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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묵상글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제 마음은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3 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아직 / 11:1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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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6.28 05:18
- 제 마음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제 아들의 거룩한 마음에 이어
오늘은 어머니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을 기립니다.
아들의 거룩한 마음이 온 인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기린다면
어머니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은 아들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오로지 아들을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머니 마음 안에는 오로지 아들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마음이 오로지 아들을 향해 있다는 것은
마리아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무릇 모든 어머니가 그럴 것이고,
연애할 때는 연인끼리도 그럴 것입니다.
뭘 해도 모든 촉각이 한 사람을 향하고,
모든 관심(關心)이 한 사람을 향합니다.
관심이란 말 자체가 마음을 뜻하는데
무엇 또는 누구에 관한 마음이고,
이 관심에서 관계가 시작되는 겁니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됩니다.
어쨌거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오직 아들 예수님을 향해 있고,
모든 관심이 아들을 향해 있는데 이는 다른 어머니들의 마음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마음 안에 아들만 있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다른 엄마들의 그것과 다를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보통 엄마들의 아들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아들들이 자기의 성공을 꿈꾸는 데 비해
마리아의 아들은 인류의 구원을 꿈꾸는 것이 다르고,
그러기에 보통의 엄마들이 자식의 성공을 늘 빌지만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사업이 잘되기만을 빌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처음부터 늘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도 처음에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당신 아들의 안위만 걱정하는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아들을 잃고 걱정하는 어머니인데
이런 어머니에게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어머니 곁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라며 어머니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마음 안에는 오직 아들만 있지만
아들의 마음 안에는 성부의 뜻과 인류 구원이 있기에 마리아는 이제
아들의 안위만 걱정하지 않고 아들의 마음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아들이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릴 때
거기서 내려오라고 하지 않고 그 옆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한 사람을 위해 주님께 매달리고 졸라댑니다.
젊은 사람이고 한 가족의 가장이 지금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고,
그 어머니는 오래 치매를 앓은 시어머니와 파킨슨병을 오래 앓은 남편 때문에
일생 고생을 너무 많이 했는데 아들이 지금 또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할 수 없고,
그를 꼭 낫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고 강요까지 하고,
그 어머니에게는 성모님의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은 이번만은 주님께서 저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주님과 성모님의 마음에 한참 미치지 못할지라도
이 마음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기도 들어주시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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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모성심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의 힘”
어제 6월27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 6월28일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성모성심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 에우데스에 시작됩니다. 교회는 이 신심에 대해 오랫동안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1805년 비오 7세는 흠없는 성모성심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낼 것을 허용하였고, 1855년에는 에우데스에 의해 만들어진 경문을 바탕으로 한 고유미사가 행해졌고, 1857년에는 고유한 성무일도 경문도 만들어집니다.
마침내 교황 비오12세는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이하여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합니다. 이어 경신성사성은 1996년 1월1일자 교령으로 ‘예수성심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선택기념일’로 지내오던 이 축일을 ‘의무기념일’로 지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미사는 생략됩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순수요 사랑의 힘입니다. 성모성심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니 바로 모성애의 사랑 때문입니다. 부성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모성애는 하느님 사랑에 가깝습니다. 어제의 유쾌했던 추억은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6월21일 시작된 수도원 배밭의 배봉지싸기가 어제 예수성심대축일 오전에 다 끝났습니다. 해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흡사 무수한 배봉지들이 배나무 가지마다 달린 모습이 하늘에 별들같습니다. 마침 써놓은 시가 있어 배봉지 싸기전 잠시 여섯 어머니들에게 나눠드리고, “하늘에 별들을 다는 어머니들과 함께!” 인사한 후 강복을 드린후, “하늘에 별들을 답니다” 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하늘에 별들을 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사랑의 어머니들
희망의 별, 사랑의 별, 흰별들을 답니다
주님 사랑의 별같은 어머니들입니다.
배나무 가지들마다
흰봉지를 쌀 때 마다
무수히 떠오르는 희망의 별, 사랑의 별, 흰별들
배밭 전부가
희망의 별, 사랑의 별, 흰별들 가득 떠오른 하늘이 됩니다
인고의 세월 사랑으로 익어 딸 때까지
희망의 별, 사랑의 별, 흰별들 보는 기쁨에 살겁니다.”<2025,6,27>
하늘에 별들은 다는 어머니들은 또 하나의 성모님들입니다. 성모님같은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배밭 하늘에 약 15만개 별들을 달았습니다.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과 아드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기인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이요 두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사랑의 찬미입니다.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 찬미로 표현됩니다. 성모님은 찬미의 어머니였습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사랑의 찬미로, 찬미의 힘으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사야서의 찬미는 그대로 마니피캇 성모님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이런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찬미기도를 바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의 관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의 소년시절, 예루살렘에서 전개되는 현실이 자못 복잡하고 혼란합니다. 문제아적인 성향이 농후한 예수님이요 전 과정을 지극한 인내로 깊이 생각하며 묵묵히 견뎌내는 성모님의 모습 완전히 관상적입니다. 율법학자들과 주고 받는 문답에서 소년 예수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고 이어지는 성모님과 아드님의 대화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화두처럼 들리는 이해불가한 아드님의 말이지만, 마음속 깊이 담아 간직한 성모님의 지혜가 정말 관상적입니다. 고결한 영혼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그리하여 나자렛으로 내려온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했고,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았으니, 성모님의 관상의 사랑과 지혜가 큰 몫을 했음을 봅니다. 티없이 거룩하신 성모성심 기념 미사를 통해 성모님의 사랑의 찬미와 사랑의 관상을, 관상의 지혜를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나이다.”<복음 환호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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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교황 비오 9세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나셨습니다. 언제나 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어머니.
