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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 이원호
5권
---- 차 례 ----
1. 사는 자와 죽는 자
2. 하바로프스크의 담판
3. 견제하는 세력들
4. 마피아와의 전쟁
5. 몰락의 시작
6. 유랑
7. 기다리는 사람들
8. 대결
1. 사는 자와 죽는 자
마파척은 산동성 사람으로 30대 후반의 조금 마른 듯한 체격의 사내였다. 젊었을 때 세상을 떠돌면서 어느 누구한테도 메여 살지 않았던 그가 삼합회의 일을 맡게 된 것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특급 대우를 받는 별동대원이 되어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로 휘청이며 걷는 그가 온갖 수단에 능한 살인업자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반 년 전 마카오의 염대태를 사흘 안에 살해할 때까지 진대원도 그저 허명이었거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진대원은 마파척과 밀실에 마주앉아 있었다. 죽은 생선의 눈알처럼 흐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파척은 어젯밤에 타운에 잠입해 왔다. 잠입해 왔다는 것은 진대원 외에 그의 입국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상황이 심각하다. 부하들이 동요를 하고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대원이 말했다.
「믿을 놈은 몇 놈밖에 없다.」
마파척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홍콩에서 진대원은 그에게 자신의 정보원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마파척은 정보원을 가족 두 명과 함께 살해하여 바다에 묻었던 것이다.
「나는 내일 아침에 부하들을 동원해서 김상철을 친다.」
「지난번에는 놈에게 속아서 엉뚱한 곳을 쳤어. 놈은 이만저만 몸조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
「놈의 통나무집은 요새야.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안에는 무장병력이 20명이 넘는다.」
「둘러보았습니다.」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마파척이 말했다.
「실패했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래서 ‥‥‥」
「놈이 제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압니다.」
「오늘 아침의 습격도 철저히 준비된 것이야. 놈의 출근길을 덮칠 계획이다.」
「‥‥‥‥」
「그러나 만일의 경우, 실패했을 때 부하들의 동요가 더 심해질 것이다.」
「‥‥‥‥」
「그때에는 네가 나서라. 아마 놈도 우리 쪽 분위기를 조금쯤 읽고 있을 테니 방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만 달러를 내십시오, 진 형님.」
그러자 진대원이 옆에 놓인 낡은 비닐가방을 들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정도 부를 줄 알고 준비해두었다.」
「염대태보다 더 어려운 환경입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한꺼번에 주는 것이다.」
진대원이 팔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부하들과 회의를 해야 한다. 내일 아침에 그놈이 제거된다면 너에게 다른 임무를 줄 테니 기다려라. 실패한다면 예정대로 진행하고.」
새벽 3시가 되자 주택가의 불빛은 거의 꺼졌다. 골목 입구에 켜진 외등 한 개만이 희미하게 주위를 비칠 뿐이다. 짙은 어둠이 내려덮인 중국인 주택가의 깊숙한 안쪽, 문패도 없는 허름한 판자 대문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 안이다. 간간이 기침소리와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골목 밖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을 뿐 적막에 싸여 있던 골목에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울려나왔다. 한두 사람이 아닌 서너 명의 빠른 발자국 소리였다. 이어 양쪽 담장의 어둠 속에서 두어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요?」
「나다, 용형이야.」
다가온 것은 마작방의 책임자인 용형을 비롯한 서너 명의 간부급 보스였다. 그들은 사내들을 지나 그중 한 곳의 판자문을 들치고 들어섰다. 좁은 통로를 거쳐 그들이 방 안에 들어서자 상좌에 앉아 있던 진대원이 머리를 들었다.
「늦었군, 용형.」
「검문이 심해서 애를 먹었습니다.」
방 안에는 7,8명의 간부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가 제일 늦은 것이다.
나파스 클럽의 로켓포 공격사건이 지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경비부의 경계는 조금도 늦추어지지 않았다. 특히 중국인 거리에 대한 검문과 검색은 갈수록 심해져서 폭설기간 때의 습격피해를 아직 복구하지도 못한 주민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진대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내일 아침에 작전을 개시한다. 이번에는 실수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방 안의 사내들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켓포 세 문으로 세 대의 차량을 쏘는 것이야. 거리는 50미터 미만일 테니 내일로 김상철의 인생은 끝난다.」
진대원의 시선이 철안에게로 향해졌다. 그는 지난번에 나파스 클럽의 뒤채에 로켓포를 쏘아 넣은 장본인이다.
「철안, 세 대의 차량이 박살이 날 때까지 쏘아라. 한 놈도 살아 나와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대형 .」
말석에 앉은 그가 머리를 숙였다. 중국군 장교출신으로 회에 가담한 그는 자신의 출세가 이번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
「계획은 완벽하다. 김상철이 집을 떠날 때, 그리고 타운 앞을 지날 때에도 너에게 연락이 갈 테니까. 네가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
「김상철이 차에 탔는지, 탔으면 몇 번째 차에 탔는지도 알려줄 데니까.」
그렇게 말한 것은 용형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만일의 경우, 내일 아침에 그자가 대아운송에 출근하지 않을 때에는 그냥 철수해서 돌아오도록.」
「알겠습니다, 용형님.」
진대원이 머리를 돌려 양필성을 바라보았다.
