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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그리고 텃밭
전 호 준
봄 산골(春山:의성군義城郡 춘산면春山面) 촌놈이 명실공히 대구 직할 시민이 된 지 만 4년이 되었다.퇴직하고도 몇 년간 대구와 촌집을 오가며 과수 농사를 지었다. 4년 전 집과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주민등록을 가족이 있는 대구로 옮겼다.
내가 살던 촌집은 담을 사이에 두고 30여 평의 텃밭이 있었다. 집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건너편엔 산봉우리가 바로 가슴에 안기듯 다가오는 전형적인 산촌 전원주택이다. 강을 경계한 제방 둑에 호박 넝쿨을 올리고 집 주위에는 장미를 비롯한 각종 정원수와 꽃을 심었다.
비록 넓지 않은 마당을 활용해 아내는 구석구석 머위며 달래, 참나물과 돌나물 등을 가꾸었다. 대문 옆에는 제법 큰 가죽나무가 수문장처럼 서서 죽 나물과 그늘을 제공해 준다. 담 넘어 텃밭에는 고추며 상추 들깨 파 각종 채소가 키 재기 하듯 자라고 고구마며 감자 옥수수 등 부족하고 궁할 것이 없는 식료품의 보고였다.
집은 보잘것없는 허름한 슬레이트 삼간이지만 흙벽돌로 지은 집이라 나름 황토집인 셈이다. 사실 결혼한 이후 어렵사리 처음 구입한 내 집이었다.
읍면 단위 농촌에는 면 소재지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집마다 크고 작은 텃밭이 살림집 구역 안에 있다. 텃밭의 고유 명칭은 집터에 딸린 밭이나 근처에 있는 밭을 말한다.
옛날 오일장에서 시장을 봐야 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텃밭은 시장과 냉장고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더욱이 수시로 작물을 돌보며 가꿀 수 있고 시시때때로 필요한 만큼의 갖은 식재료를 즉시 얻을 수 있으니 그 편의성과 신선함이 우리 밥상에 없어서는 안 될 보배 같은 땅이 텃밭이다.
그동안 대구와 촌집을 오가며 조달하여 먹던 식료품 보급이 끊어졌다. 하기야 몇 미터만 나가면 시장이고 대형 마트라 구입해 먹기가 손쉽지만, 유기농이니 참살이니 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내 손으로 직접 지은 채소같이 신선도 나 신뢰성이 부족하다. 사 먹는 것도 괜히 신경이 쓰일 때가 있다. 자급자족하던 습관 때문인지 아내는 가끔 비싸다니, 제맛이 아니라며 불평불만이다. 아마도 한평생 손수 가꾸어 먹든 재미와 흙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몸에 밴 추억 같은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 같다.
대구에 살면서 친구들이 시 외곽지나 근교에 텃밭을 분양받아 정서 생활을 겸한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자랑삼아 말한다. 궁여지책이지 이는 텃밭이 아니다. 텃밭은 밥을 지으며 짬을 내어 즉시 채취 조리할 수 있는 집 가까이 접해있는 밭이 진정한 텃밭이다.
아무튼, 아내는 무언가 허전하고 답답해 손이 근질근질 한 모양새다. 시 외곽에 작은 밭을 한필 구입할까? 텃밭 분양을 알아볼까? 하던 참에 단독주택인 집 옥상에 이동식 텃밭을 만들자는 아내의 제의다. 다년간 농사일에 주눅이 든 나로선 억지춘향이로 동의를 하고 옥상텃밭을 일구기로 했다.
커다란 화분을 몇 개 사고 꽃을 기르다 내버려둔 화분을 정리했다. 촌에 나가 화분에 채울 흙을 파오고 거름 비료도 몇 포 구입 흙과 잘 섞어 삼십여 개에 화분으로 제법 아담한 이동식 간이 텃밭을 일구었다.
매운 고추 두어 포기, 찜 고추며 풋고추용 몇 포기, 상추 방울토마토 깻잎용 들깨 오이 파 등, 끼니때마다 요긴한 작물을 심고 보니, 제법 어울리는 나름의 예쁜 정원 같은 텃밭을 일구어 가꾼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애호박 심을 궁리를 하다가 마당 한구석, 줄 장미 나무 아래 화분을 놓고 호박 두 포기를 심었다. 장미 넝쿨에 호박 넝쿨을 올리니, 안성맞춤이다.
어느 날 아침에 나가니 호박꽃이 환한 얼굴로 인사한다. 암수 꽃이 수줍은 듯 떨어져 피었다. 기대가 곧 실망으로 돌아왔다. 탁구공 크기의 호박이 빠져버렸다. 벌 나비 보기 드문 도심에 수분(受粉)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엔 인공 수분을 해야지" 꽃이 피기를 기다려 면봉으로 수꽃 가루를 묻혀 암술에 강제 미투를 실시했다. 성공이었다.
