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58
3월10일[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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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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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kudIBAmOU
[서울대교구 김광두 고스마(전산정보실 부실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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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웃픈 현실 앞에서...>
사순시기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悔改)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난 시절 지은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입니다.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가슴도 치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가슴을 치는 행위도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죄나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도 회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다른 측면의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라는 표현 안에는 ‘안다’ ‘인식한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삶에 여유가 없어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미처 몰랐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 역시 회개입니다.
칼라너 신부님의 표현에 따르면 회개란 우리가 지니고있는 지극히 협소한 인식 지평을 더 넓게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더 깊어지고 더 충만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중요한 노력이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시는 주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는 주님, 내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시는 주님, 나의 작은 신음소리 조차 귀기울이시는 주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으면 다음 작업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 앞에 나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흙이요 먼지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죄와 한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지닌 존재입니다. 왜? 우리 각자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느님을 잘 알게 되면,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란 존재는 그 어떤 다른 곳이 아닌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지상 과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회개의 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측면의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좋은 마음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고, 목 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음료 한 잔 건넸는데, 그것을 받아 먹고 마신 사람들이 예수님이시랍니다. 우리는 습관처런 병자 방문을 가고 교도소 면회를 갔는데. 거기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이 또 다른 예수님이시랍니다.
회개와 관련해서 요즘 시국 돌아가는 것을 묵상해보니, 정말이지 큰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고 김치찌개를 맛나게 드시고 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입니다. 그는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 자신을 모르는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그런 죄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최악의 생활고와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직무상 어쩔 수 없이 참담한 사태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가슴을 찢고 있는데, 무슨 세계 챔피언 먹은 것도 아닌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이지 참담하고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와 그 가족, 주변에 죽치고 있는 하이에나 무리의 회개와 새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슬픈 저녁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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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6BsAIjh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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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없다는 헛된 희망을 주는 이들에게>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짐승의 사랑의 수준이 있고, 인간, 그리고 성인들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도 구제받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이와 달리 엄격한 심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드린 것이며,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하느님께 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내가 먼저 구원받아 그 사랑의 기쁨과 능력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는 매우 탐욕스럽고 냉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과 직원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느 성탄 전날 밤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들을 만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절대 다른 이를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면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야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고 아기가 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의 눈높이에서 아이를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만약 아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그 물속에는 괴물들이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게 사랑일까요? 부모는 또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게 함께 죽는 것이라고 믿고 뛰어들어 죽으면 그 부모를 통해 새로 태어날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생명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생명에 대한 경시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낚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깊이에 있는 물고기들은 낚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두운 심해로 들어가서 눈을 잃은 물고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 물고기를 낚겠다고 그 압력 높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시입니다.
반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어릴 적부터 가진 열등감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증오와 야망으로 자신을 채웠습니다. 작은 악들이 쌓여 마침내 그는 유대인을 향한 끔찍한 학살과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최후의 순간에도 회개하지 않은 채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우연히 절대 반지를 얻은 이후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 전체를 그 반지에 투자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반지를 얻으려는 집착만이 남아 삶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저에게 돈을 꾸고 갚지 못해 몇 년간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집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더는 희망을 할 수 없는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다른 죄는 용서받아도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의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를 먼저 착용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먼저 안전하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옥이 존재하고 심판이 존재합니다. 사랑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모기나 기생충은 사랑을 배울 수 없는 수준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에 희망을 거는 것은 나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경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생명은 받아서 주는 것이라 그 받은 사랑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하느님이 계셔야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느님 생명까지 경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심판이 없는 게 사랑이 없는 것이지, 사랑이 있다면 심판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제물이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판, 그리고 적대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에 대한 무서운 예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히브 10,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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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아침에 달걀, 우유, 떡, 야채를 먹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무엇을 먹을지 선택합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달라집니다.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몸이 활기차고 힘이 납니다. 오트밀, 그리스식 요구르트, 달걀, 통곡물로 만든 빵과 같은 음식들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하루를 활기차게 살아가게 도와줍니다. 반면, 도넛이나 설탕이 많은 시리얼, 패스트 푸드 같은 음식들은 순간적으로는 달고 맛있지만, 금방 피곤해지고 건강을 해칩니다.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가난한 이에게 먹을 걸 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볼 때, 우리의 영혼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약해지고 병들어갑니다. 