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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시대"? 현대 역사학은 중세 초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들어가며
우리 주변에서 '중세'하면 자동적으로 뒤에 '암흑 시대'라는 말이 따라붙는 문장을 관찰하기는 아직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근래 들어와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가 전달되면서, 적어도 유럽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중세 천 년 전체를 암흑 시대라고 보는 현상은 많이 사라진 편이다. 그러나 '중세 중기 이후는 몰라도, 중세 초는 암흑 시대 맞잖아?'라는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고, 여기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한 번쯤은 중세 초기에 대한 최근 학계의 담론을 정리한 글을 올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중세 초 한정 암흑 시대'라는 표현도 현재 학계에서는 지양되는 표현임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현재 고대 말-중세 초를 가리키는 학술적 표현으로는 'Late Antiquity'와 'Early Middle Ages'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일부 소수 학자들 중에서 통사를 쓸 때 중세 초를 '야만과 폭력이 횡행했던 시대'라고 상투적으로 쓰고 넘어가는 이들도 전혀 없진 않으나, 그런 이들 상당수는 중세 역사에 크게 전문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서술한 적이 있지만, 특정 시대를 비난하거나 찬양하기 위해 보는 것은 현대 역사학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또한 '암흑 시대'와 같은 용어를 피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 시대의 복잡성과 의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어 문제
우선 '암흑 시대'라는 용어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간혹 "중세 초기는 ~가 뒤떨어졌다는데 그럼 암흑 시대 맞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암흑 시대라는 용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완전히 잊혀졌다는 인식에서 등장한 것이다.(게다가 무언가가 '뒤떨어졌다'는 것도 객관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데다가, 특정 분야가 발전이 미진하거나 단순화되었다고 해서 암흑 시대라는 용어가 정당화된다면, 인류 역사에 암흑 시대라는 용어가 정식 학술 용어로 쓰여야 할 시기는 수도 없이 많다는 문제점이 있다.) 14세기 초엽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가 이 용어를 처음 꺼내 들었을 때의 의미는 그동안 잊혀졌던 고전 문명이 자신들의 시대에 재발견되었음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페트라르카가 살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태동기인 14세기는 지금은 완전히 중세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다.(학자마다 중세의 끝을 언제로 잡는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이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에 속함에는 현재 거의 이견이 없다.)
따라서 '암흑 시대' 담론이 왜 학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후기 로마 제국과 중세 초기의 연속성 문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학문 분과로서 근대 역사학이 정립되고 이 방법론에 의해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페트라르카의 고전 문명이 잊혀진 암흑의 중세와 이를 회복한 르네상스의 '빛'이라는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18세기 에드워드 기번 식의 '야만과 종교의 승리' 담론이 더해져서 중세는 빛나는 고전 문명이 잊혀지고, 오로지 믿음에만 의존한 '미개'한 시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와 중세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담론은 강력하게 도전을 받았다. 중세 문명이 로마 문명을 계승한 부분에 있어서도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래 브라이언 워드-퍼킨스 교수 등이 제기한 문제점들이 보여 주듯, 연속성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되었건, 서로마는 평화롭게 교체된 것이 아니라 꽤 폭력적으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충격과 후유증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후기 로마와 초기 중세 유럽은 상당히 비슷하면서 또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이 고민하는 질문은, 전근대 역사 서술이 종종 그랬듯 이를 피상적으로 보면서 '퇴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이 어떻게 유사했고, 또 어떻게 달랐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이다. 그렇다면 가장 기초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영역에서부터 이에 대한 현대 학계의 연구를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인과 '야만인'-정치적 정체성 문제
사실 유럽의 중세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가는 여전히 규정하기 힘든 문제다. 서로마 제국 황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제국 전역의 그 수많은 로마인들이 하루아침에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연속성은 우리가 역사를 볼 때 특정 시기를 한마디로 규정짓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후대 입장에서 볼 때 특정 시대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변화는 말 그대로 후대 입장에서 봐야지만 뚜렷해지는 경우가 많다. 당대 사람들은 그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힘들었다. 그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하루를 살아갔을 뿐이다.