당신은 마음에 말씀을 품으신 도서관이셨습니다.
말씀을 펼쳐 읽으시며, 순명을 배우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과 믿음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품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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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일정을 3곳에 적어 놓습니다. 하나는 구글 달력입니다. 그렇게 하면 핸드폰과 노트북에 일정이 기록됩니다. 다음은 사제관과 집무실의 탁상용 달력에 적어 놓습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일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정해진 일을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3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간 이식 수술을 앞둔 형제님을 위한 병자성사가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기증자가 없어서 고생했는데 다행히 기증자가 생겼습니다. 기증자는 뇌사 상태였고, 장기기증을 했기에 형제님을 위해서 ‘간’을 기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눈, 심장도 기증한다고 합니다. 병자성사를 하면서 예전에 보았던 ‘몬트리올 예수’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연극에서 ‘예수님’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사고로 뇌사 상태가 되었고, 배우의 장기는 비행기를 타고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영화는 끝났습니다. 간 이식을 받은 형제님도 건강을 회복하여 성당으로 나왔습니다.
오후에는 에어컨 수리 기사를 만났습니다. 성당의 에어컨이 고장나서 성당과 친교 실 이외에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옥상에 올라가서 기계실을 점검했는데 퓨즈가 2개 나갔다고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하므로 에어컨 설치 회사에 문의했습니다. 나중에 점검해 보니 4개의 모터 중에 1개가 고장났다고 합니다. 우선 3개의 에어컨을 이용해서 퓨즈를 연결해서 성당의 에어컨이 작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모터를 교체하면 성당 에어컨은 문제없이 작동할 거라고 합니다. 문득 ‘퓨즈’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퓨즈가 없다면 과부하로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퓨즈는 에어컨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신앙인에게 퓨즈와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고백성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신앙 안에서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하지 않고, 하느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근심과 불만이 넘쳐서 고장나고 말 것입니다.
저녁에는 병원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축성을 청하는 의사 선생님은 한국인의 특징을 두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인은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때가 많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아 건강검진을 받고, 증상이 있으면 병원을 찾는다면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마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육적으로도 건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어제는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마치 어제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오늘은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 품으신 어머니의 마음을 묵상하는 날 같습니다. 저에게는 ‘사제 성화의 날’인 어제가 특히 의미 깊었습니다. 25년 전, 제가 사제로 살아가며 처음으로 ‘사목’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구장 신부님께서 제게 ‘사목 체험’을 발표해 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는데, 처음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영성도 부족하고, 체험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권유받고, 겸손하게 ‘나의 사목 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한 주제가 ‘사목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대답이 있었습니다. “사목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지식과 이론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닿는 사목,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목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는 항상 ‘어머니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은 바로 그러한 마음입니다.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 끝까지 기다리는 마음, 칼로 찌르듯 아픈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예”라고 응답하는 마음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며, 지칠 때마다 저는 이 성모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특히 어렵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나 스스로 반성할 때면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오늘은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하는 날입니다. 티 없는 성모님의 성심은 세상의 상처로부터 지켜낸 순결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쉽게 냉소하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판단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시금 사랑하고, 기다리고, 품으려 할 때 그 중심에는 늘 성모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심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성모님의 성심은 그 사랑을 품은 교회의 마음입니다. 저도 부족한 사제이지만, 어머니의 성심을 닮아가는 사제가 되기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성모님께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맡겨보십시오. 그분의 티 없는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을 보여주는 가장 부드럽고 확실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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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개인과 공동체를 함께 책임지는 정신!
하느님의 숨
2025.06.27. 17:0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6월 27일 금요일 - 스물다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변화의 공동체를 창조하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도자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서로를 도울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작가 오리 브라프만(Ori Brafman)과 로드 벡스트롬(Rod Beckstrom)은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공동체와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강력한 교훈에 대해 성찰합니다:
불가사리에게는 우리가 믿기 어려울 정도의 특성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들의 팔을 자르면 대개는 그들에게서 새 팔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린키아나 긴팔 불가사리와 같은 몇몇 종은 단 하나의 팔로도 다른 팔들을 모두 복제해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마법을 부리듯 재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가사리는 실제로 전체가 신경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본적으로 세포들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사리는 거미처럼 머리를 가지고 있는 대신 분산된 네트워크로 기능을 합니다....
이 모든 종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불가사리 종 하나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특별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이라는 불가사리 종입니다. 1935년에 빌 윌슨(Bill Willson)은 맥주 캔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20년간 거의 내내 맥주나 다양한 종류의 술을 손에 들고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의 주치의가 술을 끊지 않으면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 말이 빌을 흔들리게 했지만, 그가 술을 끊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중독은 극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빌은 엄청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알코올 중독과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전문가들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다른 중독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하면 곧바로 빌은 그 충고를 자기 합리화로 무시해 버리고 또 술을 마셨습니다. 돌파구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빌은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같은 문제를 안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충고하는 사람]에 반기를 드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무시하기는 훨씬 더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이 태동하게 된 계기입니다.
