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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기
오향대제(五享大祭)는 종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대제)로 매년 지내는 사시제와 납일의 다섯 제향을 말한다. 이는 종묘에서 가장 큰 제사이기 때문에, 대제(大祭)라 칭하였다. 사시제의 날짜는 사계절 첫 달의 상순으로 길일을 점쳐서 정하였다. 제사 음식은 12변(籩) 12두(豆)이며, 제사 절차는 참신-신관례-궤식-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사신-철변두-망예의 순서로 거행되었다. 오향대제는 각 능전(陵殿)에서 거행하는 큰 제향을 칭하기도 하였다. <오향친제찬실도>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 중 5폭에 위치한 그림이다. 상단에는 <찬실도>가 하단에는 <준소제기도>가 배치되어 있다. <오향친제찬실도>와 <준소제기도>에 그려진 제물은 『세종실록오례』와 동일하다. <준소제기도>에는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준과 이의 종류가 구분되어 그려져 있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봄여름에 사용하는 조이와 계이가 나란히 있고 각각 울창과 명수란 글자가 쓰여 있다. 조이와 계이 위에는 멱이 덮이고 용찬이 얹혀 있다. 우측 하단으로 내려오면서 좌우로 예제와 명수를 담은 희준 2개, 앙제와 명수를 담은 상준 2개, 청주와 현주를 담은 산뢰 2개가 3줄을 이루며 진설되었고 그 가운데 공간에 촉대, 폐비, 용찬이 배치되었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는 가을, 겨울, 납일에 사용하는 황이와 가이가 나란히 있고 각각 울창과 명수란 글자가 쓰여 있다. 좌측 하단으로 내려오면서 좌우로 예제와 명수를 담은 호준 2개, 앙제와 명수를 담은 상준 2개, 청주와 법주를 담은 산뢰 2개가 3줄을 이루며 진설되었는데, 모두 입구에 멱과 덮고 용찬을 얹었다. 그리고 사이에는 촛대, 폐비, 용찬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계절, 용도, 제기의 종류에 따라 좌우 대칭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이는 국가제사의 규범과 규칙을 이해하기 쉽도록 잘 전달하며 제의를 준비하는 관부들이 누구라도 실수 없이 준소상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오향친제찬실도>와 <준소제기도>에 그려진 제물은 실제로 그대로 차려졌을까?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똑같이 차려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많다. 오례의의 도식과 다르게 진설하는 것에 대해 오례의의 제향도식은 다 주례 가운데에서 가려내어 만들었는데, 중간에 이처럼 대용하는 것은 오례의의 주 가운데 ‘무릇 신명에게 제사하는 물건 중에서 그때에 없는 것은 그때에 있는 물건으로 대신하고, 외방(外方)에서는 또 토산물이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 채운다’고 하였으므로 수시로 변통하는 이유를 밝혔다. 조선시대에 봉행된 제사는 수십 종류가 넘는데, 중 소의 제사들 중에서도 종묘나 경모궁, 육상궁, 저경궁 등의 제사와 같이 소수의 큰 제사들만이 1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및 납일의 다섯 차례의 정기 제사(오향제)를 올렸고, 중간 규모의 제사들은 봄과 가을, 혹은 봄, 가을, 납일의 2-3차례 정기 제사만을 올렸으며, 다수의 소규모 제사들은 1년에 한 차례의 정기 제사만을 올렸다. 따라서 위와 같이 계절별로 4종류의 준을 모두 사용한 제사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1년에 1-3차례의 제사만을 올리는 중간 규모내지 소규모의 제사에서는 1-2종의 준만이 사용되었는데, 4종류의 준 중 어떤 준이 사용되었는지는 제사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종묘대제 때 사용하는 제기 이야기
범솥말 2024. 2. 26. 00:14
이 글은 2013-04-11 에 최초 작성한 글입니다.