가령, 서로마 말기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한 반달족은 이미 거의 로마인과 비슷해져 있었다.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의 정부와 행정 구조는 로마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이 '로마화'된 반달족은,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아프리카를 떼어 냄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구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러한 패턴은 이후 서로마의 소위 '후계자 왕국들'에서 반복된다.
이 왕국들의 새로운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왕조의 권위를 새로이 만들고 새로운 엘리트층을 만들어 내고, 백성들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야 했다. 대략 650년경에 이르면 이 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이 작업들은 각각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이 점이 또한 한 시대를 '암흑 시대' 등과 같은 용어로 한 줄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로마 제국만 해도 균일한 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제국의 동방과 서방의 사정도 달랐고, 제국의 변방인 브리타니아와 중심부인 이탈리아는 당연히 달랐다. 갈리아도 북부 갈리아와 남부 갈리아의 상황은 달랐다. 중세 초기 왕국들이 걸어간 길도 여기에 따라 크게 갈린다. 로마가 가장 일찍 철수해 버린 브리튼의 앵글로 색슨 왕국들과 로마의 기존 인프라를 상당 부분 흡수한 다른 왕국들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샤를마뉴의 왕궁 부속 성당, 아헨)
어쨌든 새로이 모습을 갖춘 중세 초기 왕국들은 특별히 야만적이지도, 미개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게르만 엘리트들은 로마 세계에 적응했고, 기존의 로마 엘리트는 새로운 정치 현실에 적응했다. 가령, 이 시기에 대한 최고의 사료를 제공해 주는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옛 원로원 가문 출신의 주교였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옛 로마의 지배층들이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신생 왕조들의 엘리트층으로 통합되었다. 이들 문인들은 매우 로마적인 용어로 새로운 통치자들을 칭찬하거나 비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로마인이 아니라 '프랑크인, '비시고트인', '롬바르드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엘리트 문인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이미 서술한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스페인의 성 이시도루스 등이다. 한때 역사가들은 이들을 '중세의 창조자들'로 불러야 할지, '최후의 고대인들'로 불러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Fontaine 교수가 지적하듯, 이러한 이분법은 지나친 단순화에 불과하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이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듯이, 이들도 두 문명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이 중세 초기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냈다. 이 과정을 거쳐서 각 왕국들의 정치와 사회와 문화는 점진적으로 로마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Wickham이 지적하듯,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선례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보아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정부와 국가 만들기
그렇다면, 로마의 선례와 게르만 전통을 융합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국가들의 형태는 어떠했을까? 우선 이 역시도 지역적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로마의 전통 중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여 새로운 통치 구조를 만들어 낼 것인지는 무엇보다도 각 지역의 특성과 정치적 상황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새로운 통치자가 새로이 토지에 안착한 전사 귀족과 옛 로마 행정 관료 집단의 보좌를 받아 통치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메로빙 왕조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는 중세 초기의 정부가 소위 '암흑 시대'답게 엉성했을 것이라는 편견이 주를 이루었고, 이 때문에 '중세 초기에는 정부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는 서술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메로빙 왕조의 정부가 생각보다 정교한 형태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정부의 일상적인 행정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앞서 말했듯, 옛 로마의 관료 귀족들은 예전과 별로 다를 것 없이 새로운 통치자들을 위해 업무를 계속했고, 덕분에 이 시기의 행정 문서와 법령들은 매우 체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료들은 메로빙 왕조의 왕들이 흔히 생각하는 야만족 전사왕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게, 능숙하게 정부를 운영하고 적극적으로 통치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정부 구조가 후기 로마 제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단순화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지중해 전역을 통일한 제국과 그중 몇몇 지역만 차지한 국가의 통치 메커니즘이 같을 수는 없다. 또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다수의 새로운 통치 엘리트가 전사 귀족이었으며, 이들의 목표는 토지에 정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 재정 정책의 기본 구조도 세금에 의한 지배보다는 토지를 매개로 한 지배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퇴보로 규정짓는 것도 지나치게 단편적인 시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로마 제국도 대규모 관료 조직을 바탕으로 한 정부를 추구한 것은 제국 후기부터의 현상이다. 필자가 지난번에 썼던 몇몇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중앙 집권'이나 '관료화'는 각각의 특수한 맥락에 따라 해석해야 할 현상이지 그 자체로 절대선이 아니다.