마치 아침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건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를 양과 염소로 나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를 입힌 이들입니다. 반면, 염소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아침에 꼭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 말씀, 용서입니다. 먼저, 기도는 우리를 하루의 시작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에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몸이 힘을 얻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영혼도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입는 갑옷과 같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에 임하는 신앙인에게 무기와 같습니다. 기도는 먼 길 떠나는 자동차에 필요한 기름과 같습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마음을 다스려 줍니다. 하루를 말씀과 함께 시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작은 구절이라도 읽고 묵상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영혼이 더욱 튼튼해질 것입니다. 말씀은 신호등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미움과 분노를 품으면 그날 하루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실천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하루가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 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선행 하나하나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마치 매일 아침 건강한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몸을 위해 건강한 아침을 챙겨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용서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건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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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 준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가장 작은 이들’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의인이 되려면,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작은 이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이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6절 참조)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10절 참조)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참조) 바로 이 작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어린이처럼 스스로 작아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작은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의인들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업신여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해서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머물 곳이 없는 이들은 죄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과 함께하도록,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서로 도우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이들’이 되어 ‘작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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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31-46: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시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주며, 그분을 닮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모시고 사랑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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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1-46)
1) 이 말씀의 핵심 주제는 ‘사랑 실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작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다가는, ‘불우이웃 돕기’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그런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온 삶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온 삶으로’ 실행해야 할 ‘아버지의 뜻’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고(루카 10,25-28), 그 율법학자가 다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29-37)
2) 신앙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랑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하고, ‘나보다 작은 이들’도 사랑해야 하고,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잘 모르는 사람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도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들도, 식구들도, 친척들도 사랑해야 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랑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비방하면서 적대시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사탄의 종교라고 비난하는 자들은? 그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3) ‘하느님 사랑’을 ‘신앙’으로, ‘이웃 사랑’을 ‘생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있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쭉정이’이고, 쭉정이 같은 신앙은 신앙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마태 3,12)
반대로 사랑은 있는데 신앙이 없다면?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될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4) ‘사랑 실천’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이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입니다.
5)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의 44절에 있는,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는, 뜻으로는 “주님, 주님께서 언제”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작은 이’가 되셨느냐고 묻는 말이고, 그렇게 되셨다는 것을 자기들이 알았다면 곧바로 가서 도와드렸을 텐데, 몰라서 못했다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이 곧 나다.”입니다. 사실 ‘작은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6-27)
‘작은 이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나’입니다.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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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장 작은이와 만나다>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가장 작은이와 만나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가장 작은이에게
눈길 건네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
눈길 건네는 사람은
사람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사람을 보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스스로를 보는 사람은
스스로인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이에게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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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멈추어 익명의 그들에게로>
나의 님은 어디에 계실까? 지금이 바로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고 힘 있어 보이는 것들을 좇는 발길을 멈출 때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하느님의 ‘거룩함’에서 오고 그것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도 요구되는 ‘성덕의 율법’이 나온다. 이는 거룩한 관계나 종교의식에 관한 규정들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도덕적, 규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 중심 주제는 공동체에 중요한 형제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그 밑바탕에는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칙이 자리하고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역사의 피안(彼岸)에 존재하시는 신비 자체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거룩함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보여주시며, 인간을 자아와 물질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주신다.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해주는 길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기 19장 18절)이 거룩함으로 가는 지름길이요 님 만남의 장(場)이다.
‘도둑질하거나 속이거나 사기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레위기 19장 11절-12절) 또한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레위기 19장 13절), 귀먹은 이에게 악담하거나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레위기 19장 14절) 재판할 때는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되며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레위기 19장 15절) 중상하러 돌아다니거나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되며,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기 19장 16-17절) 형제자매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고,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9장 18절).
오늘 복음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임을 말해준다. “가장 작은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의미한다. 마태오 교회에서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겸손한 신자들의 딱한 사정은 분명히 문제시 되었던 것 같다.