「경비본부 모략은 빈틈없이 하도록. 증인 제보나 신고에 허점이 있으면 안 된다.」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양필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만 제대로 된다면 경비본부는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김상철은 적이 많은 놈이야. 근대리아 측에서는 일단 우리와 마피아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을 것이지만 사후수습에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진대원이 주위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내일 일이 성공하면 근대리아의 판도는 바뀐다. 통치는 근대리아 행정부가 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주민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우리와 마피아 그리고 북한이다.」
회의를 마쳤을 때는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일을 할당받은 간부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대원들은 용형과 함께 임시 사무실을 나섰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거처를 바꾸는 진대원인지라 간부들도 그의 소재를 모른다.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진대원과 용형이 들어선 곳은 주택가 끝 쪽에 있는 벽돌집이었다.
방 안에 자리 잡고 앉자 진대원이 용형을 바라보았다.
「양필성이 고분고분한 것은 내가 원로회의에 보고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여굉의 보고 내용이 어떻든 간에 그자를 이곳에서 내보내겠어. 난 내 지휘방식에 반발하는 자는 데리고 있지 않겠다.」
용형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진대원이 팔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보고내용에 따라 내가 즉결처분할 수도 있겠지.」
그들은 양필성의 부하로 마약방의 재정을 맡고 있는 여굉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굉이 양필성의 자금 관계에 대해서 보고할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인데 진대원으로서는 이번이 눈 속의 가시 같은 양필성을 처단할 좋은 기회였다.
「오는 모양이군.」
용형이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밖에서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곧 방문이 열렸다.
앞장서서 들어선 것은 여굉이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는 낮선 사내가 한 명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내를 본 진대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양필성이었던 것이다. 진대원이 힐끗 용형을 바라보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음, 어서들 앉아.」
갑작스런 양필성의 출현에 놀랐지만 그 정도에 동요할 진대원이 아니다.
그의 시선이 곧장 양필성에게 쏘아졌다.
「그래, 거기도 나한테 보고할 것이 있단 말이군.」
「그렇습니다, 대형.」
앞자리에 앉은 양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진대원의 시선이 끝 쪽에 앉은 사내에게로 옮겨 갔다.
「그런데 이자는 누군가?」
「저승사잡니다, 대형,」
억양 없는 양필성의 말에 진대원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양필성, 지금은 농담할 상황이 아니다.」
「당신이 그렇소.」
양필성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원로회의는 당신의 무리한 행동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결정을 내렸소, 당신의 개인적인 공명심 때문에 우리 조직과 수만의 주민이 피해를 입고 있단 말이야.」
「건방진, 감히 누가‥‥‥」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진대원이 버럭 고함을 친 것은 문밖의 경호원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그러자 양필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발악하지 마라, 진대원. 대형답게 품위를 지키란 말이다.」
「이놈, 양필성.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네 부친이나 숙부도 어쩔 수 없어. 원로회의가 승인했고 회주께서 결정하신 일이니까,」
양필성이 여굉의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당신 차례요.」
그러자 사내는 가슴속에서 소음기가 끼워진 기다란 리볼버를 꺼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싱거워서 ‥‥」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한이 진대원의 이마에 리볼버의 총구를 겨누었다.
「뒈지기 전에 궁금증을 풀어주겠는데 난 김상철의 부하로 이한이라고 한다. 오늘 이 자리에는 초대를 받아왔어.」
유창한 중국말이다. 그러자 양필성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뜻을 전달하기엔 이 방법이 좋을 것 같아서 초대한 거야.」
그 순간 눈을 부릅뜨고 있던 진대원이 둔탁한 총성과 함께 뒤로 벌떡 넘어졌다.
입맛을 다신 이한이 권총을 가슴 안에 끼워넣자 양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이 일을 김 사장께 그대로 보고해 주시오, 이선생.」
「내분이 아닙니다. 삼합회가 근대리아에서의 정책을 바꾼 것이지요, 진대원이 제거당한 후에 오히려 조직이 안정되었고 주민들의 반응도 나아졌습니다.」
유장석의 방 안이다. 이상훈의 보고를 들은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과격한 놈이 없어졌다니 다행이야. 그렇다면 누가 진대원의 뒤를 이었나?」
「그것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보다 치밀하고 경륜을 갖춘 자가 보내질 것은 분명합니다.」
유장석이 머리를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김 사장 부하를 시켜 직접 쏘아 죽이도록 했다니 기발한 방법이다. 마음 놓을 놈들이 아니야.」
진대원이 죽고 난 후로 타운은 오랜만에 휴전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네 개의 조직은 세력을 강화시키면서 마찰은 극력 자제하는 상황이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근대시의 상가지구가 개발을 시작하면 그곳이 격전장이 되겠지요. 이제 무대는 타운에서 근대시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러자 이상훈이 말을 받았다.
「날씨가 풀려 건설이 시작되면 다시 움직임이 활발해지겠지요. 모든 조직이 근대시에서 승부를 걸려고 할 테니까요,」
「중국 정부가 지난번 삼합회 소탕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해 왔어.」
유장석의 말에 두 사내는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근대리아 행정부에 말입니까?」
이상훈이 묻자 그가 머 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개발단장인 내 앞으로.중국계 주민의 편파적인 탄압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꽤 강력한 경고야.」
「삼합회의 배후에는 중국 정부가 있다고 봐야 한다. 마피아의 배후는 러시아정부고‥‥ 이건 대리 국제전의 양상이다.」
그러면서 유장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가 우리들의 책임이야. 잘못하면 소화불량이 되어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다.」
유장석의 방을 나온 김상철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이상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김 사장님, 잠깐만‥‥‥」
그들은 옆쪽의 창가로 다가가 섰다.
「지난번에 들여온 북한출신 여자들 말씀인데요.」
이상훈이 말을 이었다.
