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외
박성준
건물 외벽에다 벽걸이 시계를 수십 개나 걸어놓은 철물점 남자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모르고
그 또한 나를 몰라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사이였으니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나, 말을 잃은 사이
그가 모자를 벗자 그의 휑한 민머리가 드러나고, 그 위로 수리할 수도꼭지를 겨드랑이 사이 끼고 집에 들어온 적도 있었던 것 같은 낯빛이었던가, 저 햇빛은
어느 날인가 철문점 한길에 욕실 의자 같은 것에 쪼그려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그를 가만히 훔쳐본 적이 있었지만, 끝내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뻐꾸기가 울어서 슬픈 날보다 슬퍼서 우는 뻐꾸기를 기억하는 날들이 많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인간이 우는 이유가 꼭 슬퍼서라고 말하고 싶은지, 건물 외벽에 멈춘 시계를 보면서 끄덕이게 되었다.
모:든시 2018년 봄호
정체와 불명
달걀을 삶는 동안 소식을 들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가끔씩 본분을 잊고 튀어나오는 기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그늘이 육체를 다녀갔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소금을 꼬집어
누군가의 끓는점을 잠시 가라앉힌다
명치끝에 걸린 슬픔을 다 누르려면 얼마나 많은
소금에 간섭당해야 하나
고백이란 그런 것이다
그에게도 한때 격정을 벗 삼아 몇 통의 아름다운 유언을 적었던 필체가 있었다
간판에 손글씨를 쓰러 다니던 바퀴도 있었고
달에 귀가 돋을 때까지 얼룩을 떨어뜨리며 믿던
싱싱한 골목도 있었을 것이다
다 끓기 전에 꺼내도 됩니까, 긍정하지 않아도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몸의 기울기를 갖으리라
설탕을 문질러 손톱 사이 검정들을 지우는 저녁이면
이불 속은 늘 춥고 어둡다는 걱정, 기다려라
소식보다 기적은 대부분 무슨 이야기부터 감시해야할 확신으로 오고 있으니
달걀을 삶는 동안 그가 다녀갔을 것이다
끓는 물속에도 구름이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미세하게 깨진 달걀에서 흰 자가 풀려나온 것을 보는, 그런 동안에도
문학공간 2019- 2월호
주어온 눈 코 입
신은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병을 흔든다 어디가 아파? 타인에게 약값을 빌려주자
오른손을 올리면 기준
양손을 다 올리면 벌 받는 사람
이것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신은 다 용서할 것이다
제가 열었던 나무의 문을 다시 봉인하고 썩는 나뭇잎처럼 절망을 통과해온 동력도, 노력한 대로 겸손해진 소원도, 그랬구나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가 않다 간절하지 않다 책을 덮는다 마저 다 읽지 않고 덮은 어느 가을에 상한 빵이 식탁에 올려져있다
이제 떨림 없는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
저희에게 증오할 직업을 주시고 흠 있는 타인에게 간섭할 용기를 주시고 쾅쾅 흘러내릴 뺨을 주시고, 무너지기로 작정한 어떤 날에도 무너지지 않아야할 천박함을 주시고, 그리 견딜만한 감동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고 살고 싶나이다
사나흘 간격으로 앓던 창은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 노력만큼이나 메스껍고, 오늘 배운 문자로 채워야할 노트가 너무 넓다는 사실에, 신은 피부병에 걸린 살을 긁는다 심지어 노트는 비에 다 젖어 울어 있다
오른손을 올리면 질문 있는 사람
양손을 다 올리면 기도하는 사람
마음이 아파? 병을 흔들며,
없는 눈물 대신 자꾸 눈가를 긁었다
2019 기형도 헌정시집 수록작
좋은 이름을 골라 중얼거리고 싶은
존경해온 그에게 뺨을 맞았다
(많이 먹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순 없지만
이것은 그의 진심이다
술자리 말미에서는 호사스러운 지인으로부터 궁금하지 않은 옛 애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분위기 탓이다)
쏟아지는 저항심을 누르려고 오른쪽 볼을 부볐지만 뺨을 맞은 곳은 왼쪽이라는 슬픔
잘못 선택된 감정
거기 있거나
거기에 있지 않는, 그래서
그 꽃을 버리기로 작심했다 꽃을 어떻게 버려야하나 어디에다 버려야하나 쓰레기는 관급봉투에 버리는 것으로 배웠지만, 일단 물부터 마셔야했다 (무릎을 갉아먹고 싶어) 마음에서 이미 쓰레기라고 판단한 꽃이라면 종량제 봉투를 선택해보자 여기서 그 꽃이 드라이플라워라면 굳이 음식물쓰레기봉투를 택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음식물쓰레기로 취급되는 것들의 목록을 적는다
이마를 맞으면서 뽑은 앞니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비닐 벽을 타고 흐르는 생크림 케이크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어두운 길에서 나를 선택한 고양이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나는 폭력에 노출되었어요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공원 화장실에서 낳은 아기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생일 축축합니다 생일 축축합니다 사랑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랑합니다 고객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모든 노력은 터무니없이 실패)
치욕을 슬픔으로 가장한 얼굴이 돼서, 검지에 봉투 매듭을 걸고 복도를 걷는다 대다수의 경우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단 두 가지라는 게 진실
내가 모르게 된 많은 사람들은 차곡차곡 행복해지고 있다는 생각
다행히 오늘은 꽃을 버릴 수 있는
목요일
내가 겪은 실패가
여전히 어디선가 고통 받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시현실 2018년 가을호
프로필
박성준 -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 사회 시, 2013년 경향신문 평론 등단. 시집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가 있다. 2015년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