마태오는 지식인과 비해서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존엄성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마태오는 심판의 보편성과 나라의 보편성을 연결시키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려면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가장 작은 이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공생활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 하신 말씀처럼 자신 전부를 내놓으시는 사랑의 생활이었다.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나 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동등한 인격체로써 대하셨다. 그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충만히 베풀어주시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셨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바로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만이 우리를 진정한 삶의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듯이, 우리도 먼저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전 존재를 봉헌하고 그분 뜻대로 생각하고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의 심장으로 더불어 연민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언제나 한없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기에 우리 삶은 진정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과 굶주린 이들, 소외된 이들,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나 홀로 기뻐할 때가 아니다.
이 사순절에 보잘것 없는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회상하자. 나만을 보고 나의 이익과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싶은 것만을 추구하였던 발걸음을 멈추자.
멈추어 내 밖에 '이름 모르는 너', '상관없는 그'로 지나쳤던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참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가장 작은 이를’ 위해 자신과 재물과 시간과 마음을 내놓고, 내 자신처럼 사랑해보자! 바로 그곳이 거룩한 성전(聖殿)이요, 예수님의 거룩한 몸이며, 하느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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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마태오 복음 25장 31절-46절 참조)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대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대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최후심판 때이다.
오늘 복음에서 몇 가지를 묵상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즉 나의 생명, 시간, 능력, 이웃 등은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장 28절)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맡긴 모든 것을 잘 관리하여 번성하게 만드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는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하느님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만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가장 작은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뿐이다.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이 하느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고 그 명령을 따라 내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오늘 나의 사명이요 복을 받는 일이다.
둘째, 하느님이 최후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한 동사는 현재이지만 심판을 내리시는 내용은 과거 동사를 사용하셨다. 즉 심판하실 때에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현재 동사이고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라고 그가 한 행동은 모두 과거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니까 최후심판은 최후 심판 때에 가서 즉석으로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가 살았던 행적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후 심판은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재 내가 사용하는 시간을 통해서 이루워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매 순간은 곧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야 할 시간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오늘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미래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시는 것이다.
내가 받아야할 하느님의 축복은 미래에 받을 것이 아니라 오늘 받아야 한다. 하느님은 오늘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마지막 날에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지막 날에는 당신이 나에게 주셨던 그 복을 거두워 드리실 뿐이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가서 복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린 것이다.
오늘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을 잘 받아들여서 축복 받는 삶을 살았으면 마지막 날에 가서 축복을 받을 것이오, 오늘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저주받는 삶을 살면 마지막 날에 가서 저주받게 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삶은 어떤 삶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어떤 삶인가? 하느님이 축복으로 나에게 주신 삶을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삶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내가 복을 받는 삶이란 가장 작은 이들이 굶주려 있을 때에 먹을 것을 주는 것이요,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이요,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요,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요,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을 찾아주는 것이다.
저주 받는 삶은 어떤 삶인가? 오늘 가장 작은 형제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이방인을 따듯이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이요, 병든 이나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는 것이다. 즉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이 저주 받은 삶이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을 받는 삶이다.
넷째, 내가 받은 것을 나누어 주어야할 "가장 작은 이들"이란 누구인가? 가장 작은 이들이란 내가 하느님 한테 받은 축복을 나누어 줄 대상이다. 그 대상이 부자도 아니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니다.
가장 작은 이란 내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그 어떤 댓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아무런 조건없이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나누어 주는 것을 겨우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난한 사람이다.
"가장 작은 이들"란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나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지금 현재 나의 상황이 어떻든 나는 "가장 작은 이들"보다는 나은 형편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위에 그 어떤 사람도 나의 것을 나누어 주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이들이 다 내가 나누어 주어야할 대상들이다.
세네카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요 그것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번성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축복해주시고 그 축복으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이 바로 자살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심는 것을 거둔다. 심지 않고는 거둘 수가 없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는 법이다.
아버지께 축복을 받는 사람은 "세상 창조 때부터 나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요, 저주 받는 사람은 "나에게서 더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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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생겼습니다. 본당에 가면 여름 캠프를 함께 해야 하고, 따라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해야 할 텐데 저 자신이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걱정이 되었고, 나름의 생각 끝에 도서관에 가서 ‘수영 교본’을 빌려서 읽었습니다. 방학 전에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름 캠프에 가서 멋지게 수영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수영은 물에 들어가야지만 배울 수 있으니까요.