또한 이 시기 메로빙 왕조가 이룬 성취는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Wickham이 지적하듯, 본래 프랑크족의 중심지는 북부 갈리아였다. 반면에 로마 제국 입장에서 북부 갈리아는 후기에 트리어가 수도로 기능할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군사적 기능이 강한 변방에 더 가까웠다. 이제 메로빙 왕조의 통치 하에서 프랑크족은 로마 시대의 인프라와 부가 집중된 남부 갈리아와, 앞서 서술한 북부 갈리아, 그리고 로마의 세력권 밖이었으며 인프라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던 라인강 동편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성 요한 세례당, 푸아티에: 메로빙 왕조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북부 갈리아를 거점으로 삼고 개발했다. 즉, 이 시기에 파리에서 콜로뉴 지역이 처음으로 정치적 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현재까지 쭉 이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들은 옛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넘어 라인강 서안과 동안을 동시에 지배한 첫 번째 왕조가 되었다. 앞서 서술했듯, 라인강 동안 게르마니아는 갈리아보다 단순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식 인프라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메로빙 왕조 치하에서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라인강 동안과 갈리아는 보다 비슷한 모습으로 통합되었다.
브리튼 섬은 프랑키아와 사정이 매우 달랐다. 앞서 서술했듯 로마가 철수하면서 이곳의 인프라는(그나마도 대부분 남부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앵글로 색슨 왕국은 프랑키아와 상당히 다른 뿌리에서 시작했으며, 프랑크족이나 고트족과 달리 참고할 로마의 선례도 부족했고, 기반으로 삼을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9세기 무렵이면 앵글로 색슨 왕국도 어려움을 이겨 내고 프랑크 왕국과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왕국의 외형적 팽창 못지않게 행정적 인프라 정비도 잘 이루어졌고, 이는 저 유명한 '오파의 제방(Offa's Dyke)'이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쪽이야말로 거의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작지 않은 성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파의 제방: 머시아의 오파 왕에 의해 만들어진 8세기의 거대한 방벽)
'법에 의한 통치'는 중세 초기 왕국들이 로마로부터 물려받은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며, 이들이 더욱 정교하게 발달시켜서 후대로 계승했고 근대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중요한 유산이다. 예전에는 로마의 법 개념도 이후 재발견될 때까지 잊혀졌으며, 중세 초기는 무식한 전사 귀족들이 깡패짓하고 다닌 무법천지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Mickitterick이 지적하듯, 로마법의 "쇠망(decline and fall)"은 없었다.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점진적인 변형이 있었을 뿐이었다.
중세 초기 법치주의에 대해서는 9세기 랭스 주교였던 힌크마르가 가장 잘 표현한 바 있다.
"모든 이들이 법을 알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선포되었으므로, 그 누구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의 권위에서 예외는 있을 수 없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법령이 제정되는 동안에는 누구나 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일단 동의를 얻어 제정이 되면, 재판관들은 이를 적용할 뿐이다."
