼴리는 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모두 웃음)
“스님도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그럼요.”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질문자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크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습니다. 청중도 기쁜 표정으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없어요. 다만 약은 꼭 먹어야 해요. 약도 먹기 싫다고 꼴리는 대로 안 먹으면 안 돼요. 첫째, 약은 꼭 먹어야 해요. 둘째, 아무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인생은 굳이 죽을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죽으러 가려면 약 사야 하고, 목을 매달려면 밧줄 묶어야 해요. 그러려면 힘들어요, 안 힘들어요?”
“그것도 귀찮아요.”
“맞아요, 귀찮죠.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인생은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어요. 굳이 수면제 먹어서 죽을 만한 가치도 없고, 굳이 밧줄 매달고 의자 갖다 놓고 목 걸어서 죽을 만한 가치도 없어요. 그러려면 얼마나 힘들어요? 가만히 있으면 100년 지나서 저절로 죽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일부러 죽으려고 해요? 가만히 놔두면 돼요. 알았죠?”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이런 대답은 처음 들어 보셨죠? 대부분은 ‘죽으면 안 된다. 인생은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잖아요.”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아들은 자존감이 높고 자기 일을 알아서 잘합니다. 중학생 딸은 공부도 안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까지 마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토회 명상 수련을 하고 구도자의 삶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누님을 독실한 불교 신자지만 기복적이에요. 누님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치매가 온 어머니를 제가 돌보면서 형제들이 미워졌어요. 오빠는 어머니 재산을 다 팔았어요.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잘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자 살던 조카 아주버님이 돌아가셔서 조카를 키우게 됐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남편 일을 도와주고 있는데 뭘 도와줬냐고 하면서 생활비를 안 줘요. 이제 제 일을 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산만하고 물건을 잘 잊어버려서 걱정이에요.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어요. 죽을 때 후회가 없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조국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위와 아래가 싸웠습니다. 내년에 총선도 있는데 정치를 어떤 혜안으로 봐야 할까요?
스님 덕분에 72살 평생 앓았던 심한 우울증이 절반은 나았습니다. 그런데 절반은 계속 남아있어요. 어떻게 다 치료할 수 있을까요?
스님의 아이큐는 얼마인가요? 건강이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가요?
다양한 삶의 고민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흥부가보다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신명 나는 소리를 들은 듯 질문자도, 청중도 시원한 얼굴로 강연장을 나섰습니다.
강연장을 나서니 어두운 하늘에 보름달이 훤했습니다. 내일은 인천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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