어느새 밥공기 크기의 청보석 같은 매끈한 애호박이 손길을 기다린다. 애호박전에 아내와 함께 마셔보는 막걸리 한 잔이 색다른 맛과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아침저녁 오르내리며 돌보고 수확하는 재미는 텃밭을 넘어 정원을 가꾸며 산책하는 기분이다.
삼 년째 그대로 작물을 심었더니 지난해는 작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객토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촌에 나가 산비탈 부엽토를 조금 파와 밭갈이하던 중 커다란 화분에서 엄지 마한 굼벵이가 한 움큼이나 나온다.
굼벵이가 산다는 것은 흙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도 굼벵이가 있으면 작물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 어디 낳을 곳이 없어 여기다가 알을 낳았을까? 집 뒤 말뫼공원에 울부짖던 매미가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어버린 인간들의 횡포에 궁여지책 산란한 곳이 손바닥 마한 우리 집 텃밭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흙은 모든 생명체의 모체(母體)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잡아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어쩌라! 굼벵이와 생존경쟁을 하는 것 같다. 인간들의 횡포와 욕심은 어디까지일까?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속흙과 겉흙을 뒤집고 갖고 온 부엽토를 섞어 작물 십여 가지를 심었다. 제법 아담하고 보기가 좋다. 세 식구에 이만한 텃밭이면 올여름 반찬 걱정은 덜 것 같다. 팔을 걷어붙이고 고추를 심다가 허리를 펴며 활짝 웃는 호미든 아내의 모습에 흙냄새가 물씬 배어난다. 2018. 5. 3
첫댓글 텃밭은 '밥을 지으며 짬을 내어 즉시 채취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집 가까이 접해 있는 밭'이라는 개념 정의가 적절한것 같습니다. 냉장고도 없던 옛날에는 신선한 채소가 필요할 때 즉시 먹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지요. 그리고 텃밭은 그 행위를 통해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먹는다는 것 이상으로 노동의 즐거움이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잘읽었습니다.
텃밭은 집과 가까워야 합니다. 농작물도 주인이 잘 돌봐 주어야 무럭무럭 자랍니다. 일정한 농토가 없다면 옥상에 흙을 날라 밭을 만들거나 화분에 채소 등을 심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됩니다. 이러한 단독주택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으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장원하는 바가 텃밭이 딸려있는 집에 사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반대로 못하고 있지만~ 좋은 텃밭 확보하셨네요
건강한 먹거리와 함께 키우는 재미도 함께 하시는 모습 그려집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텃밭을 가꾸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잘 보내시는 모습.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옥상 텃밭을 가꾸시면서도 끼니에 필요한 웬만한 채소들은 모두 해결이 될만큼 다양한 채소들을 가꾸시네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옥상텃밭마저 부럽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의성군 춘산면 효선초등학교. 제가 초임 발령을 받은 학교입니다. 넓은 들판에 자라고 있는 것이 마늘인지 양파인지도 구별을 못해 교사가 아이들에게 거꾸로(?) 물어보며 시골생활을 시작했지요. 40년 전의 추억을 떠올려주는 정겨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시장과 냉장고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텃밭을 옥상에다 설치하여 면봉 미투로 수정까지 시키시는 전선생님의 도시농업 기법이 대단히 훌륭하게 생각됩니다. 시골 흙냄가 물씬 풍기는 구수한 텃밭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조그만 텃밭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투자 보다 생산은 적지만, 주일마다 저의 노동력으로 채소를 수확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부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귀농, 귀촌이 흔해지는 시절에 선생님은 과감하게 도시로 오셨고 도시에서도 그 특유의 부지런하심과 농사기술로 옥상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아주 가까이서 키우고 계시네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부럽습니다. 튼실한 열매 맺길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친정집이 그립습니다. 과수원 속에 우리집은 집 주변이 거의 다 우리 땅이라 집을 둘러싼 텃밭이였지요.
지금은 조카의 명의로 된 친정댁 땅은 그대로지만 사람이 살지않는 집은 십년도 안돼 사그러지는 흉물이 되어 군청에서 철거 시켰다나요 저 어릴때 텃밭이 아롱아롱 피어납니다.
흙, 그리고 텃밭의 제목이 글의 내용을 말해줍니다. 고향에서 과수원을 경영하시다 정리하시고, 도시생활의 아쉬움을 단독주택 옥상에 텃밭을 조성하여 각종 채소를 제배하는 소회를 글로 잘 표현하셨습니다. 글 속에 부부의 다정한 정이 샘솟고 있어 행복한 노후가 엿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옥상텃밭. 그것도 재미있고 실용적인 발상이네요. 흙이 있으면 텃밭이 되니 멀리까지 갈 필요없이 아침 저녁으로 흙냄새 맡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겠습니다. 텃밭 잘 가꾸며 그 보람 오래 이어가기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