이 모임은 자신과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지는 불가사리의 생리를 본보기로 삼습니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는 책임자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책임자 역할을 합니다.... 이 모임은 마치 불가사리와 똑같은 기능을 합니다. 이 모임에 들어가면 여러분은 자동적으로 지도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고자만 하면 여러분은 불가사리의 팔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자 모임은 새로운 회원이 들어오고 또 이전 회원들이 떠나고 하는 사이에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이 모임에서 다른 것은 다 바뀌어도 한결같이 유지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독에서 회복되는 원리, 즉 열두 단계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에는 책임자가 없기 때문에, 회복의 과정에서 모든 이가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지켜 주는 데 책임을 집니다.... 이 조직에는 신청서도 없고, 아무도 이 모임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 모임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빌은 이 그룹이 엄청난 성공을 이루고 온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 삶의 전환점을 얻기를 원했을 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빌은 매우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거미의 생리를 닮은 모임을 만들어 그 모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선택해서 신청자들이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가사리 생리를 닮은 모임을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빌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책임지는 그런 생리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결혼한 여성 동성애자입니다. 제 파트너와 저는 사랑과 자애를 지닌 여성들로서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며 죄책감을 갖지 않고 영성체를 하고 있고, 또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아이들을 둔 참 많은 부모들이 우리에게서 긍정적인 전망과 용기를 얻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의 자녀들도 신앙 공동체에서 환영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실질적이고 살아있는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Linda L.
References
Ori Brafman and Rod A. Beckstrom, The Starfish and the Spider: The Unstoppable Power of Leaderless Organizations (Portfolio, 2006), 35, 36–3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oel Muni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코로나 팬데믹 시가에 푸드 뱅크에 음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연대라는 단순한 행위 안에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나설 때 참된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 조용하게 상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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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과 참된 '나'의 아름다움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숨
2025.06.28. 05:51
지극히 자애로우신 동정 마리아님, 기억해 주소서!
당신께 보호를 청하며 당신 품에 피신하는 이나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이, 당신께 전구를 청하는 이는
누구라도 당신께서 절대 외면하지 않으심을 아오니,
저희도 이 확신에 영감을 받아 당신께 날아드옵니다.
오 동정녀들 중 동정녀이신 저희 어머니,
이 죄 많고 가련한 저희가 당신 앞에 와 서 있사오니,
사람이 되신 말씀의 어머니,
저희 청을 물리치지 마시고 당신의 자비로 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소서. 아멘.
Rememer O most gracious Virgin Mary,
that never was it known that anyone
who fled to thy protection, implored thy help, or sought thy intercesstion was left unaided.
Inspired by this confidence, I fly unto thee, O Virgin of virgins, my Mother;
to thee do I come, before the I stand, sinful and sorrowful.
O Mother of the Word Incarnate, despise not my petitions,
but in thy mercy hear and answer me. Amen.
예전에 [우리 함께 기도해요] 방에 올렸던 "Memorare"(기억해 주소서) 기도인데, 제가 조금 다시 수정한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1586년 12월 무렵부터 1587년 1월 어느 시기까지 극심한 위기와 유혹, 시련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1587년 1월 어느 날 생 에티엔 뒤 그레(St. Etienne des Grès) 성당 성모님 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오 하느님, 의로우신 심판관이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 저에게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은총이 주어져 있지 않다면 적어도 이 세상에서라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당시 칼빈 개혁파들에게서 시작된 예정설(운명 예정설)이 큰 논란이 되었던 사안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도 그 영향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를 바치던 중 그 옆에 이 기도가 적혀 있는 상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이 기도를 온 마음으로 바쳤는데, 그간 겪었던 그 모든 괴로움과 번민이 곧바로 치유되었고, 유혹도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힘과 확신이 그를 채워 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자신을 봉헌하고 온 삶을 정결하게 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해 드렸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 안에 머물면서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기에 성모님의 자모적인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도 오래 전(아마 2009년 봄일 겁니다) 큰 시련 가운데서 성모님께 제 온 삶을 당신 아들 사제로 살겠다는 결심을 바쳐드리면서 묵주의 9일 기도를 힘이 닿는 한 죽을 때까지 바치겠다고 약속을 드렸고, 아직까지는 그렇게 매일 묵주의 9일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성모님의 자모적인 사랑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중재해 주십사고 청하곤 합니다.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하고 그 메시지를 들었던 세 명 중 하나인 루시아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나의 교회가 내 성심에 온전히 봉헌하면서 동시에 원죄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온전히 봉헌하길 바란다."
이후 루시아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업적의 시작은 말씀이 인간이 되시기 위해 하늘에서 마리아의 태중으로 내려오신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리고 그후 9개월 동안 그리스도의 피는 마리아의 티 없이 깨끗하신 심장에서 주어지는 피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마리아의 심장과 일치하여 뛰고 있었습니다!"