「대부분이 군대에서 차출된 여자들인 것 같습니다. 이금철과 북한 당국은 여자 전투요원을 보낸 겁니다.」
「‥‥‥‥」
「지금 각 사업장에 흩어져 있는 그 여자들 감시를 철저히 하셔야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인규한테 관리를 맡겼는데‥‥ 그 여자가 적임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자 이상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하지만 조심해야 될 거요. 이금철의 명령 한마디에 뒤에서 치고 나올 년들이니까.」
안인석이 들어선 곳은 공원 끝 쪽에 있는 조그만 찻집이었다.
오사카 성 옆의 공원에는 아직 2월 초순의 차가운 날씨와 평일의 오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찻집에도 손님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오성전자의 오사카 지사원인 백용근 과장이다.
「오랜만입니다, 안형.」
백용근은 30대 중반으로 당당한 체격에 호남이다. 이번에는 열흘 만에 만나는 것이니 그가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차를 주문해서 뜨거운 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자 백용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형, 무슨 일입니까?」
안인석은 이미 그에게 그 전에 근대전자의 중요한 자료는 대부분 빼내서 넘겨주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따위 도둑질은 하지 않을 작정이니까 그렇게 아시오.」
안인석의 말에 백용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안형, 갑자기 무슨‥‥‥」
「나는 근대그룹에 대한 원한은 없어요. 그건 당신들이 잘 알 겁니다. 그리고 당신들에 대한 인연이나 의무감은 말할 것도 없고‥‥ 돈이라면 당신네 어느 누구보다도 많습니다.」
「김상철에 대한 감정 때문에 당신들과 인연을 맺은 것인데 요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아, 내 인생에.」
「잠깐만 안형.」
백용근이 부드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면 우리한테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시면 좋겠는데.」
안인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들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겠지만 내 가정은 파탄이야. 마누라가 김상철을 찾아 근대리아에까지 다녀온 상황이란 말이오.」
「‥‥‥‥」
「죽은 줄 알았던 그놈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신을 못 차린 거지,」
「‥‥‥‥」
「내가 오사카로 떨려나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게 되었을 거요, 그런데도 나는 당신한테 지사 정보나 빼돌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요?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요?」
상기된 얼굴로 안인석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이와 관련된 일을 돕도록 해주시오. 본래 난 그러려고 당신들과 제휴했던 것이니까. 난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말해주시오.」
박미정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밤 10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였다. 숙소에 일찍 돌아와 있던 안인석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한 달이 넘도록 서로 전화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전화하기가 두려웠고 싫기도 했다.
「그동안 전화 못해서 미안해요.」
박미정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가늘게 숨을 내려쉬었다.
「아니, 나도, 요즘‥‥‥」
「저, 나‥‥ 아이 지웠어요.」
숨을 멈춘 안인석이 잠자코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없어서, 당신을 믿고 살 자신이 ‥‥‥」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억눌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계획이 있을 테니, 말해 봐.」
「우리, 헤어져요.」
「그렇군.」
「동의하시죠?」
「좋을 대로.」
「시부모님께는 당신이 말씀드려 주세요. 이쪽은 내가‥‥‥」
「그래야겠지. 그런데 ‥‥‥」
안인석이 벽을 쏘아보았다.
「김상철이하고는 이야기가 되었어?」
「널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다는 거야?」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때문이라면 내가 당신들 앞에서 사라지겠어.」
「이봐, 미정이.」
그러나 전화가 끊겼으므로 안인석은 전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이런 개 같은 년.」
눈을 부릅뜬 안인석이 이를 악물었다
「아주 계획적이구만 그래, 이년도.」
박미정이 응접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이여사가 머리를 들었다. 며칠 사이에 그녀의 얼굴도 박미정만큼이나 초췌해져 있었다.
「왜 나왔어? 누워 있지 않고?」
「난 괜찮아요.」
「괜찮기도 하겠다.」
중절수술을 받고 돌아왔다는 박미정의 말을 듣고는 하마터면 기절해 쓰러질 뻔했던 이여사였다. 성화에 견디다 못한 박미정이 이혼해야 할 이유를 안인석에게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까무라칠 뻔했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한테는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두 모녀는 눈치만 살피고 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겨울 날씨인데도 유리창 밖의 햇빛이 밝은 날이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박미정이 화장기 없는 얼굴을 들어 이여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걱정만 시켜드려서 미안해요.」
이여사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를 돌렸다
「내가 오사카에 갔을 땐 그 사람한테 기대하는 것이 조금은 있었는데 ‥‥‥」
「가서 변했단 말이냐?」
「‥‥‥」
「그래, 이미 끝난 일 같다만 그 얘기나 자세히 듣자. 오사카에서 안 서방이 뭐라고 하던?」
「헤어지자고 그래? 여자 생겼다고?」
「아니, 그냥 그런 비슷한‥‥‥」
「못된 놈 같으니.」
반대의 상황이더라도 어머니는 이쪽편이 되었을 것이다.
박미정이 소리죽여 숨을 내려쉬었다.
「어머니, 나, 은희 언니한테 가 있겠어요.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또‥‥‥」
「파리에 말이냐?」
깜짝 놀란 이여사가 머리를 저었다.
「안 돼, 내가 네 아버지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안 된다.」
「언니한테 가 있으면 아버지도 걱정하시지 않아요.」
「그래도 안 돼, 너는.」
박은희는 파리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는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박미정의 사촌언니였다. 결혼하기 전의 일이지만 그녀는 몇 번이나 박미정을 초청했었던 것이다.
「엄마, 나 갈 테야.」
박미정이 이여사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도와줘요, 엄마. 이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
어느덧 박미정의 얼굴로 눈물이 가득 흘러내렸다.