종종 ‘기도할 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기도할 줄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 관련 책을 계속 읽으면 될까요? 기도에 관한 강의나 피정에 참석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며 기도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대화도 만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는 정의를 기억하면서, 사람과 대화하듯 하느님과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많이 읽고, 교리 지식에 대해 박식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수영을 잘하기 위해 책만 읽고 있고,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성경과 교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또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에 다가선 것을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로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 배고픈 이, 목마른 이, 병든 이, 억압받는 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시지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2.42)
이웃을 향한 사랑이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의인으로 인정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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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순절을 시작한 첫째 주 월요일에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심판의 모습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오른쪽에는 양들을, 왼쪽에는 염소들을 서게 할 것입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양과 염소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요?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오늘 주님은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누구일까요? 우리 사회 안에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있음에도 드러나지 않아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이들이고, 노약자이며, 몸이 불편한 모든 사람입니다.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작은 이들에게 ‘나에게 해준 것처럼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뿐만이 아닌 그들의 현실에 맞는 무언가를 해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제의 꿈을 키우는 이들에게 매년 쌀을 보냅니다. 나라는 달라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러보세요. 우리 손이 필요한 곳에 그 손을 펼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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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집
옷 가게
과일 가게
생선 가게
조명 가게
천 가게
하물며 반찬 가게......
거의 모든 상점을 가게라고 표현하는데....
밥을 파는 곳은 ‘밥 가게’라고 부르지 않는다.
밥집이라 부른다.
왜 그럴까?
밥은 집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밥은 가족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밥은 회복과 따스함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밥은 집에서 먹어야 일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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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25,40)
유럽과 중동에서의 전쟁과 강대국 미국이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자국 중심적 태도를 취하여 전세계는 커진 불확실성으로 혼돈스러워 합니다. 상호 존중과 인류애라는 기본 가치를 추구하던 국제 사회가 극단적 국익 중심적인 태도로 변하여 이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이 오직 자국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하여야 하는 불안한 국제시대와 동시에 국내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의 혼돈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분명 약자와 약소국을 돌보는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주님의 사명을 추구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이나 자국의 이익을 찾아 나서지만, 그래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류를 형제자매로 보고 서로 사랑하라고 주님께서는 명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더 큰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만, 주님께서는 더 작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현실에서는 큰 이들을 우러러 보지만, 주님께서는 작은이들을 소중하게 보라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많이 가지는 것을 좋아하지만, 주님께서는 나누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땅에서는 가질수록 더 채우려고 애쓰지만, 주님께서는 적게 가지고 더 비우라고 하십니다. 땅에서는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주님께서는 가지지 못한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아도 버리지만, 주님의 나라는 모자라도 서로 나눕니다. 세상에서는 쌓아 두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나누고 비우는 행복을 갈망합니다. 이 땅에서는 세상을 썩히고 자신을 살리지만, 하늘나라는 자신을 썩혀서 세상을 살립니다.
이 땅에서는 차별을 통하여 상대적 우위를 즐기지만, 하늘나라는 다름을 통하여 다양성을 즐깁니다. 땅에서는 아주 작은 차별이라도 하여야 만족하지만, 하늘나라는 조금이라도 서로 달라야 만족합니다.