어제 제가 하느님 마음으로 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가장 큰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중재 기도를 바쳐 주시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심 안에 머무는 것과 성모님의 성심 안에 머무는 것은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시련이나 유혹 가운데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특별한 마음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그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새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자주 성모님께, 그리고 성모님과 더불이 기도를 바치기는 하지만 분심 속에 바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분심 없이 기도를 바치면 참 좋겠지만, 그래도 다시, 또다시 꾸준히 마음을 모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그리고 성모님과 더불어 기도를 바치는 것은 우리가 은총을 감지하는 데 있어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오래 전에 사제품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브리지 메케나 수녀의 [예수께서 함께하시면 기적은 일어난다]라는 책에서 메케나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심이 들거나 졸음이 오더라도 성체 앞에 앉아 있으면, 마치 바닷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면서 잠을 자더라도 몸이 그을리는 것처럼, 은총을 입게 됩니다...."
물론 제가 이 글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지향을 늘 마음에 두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비록 기도의 과정에서 분심이 들거나 졸음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으로 '나'답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특별히 기억하며 새기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눈에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기에 성모님은 우리가 우리의 이 내면 깊은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 곁에서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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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2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셸 드 몽테뉴는 말했습니다.
“내 삶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은 불행이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이가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동전을 10번 던지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앞면이 나오면 10,000원씩 받습니다. 그렇다면 10번 모두 던졌을 때 본인은 얼마나 벌까를 물었습니다. 확률이 50%이니 모두 50,000원을 이야기했을 것 같지만, 실제 기대치는 39,000원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성공 가능성을 확률의 법칙보다 더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지요.
“제가 텔레비전을 보면 응원하는 팀이 꼭 져요.”
일어나지 않은 불행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는 행복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녀의 마음은 항상 하느님께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죽음의 위협이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인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면서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스카 축제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찾고 찾아 결국 예루살렘까지 왔을 때,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때 성모님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역시 하느님께 향해 계시는 성모님이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믿음만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지만 되돌아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쇠렌 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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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카카오톡채널 ‘갑곶순교성지’- 소식에 들어가시면 다일 묵상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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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https://www.band.us/band/69309768
밴드 “복음 맛들이기”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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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고도미니코’로 들어가세요.
아주 가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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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big-llight]
우리도 성모님 성심 새기는 삶을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성모 신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으로 보편화되어,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로 거행되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를 온 교회가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냈는데,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의무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 하느님 계획을 알려한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하필 왜 저란 말씀입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며 그분께 막 따진다.
이게 일반적인 우리다. 허나 성모님은 이런 일에 늘 새기시면서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나.
성모님도 처음에는 당신께 닥친 그 엄청난 일을 하느님께 여쭈고 또 여쭈었으리라.
그렇지만 침묵으로 그 뜻을 이해하셨을 것이고,
그분의 놀라우신 계획을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순명으로 받아들이셨으리라.
이리하여 나자렛의 우리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님 탄생 예고를 받은 그 순간부터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참으로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셨으리라.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는 아들에게 한 번도 ‘왜?’라고 묻지 않으셨다.
그저 믿음으로 마음속에 꼭꼭 간직하시면서 사셨으리라.
이 순명의 믿음 덕택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성모님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정녕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말한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순종하며 자랐다.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평생을 두고 마음속에 고이 새기시면서 간직하였다.’
참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의 답변은 누가 뭐래도 당돌하면서도 의외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상냥한 어투도 아니다.
그렇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소년 예수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데, 정말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게다.
우리도 알아듣는데 그분들이야 못 알아들을 수가?
이렇게 소년 예수는 부모가 찾는 줄 알면서도 사흘간 성전에 남아 오랜 토론을 벌였다.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담아서, 겸손과 순명의 자세로 깊이깊이 간직하였으리라.
사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시다.
그래서 하느님 구원 사업은 성모님으로 시작되었고, 성모님은 이 사업의 협력자이셨다.
성모님은 그분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고 실천하셨다.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 깨끗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주님 뜻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야만 한다.
이처럼 세례 받은 믿는 이들은, 온전히 그분 뜻에 순명하여야 할 게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 토요일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지낸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번민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신앙인의 모범이자 거울이신 성모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의 회개와 그분의 구원을 늘 바라신다.
이처럼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성모님의 마음은 이제와 항상 우리에게는 더없는 위로이다.
따라서 성모님의 신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오늘, 성모님께서 새기시며 간직한 겸손과 순명의 그 삶을 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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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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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나의 집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
서하 [nansimba] 2025-06-27 ㅣNo.183087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12살 예수님이 던진 근본 질문
열두 살 예수님이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다가 걱정하며 찾아온 부모님께 한 이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근원을 깊이 인식하는 선언입니다.
우리 삶의 근본 질문인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를 향한 내면의 응답입니다.
존재영성: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존재하는가'
존재영성은 외적인 행동이나 성과보다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가 존재하는 그 자리'에 머무는 것.
바로 그곳에서 평화와 참된 자아를 만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아버지의 집' - 내 존재의 뿌리와 안식처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근원적인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흔들림 없이 나를 지탱해 주는 '존재의 뿌리'이며,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예수성심 대축일: 존재의 심장에 담긴 사랑
어제 교회가 기념한 예수성심 대축일은 그 '존재의 심장'을 묵상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행위 이전에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힘이고,
우리 각자의 존재 깊숙한 자리까지 닿는 은총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 존재를 받아들이는 마음
성모성심을 기념하는 오늘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품는 성모님의 순수하고 거룩한 '존재의 수용'을 묵상합니다.