「그곳에서 얼마쯤 지나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엄마. 엄마는 날 보려면 언제든지 파리로 올 수도 있고.」
「엄마, 날 도와줘, 이곳을 떠나게 해줘.」
최선호 전무는 서울발 오사카행의 대한항공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는 파랗게 개인 동해 상공을 나는 중이었고 그의 옆자리에 상체를 꼿꼿이 세워 앓아 있는 사람은 이재환 과장이다.
「근대리아의 작년 매출액이 30억 달러였지만 올해에는 150억 달러가 된다.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이야.」
최선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제력이 곧 국가의 힘이야.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근대리아는 3년 후에는 500억 달러의 매출액을 갖는 중견국가가 될 것이다. 강씨 연방이라고 해야 되나?」
「지하자원이 풍부한데다 주민들의 노동력이 때 묻지 않아서 마치 60년대의 한국과 같고 거기에다 첨단기술을 갖춘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으니까요.」
이재환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기후조건 외에는 자본과 기술, 노동력에다 시장까지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안인석의 효용가치는 거의 제로야. 그자가 김상철이 운운하는데 우습다. 이미 레벨이 달라서 연결 고리가 없어.」
최선호가 화제를 바꾸었으므로 이재환은 다시 긴장을 했다.
「그렇습니다. 더구나 박미정과 갈라서게 되었다면 더욱 끈이 닿지 않습니다.」
「이제야 악이 받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김상철이처럼 람보 같은 기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최선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김상철이는 풍파를 일으키는 놈이다. 안인석이를 가볍게 파탄시키는 걸 보면 대단한 위력이야.」
그들이 오사카 공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대합실로 나온 그들은 곧장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가서는 택시에 올랐다.
「힐튼 호텔로.」
운전사에게 말하고 난 최선호가 이재환을 돌아보았다.
「예약은 되었겠지?」
「예, 전무님, 제 이름으로 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손을 떼야지. 그놈의 억지 요구에 우리가 무리수를 둘 수 없으니까.」
안인석에 대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보도 빼낼 만큼 빼냈고 앞으로 신통한 일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오늘 상담이 끝나고 나서 자네가 만나 통보를 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알겠습니다, 전무님.」
「백과장한테 그만두겠다고 한 건 우리 일이야? 아니면 근대야?」
「그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양쪽 다일 것 같은데요.」
「안 됐어. 졸지에 모든 것을 잃다니.」
「자업자득입니다, 전무님,」
「그 여행사 사장이라는 여자, 그 여자가 남아 있군, 참.」
회전의자에 다리를 꼬고 기대앉아 있던 이유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임신 4개월째였다니 그 여자도 꽤 힘이 들었겠는데, 그렇지 않아?」
그랜드 여행사의 사장실 안이다. 넓고 쾌적한 분위기의 방 안은 엷은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장님. 위험하기도 하고.」
「그 여자는 지금 친정에 가 있지?」
「예, 짐은 거의 다 옮긴 상태여서 집은 빈집이 되어 있습니다.」
20대 후반으로 체격이 건장하고 용모가 미끈한 이 사내는 신명인의 정부였던 오정길이다. 그러나 홍만규가 신명인의 아파트로 거처를 옳긴 지금 그는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그가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박미정이를 계속 감시 할까요?」
「아니, 이젠 됐어.」
이유미가 머리를 저었다. 박미정에게 김상철이 근대리아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심부름 하는 사내처럼 전화를 한 것도 오정길이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봉투를 집어내더니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것, 500만 원이야. 당분간 카바레 가서 놀 만큼은 될 거야.」
「고맙습니다, 사장님.」
재빠르게 봉투를 집어 가슴 주머니에 넣은 오정길이 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시면 열심히‥‥‥」
「당신은 쓸모 있는 남자야. 내가 다시 연락을 할 테니까.」
허리를 숙인 오정길이 방을 나가자 이유미는 결재서류를 펼쳤다. 여행사는 목표를 초과달성해가는 상황이었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 인터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그녀는 스위치를 켰다. 등 뒤의 대형 유리창이 환한 햇살을 흠뻑 받고 있는 맑고 상쾌한 날씨였다.
「사장님, 오사카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여직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안인석 씨라고 합니다.」
이유미는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직통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출장 갔다고 해줘요, 미스 정.」
「네, 사장님, 그런데 어디로 가셨다고.」
「글쎄, 유럽 쪽이 좋겠네. 한 달쯤 걸릴 것이라고‥‥‥」
「그럼 이 분한테만 그렇게 ‥‥‥」
「물론이야, 미스 정.」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유미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이미 안인석은 티켓팅이 끝난 고객이었다. 그렇게 되면 여행은 그가 하는 것이지 여행사 사장이 꼭 동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힐튼 호텔의 스위트 룸 안이다. 응접실에는 네 사내가 둘씩 마주보는 위치로 앉아 있었는데 한쪽은 최선호와 이재환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저녁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진 선봉지역의 특혜뿐만이 아니오. 앞으로 오성그룹은 우리 공화국 사업에 대해서 최우선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50대 후반쯤의 나이로 깡마른 체격에 온화한 인상의 사내였다. 대체적으로 마른 체격은 날카롭게 보이는 것이 보통인데 그의 웃음 띤 얼굴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북한의 해외특수사업부 부장인 안철현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 나진 선봉지역에 대한 우리 공화국의 합의서를 가져왔습니다. 지난번에 합의 했던 대로요.」
그가 눈짓을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최선호에게 두툼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우리 공화국의 정무원 총리, 해당 각부 부장의 수표가 찍혀 있습니다.」
안철현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총비서 동지께서도 영광스럽게도 저를 직접 불러 격려해 주셨습니다. 오성그룹에 대해서도 대단한 호의를 갖고 계십니다.」
이재환에게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인계한 최선호가 따라 웃었다.