땅에서는 위로 올라가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땅에서는 높은 곳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낮은 곳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땅에서는 일등을 바라보지만 주님께서는 꼴찌를 바라보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작아지고, 차별받으며, 비우고, 낮은 곳으로 갈 때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혼자서도 잘사는 독립적인 염소는 이 땅에서 사랑을 받지만, 목자의 음성에 의존하여 우주의 공동체를 갈망하는 양떼는 하늘나라에서 사랑을 받습니다. 주님앞에 서기 전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할일은 오직 사랑 뿐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기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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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6)
이냐시오 성인이 집필한 <영신수련>을 보면 “두개의 깃발”이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고, 그 주변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깃발 아래에 모여 있으면 성공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지요. 그러나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의 최후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다 결국 단절되고 마는 것, 즉 ‘지옥’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은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이고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힘들고 괴로운 표정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깃발 아래에 모여 있으면 고통과 시련이 계속될 것만 같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마주할 미래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친밀해지다가 결국엔 완전히 일치되는 것, 즉 ‘천국’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할 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아는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건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마음이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의 순간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오면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온 의인들은 당신 오른쪽에, 주님의 뜻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망에 휩쓸리며 살아온 죄인들은 당신 왼쪽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 오른쪽에 서 있는 이들, 즉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 있고자 노력한 이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고, 그분 왼쪽에 서 있는 이들, 즉 사는 동안 ‘사탄의 깃발’ 아래에 서 있으려고 발버둥 친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이 때 왼편과 오른편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심판의 기준은 ‘죄’를 지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즉 나의 도움과 보살핌이 없으면 하루 하루 살기가 버거운 어려운 이웃들에게 평소에 사랑과 자비를 얼마나 열심히 실천했는가에 따라 내가 영원한 삶을 누릴 장소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님을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데, 그분은 어린이와 같이 작고 약한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실 정도로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과 특별하고 깊은 친교를 맺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시간을 내서 무료급식소에 봉사를 가면, 그곳에서 굶주림에 시달리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가출청소년 쉼터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면, 그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며 사랑과 관심을 갈망하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 가득한 마음을 안고 병실을 찾으면 그곳에서 매일 계속되는 십자가 고통에 너무 아파 신음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편견을 무릅쓰고 높은 담장을 넘어 교도소를 찾으면 그곳에서 깊은 후회와 절망으로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난 주님으로부터 환대받지 못하면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왔나?’하는 생각에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찾아가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그분 마음을 열면 나를 괴롭히는 고통과 시련, 슬픔과 아픔을 이겨낼 힘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돌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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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또르 데 스뻬키 수도회](Tor d'Specchi)의 창설자요, 로마의 주보성녀인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1384~1440)) 대축일입니다.
프란치스카 로마나 성녀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성인 돌아가신지 36년 후인 1384년에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의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두 살 때쯤에, 부모님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 4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역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고, 로마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성녀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직접 봉사하면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녀는 1425년 8월 15일, 45세 때, 현재의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노바 수도원]의 봉헌자로 응답하였고, 1433년 3월 25일에 함께 봉헌한 자매들과 함께 [또르 데 스뻬키](Tor d'Specchi) 수녀원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창설한 이 수녀원에 자신은 입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혼인한 한 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52세 때, 1436년,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자, 비로소 공동체에 입회하였습니다. 한참 늦은 ‘늦깎기 성소’인 거죠. 그리고 4년 후, 1440년 3월 9일 56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삶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는 가정과 신앙의 조화입니다. 성녀는 결혼한 여성으로서 가정을 충실히 돌보면서도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큰 모범이 됩니다.
<둘째>는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성녀는 전쟁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녀께서는 우리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셋째>는 사랑과 봉사의 실천입니다. 성녀는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직접 돌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르 벡에 있는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봉헌자 수녀원”의 사라 수녀님은 “오늘 올리베따노회 수도자들에게 주는 성녀 프란치스카의 메시지”를 세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예, 제가 원합니다.” 라는 순명, 곧 봉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봉헌되고 선사되고 바쳐지고 남김없이 자신을 쏟아 붓는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되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을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계획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더 좋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계획에 늘 열려 있으십시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하느님께 바치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은수 성소를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두 살 때, 부모님의 뜻에 따라, 불타오르는 자신의 갈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의 부르심에 “예, 제가 원합니다.” 하고 응답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성 알렉시오의 전구로 기적적인 치유를 얻게 됩니다. 기도 중 환시에서, 성 알렉시오가 그녀에게 “낫기를 원하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예,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낫기를 원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녀의 일생 전부는, 주변의 상황에 대해,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 하인들과 이웃들의 요청에 대해, 온통 “예” 라는 순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1425년 8월 15일, 45세 때, 현재의 프란치스카 로마나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노바 수도원]의 봉헌자로 “예” 하고 응답하게 됩니다. 그때 그녀는 [봉헌증서]를 통해, “저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저를 봉헌합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녀는 함께 봉헌한 자매들이 자신들이 봉헌을 공동체 생활로 확장시키고 싶어 했을 때도, “예” 라는 순명으로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녀는 [또르 데 스뻬키](Tor d'Specchi) 수녀원을 창설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입회한 자매들은 여전히 [산타 노바 수도원] 수도원의 봉헌자 신분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곧 봉헌자 수도공동체였던 것입니다.