오늘 저는 성모님처럼 내면에서부터 예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자리로 돌아가기
진정한 '나'는 여러 역할과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깊고 고요한 존재의 자리 안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 때 비로소 '나'로서 존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 성심의 축일이 주는 은총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축일은 저에게 존재의 본질을 묵상하게 하며,
그 사랑과 순명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 존재의 집으로 돌아가 머무는 은총을 선물합니다.
기쁘게 선물을 받아 안고,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나의 집』
바쁘고 분주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존재의 자리’를 기억하고 싶었어요.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혼의 근원이며,
예수님의 심장이 뛰는 ‘사랑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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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때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그곳에 남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아들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찾은 아들은
율법 교사들과 토론 중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행 가운데
아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예수님의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더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걱정한 것과 달리 아들 예수님은 태연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성전에 남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모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실 루카복음은 성모님의 모습을 전하면서
여러 번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행동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다른 여인들과 똑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아기를 갖게 되면서부터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식을 선택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임신이라는 죽을 위험을 무릅쓴 것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매 순간은
성모님께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혼자 감당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있었기에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의 여정이기에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마주할 때
하느님과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는 않을수도 있지만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하면서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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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5,3-7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오늘 우리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하고 묵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을까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유 안에서 드러나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인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리의 양도 소중히 여기며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입니다. 병들고 약해도, 고집이 세서 목자의 말을 잘 안들어도, 그래서 자꾸만 엉뚱한 길로 빠지는 바람에 목자를 고생시켜도, 그런 양을 차마 미워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의 본성은 그것이 필요한 이에게로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족하고 약한 양을 더 많이 챙기고 사랑하십니다. 부모가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을 대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입니다. 그 양이 길을 잃어 당신으로부터 멀어지면 고생할 모습이 눈에 밟혀서 찾아나설 수 밖에 없는 마음, 그 양을 되찾아 다시 당신 품 안에 안기 전에는 편히 쉴 수도, 수색을 멈출 수도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절절한 사랑을 느낀 이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비유에는 양들을 대하는 목자의 또 다른 마음가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두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시는지 그 속뜻을 알지 못하는 이는 그런 예수님의 행동이 양들을 위험 속에 방치하는 걸로 보일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 찾자고 아흔 아홉마리나 되는 양을, 그것도 맹수와 여러 위험요소로 가득한 광야에 방치했다가 더 많은 양을 잃게 되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처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절대 ‘잃은 양’이 되지 않을거라는 교만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약한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아흔 아홉마리 양의 입장에 서서 잃은 양과 목자를 싸잡아 비난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잃은 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목자이신 예수님이 나를 찾아주실 날을 애타게 기다리게 될 상황이 언제든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끝까지 추적하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아흔 아홉마리 양을 광야에 놓아두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부모가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혹독하게 훈육하는 것과 비슷한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고생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순수한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도록, 그들이 마음 속 가득한 탐욕과 교만을 비워내고 완전한 사랑과 순명으로 당신을 따르도록, 그렇게 하여 당신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하는 참된 행복을 누리는 진정한 당신 백성이 되도록 이끄시기 위해서였지요. 예수님도 그런 마음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당신을 믿기만 하면 편안함과 안락함이 보장되리라는 잘못된 기대를 내려놓도록, 당신을 ‘주님 주님’하고 부르기만 하면 가만히 있어도 구원받으리라는 착각을 바로잡도록, 다른 이를 심판하고 단죄함으로써 자신의 상대적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고, 다른 이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끄시기 위함인 겁니다. 이런 예수 성심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두루 묵상해보고, 앞으로 그분 마음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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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Izfk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정인준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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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O4U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기경호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현재는 과거 묵상글을 일부 수정하여 누군가
게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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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rqr
다음카페 “평화의 사도”
오상선 신부님 강론글 리스트에서 보실 수 있음( 현재는 과거 묵상글을 일부 수정하여 누군가
게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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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68
6월28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연중 제 1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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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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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수원교구 현영민 루도비코(삼가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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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생에 걸친 묵상과 관상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께서 열두살 소년 예수님께 하셨던,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젊은 사제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청소년 보육 시설에서 아이들과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물론 인간적 미성숙과 성급함으로 인해 아이들의 깊은 상처를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한 자책도 크지만,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쌓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보육 시절 책임자로 제일 힘든 부분이 아이들의 가출이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집에 붙어 있어야 대화를 하든지 뭘 할텐데, 여차하면 가출하니, 또 가출로 인한 후유증이 만만치 않으니, 정말 괴로웠습니다.
한번은 가출 전문가 친구가 혼자만 가출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린 동생들까지 줄줄이 데리고 나가서 일주일 넘게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림동으로 봉천동으로 샅샅이 찾아다니고, 때로는 잘 다니는 길목에 승합차를 세워놓고 밤새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검거했는데, 녀석 얼굴을 보자마자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하지 말아야 할 험한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동시에 녀석의 뒤통수를 있는 힘을 다해 후려갈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모님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순례 길에서 소년 예수님이 사라졌습니다. 사흘 내내 소년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성모님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은 저처럼 욕을 퍼붓지 않으셨습니다. 뒤통수를 갈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이렇게 물으십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런 성모님의 말씀에 웬만하면 “죄송해요. 어머니.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가관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순간 저 같았으면, 더 확 끌어올라 아마도 이렇게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것이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말대꾸가?”