「영광입니다. 그토록 관심을 가져주시니, 저희 회장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머리를 끄덕인 안철현이 잠자코 시선을 주는 이유는 알았지만 최선호는 모른 척 했다. 이윽고 이재환이 머리를 들었다.
「전무님, 끝냈습니다.」
이상 없다는 말이다. 그러자 최선호가 입을 열었다.
「3천만 달러가 열흘 후에 스위스로 입금될 것입니다. 은행 이름과 구좌, 비밀번호는 그때 다시 만나서 전해드리기로 하지요.」
「아, 그렇습니까?」
「저도 이 서류를 갖고 가서 보고를 해야 되니까요,」
「이해합니다.」
최선호가 찻잔을 들고는 편하게 앉았다.
「그런데 근대리아의 사업은 승산이 있겠습니까?」
스위스로 보내질 3천만 달러는 거의가 근대리아의 상가 개발 사업에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남의 일이지만 속이 불편해진다. 그러자 안철현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승산이 있다마다요, 오래 가지 않아 승부가 납니다.」
「솔직히 난 그곳에 투자하시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만에, 최 전무님. 그곳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땅이오. 우리 동포만 해도 벌써 20만이 넘었고 올해 안에는 50만이 될 겁니다.」
이제까지 차분했던 그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고 눈빛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급속도로 번영하고 있는 겁니다. 근대리아는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재환과 시선을 마주친 최선호가 헛웃음을 웃었다.
「아니, 도대체, 근대리아 번영하고 북한하고 무슨 …. 그것은 근대그룹의 번영이고 강씨 가문의 번성입니다, 부장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안철현의 표정이 단호해져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선 동포의 번영이고 번성이오. 왜냐하면 근대리아는 곧 우리 조선 동포가 지배하게 될 테니까요.」
「‥‥‥‥」
「솔직히 오성그룹에서 우릴 지원해준 것도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아니, 우리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최선호가 정색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우린 나진 선봉지역의 특혜 대가로 그 돈을 드린 것뿐이지 다른 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실언을 했다고 생각한 듯 안철현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미안합니다. 말이 잘못 나와서‥‥ 어쨌든 지금 근대리아에는 우리 공화국의 일꾼들이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공화국에서 직접 말입니까?」
놀란 듯 최선호가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계속될 거요.」
「근대리아 당국에서 받아준단 말입니까?」
「당국은 아니지만 타운의 실력자가 받아들이고 있소. 그자가 당국을 설득한 모양이오.」
「김상철이 말입니까?」
「잘 아시는군요.」
「알다마다요. 그자의 족보까지 훤하게 알고 있지요.」
최선호와 이재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두실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정보를 조금 드릴까요?」
박기동이 이번에 데려온 사내는 이태리인으로 도난경보시스템의 판매 책임자였다. 상담을 마친 그가 김상철의 방을 나왔을 때였다. 아직도 깁스를 한 한쪽 팔을 목에 걸고 있는 송길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보쇼, 박 사장. 잠깐 저쪽으로 갑시다.」
「아니 난 이 사람하고 같이 호텔로 돌아가서 할 일이‥‥」
이렇게 말하면서 박기동이 이태리인을 눈으로 가리키자 송길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깐이면 돼요. 그리고 그 친구는 애들 시켜서 태워 보내고.」
박기동이 송길수와 함께 들어선 곳은 저택 아래층에 있는 대기실이다. 그들이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이한과 장인규가 머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요?」
소파에 앉은 박기동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레고리를 빼고 김상철의 고위급 간부가 모두 모인 셈이었다. 그러자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박 사장, 당신 덕분에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제때에 얻게 되어서 다행이오.」
「아, 그거야 뭐, 당연히 ‥‥‥」
「그런데 내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 말인데, 당신이 지난번에 북한에서 데려온‥‥」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박기동이 상체를 세웠다.
「계약을 어기면 교환이 됩니다. 하자가 있어도 마찬가지요.」
「여자들 말을 들었고 이금철 쪽의 이야기도 들었어요. 당신 여자들한테 주기로 한 1인당 1000달러의 계약금에서 수수료 100달러를 떼어 먹었더구만. 그리고 여자들한테서도 다시 수수료 ~달러씩 걷었고.」
얼굴이 하얗게 된 박기동을 향해 장인규가 말을 이었다.
「결론적으로 당신은 이금철한테 여자 한 명당 900달러씩 주었어. 그런데 그 돈이 어떻게 된지 알아? 북한 당국에서 500달러를 떼고 여자들한테는 400달러씩 나눠줬지, 그 400달러에서 여자들은 집에 돈을 보내주고 겨우 50달러에서 100달러씩 가지고온 거야. 거기에서 너는‥‥‥」
장인규가 박기동을 쏘아보았다.
「이 뚜쟁이 같은 놈, 넌 당장에 쏘아죽여야 마땅하다.」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한이 허리춤에 찔러 넣고 있던 콜트 45구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총구를 박기동의 이마에 쑤셔 넣었다.
「쏴 죽입시다, 당장. 형님도 아무 말씀하지 않으실 거요.」
「아, 아, 잠깐만, 잠깐만요.」
박기동이 두 손을 크게 휘젓지도 못하고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오햅니다. 내가 아니고 여자들이 걷어서 ‥‥‥」
그 순간 송길수의 성한 한쪽 주먹이 날아가 박기동의 볼을 쳤다.