2024년 구혜인님의 조선시대 왕실 제기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참고해 수정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국가 대사에 속하는 제례 중,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대제가 왕들의 신을 모시는 종묘제례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왕조국가인 조선시대에서는 혈연적 관계인 선왕과 선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왕실의 제향을 중시했으니 쉽게 말하면 사직대제가 종묘제례보다 높은건 사실이나 실제로는 종묘제례를 더 중시여겼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왕(王)은 천명을 받아 개국하고 나면 반드시 종묘를 세워서 조상을 받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후한도리이다. 」 라고 했으며 정조임금은 『홍재전서』에서 「그 나라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전례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전례가 가장 존엄하게 적용되는 곳은 종묘와 사직보다 더한 데가 없다. 」 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선왕들의 혼에게 드리는 종묘제례는 큰 의미를 부여했으니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제기도 다양했습니다.
종묘대제란?
조선왕조의 역대 제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정전과 영녕전에서 국조오례 규범에 의한 재물을 준비하여 의례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제례는 정전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섣달 5번을, 영년전에서는 봄과 가을 2번을 지냈었는데 광복 후 폐지되었다가 1969년부터는 정전과 영녕전에서 각각 1번씩 지내다가 1971년 이후 사단법인 「종묘제례보존회」에서 정전과 영녕전을 통합해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정전에는 19실에 왕과 왕비 49위와 영녕전에는 16실에 태조의 4대조를 포함하여 왕과 왕비 34위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으며, 공신당에는 정전에 모신 국왕의 공신 83위의 위폐를 모시고 있습니다.
참고로 정전에는 공신당이 있지만 영녕전에는 공신당이 없습니다.
제례는 신관례, 천조례, 음복례, 송신례, 망묘례 순으로 진행합니다.
신관례는 신을 맞이하는 예로 향을 세번을 피워 하늘의 혼령을 모시고, 술을 3번에 나누어 관지통에 부어 지하에 계신 체백을 모시고, 신에게 드리는 예물로 폐(흰 모시)를 올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천조례로 신이 즐기도록 상을 차리는 절차입니다.
천조례에 쓰이는 제물로는 소, 양, 돼지의 생간과 피, 좁쌀을 기름에 버무려 쑥과 함께 태우는데 이와같이 땅에서 자란 동식물을 봉헌하는 의식을 통하여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초헌, 아헌, 종헌의 순서에 따라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습니다.
다음은 음복례로 조상 신들이 들었던 술과 음식을 먹음으로 복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은 신을 보내드리는 송신례로 모든 제관이 신위를 향해 4번 절을 합니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망묘례로 제사에 사용했던 축과 폐를 태울 때 타오르는 연기와 함께 조상신을 떠나 보내며 제례는 끝납니다.
제기 이야기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한 실을 기준으로 필요한 제기는 제상과 준상에 놓는 놋쇠 그릇 66개, 대나무 그릇 13개, 나무그릇 14개, 도자기 2개이고, 제상은 12개, 관세기 4개, 음복기와 망료기 각 3개를 합하여 총 24종에 114개가 사용된다고 합니다.
정전과 영녕전에는 총 35실이 있어서 종묘제례시에는 모두 4,400여 점이 필요하며, 여기에 공신당에서 사용되는 5종류 590여 개를 합하면 모두 29종류에 약 5,000여 개가 사용해야 합당한데 그러나 여러 가지 여건상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 1실만을 원형 그대로 진설하고 나머지 33실에 대해서는 간소화하여 진설하고 있습니다.
종묘제례에 올리는 제수는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아 모두 생것을 올리며 상하기 쉬운 제수는 소금에 절이거나 삭히고, 육류는 육포를 쓰며,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을 하고, 수저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묘제례 때 제물을 담는 그릇으로 쓰이는 제기의 종류는 63종으로 그 형태는 옛날 중국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비슷합니다. 제기는 목재와 대나무 그리고 자기와 놋쇠로 만들었는데 조선 후기들어 유기(놋그릇)로 바뀌었습니다.
제기에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그 형태나 색깔 등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우리 선인들은 이와 같이 제사 절차나 제기 또는 조상숭배사상에 깊은 의미를 부여 하여 예를 행하였던 것으로 제기의 종류 및 용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기의 종류 및 용도
1.작(爵)
작은 잔을 떠 받치는 3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행하는 대.중.소사와 궁중에서 쓰이는 술잔은 한격 높여 작이라 부르는데 모양이 참새와 비슷하다고 하여 참새작(雀)과 발음이 같은 '벼슬작(爵)'으로 명명되었답니다.