중세 초기의 가장 기본적인 법은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성서에 기반을 둔 교회법이 더해졌다. 여기에 현실의 상황에 맞게 왕들이 새로이 제정한 법령집까지 더해져서 중세 법의 기본 체계를 이루었다. 재판이 벌어질 경우 법전의 해석은 기존 판례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판례를 제공하기 위해 기존 판결들은 체계적으로 잘 보존되었다. 이는 프랑키아, 이탈리아,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 등등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동시에 법령집의 사본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배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중세 초기에 법의 권위가 받아들여진 정도와 그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교육과 학문
중세 초기 교육과 학문이 일괄적으로 쇠퇴했고, 전사 귀족으로 구성된 통치 엘리트들은 문맹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무식쟁이였으며 학문은 수도원에서나 근근이 맥을 이어 나갔다는 것은 꽤 오랫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 연구가 밝혀냈듯이, 중세 초기 왕국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행정력을 발휘했으며, 법치의 전통을 이어갔다는 점을 볼 때, 위의 견해는 상당히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일단 5세기의 내전과 침공이 고대의 교육 시스템에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과 학문의 전통은 살아남았고, 곧 충격에서 회복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대 후기의 체계를 대체로 온전히 보존하는 데 성공한 집단인 교회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단 수도원만이 아니고, 전 유럽에 걸친 교구들은 성직자뿐만 아니라 모든 세례받은 교인에 대한 교육을 중요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시행했다. 여기에 옛 로마 상류층 가문의 가정 교육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 내내 대다수의 왕과 귀족들은 문맹이 아니었다. 중세 초기 왕국들의 통치 행위는 철저히 문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암흑 시대' 이미지에서 떠올리기 쉬운 편견과 달리, 이 시기에 생산된 텍스트의 양은 Wickham의 지적대로 후기 로마 제국과 비교해서 특별히 뒤떨어지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글의 주제였다. 로마 제국의 통치 엘리트와 비교해 봤을 때, 중세 초기의 엘리트는 전사 귀족과 성직자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텍스트 상당 부분은 산문이나 희곡 등보다는 보다 종교적인 주제나 성인전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교육과 학문이 쇠퇴했다는 오해를 낳았다. 그러나 이는 주 수요층의 기호 변화를 따랐을 뿐, 종교적인 주제가 세속적인 주제보다 더 열등하다고 볼 이유는 없다. 현대 학자들이 강조하듯, 역사학적 방법론이 정착하기 이전의 저술가들과 달리 현대 역사학은 이런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물론 종교적 텍스트가 이 시기 문서의 전부는 아니다. 성직자층 외에 세속 귀족들도 물론 앞서 말했듯 대부분 문맹이 아니었기 때문에 텍스트 생산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들이 생산하는 문서는 문학보다는 일상의 행정과 법령에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이런 아카이브 자료들이 역사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세 초기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사료들이 연구되기 시작하면서의 일이다.
'종교에만 의존한 야만의 시대'라는 편견과 다르게, 중세 초기 사람들은 학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다. 앞서 서술했듯 법학은 그 중요한 사례이며, 의학의 전통 또한 마찬가지다. 중세 의학에 대해 몇몇 단편적인 에피소드에 기초한 잘못된 이해가 많이 퍼져 있지만,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의학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갈레노스의 이론을 담은 저작은 계속해서 유통되었고, 중세 의학의 핵심 이론을 이루게 된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매우 미신적이었고, 신앙과 기적에 의한 치료가 가능하다고 확신하며 살았다.(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대 로마인들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학과 신앙을 대립시키고 한쪽을 탄압한다든가 무시한다든가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적어도 귀족과 성직자를 비롯한 사회 상층부와 부유한 사람들은 주치의를 두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병이 나면 성인과 의사에게 동시에 의지했다. 그리고, Wickham이 지적하듯, 당시 사람들은 이를 모순이라 보지 않았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6세기 스페인 비시고트 왕국에서 살았던 그리스 출신의 의사 파울로스였다. 그는 스페인에서 사산된 아기를 제왕 절개 수술로 꺼내 산모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유명해진 실력 있는 의사였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성직자(메리다의 주교)였으며, 결국 성인품에까지 오른다. 이는 당시 중세 초기 왕국들이 상당히 열린 사회(외국 출신이 고위 사제직에 오를 수 있는)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인들이 가졌던 의학에 대한 태도까지 잘 보여 주고 있다.