「아이고머니!」
몸을 비스듬히 굽힌 그의 뒤통수에 다시 총구가 와 닿았다.
「누님,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쏴 죽입시다.」
「아이고머니!」
「일어나! 일어나서 날 봐.」
장인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박기동이 겨우 머리를 들었다.
「너, 돈을 얼마나 모았어?」
「예, 얼마 안 됩니다. 그저 ‥‥‥」
「얼마야?」
「오, 오만 달러 정도.」
「이런 도둑놈.」
다시 주먹을 날리려는 송길수를 저지하면서 장인규가 말을 이었다.
「다른 돈은 상관 않겠다. 여자 몫으로 뗀 돈을 한 시간 내로 가져와라. 넌 이미 사장님한테서 수고비로 만 달러나 챙겨 넣었어. 넌 나쁜 놈이야.」
「아, 글쎄 죽여 없애자는 데도 ‥‥」
이한이 짜증난 듯 소리쳤으나 송길수가 박기동을 걷어차 밖으로 내몰자 더 이상 고집하지는 않았다.
대아운송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그레고리 파트킨으로 강도단 두목이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대단한 변신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전력은 구소련군 소령으로 그는 행정업무에 밝았고 지휘 통솔력까지 갖추어서 나무랄 데 없는 관리자였다. 더구나 그를 위시한 백여 명의 부하가 모두 새로운 직업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의 주요 업무는 수송계획보다 수송로의 안전에 있었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가끔씩 내리는 눈으로 길이 수없이 끊기고 눈에 묻히거나 구르는 사고가 난다. 그는 주요 수송로의 요소요소에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지만 천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오늘도 그는 헬기를 타고 사고 지점에 도착했다. 근대리아 국경에서 150킬로 지점으로 꽤 가파른 구릉지대였다. 다섯 대의 트럭이 길 아래로 굴러 떨어진 사고였는데 길이 끊겨 20대 가량의 트럭이 발이 묶여 있는 것이다. 헬기에서 내린 그에게 부하가 다가왔다. 이곳에서 10여 킬로 위쪽의 길가 부락에 주재하고 있는 부하였다.
「대장, 이번 사고는 도로의 지반이 약해져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레고리를 사고 난 지점으로 서둘러 안내한 부하가 말했다.
「여길 보십시오. 멀쩡한 도로가 이 부분만 무너져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구릉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아래쪽은 10여 미터 깊이의 골짜기였다. 트럭은 구릉의 구비를 돌다가 흙과 함께 굴러 떨어져서 아직도 다섯 대의 트럭이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로를 유심히 살펴본 그레고리는 부하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반은 아직 얼어붙어 있어서 단단했다. 그런데 10미터 가량의 도로 한쪽이 떨어져나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도로를 폭파해 놓고 그 위를 위장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운전사들의 말을 들어도 멀쩡했던 도로가 허망하게 꺼져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레고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덮인 길을 위장해 놓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사고현장에서 돌아온 그는 곧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헬기에서 연락을 했었으므로 김상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보고를 받은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어, 사흘 전에는 유리를 싣고 오던 트럭이 뒤집혀서 큰 손해를 보았고 일주일쯤 전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트럭에 불이 났었다.」
「저도 파벨의 방해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증거가 없으니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폭설기간 동안 근대리아가 식량난을 겪게 될 위험한 순간에 제설차를 모조리 부수고 운전사들을 위협해서 도망치게 한 것은 분명히 마피아 소행이었다. 그레고리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루진스키를 만나 따지겠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지요.」
「증거가 없으니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파벨이 운송사업에 대단한 미련을 갖고 있다고 들었다.」
파리야킨의 코쟈크 마피아가 극동지역에서 기반을 굳힌 이유는 운송수단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파벨이 비약적으로 성장해가는 근대리아의 운송업에 미련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파벨하고 협상을 해야 돼.」
저택으로 돌아온 김상철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운의 업체들을 관리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자주 저택에 들렸는데 이인숙과도 친해진 것이 그 원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제 이인숙을 언니라 부르고 있다. 김상철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박기동을 꼭 데리고 있어야 합니까?」
「왜? 돈을 게워내게 했지 않아? 또 다른 사건이 있어?」
「병균 같은 놈이오. 남조선의 썩은 습관을 하나도 빼지 않고 갖추고 있는 놈이란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놈이야.」
그러면서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자도 역시 맹렬하게 살고 있는 중이야. 난 그자가 왠지 밉지가 않아,」
「오늘 하마터면 그놈을 죽일 뻔했어요. 그런 철면피한 행동을 한 놈과 같이 지낼 수는 없습니다.」
장인규가 맑은 눈을 치켜떴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놈입니다. 그런 놈을 용서해준다면 부하들의 기강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제는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내가 당신한데 맡겼지 않아? 적당히 혼을 내주라고 말이야. 그놈은 감시받고 있어서 큰일은 못해.」
「언니한테 치근덕거리는 것도 내버려 둘까요?」
그러자 김상철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언니라니?」
「이인숙 씨 말예요.」
「한국의 마누라하고는 이혼했으니 같이 살자고 졸라대는 모양입니다.」
「‥‥‥‥」
「이쪽저쪽 그놈이 발을 디딘 곳은 문제가 생기지 않는 곳이 없어요. 언니는 어쩔 줄 몰라 나한테 상의를 해 왔습니다.」
박기동이 응접실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약속한 대로 여자들한테 돌려줄 달러를 가방에 싸들고 돌아왔던 그는 곧장 김상철에게 불려간 것이다. 이한에게 안내되어 응접실에 들어선 그는 이미 주눅이 잔뜩 들어 있었다. 시선을 올리지도 못하고 앞자리에 앉은 그의 몸은 뻣뻣해진 상태였다.