무게는 1.1kg 정도로 무거운 편이며 다리는 셋인데 이는 천(天). 지(地), 인(人)의 원리에 따른 것이며 작 양쪽으로 기둥이 솟아 있는데 한쪽은 용의 머리로 만들어 졌으며 작의 입은 입을 대고 마시는 안쪽은 둥굴고 반대쪽은 조금 뾰족합니다.
두개의 기둥에 대해 시경, 예기도설에는 「마시기를 다하지 않는 뜻을 취한 것이니 지나침을 경계한 것이다.」라고 설명했으니 쉽게 설명하면 작은 높은 기둥으로 술을 다 마시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인데 취하는것을 경계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기에는 有以小爲貴者 宗廟之祭 貴者獻以爵 賤者獻以散 尊者擧鱓 卑者擧角 五獻之尊門外缶 門內壺 君尊瓦甒 此以小爲貴也(유이소위귀자 종묘지제 귀자헌이작 천자헌이산 존자거선 비자거각 오헌지존문외부 문내호 군존와무 차이소위귀야) 라고 해서 작은 것을 가지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묘의 제례에 존귀한 자는 ‘작’(한 되)으로 술을 드리고 비천한 자는 ‘산’(닷 되)으로 드린다.
(술을 마실 때) 존귀한 자는 ‘치’(석 되)를 들고, 비천한 자는 ‘각’(넉 되)을 든다.
오헌(자남의 제후 술통을 벌여 놓는 법)의 술통은 부(호보다 더 많은 양)를 문 밖에 두고 호(1석)는 문 안에 둔다.
임금의 술통은 ‘와무’(5두)를 쓴다. 이는 작을수록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참고로
한 되들이 잔은 작(爵)
두 되들이 잔은 고(觚)
세 되들이 잔은 치(觶)
네 되들이 잔은 각(角)
다섯 되들이 잔은 호(壺)라고 합니다.
대제 때는 신주 한위당 3개의 작이 올려지는데 처음 올리는 초헌용 작에는 예저가 담겨 올려지고, 두번째 올리는 아현용 작에는 앙제가 담겨 올려지고 세번째 올리는 종헌용 작에는 청주가 담겨저서 차례로 올려집니다.(대제가 아닌 일반 제사에서는 한 번만 올리는데 일반적으로 청주를 올립니다.)
몸체 한쪽에는 손잡이가, 아래쪽에는 가늘고 긴 삼각(三脚)이 받치고 있으며 모양으로 보아 술을 데우는 데 알맞을 듯하나 술잔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작 (爵) 의 문양은 위 사진 2번째 하단과 같이 무늬는 회곡문(回曲文)이라고 하여 쉽게 표현하면 소용돌이 무늬로 원형과 4각형의 무늬가 회전을 하며 점점 작아지는 소용돌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2.작점(爵玷)
작 밑에 받침대가 있는데 이것을 점이라 부르는데 다르게 작판이라고도 부릅니다.
놋쇠로 만들며 작을 받친다 하여 작판으로도 불리는가 하면 점은 점유한다는 의미라고 하며 무게는 1.74kg로 제법 무겁습니다.
삼례도에는 「점은 작을 올리는데 쓰고 또 준을 받는데 쓴다고 하였는데 축사를 기재한 판과 작헌을 준비한 작을 반드시 둘 곳을 살펴서 놓는 것은 제사를 공경하고 삼가는 뜻을 보인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사각의 판에 가운데 원이 있는데 이는 선인들이 생각했던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천원지방의 원리를 딴 것으로 가운데 원의 있어 작을 올려 놓으면 움직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3.용찬(龍瓚)
찬(瓚)은 신령의 강림을 바라면서 신관례 때 울찬주를 붓는 주기로 용찬은 넓적하고 낮은 형태의 잔으로 안쪽에는 용머리를 다른 한쪽에는 손잡이를 부착하였는데 용머리는 찬으로 구멍이 뚫렸는데 구멍을 통해 술이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접시 형태의 찬반과 한 조를 이루는 용찬은 고대에는 옥으로 만들었으므로 옥찬(玉瓚) 또는 규찬(圭瓚)이라고 불렀습니다.