농촌 경제
흔히 고대는 도시 문명이고, 중세 초기는 농촌 문명이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대 이전 세계는 어디나 본질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였다. 도시민과 농민의 비율이나, 경제 구조의 본질 자체는 Devroey의 지적대로 고대 로마나 중세나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중세 초 농촌 경제의 메커니즘은 어떠했을까?
중세 초기의 가장 독특한 점이라고 하면 역시 농민 자치의 확대를 들 수 있다. 프랑키아를 비롯해서 서유럽 국가들의 강력한 귀족들은 물론 대토지를 소유했지만, 지역 농민들 전체에게 지배력을 확장하는 데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 이전 및 이후와 비교하여 중세 초기의 농민들은 대체로 지주들에게 예속된 정도가 훨씬 덜했고, 농촌 공동체 자체도 더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농민층은 예속농과 자유농으로 구성되었다. 예속농은 모두 차지농(지주에게 일정 소작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빌려서 농사를 짓던 농민)이었고, 자유농은 차지농도 있었고 자작농도 있었고, 중소 지주도 있었다. 이들 자유농들 중에서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이 주도적으로 농촌 공동체를 이끌었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농촌 공동체의 자치권이 강했다는 말을, 그 공동체가 평등한 유토피아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속농들까지도 나름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이후 중세 전성기로 접어들면서 농민의 예속 상태가 강해지고, 귀족의 부와 지배력이 증가했지만 중세 초기에 형성된 농촌 공동체는 계속 유지되어 농민층의 권익을 대변했다. 이를 통해서 중세 농촌 사회는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로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로 발전해 나갔다.
어찌 되었건, Wickham의 지적대로, 자유농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귀족 지주들이 보유한 토지의 비율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가족 단위로 토지를 보유한 소농들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한 국가의 재정 구조가 더 이상 후기 로마 제국처럼 세금이 아니라,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렌트와 현물세가 정부와 지주들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메로빙 왕조 시대에 농민들이 납부하던 지대는 Deveroy가 지적하듯 기존의 토지세보다 확연히 낮은 부담이었다.
이 말은 로마 시대와 비교하면 귀족층의 부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뜻이 된다. 이 시기 지어지던 건물이나 거래되던 물품이 덜 화려해 보이는 것은 문화가 미개해져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수요층인 귀족들의 구매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예전에 그러듯이 단순히 '퇴보'라고 논할 수는 없다. 가령, 이 시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비교적 낮은 세금을 내던 농민들에게 "당신은 화려한 건물 하나 못 짓는 암흑 시대를 살고 있네요."라고 말한다면 과연 납득할까?
게다가 부유한 귀족들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지역에 따라 통치 엘리트가 여전히 상당한 부를 누린 지역의 경우 얼마든지 정교한 사치품과 화려한 건축물들을 짓기도 했다.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의 왕들이 가장 전성기에 누린 부는 그럭저럭 동지중해 세계의 통치자들과 비교할 만했다. 이들이 남긴 건축물과 각종 일용품 유물들의 화려함도 그리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며, 이는 중세 초기에 이러한 물건과 건물을 만들 기술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앵글로 색슨 귀족들의 상자: 중세 초기 귀족들의 대표적인 사치품이며 예술적 가치도 크다.)