「당신, 근대리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김상철이 대뜸 물었다.
「이곳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자. 솔직히 말해. 꾸며 말하면 끝장인 줄 알고.」
그러자 박기동이 머리를 들었다. 한쪽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한테는 기회의 땅입니다. 사방에 돈이 보이는 …. 예, 한밑천 금방 잡을 수 있는 곳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더듬대며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신이 보는 근대리아의 미래는?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있습니다, 사장님.」
「말해라.」
박기동의 뒤쪽에 서 있던 이한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박기동이 입을 열었다.
「예측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북한이, 중국이, 또는 러시아가 장악할지도 모르는‥‥ 모두 제각기 기반들을 굳혀가고 있어서. 한국의 근대리아 정부는 언제 전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조직은 어떤가?」
박기동이 머리를 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듯 턱까지 치켜들고 있다.
「주민을 바탕으로 하는 세력이 아니어서 기반이 약합니다. 오직 경비대와 행정부의 지원이 있을 뿐인데, 그것이 지금은 막강한 세력으로 보일지 몰라도 상황이 다급해졌을 때는‥‥‥」
「계속해.」
「근대리아 정부와 같이 넘어갈 것같이 보였습니다.」
「당신은 지난번에 조선족을 동화시켜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예, 근대리아에 이주한 조선족이나 북한계가 근대리아 식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의 조직력이 강합니다. 그들은 정부차원에서 이곳을 공략하고 있는 반면 근대리아 행정부는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배척하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오직 안기부의 협력으로 경비대가 운영되고 있으므로 주민 장악력이 없습니다. 군림하고만 있을 뿐이지요.」
김상철이 머리를 들어 이한을 바라보았다.
「박 사장과 함께 여자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오너라. 사과도 시키고.」
「예, 형님.」
박기동의 눈에서 생기가 났다. 그러나 아직도 조심스런 표정으로 김상철과 장인규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나가봐요. 그리고 참‥‥‥」
마악 일어서려던 박기동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한국에 있는 가족들 말인데, 내가 사람을 시켜 이곳으로 불러올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 아닙니다. 아직.」
박기동이 한 손을 올렸다가 금방 내렸다.
「제가, 아직 ‥‥ 조금 나중에, 다시 ‥‥‥」
이한과 박기동이 방을 나가자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제법 솔직하게 말한 것 같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그냥 보내기엔.」
장인규가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저놈은 다른 쪽에 잡혀 총을 들이대면 이쪽 사정을 술술 불 거예요, 지금처럼.」
머리를 올린 그녀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죠?」
「알아서 처리해.」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보고할 것도 없다.」
「박 형, 한 잔 듭시다.」
술잔을 든 찬드라가 박기동을 향해 말했다.
「거,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거요? 술도 안 들고.」
「아니, 그런 건 없습니다.」
박기동이 술잔을 들어 한숨에 위스키를 삼켰다.
나파스 클럽의 특실이어서 그들은 소음이 전혀 없는 방 안에 앉아 각각 러시아계 여자들을 옆에 앉혀놓고 술을 마시는 중이다. 찬드라가 박기동의 빈 잔에 발렌타인 17년을 따랐다. 그는 싱가포르 전자회사 중역으로 근대리아에 시장조사차 나와 있는 사람이다.
「내가 술 산다고 부담 느끼실 것 없소. 난 술친구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찬드라가 얼굴을 펴며 웃었다. 말끔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낀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박기동에게 무슨 부탁을 해온 적이 없다. 호텔에 묵은 지 보름 가깝게 되어서 서너 번씩이나 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장의 상황 정도나 물어볼 뿐이었다.
「싱가포르에 올 기회가 있으면 날 찾아주시오. 내가 근사한 곳을 안내해 드릴 테니까.」
찬드라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에는 영국식 발음이 약간 섞여 있었다.
「이제 근대리아도 슬슬 관광 사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찬드라가 묻자 박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시의 상가와 유흥업소 공사가 끝나는 대로 시작될 겁니다. 아마 내년쯤이면 관광객이 들어올 거요.」
「동계올림픽으로는 그만인 조건이지. 우리 같은 남국 사람들이 겨울휴가를 보내는 장소로 개발시켜야 해요,」
술잔을 내려놓은 찬드라가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박형, 난 전자제품 판매보다 관광사업에 관심이 있어요. 가능하면 근대시에 호텔이나 빠징코 업체를 차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근대리아 행정부에 신청을 하시는 것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정색을 한 박기동이 말했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대로 그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투자가였던 것이다.
「서둘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분위기를 보니까 근대 쪽과 북한, 러시아, 삼합회에다 야쿠자까지 명함을 내밀고 있던데 ‥‥ 나는 슬슬 움직일 작정이오.」
찬드라가 여유 있게 웃었다.
「분위기도 보고, 장소나 시설들을 보고나서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요.」
「그러고나서 어떤 조직의 우산 밑에 들어갈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겠지. 그것이 이곳의 생존법칙인 것 같으니까.」
찬드라를 바라보던 박기동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찬드라와 같은 군소 투자가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다.
「찬드라 씨, 그렇다면 내가 김상철 씨를 소개시켜 드리지요. 제일 안전한 우산인데다 조건도 좋을 겁니다. 어때요? 만나보지 않으시겠소?」
「천천히.」
찬드라가 가볍게 손을 저으며 웃었다.