규찬이라고 부른 것은 세종실록 제기도설 규찬도에 의하면 찬부분만 옥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찬을 주철로 제작한 것은 오례의 내용을 인용해보면 '종묘, 영녕전 4계절과 납향 때 매 방마다 쟁반을 갖춘 용찬을각각 1개를 준소에 설치한다.'라는 기록으로 제향 때 종묘, 영녕전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료는 처음에는 옥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놋쇠로 만들며 용머리 ,몸통, 자루(손잡이)로 구분 되며 용의 입 안쪽에 구멍이 몸통까지 뚫려 있고 사라고 하여 용의 혀가 홈통으로 되어 입밖까지 나와 있는데 용두의 길이는 4촌으로 12cm정도로 만들어 졌습니다.
종묘제향 절차는 참신->신관례->강신->삼헌(초헌, 아헌, 종헌)->사신의 순서로 진행하는데 신관례라는 것은 조상의 혼령을 부르는 의식입니다.
이떼 먼저 3번 향을 사르는 삼상향을 하고, 울금향이 나는 울창주를 용찬(龍瓚)에 담고 신실 바닥에 있는 관지통에 붓는 관창이 이루어지는데 관창을 할 때 용찬을 통해 흘러나오는 울창주의 향내음을 따라 지하의 혼이 따라 올라와 신주에 임한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4.멱(冪)
아래 사진에 산뢰를 덮은 사각 검은 덮개를 덮는 다는 뜻의 덮을 멱(冪)자를 써서 멱(冪)이라고 합니다.
멱은 뢰뿐만아니라 이. 준, 변, 솥 등 제례기간동안 이용되는 모든 것을 덮는 물건을 통칭하는데 제사에 쓰일 희생을 덮는 덮개를 포함한 제물에 벌레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덮는 덮개를 통칭합니다.
『세종실록』 「오례 」 에 멱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중국의 석전의라는 문헌에서 인용한 삼례도인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삼례도에 이르기를 「포의 폭은 2자2치인데 이를 둥글게 하였으나 지금은 포 1폭으로서 네모를 취하여 이를 만든다.고 했는데 중국의 멱은 둥근천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각으로 만든다. 」 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주례에서는 「팔찬은 천지에 헌작하는 까닭으로 굵은 포건을 사용하니 질박을 숭상하기 때문이요, 육이는 종묘에 사용하는 까닭으로 고운포건을 사용한다. 구름을 그려서 문채를 놓은 것과 특성의 멱은 굵은 갈포를 사용한다. 」 라고 기록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멱은 제기의 뚜껑 역할을 하는 보조 도구이자 제물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조선왕실의 멱은 중국의 석전의에 나오는 삼례도와 주례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멱의 종류에는 변을 덮는 변멱, 이. 준. 뢰를 덮는 멱은 찬멱, 솥을 덮는 멱은 솥(鼎),정자를 싸서 정멱(鼎冪)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멱에 보문을 장식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문양이 없는 멱을 사용하다가 광해군 때부터 덮는 멱에 붉은 색의 구름 문양을 장식한 멱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5.용작(龍勺)
용작은 조선왕실 제사에서 작헌과 관세에서 술이나 물을 뜨는 국자를 용작이라고 부릅니다.
용작은 산뢰위에 멱을 얹고 그 위에 용작을 얹어 진설하였습니다.
용작에는 3가지 종류가 있는데
주용작(酒龍勺)은 위 사진 좌측에 있는 것으로 술통에서 술을 떠서 작에 부을 때 쓰며 무게는 1.2kg입니다.
작세작(爵洗勺)은 규격이 조금 크고 물통에서 물을 떠내서 작을 씻을 때 쓰는데 위 사진 산뢰위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관세작(盥洗勺)은 술을 뜨는 작보다 조금 크며 손을 씻기위해 물통에서 다른 세기로 물을 떠낼 때 사용하는데 위 사진 우측의 것입니다.