그러나 성모님은 그냥 침묵하십니다. 비수처럼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십니다. 도대체 그 말씀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곰곰이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성모님에게 있어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과 묵상과 관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우고, 출가하실 때까지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이해하지 못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사건들 앞에 보이신 성모님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큰 귀감으로 다가옵니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분노를 식힙니다. 의혹의 눈길도 거둡니다. 그저 침묵합니다. 곰곰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갑니다.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때가 올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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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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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일상에서 찾는 것>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며,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향한 그 순결하고 깊은 사랑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 바로 성가정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되찾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오늘 강론의 핵심이자, 성모님 마음의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성모님께서는 당신 삶에 일어난 모든 일, 특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거듭 묵상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그 일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와 목적, 곧 ‘섭리’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함, 곧 교만한 마음의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우연’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모님의 이러한 태도와 정반대의 것을 평화의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특히 현대 심리학의 한 흐름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최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김주한 교수는 그의 책 『내면 소통』에서, 인간은 ‘경험자아’와 그것을 되새기는 ‘기억자아’ 때문에 불안에 시달린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필연적인 이유를 찾으려는 순간, 우리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우연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경험자아가 날뛰기 시작한다. 뭔가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순간, 즉 필연성을 부여하는 순간 경험자아는 그 원인을 찾으려 하고, 결국 ‘내가 뭘 잘못했나?’ 혹은 ‘누구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온갖 부정적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으로 ‘그냥 일어난 일(Just happened)’이라고,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솝 우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어리석은 주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매일 하나씩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의 신비를 기다리고 감사하며 그 의미를 헤아리는 대신, 모든 것을 한 번에 얻으려는 조급함에 사로잡힙니다.
거위의 배 속에 거대한 황금 덩어리가 들어있을 것이라는 착각, 즉 거위의 생명과 그 과정의 의미를 무시하고 눈앞의 결과라는 ‘우연’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거위의 배를 갈랐고, 결국 황금알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의미를 찾는 인내를 포기하고 눈앞의 우연에만 집착하는 삶의 끝이 얼마나 허무하고 파괴적인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화입니다.
마찬가지 성경 사례로, 루카 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풍년을 맞이했을 때,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구나, 이웃과 어찌 나눌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즐겨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풍년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운이 만들어낸 '우연한 대박'으로 여겼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볼 겸손함이 없었기에, 감사가 아닌 탐욕으로 반응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은총을 '행운'으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쌓아두려는 불순한 마음만 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직감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섭리의 순간'이 아닌, 잘못 걸려든 '재수 없는 사건(우연)'으로 취급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냉소적으로 물으며 진리를 외면하고 손을 씻는 행위는, 섭리를 우연으로 격하시켜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마음의 전형입니다. 마음이 불순하면 진리 앞에서 책임을 지기보다, 그 상황을 '우연'으로 치부하여 도망갈 구멍을 찾습니다. 이런 사례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이는 자신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고 창조자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허락하시는지 기억하고 곰곰이 묵상하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뜻 따라 선택을 이어갑니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우주 자체의 신비 앞에서도 힘을 잃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 우주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얼마나 정교하게 ‘미세 조정(fine-tuned)’ 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고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중력의 힘, 원자를 묶어주는 힘, 우주 팽창의 속도 등 수많은 물리 상수들이 지금의 값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별과 행성은커녕 원자 하나도 제대로 형성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눈먼 ‘우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강력한 태풍이 고철 처리장을 휩쓸고 지나간 뒤에 완벽한 보잉 747 여객기가 저절로 조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여기는 진화론적 관점의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우연에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는 삶의 고통을 감내할 힘이 없어집니다. 이 지점에서, 20세기 최악의 역사적 비극의 한복판을 통과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의 외침이 우리 영혼에 경종을 울립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는,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인간에게서 마지막까지 빼앗을 수 없는 자유가 있으니, 그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건 자체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우연이 아닌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더 높은 수준의 존재에게 허락된 교육과정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이야말로 빅터 프랭클과 우리 순교자들이 보여준 ‘의미를 찾는 신앙’의 원조이자 정점이십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사흘 동안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애가 타고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이 수없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사건을 불행한 ‘우연’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찾은 후에도,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는 아들의 알 수 없는 말씀을 포함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삶에서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고통과 상실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때 세상의 목소리처럼 ‘이건 그냥 우연이야’라며 의미를 포기하지 맙시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그 모든 고통과 기쁨,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하는 용기를 청합시다.
