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86 - 낭가파르바트에 혼자 오르다게르만족의 한을 푼 헤르만 불(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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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1. 04:58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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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낭가파르바트에 혼자 오르다
게르만족의 한을 푼 헤르만 불(1953년)
요약 낭가파르바트는 8,126m의 높이에 굶주림과 추위, 눈사태 등이 탐험대 여럿을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독일은 숙명인 듯 계속 도전했다. 1953년에 제6차 탐험대를 보내 헤르만 불이 혼자 공격에 나섰다. 16시간 30분 만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 헤르만 불은 눈 속에 피켈을 꽂고 독일인의 끈질김을 보여주었다.
정복자의 두 얼굴
왼쪽은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에 오르기 전, 오른쪽은 정상에 올라 갔다 온 뒤 모습. 겨우 40시간만에 스물아홉 청년이 여든살 먹은 노인처럼 변했다.
히말라야의 8,000m 봉우리들은 모두 네팔 히말라야(9개)와 카라코람 히말라야(4개) 지방에 있으나, 단 하나 낭가파르바트만이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 펀잡 히말라야에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의 높이는 8,126m로 아홉 번째이지만 얽힌 사연으로 따진다면 단연 으뜸이다. 1895년 첫 도전으로부터 1953년 첫 등정까지 58년 동안 젊은 목숨 서른 하나를 앗아간 비극의 산이 바로 낭가파르바트이다.
낭가파르바트에 처음 도전한 사람은 영국 사람 앨버트 머메리이다. 인간이 8,000m 봉우리에 도전한 최초의 일로 1895년이었다. 친구와 함께 둘이 도전한 머메리는 1895년 8월 24일 디아마 콜(6,200m) 얼음 절벽을 넘다가 사라졌다. 히말라야에 바친 첫 희생이었다.
1932년 두 번째로 독일인 빌리 메르클이 이끄는 독일···미국 합동등산대가 도전했다. 그들은 6월 24일부터 37일간 라키오트 빙하 골짜기를 300km 올라가 6,600m 높이에 제6 캠프를 세웠다. 7월 29일 대원 세 사람은 6,950m 높이에 이르자 제7 캠프를 친 뒤 다음날부터 정상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한 달이나 계속되자 이들은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선(死線)을 넘어온 불사조
독일이 두 번째 도전했을 때 1주일 동안 굶주림과 싸우며 제8 캠프까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셰르파 앙체링을 동료들이 부축하고 있다.
1934년 5월 2일 메르클의 독일대는 다시 낭가파르바트에 도전했다. 7월 6일 대장을 선두로 대원 5명과 셰르파 11명이 7,480m 지점에 제8 캠프를 세웠다. 정상까지는 4~5시간 거리, 누구도 내일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쳤다. 후퇴하면서 그들은 무려 아홉 사람이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 갔다.
1937년, 독일은 기어코 낭가파르바트를 정복하려고 3차 등반대를 보냈다. 대장은 칼 빈, 대원은 독일 최정예 등산가 6명과 셰르파 9명. 이들은 6월 11일 제4 캠프에 모두 모였다. 지원팀이 제5 캠프를 세우고 돌아왔으므로 이번에야말로 가슴의 응어리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고의 비극이 일어난 것은 6월 15일 오전 0시 20분이었다. 라키오트 봉으로부터 무너져 내린 눈사태가 제4 캠프를 덮쳐 등반대원 7명과 셰르파 9명 모두를 삽시간에 묻어 버렸다.
낭가파르바트는 독일에게는 '운명의 산'인가? 독일인들은 숙명인 듯 낭가파르바트에 계속 도전했다. 그러나 1938년의 4차 원정, 1939년의 5차 원정도 실패로 끝났다.
1953년,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물 무렵 독일은 제6차 탐험대를 보냈다. 대장은 2차 원정 때 기적처럼 살아난 페터 아센브렌너. 대원은 독일인 6명, 오스트리아인 4명, 5월 24일 베이스 캠프를 차린 이들은 7월 2일 제5 캠프를 세웠다.
7월 3일 오전 2시 30분. 대원 네 사람 가우데 헤르만 불이 혼자 공격에 나섰다. 30분쯤 지나 오토 켐프터가 식량을 가지고 그 뒤를 따랐지만 도중에 되돌아갔다. 앞서간 불은 식량 없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대장이 무전기로 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불은 뜻을 굽히지 않고 정상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오후 7시. 무려 16시간 30분 만에 불은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다. 그는 눈속에 피켈을 꽂고, 티롤산악회 깃발과 파키스탄 국기를 매달고 사진을 찍었다. 독일인의 끈질긴 도전이 끝내 승리를 이끌어 낸 순간이었다.
불이 산을 내려오는 길에 해가 졌다. 그는 8,000km 높이에서 벼랑에 기대어 선 채 밤을 지샜다. 산소가 모자라 숨이 가쁜 데다 영하 30도 추위가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그 속에서 불은 꺼질 듯 꺼질 듯한 생명의 불씨를 감싸며 버티어 냈다.
'···슬리핑백도 없었지만 누울 자리도 없었다. 몸을 바위에 묶어 안전하게 할 밧줄도 없었다. 나는 벼랑에 기대어 서서 그냥 잠들었다.···문득 잠이 깨어 둘러보니 내 몸이 벼랑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발 밑은 가마득한 낭떠러지였다.
···내 오른손은 여전히 바위를 붙잡고, 왼손은 스키 스틱을 꼭 쥐고 있었다. 구두는 꽁꽁 얼었고, 다리는 뻣뻣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아침의 첫 햇살이 내 몸에 닿자 굳었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몸이 다 풀린 것 같자 나는 천천히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줄곧 옆에 누가 있다고 느꼈다. 어이 내 장갑 못봤어 하고 물었더니 자네가 잃어 버렸지 않아 하는 소리가 났다. 내려가는 동안 그 친구는 한시도 내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아주 친해졌다.
그가 없었더라면 내가 과연 혼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까? 멀리 검은 점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인기척이 났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날이 어두워졌다. 나는 계속 비틀거리며 무겁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나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그림자가 가고 있었다.···'
불은 용케도 버텨 냈다. 뇌에 산소가 모자라서 생기는 환각과 환청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 넘나들면서 그가 제5 캠프에 닿은 때는 그곳을 떠난 지 40시간이 지나서였다. 스물아홉 청년의 얼굴은 그동안 노인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온갖 고난과 영광을 한 뼘 넓이에 담은 여든 살 노인의 얼굴로. 뒷날 메스너는 이렇게 말했다.
"헤르만 불이 살아 돌아온 것은, 그가 정상을 밟았기 때문이다. 만일 눈앞에 두고도 정상을 밟지 못했다면, 그는 절망감에 빠져 그처럼 초인적인 힘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88년 / 최태식 등정(미확인) * 1992년 / 김주현 · 박희택 · 송재득 초등 [네이버 지식백과] 낭가파르바트에 혼자 오르다 - 게르만족의 한을 푼 헤르만 불(1953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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