세종실록 오례를 따라 관세용 용작과 작헌용 용작은 같은 모양의 용작을 썼지만 서로 혼용할 수는 없었는데 제례를 집행하는 집사들이 헷갈려 실수를 하였는데 이에 영조 때, 관세용 용작과 작헌용 용작의 모양을 달리 만들자고 신하들이 의견을 올리자 영조는 물을 뜨는 바가지 부분을 꽃받침 모양의 뜻의 화악작을 만들어 종묘에 배치하도록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 이(彛)
우리나라 이(彛)의 기원은 중국 고대 의례에서 비롯되었는데 중국 고대 의례에서 술을 담는 술통이 변모하며, 이(彛), 뢰(罍), 준(樽) 등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예기에서는 상존왈작 중존왈설 하존왈대라 하여 준 중에서도 이는 상존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에 따르면 이(彛)는 장식 종류에 따라 6종류인 6이가 있었는데 6이는 닭 문양을 새긴 계이(鷄彛), 세 문양을 새긴 조이(鳥彛), 닭 문양을 새긴 계이(鷄彛), 문양이 없는 가이(斚彛), 눈 문양을 새긴 황이(黃彛), 호랑이 문양을 새긴 호이(虎彛), 원숭이 문양을 새긴 유이(類彛) 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도 이에대한 영향을 받아 닭 문양을 새긴 계이(鷄彛), 새 문양을 새긴 조이(鳥彛), 닭 문양을 새긴 계이(鷄彛), 벼이삭 문양의 가이(斚彛), 눈 문양을 새긴 황이(黃彛) 등 4이가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눈여겨볼 것은 중국의 가이는 문양이 없는 반면 우리나라 가이에는 벼이삭 문양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이(彛)는 계절에 따라 쓰이는데 봄철에는 계이가, 여름철에는 조이가, 가을철에는 황이가, 겨울철에는 황이가 쓰였습니다.
◈계이(鷄彛)와 조이(鳥彛)
조선의 의례서에서는「예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계절에 따라 술을 담는 술통을 지정하고 있는데 종묘 정전 우측 협실 제기고와 영녕전 좌측 협실로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쪽 판지에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술통을 지정하는 내용을 작은 쪽 판지에 새겨 달아 놓았다.
계이는 조이와 한 조를 이루며 쓰는 술통으로 봄에는 계이에 명수를 담고 조이에 울창주를 담으며, 여름에는 계이에 울창주를 담고 조이에 명수를 담습니다.
여기서 명수는 술이 아니고 깨끗한 물을 의미하고 울창주는 검은 기장으로 만든 향이 있는 술을 의미합니다.
조선의례서에서는 예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조이와 계이는 봉황과 닭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을 말한다. 닭은 동방을 상진하는 조물로 인(仁)에 해당되고 새는 남방을 상징하는 조물로 예(禮)에 해당된다. 이것이 선왕이 계이와 조이를 봄의 사(祠)제사와 여름 약(禴)제사 사용한 까닭이다. 봄의 사(祠) 제사에는 계이에 명수를 담고 조이에 울창주를 담고, 여름 약(禴) 제사에는 계이에 울창주를 담고 조이에 명수를 담는다.
6.계이(鷄彛)
술을 담는 술통으로 표면에는 닭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봄제사에는 명수를 담고 약제라고 부르는 여름제사에는 울창주를 담아 씁니다.
닭은 동방의 생물이니 음(陰)에 속하여 오행의 인(仁)을 뜻하며 비슷한 제기인 조이(鳥彛)는 새로 새는 남방을 상징하는 조물로 양(陽)에 속하여 예(禮)를 뜻하며 계이와 조이는 한쌍으로 사용합니다.
계이에 담는다는 울창주는?
울금이라는 향초를 넣고 검은 기장인 거와 함께 빚은 술로 검은 빛이 나고 독특한 향내가 나는 술로 지하에 있는 혼백이나 신을 모실 때 쓰인다고 합니다.
계이의 형태는 이와 받침에 모두 수탉이 새겨져 있으며 손잡이가 있는 것과 손잡이가 없는 것이 있는데 조선초기부터 손잡이가 없는 이가 사용되었으며 손잡이가 있는 이는 조선후기, 대한제국 때부터 사용된 것입니다.