그 안에서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고 응답하는 용기를 얻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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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일정을 3곳에 적어 놓습니다. 하나는 구글 달력입니다. 그렇게 하면 핸드폰과 노트북에 일정이 기록됩니다. 다음은 사제관과 집무실의 탁상용 달력에 적어 놓습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일정을 잊어버리지 않고, 정해진 일을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3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오전에는 간 이식 수술을 앞둔 형제님을 위한 병자성사가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기증자가 없어서 고생했는데 다행히 기증자가 생겼습니다. 기증자는 뇌사 상태였고, 장기기증을 했기에 형제님을 위해서 ‘간’을 기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눈, 심장도 기증한다고 합니다. 병자성사를 하면서 예전에 보았던 ‘몬트리올 예수’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연극에서 ‘예수님’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사고로 뇌사 상태가 되었고, 배우의 장기는 비행기를 타고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영화는 끝났습니다. 간 이식을 받은 형제님도 건강을 회복하여 성당으로 나왔습니다.
오후에는 에어컨 수리 기사를 만났습니다. 성당의 에어컨이 고장나서 성당과 친교 실 이외에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옥상에 올라가서 기계실을 점검했는데 퓨즈가 2개 나갔다고 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하므로 에어컨 설치 회사에 문의했습니다. 나중에 점검해 보니 4개의 모터 중에 1개가 고장났다고 합니다. 우선 3개의 에어컨을 이용해서 퓨즈를 연결해서 성당의 에어컨이 작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모터를 교체하면 성당 에어컨은 문제없이 작동할 거라고 합니다. 문득 ‘퓨즈’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퓨즈가 없다면 과부하로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퓨즈는 에어컨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신앙인에게 퓨즈와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고백성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신앙 안에서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하지 않고, 하느님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근심과 불만이 넘쳐서 고장나고 말 것입니다.
저녁에는 병원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축성을 청하는 의사 선생님은 한국인의 특징을 두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인은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때가 많다고 합니다. 병원을 찾아 건강검진을 받고, 증상이 있으면 병원을 찾는다면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저렴한 비용으로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마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육적으로도 건강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어제는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마치 어제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오늘은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 품으신 어머니의 마음을 묵상하는 날 같습니다. 저에게는 ‘사제 성화의 날’인 어제가 특히 의미 깊었습니다. 25년 전, 제가 사제로 살아가며 처음으로 ‘사목’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구장 신부님께서 제게 ‘사목 체험’을 발표해 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는데, 처음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영성도 부족하고, 체험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권유받고, 겸손하게 ‘나의 사목 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한 주제가 ‘사목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대답이 있었습니다. “사목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지식과 이론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닿는 사목,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목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는 항상 ‘어머니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은 바로 그러한 마음입니다.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 끝까지 기다리는 마음, 칼로 찌르듯 아픈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예”라고 응답하는 마음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며, 지칠 때마다 저는 이 성모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특히 어렵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나 스스로 반성할 때면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오늘은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하는 날입니다. 티 없는 성모님의 성심은 세상의 상처로부터 지켜낸 순결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쉽게 냉소하고, 쉽게 포기하고, 쉽게 판단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시금 사랑하고, 기다리고, 품으려 할 때 그 중심에는 늘 성모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심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성모님의 성심은 그 사랑을 품은 교회의 마음입니다. 저도 부족한 사제이지만, 어머니의 성심을 닮아가는 사제가 되기를 다시금 다짐합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성모님께 여러분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맡겨보십시오. 그분의 티 없는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을 보여주는 가장 부드럽고 확실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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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따로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공포에 빠져 온 시가지를 헤매고 다니는 이 거룩한 부모의 비통과 자괴감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것입니다. 그런데 애타게 아들을 찾던 어머니에게 아들은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살아온 소년이 진정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곧 하느님 아버지와의 내밀한 관계를 처음 드러낸 것입니다. 부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간직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지막 두 문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2,51). 오늘 기념하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아들의 언행을 사랑과 존중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일과 걱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곧잘 잃어버리고는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사랑하는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그분을 찾았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박한 순간에 도움을 청하고자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평범한 우리 일상 안에서 소중한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지키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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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 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 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했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했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 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게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 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배 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 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신앙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에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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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루카 2,41-51 (예수님의 소년 시절)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마음으로만
당신을
품습니다
언젠가
이 마음이 곧
내가 되리라 믿기에
마음으로만
품을 수밖에 없음에
슬퍼하지 않고
마음으로나마
품을 수 있음에
고마움과 기쁨으로
살며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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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셸 드 몽테뉴는 말했습니다.
“내 삶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은 불행이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이가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동전을 10번 던지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앞면이 나오면 10,000원씩 받습니다. 그렇다면 10번 모두 던졌을 때 본인은 얼마나 벌까를 물었습니다. 확률이 50%이니 모두 50,000원을 이야기했을 것 같지만, 실제 기대치는 39,000원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종 성공 가능성을 확률의 법칙보다 더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지요.
“제가 텔레비전을 보면 응원하는 팀이 꼭 져요.”