「내가 뭘 부탁드리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소? 그리고 서둘 것 없습니다, 박형.」
「내가 뭘 바라고 이러는 것이 아니오.」
박기동이 정색을 했다.
「가장 장래성이 큰 조직이 김상철의 조직이오. 그리고 인물도 그렇소. 그 사람은 도량이 크고 심지가 깊습니다. 또 사람을 아낄 줄도 알고, 한번 믿으면 어지간한 실수는 눈감아 준단 말이오.」
그는 잔에 든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밑에 있는 똘마니들은 좀 다르지만 말이오,」
송길수는 천성이 무뚝뚝한 성격인데다 대가 굵고 큰 키의 거한이어서 거친 분위기의 사내였다. 유지노사할린스크의 조선족 경찰이었다가 상관을 살해한 그는 거지 신세가 되어 근대리아까지 도망쳐 왔다. 생에 대한 의지는 있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막막한 시점에서 만난 것이 김상철이다. 그때부터 그는 김상철의 오른팔이 되어 타운을 개척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했으니 기업으로 말하면 창업공신이었다. 그는 이제 타운의 사업장들을 장인규에게 인계하고 근대시에 건설될 거대한 사업장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생의 의욕이 넘치는 나날이다. 현재 나이 28세, 아직 독신으로 주거지는 김상철의 저택 1충에 있었다.
「식사하세요.」
방에 들어선 현채옥이 말하자 송길수는 머리를 들었다. 오늘 할 일을 꼼꼼히 적어두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 사장님은 내려오실 건가?」
식당이 아래층에 있었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김상철과 같이 식사를 한다.
「아닙니다. 사장님은 이 선생님과 일찍 나가셨습니다.」
「어디로?」
「그건 모릅니다.」
현채옥은 지난번에 북한에서 들어온 여자 일꾼 중의 하나로 송길수의 당번이다. 클럽의 로켓포 폭파사건으로 송길수는 등과 팔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고 김상철의 지시로 현채옥은 그의 시중을 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식사 안하겠어. 밥맛도 없고.」
송길수가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리자 현채옥이 한 걸음 다가와 섰다.
「식사 이쪽으로 가져올까요? 조금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아, 신경 쓸 것 없어.」
그 말에 머리를 든 송길수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현채옥은 키가 늘씬한 미인이었다. 맑고 또렷한 눈에 콧날이 곧았고 윤기 있는 입술이 계란형의 얼굴과 빈틈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놔둬, 나가서 근배한테 10분 후에 공사장으로 출발한다고 전해.」
그가 던지듯 말하자 현채옥은 잠자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송길수는 볼펜을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이는 스물다섯, 열차 기관사인 현아무개의 장녀로 함흥 교원대학을 졸업한 후에 3년간 인민학교 교사를 지냈다는 것이 그녀의 이력이었다.
시계를 올려다본 송길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테이블로 다가가 서랍 속에서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현채옥과 함께 들어온 백여 명의 여자가 북한군에서 차출된 정예요원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리볼버를 끼워 넣으며 방을 나섰다. 저 년은 방심하면 목을 떼어갈 년이었다.
식당으로 들어선 현채옥은 안옥에 서 있는 이인숙에게로 다가갔다.
「언니, 송선생도 식사 안하신답니다.」
「오늘은 장사가 안 되는군.」
스웨터에 바지차림의 이인숙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식당은 20평 정도의 크기로 직사각형의 식탁이 네 개 놓여져 있었으나 두 곳에서만 사내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방 책임자인 사내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지시하고 난 이인숙이 현채옥을 손짓해 불렀다.
「네가 아침 먹고 타운의 장 사장한테 다녀와야겠다. 가면 술하고 고기를 줄 테니 받아와,」
「네, 언니.」
현채옥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일곱 명의 여자는 모두 이인숙의 통제를 받는다. 그리고 남자들도 이인숙이 정한 집안규율에 따라야만 했다. 이제까지 타운을 두 번밖에 나가보지 못한 현채옥이다. 이인숙은 현채옥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이리 와 앉아.」
그들은 빈 식탁의 끝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송길수가 나온 모양으로 그의 부하들이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잠시 어수선해졌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제 주방 쪽에 두어 명의 사내가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너, 내 남편이 누구였는지 아니?」
낮은 목소리로 이인숙이 묻자 현채옥의 눈이 동그레졌다. 대답을 기다리듯 잠자코 현채옥을 바라보던 이인숙이 다시 입을 뗐다.
「정보국 해외공작반 대위였다. 작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돌아가셨어.」
「‥‥‥‥」
「알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잘 새겨들어라. 난 강계의 온산 시범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이야, 이곳에서 내 자식과 함께 새 생활을 찾았고 아주 만족하고 있어.」
이인숙이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겠는데 옹화국 사람들과의 접촉은 안 된다. 만일 이 규칙을 어겼을 때는 돌려 보내진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요, 언니.」
「난 네가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래.」
자리에서 일어선 이인숙이 식당을 나가자 주방 안에서 여자 한 명이 식당으로 나왔다.
「무슨 얘기야?」
그녀에게 다가온 여자는 북한에서 함께 나온 동료였다.
「타운으로 심부름을 가라는 얘기‥‥ 장 사장한테 가서 술하고 고기를 받아오라는 거야.」
「그것뿐이야?」
「고되더라도 참으라는 잔소리,」
「그것뿐이야.」
첫댓글 집안이 살벌하네...
박진감 넘치는 잼난글 잘 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즐~
잘 보았습니다.
즐감
잘 읽고갑니다~~
고되더라도 차므라우
잘~보고 갑니다~~~^^
즐감중임다
즐감요
즐독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