1436년 5월 20일, 그녀는 남편이 타계하자, 비로소 공동체에 입회를 청원합니다. 그때 나이가 52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예, 원합니다.” 라고 하던 그 순명의 정신이 마침내 수도생활에 대한 응답으로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영성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전부’를 바치면 그분은 ‘전부’를 되돌려주십니다. 툭 트여 막힘이 없는 영성을 지니십시오. 하느님께 전부를 청하십시오. 마치 소화 데레사께서 그리 하였듯이 ‘전부’를 선택하십시오.”
<두 번째> 메시지는 “당신(타인)을 위하여” 라는 연민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합니다.
“연민으로 가득 찬 존재가 되십시오. 형제자매들의 좌절과 가난을 깊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십시오.”
<세 번째> 메시지는 “당신과 함께”라는 친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성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친교의 사람이 되십시오. 늘 타자에게 열려있고,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타자 중 으뜸 타자, 곧 ‘절대 타자’이신 하느님께 그러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한 몸”(Unum Corpus)을 몸으로 실현하십시오.” “사랑하기를 좋아하십시오. 여러분의 우정과 인간관계에 충실하십시오. 어머니가 되고 딸이 되고 누이가 되십시오.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형제가 되십시오.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가꾸어 나가십시오. 성찬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 성녀께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봉헌의 삶을 사십시오. 연민의 삶을 사십시오. 친교의 삶을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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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이웃을 남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로 보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내 몸을 사랑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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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 심판의 잣대>
-사랑-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참 오랜만에 사순 제1주일 미사중 영성체후 기도후 잠시 공지사항에 준하는 말씀 전한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미사에 참석했던 신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각인됐을 것입니다. 미사강론후에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강론 중 빠진 것이 있어 말씀드립니다.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미사전례입니다.”
사랑의 성체성사요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가 성체성사입니다. 바로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에 나오는 옛 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시편을 큰 소리로 노래하는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든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그 진리를 체험하기까지는 낯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느님만이 기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악마도 그 기도소리를 듣는다! 네가 비록 시편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악마는 의식한다. 그들은 듣고 떤다!”
악마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 떠는 것이 사랑의 찬미인 시편성무일도 노래랍니다. “악마여, 주님을 찬미하라!”하면 악마는 질색하여 달아난다 합니다. 사랑의 선택-훈련-습관을 위해 평생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영성훈련보다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만세칠창후 바치는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 ‘사랑의 전사’이다.”
교황님의 정치에 대한 견해에도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정치는 삶이요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능력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는 ‘애덕의 최고의 형태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가톨릭신자는 자신의 최고의 것을 봉헌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20년 이상 알고 지내는 모녀분이 오랜만에 함께 피정을 왔고, 그 어머니가 율리안나 딸에 대한 칭찬이 좋아 격려하고 싶어 율리안나를 불러 그대로 전했습니다.
“우리 율리안나는 크게 성숙했고 도량도 크게 넓어졌습니다. 저는 율리안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랑의 성숙이요 사랑의 도량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랑하라 연장되는 선물같은 날들입니다. 저역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쓰는 매일강론입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이자 의무요, 임종시에도 남는 아쉬움은 더 사랑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현대판 악령들린 사람들처럼 증오, 혐오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고 억울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인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이요 평생공부가 사랑입니다. ‘평화학’, ‘화해학’이란 학문도 있다는 데 ‘사랑학’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학 박사되기가 소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최후심판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종파와 국적, 인종과 남녀 차별없이 온인류에 적용되는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일반적 종교수행이나 관례나 관습이 아닌 실제적 사랑입니다.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몸의 현실에 직결된 구체적 실제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웃이 곤궁중에 있었을 때, 즉
“1.굶주렸을 때,
2.목말랐을 때,
3.나그네였을 때,
4.헐벗을 때,
5.병들었을 때,
6.감옥에 있었을 때"
도왔는가 묻습니다. 즉 6개의 구체적 항목이 열거됩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양들과 버림받은 염소들로 분리하면서 곤궁중에 있던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는 누구나 예외없이 또 하나의 예수님이라는 것이며 곤중에 있는 이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해서 비로서 사람이요 사랑이 최후심판의 잣대이자 구원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고,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하듯 디테일에 강한 사랑임을 오늘 레위기에서 배웁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가 맨처음에 나오고 구체적 부정적 ‘안된다’라는 이웃 사랑이 나열될 때 마다 후렴처럼 “나는 주님이다.”란 말마디가 못박듯이 나옵니다. 중간쯤에는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가 나오고 끝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이 결론처럼 나옵니다.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거룩함이요 경외함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으로 표현된 구체적 이웃사랑의 항목을 나열해 봅니다. 예나 이제나 영원히 준수해야할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1.도둑질해서는 안된다.