일어나지 않은 불행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어나지 않는 행복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녀의 마음은 항상 하느님께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죽음의 위협이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인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면서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파스카 축제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찾고 찾아 결국 예루살렘까지 왔을 때,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때 성모님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역시 하느님께 향해 계시는 성모님이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믿음만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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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머니의 심정은 곧 하느님의 심정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41-52)
1)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성모 성심’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나를’ 그렇게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그 애타는 심정이 곧 성모 성심입니다.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인간들이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구원을 받는 것. 그것 하나만을 바라시는 성모님의 마음을(심정을) 표현한 말이 곧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는 길을 잃은 적 없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성모님께서 나를 애타게 찾으실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이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진짜 성인 성녀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개하는데, 위선자들은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큰소리치기만 합니다.>
2) 마태오복음에 어린 자식이 죽어서(살해당해서) 통곡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나타내는 예언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6-18)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예언은 예레미야서 31장 15절입니다. 원래 이 예언은,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패망해서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의 상황에 대한 예언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붙잡혀서 끌려가는 자식들 때문에 비통해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나타낸 예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죄 속에서 살면서 멸망에 이를 때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는 자식들을 보는 비통한 심정을 나타낸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서 저자가 이 예언을 복음서에 인용한 의도에는 헤로데 같은 죄인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어머니께서 나를 애타게 찾으시는 것은, 내가 무사히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심정은 곧 하느님의 심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정은 곧 어머니의 심정’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에제키엘서에 있는 다음 말씀은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즉 모든 사람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이 말씀은, 인간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심정도 같습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또 큰아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이 말들은 모두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에 대한 큰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 ‘큰 기쁨’은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큰 슬픔’에 빠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슬픔과 기쁨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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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님]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
지난 월요일 청룡산에서 아빠 빠진 꿩 가족을 만났습니다. 엄마 꿩 주위에 병아리 꿩들이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길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털이 보송보송 난 꿩 병아리들이었습니다.
나를 마주친 엄마 꿩은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겠습니까? 엄마 꿩은 새끼들이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길 한 가운데 꼼짝 않고 서있었습니다. 엄마 꿩은 “내 새끼들을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애원하는 듯 했습니다.
엄마 꿩의 그 사랑을 범할 수 없어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조차 죽였습니다. 이윽고 길을 건너 꿩 가족들은 낙엽을 신나게 뒤적이며 평온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길을 버티고 서있던 그 엄마 꿩의 사랑은 저에게 참 사랑을 많이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지만,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냥 길 한 가운데 멈추어 선 그 엄마를 어찌 하찮은 날짐승 한 마리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비록 새끼를 보호하려는 한 마리 까투리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저에게 전해진 엄마 꿩의 사랑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꿩 가족을 뒤로하면서 “나도 저렇게 고귀한 사랑을 할 기회가 있을까?”라는 의문표를 저의 가슴에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저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 파묻혀 그 고귀한 사랑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어머님의 고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담을 수 없는 어머님의 마음을 우린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너덜거리는 걸레처럼 찢겨질 대로 찢겨진 통고의 심장을 우린 눈물도 없이 그저 사랑이라 일컫습니다.
아들의 절규에 구멍이 뻥 뚫린 어미의 마음을 얄팍한 감상에 젖어 잠시 눈시울을 적시며 그것이 사랑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일상잡무 속에서 그 마음에 비수를 꽂는 짓거리를 행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갑남을녀가 된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깁니다.
돌아오길 원하시는 어머님의 절규에 이제 마음을 깨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고통이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음을 어머님의 성심을 바라보며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마음에 담긴 사랑과 고통을 이젠 우리 마음에도 담아야겠습니다. 고통을 밀어내면 사랑이 밀려나기 마련입니다.
어미 꿩이 그랬듯이 언젠가 새끼 꿩도 엄마처럼 그렇게 새끼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한 마리 어미 새가 저에게 전해준 그 메시지를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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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신부님]
<왜 우리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가?>
특별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1917년 파티마의 성모 발현 후 더욱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파티마 성모 발현 25주년인 1942년에 전세계를 성모 성심께 봉헌하였고, 이 축일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1969년 로마 전례력이 개정됨으로써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한 등급 낮추어졌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인 토요일에 성모 성심을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성모 성심, 곧 성모님의 마음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분의 모성적인 사랑을 공경하고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온전히 결합된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어머니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영적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비체의 머리이며 만민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원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온전히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십니다.
따라서 성모의 모성적 사랑은 성모의 덕행과 내적 생활, 하느님께 받은 갖가지 은총과 연결됩니다. 심장으로 표현되는 성모 성심은 하느님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음이므로 그에 합당한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더 우리의 삶이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응답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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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당하는 고통>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정녕 복되십니다.”
성모님께 있어서는 모든 이가 부러워할 정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성경의 어느 곳을 보아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복되다’라고 딱히 드러낼 만한 구석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 생애 막바지에 가서는 심지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 곁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성모님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정녕 복되십니다. 고통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함께’하시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제목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모님의 버금가는(함께하는) 고통”(Passion of Christ and Compassion of Mary)으로 달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낳을 때부터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죽을 때까지 늘 함께하셨기에,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 안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복되다’라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며, 성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웠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학교’에서 어떻게 ‘주님과 함께’할 것인지를 배울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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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6.28.토.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따르는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의
마음속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을 품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십니다.
소중한
말씀을
지켜내고
간직할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이렇듯
성모 성심은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마음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과 일치로
드러납니다.
성모님의
깨끗하신
마음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하십니다.
성모 성심은
말씀을
낳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모두
내어 드립니다.
성모님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중심은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을
삶으로
사셨습니다.
성모 성심은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이끄시는
길잡이가 되십니다.
구원을 향한
우리 여정의
동반자이시며
중재자가 되십니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뜻을
간직한
사랑입니다.
성모 성심이여
저희 마음을
주님께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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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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