어쨌든,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이 소농 중심 사회는 이후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족 단위로 자기 소유의 땅을 경영하는 소농들은 생산을 더욱 늘릴 동기가 확실하다. 중세 초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농업 생산력 강화의 중요한 요소는 이들 소농들이었다. 특히 7세기부터 인구 증가 추세가 확연해지고, 이에 따라 농민들은 지주 영주들과 각각 한 축을 이루어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삶의 질 개선의 증거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식단이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해졌다. 이 시기 매장지와 유골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영양 부족의 증거가 눈에 띄게 감소했음을 보여 준다. 8세기부터는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 확인되며, 이때부터 축적되기 시작한 부는 10세기 중반부터 관찰되는 서유럽의 경제적 급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신분과 사회적 유동성
문명 초창기가 대부분 그런 경우가 많지만, 중세 초기도 상당히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였다. 앞서 보았듯 귀족의 농민 지배가 비교적 약했다는 말은, 귀족이라는 신분의 권위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사실 중세 초기의 귀족 집단 자체가 정의가 모호했다. 이들은 아직 '고귀한 혈통'으로 정의된 신분 집단이 아니었다. 왕과 친하거나, 관직을 갖고 있거나, 땅이 넓어서 귀족적 스타일의 생활을 할 수 있다거나 한다면 모두 귀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대다수가 "저 사람은 높으신 양반이야"라고 인정한다면 그럭저럭 귀족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가장 귀족이라고 인정받기 쉽고, 귀족 중에서도 세력이 높은 대귀족들은 소위 '왕과의 거리'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들은 궁정에 상주하면서 국가의 대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 집단 역시 혈통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국왕의 신임과 총애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예속농과 자유농의 구분은 있었지만(이것도 사실 아직 넘을 수 없는 경계는 아니었다.), 자유농과 귀족의 신분상의 구분은 이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자비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중농이 전쟁에 참여한다고 하자. 이 사람이 무예에 재능이 있어서 전쟁터에서 능력을 발휘한다면 대귀족의 눈에 들어 가신이 될 수 있다. 만일 이 사람이 지속적으로 능력을 발휘해서 이 대귀족이 밀어준다면(왕의 눈에 든다면 더욱 쉽다) 1-2대 안에 본인도 귀족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는 엄연히 전근대에 속하는 시기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지, 이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최소한의 재산은 있어야 하고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하고 운도 따라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닫힌 사회는 아니었다. 비교적 드물지만, 평범한 하층 농민이 주교직까지 오르거나 더 나아가 백작까지 되는 경우도 이 시대에는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상업 경제
상업 부분은 분명 서로마의 붕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지중해 전역을 무대로 형성된 복잡한 경제 구조가 보다 단순하고 지역화된 구조로 바뀌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Wickham이 지적하듯, 이 복잡한 경제 구조는 단일한 제국의 존재가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과거에는 북아프리카의 농민이 로마의 시장을 겨냥하고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 지역에서 먹고살기 위한 것 위주로 재배해야 했다.
물론 지역화되었다고 해도 그 양상은 다 달랐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 지역은 가장 대규모이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경제 시스템을 유지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지중해 지역은 예전보다 분산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복합적인 생산과 교환 체제를 유지했다. 반면에 본래도 변방 지역이면서 제국 붕괴의 충격을 가장 크게 받았던 브리튼은 경제도 가장 큰 타격을 입어서 적어도 8세기 초엽까지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 머물러 있었다. 애초에 로마의 세력권 밖이었던 북유럽도 마찬가지로 보다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상업의 역사도 단순히 퇴보와 쇠퇴라고 요약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는 옛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 지중해 상권이 붕괴한 상황, 즉 피할 수 없는 '지역화(localization)'라는 상황 내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뚫으려 모색하던 시기였다.
첫 번째 변화의 조짐은 농업 생산력과 인구 증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7세기에 나타났다. 이 시기에 프랑크인들은 도버 해협으로 나갈 수 있는 두 개의 항구, 캉토빅과 도러스타트를 개발한다. 8세기에는 해협 맞은편에서 이와 대응할 만한 정착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함윅(현재의 사우스햄튼. 지금도 영국을 대표하는 항구로 기능하고 있다.), 런덴위치(로마 시대 런던의 바로 옆에 위치), 입스위치 등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 국제 교역의 거점이 된 이들 항만 정착지들을 '엠포리아(emporia)'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정착지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불 해협과 북해를 잇는 국제 교통로를 형성했다. 이 항만 정착지 인근에는 일종의 산업 단지가 들어서서 장인들이 거주했다. 따라서 이 항만을 통해서 주로 거래된 물품은 거기 거주하는 장인들이 생산한 수공업품들이었다. 왕들은 이 항만 정착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수입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8세기에 북해는 물동량이 지중해를 능가하는 새로운 국제 교역의 무대로 성장했다.