7.조이(鳥彛)
술을 담는 술통으로 표면에는 큰 날개를 펼치고 있는 봉황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조이는 영조 대 이후에 만들어진 제기로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오래전에는 새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의 오례와 국조오례의 서례에서의 조이에는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이 새의 종류가 까마귀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부터 조이에는 새모습을 그리다가 광해군 때 봉화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영조 때 봉황으로 그리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세종실록 오례에 그려진 새가 까마귀냐?, 봉황이냐?의 문제로 여러 차례 논의 하였다고 하는데 정조 때 한 관원이 "주례도에서 조이의 鳥를 까마귀 烏(오)로 쓰고 까마귀를 그렸지만, 예기에서는 까마귀를 장식하는 경우가 없고 조(鳥)는 남방을 상징하므로 봉황이다."라고 하며 "그러므로 까마귀 烏를 쓰고 까마귀를 그린 것은 잘못 기록하고 잘못 그린 것으로 새 鳥(조)자를 까마귀 烏(오)자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왕에게 아뢰었다고 합니다.
손잡이가 있는 것과 손잡이가 없는 것이 있는데 조선초기부터 손잡이가 없는 이가 사용되었으며 손잡이가 있는 이는 조선후기, 대한제국 때부터 사용된 것입니다.
봄에 올리는 사 제향에는 울창주를 담고 여름에 올리는 약 제향에는 현주를 담아 쓰며 봉황새는 남방의 생물이라 양(陽)에 속하고 예(禮)를 뜻하는 제기로 계이와 한쌍으로 사용합니다.
현주(玄酒)란 글자를 직역하면 검은 술이지만 술이 아니고 맑은 물인데 물의 빛이 검게 보인다하여 검을 현을 쓴것이고 아주 옛날 술이 없을 때는 물을 썼던 것이 전래되어 온 것으로 종묘 대제 때에는 지금도 서편에 술통과 나란히 놓여 집니다.
◈가이(斚彛)와 황이(黃彛)
조선의 의례서에서는「예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계절에 따라 술을 담는 술통을 지정하고 있는데 종묘 정전 우측 협실 제기고와 영녕전 좌측 협실로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쪽 판지에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술통을 지정하는 내용을 작은 쪽 판지에 새겨 달아 놓았다.
가이(斚彛)와 (黃彛)는 한 조를 이루며 쓰는 술통으로 가을 제사에는 가이에 명수를 담고 황이에 울창주를 담으며, 겨울 제사에는 가이에 울창주를 담고 황이에 명수를 담습니다.
가이는 그릇 표면에 추수한 벼이삭을 장식하였고 황이는 그릇 표면에 청명한 기를 상징하는 황금 눈을 장식하였다.
조선의례서에서는 예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가(斚)는 稼(가)로 읽으니, 가이는 화가(禾稼)를 그린 것이다. 황이는 황목(黃目)의 준이다. 황목(黃目)은 황금으로 눈을 만든 것이니 0기(0氣)가 올라가매 황은 중(中)이요 눈은 기(氣)의 청명이다. 술잔속의 술을 따라서 밖에 청명함을 말한 것이다. 가을 제사와 겨울제사에 강신할 적엔 가이와 황이를 사용하는데 상나라에서는 가이를 사용하고, 주나라에서는 황목을 사용하였으므로 주나라의 이가 황색이었다면 상나라의 이는 백색이었던 것이다. 백색은 음(陰)의 질이니 의(義)요, 황색은 음(陰)의 미(美)이니신(信)이다. 이것이 선왕께서 가을제사와 겨울 제사에 가이와 황이를 사용했던 까닭이다.
8.가이(斝彛)
술잔으로 술잔과 술잔받침 표면에는 벼이삭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벼는 백색을 의미하며 음(陰)에 속하고 오행에서 의(義)를 뜻하며 형태는 손잡이가 없는것과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이(斝彛)는 곡식을 그린 것이며 가을과 겨울 제사에 신이 내려올 때에 가이와 황이를 사용하는데 은(상)나라에서는 가이를 사용하였고 주나라에서는 황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가을에는 가이에 명수를 채우고 겨울에는 신을 부르는 향기로운 울창을 채운다고 합니다.