2.속여서는 안된다.
3.사기해서는 안된다.
4.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5.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5.이웃의 것을 빼앗서는 안된다.
6.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7.귀먹은 이들에게 악담해서는 안된다.
8.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9.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10.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는 안된다.
11.세력있는 자라고 우대해서는 안된다.
12.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13.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는 안된다.
14.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15.앙갚음 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긍정적인 사랑의 의무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3.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4.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5.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정말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요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인지 또 사랑이 모두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임을, ‘사랑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평생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요 저절로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겸허한 자각이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은총이 우리의 사랑실천에 좋은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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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처럼, 주님처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크게 요약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이 주님이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그런데 오늘 말씀을 뜯어보면 사랑의 상승이 있습니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여기애인(如己愛人)에서, 내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여주애인(如主愛人)으로.
그러므로 상승의 시작인 나 자신처럼 이웃 사랑하기를 보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동일시(同一視)와 불이시(不二視)입니다. 동일시란 너와 나는 같고 하나라는 시각이고, 불이시는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우리 인간관계는 다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다름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같음과 하나를 추구할 수도 있고, 다른 존재가 같을 수는 없고 하나 될 수는 더더욱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다름 때문에 같을 수 없고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고, 다르지만 같음도 있고 둘이지만 둘이 아니라 실은 하나라는 걸 보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경상도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다르지만 남이냐 하면 남은 아니라는 말이고, 다른 것만 보며 남이라고 하지 말고 같은 점을 보며 남이 되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민족인데 다름만 보기에 남북이 적이 되고,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다름만 보기에 좌와 우가 극좌와 극우가 되어 싸웁니다.
이렇게 가다가 남과 북은 영원히 다른 나라가 되고, 대한민국은 둘로 쪼개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사랑은 다름 때문에 남남인 채로 살려는 것을 극복하고, 같음을 발견하려고 애쓰며 하나를 살려고 하는 의지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는 남남인 채 사는 것이 편하고,
다른데도 같음을 보고 하나가 되려는 것은 너무 힘든 것인데 주님께서는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당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런 놀라운 표현을 하십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그런데 우리의 주님께서 이렇게 이웃을 당신 형제라고 하시고,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며 이웃과 당신을 동일시하시며 당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 신명기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며 ‘나는 주님이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라고 하신 분이 우리의 주인님인 것 맞습니까? 주인님이 이리 말씀하셨는데도 나는 남남인 채로 편히 살겠다고, 남남인 채로 편하게 사는 것에 안주하며 살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앞에서 사랑은 의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려는 의지이고 더 고귀한 사랑을 향한 상승 의지입니다.
고귀한 사랑이란 주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남이 아니라 주님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 고귀한 사랑을 향한 상승 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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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마태25,31-46)은 '최후의 심판의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예수님)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의 기준'은 '사랑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믿는 이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심판의 기준!'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 하십니다. 그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이들이 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큰 낭패를 당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6)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예수님, 예수님이신 가장 작은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과 말씀과 기도 안에서 깨어 있어야 그들이 보이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보속의 시간'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를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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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하느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곧 하느님을
얻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를
찾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보다
먼저
가장 작은 이를
끌어안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만들고
이루어내시려는
진정한 복음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너무 먼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너무 작아서
우리가
못 보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으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선는
가장 작은 이가
되시어
당당하게
사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기에
사랑의 실천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버리면
안 보이던 것이
못 본 것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굶주림과
추위와
목마르심과
헐벗음과
병드심과
외로움에
다가가는
사순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깨어나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가장 작은 이를
보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실행으로
옮겨지는
사랑의 평등이며
사랑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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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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