중세 초기의 도시
'암흑 시대' 담론의 상투적 서술이 바로 버려진 도시들과 고대 세계의 상징처럼 자리잡은 도시 생활의 쇠퇴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과장이 심하다. 우선 이 역시 지역별로 편차가 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남부 갈리아나 이탈리아 등지 등 본래 '로마화(Romanization)'의 역사가 길었던 곳의 도시들은 다수가 비교적 온전히 살아남았으며, 여전히 상업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엠포리아)
프랑크 왕국의 경우 왕들이 도시에 머물기보다는 농촌의 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치적 생활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농촌화'되었다. 브리튼은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타격이 컸다. 그러나 역시 앞서 서술한 대로,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인 '엠포리아'를 만들어 도시의 상업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주교좌 성당이 있는 도시들도 대부분 살아남아서 종교 중심지로 기능했다. 사실, 주교가 있고 없고는 로마 도시들이 살아남느냐 여부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도시들과 교회들은 옛 로마 제국에서 시민 종교 의례가 가졌던 기능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모방했다. 그 결과 중세 초기에 지속된 시민 의례의 연속성은, 고대 로마에서 그랬듯이 도시 거주민들이 중요한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7세기부터 시작된 농업과 상업의 발전은 도시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1세기쯤 되면 도시 인구는 중단 없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대와는 다른 중세 도시만의 특색도 이 시기가 되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는 상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키고 새로운 도시 엘리트를 만들어 냈다. 이들 상공업 엘리트들은 곧 도시의 주도권을 놓고 전통 엘리트들과 대립하게 되고, 이는 12-13세기 코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중세 초기부터 단절 없이 계속된 점진적인 발전이 있었다.
나오며
이와 같이 현재 역사학계가 바라보는 중세 초기는 느리지만 꾸준한 발전과 역동적인 변화가 결합된 대단히 흥미로운 시대다. 무엇보다도, Devroy가 지적하듯, '장기적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중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중세 중기의 급성장은 아무 기반 없이 갑자기 일어난 현상이 아니며, 그 배후에는 5세기 서로마의 멸망 이후 치열하게 계속된 정치, 경제, 문화 전방위에 걸친 실험과 모색의 과정이 있었다. 표면적인 단절만 보고 심층을 흐르는 연속성을 보지 못한 18세기식 '암흑 시대' 담론으로는 이 변화와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중세 초기가 단순히 중세 중기 이후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목적론(teleology)적인 설명이야말로 현대 역사학이 가장 피하고자 하는 함정이다. 모든 시대는 우선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중세 초기도 예외는 아니다. 중세 초기는 그 자체로도 대단히 흥미롭고 역동적인 시대였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암흑 시대'라는 단어로는 이런 노력은 물론, 이 시대의 복합적인 면모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사실 후대의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이 시대의 다양한 노력들과 거기서 나온 다양한 면모들을 '암흑 시대'라는 한 마디 용어로 규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모든 것이 다 좋았고 발전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모든 시대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발전과 퇴보의 이분법으로만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오늘 우리의 일상도 그런 이분법적 잣대로 재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고 문헌
- Chris Wickham, Medieval Europe: From Breakup of the Western Roman Empire to the Reformation (New Haven, 2016).
- Chris Wichham, The Inheritance of Rome: A History of Europe from 400 to 1000 (London, 2009).
- Hendrick W. Dey, The Afterlife of the Roman City: Architecture and Ceremony in Late Antiquity and the Early Middle Ages (New York, 2015).
- Paul Fouracre (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 Vol 1 (Cambridge, 2005).
- Rosamond McKitterick (ed.), The Early Middle Ages (Oxford,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