9.황이(黃彛)
황이는 황금눈을 새긴 술항아리로 황은 5방중 가운데(中)으로 양(陽)에 속하고 오행에서 지(智)를 뜻하며 형태는 손잡이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이와 같이 가을이나 겨울에 사용하는 술잔으로 몸통에는 눈(目)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황이는 황목준으로 황목이란 황금으로 눈모양을 만든 것이니 울창주를 담는 최고의 잔으로, 황은 가운데를 상징하고 눈은 기(氣)가 청명한 것이니 그 안에 술을 따랐을 때 밖으로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을과 겨울 제사에 신이 내려올 때에 가이와 황이를 사용하는데 은(상)나라에서는 가이를 사용하였고 주나라에서는 황이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가을에는 황이에 신을 부르는 향기로운 울창을 채우고 겨울에는 명수를 채운다고 합니다.
◎ 준(罇)과 뢰(罍)
준은 국가제례에서 8종류의 술과 명수와 현주를 담는데 사용하는 술통과 물통을 말합니다.
중국 고대 「예서」에서는 6준이라고 하여 희준, 상준, 착준, 호준, 대준, 산준으로 구성되었는데 희준과 상준, 착준과 호준, 대준과 산준으로 각각 쌍을 이루어 사용해왔다고 하는데 이후 5준(희준, 상준, 착준, 호준, 대준), 1뢰(산뢰)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예서」에는 6준의 종류와 문양을 기록했는데 희준에는 소의 문양이, 상준에는 코끼리 문양이, 호준 착준, 대준은 문양이 없으며 산준에는 산의 문양을 그렸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준들은 예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종묘대제에서는 희준, 상준, 호준, 착준의 4준과 1뢰(산뢰)를 사용합니다.
10.희준(犧罇)
犧(희)는 대제 때 신에게 바치는 제물 중 하나로 소나 양을 제물로 사용했으므로 犧(희)는 소나 양을 의미하므로 희준에는 소나 양의 문양 또는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용도는 술을 담는 술통의 한 종류입니다.
조선왕실에서쓰던 희준은 세종 원년에 힜었던 작헌문선왕의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종 이전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실의 제기도설은 중국문헌 「사림광기」, 「예서」, 「석전의」를 인용한 것인데, 『 세종실록 』 「오례」에서는 「사림광기」, 「예서」만 실렸고, 『 국조오례의서례 』 에서는 「석전의」가 실려 있다고 하는데 이러합니다.
「사림광기」 에서는 희준은 소를 준의 배위에 장식한 것이니 구경의 최대 지름(圓俓)이 1자2치요, 바닥면은 지름(低徑)이 8촌이며, 상하의 내부 지름(空徑)이 1자5푼이요, 발(足)의 높이가 2치이다.
「예서」에서는 희준은 주나라의 준을 본 뜬 것이다. 소는 큰 희생이고, 기름은 향내가 나므로 봄의 형상에 적당하고, 코끼리는 남월(南越)에서 생산되니 이것이 선왕께서 희준과 상준을 봄의 사(祠)제사와 여름 약(禴)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
「석전의」에서는 희준은 무게가 9근 10냥이고, 발까지 합한 높이는 6치1푼이고, 입구의 지름은 2치4푼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높이는 8치2푼이고, 귀의 높이는 2치1푼이며 귀의 너비는 8푼5리이고, 깊이는 3치7푼이다.
희준의 제질은 초기에는 분청사기로 만들었다가 세종 후반에 철기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현존하고 있는 희준은 확실한 년대를 알 수 없는데 종묘의궤에 실린 희준의 몸통형태, 소의 얼굴모습, 길이와 곡선형태, 몸의 주름이 매우 흡사하여 종묘의궤에 기반하여 17세기후반이나 그 이후에 제작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1.상준(象罇)
상준은 몸체 표면에 코끼리 문양을 새기거나 몸체 자체를 코끼히 형상으로 만든 술을 담는 술통이나 물을 담는 물통으로 봄과 여름 제사에 희준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었으며 앙제와 명수응 담았다고 합니다.
「예서」에서 코끼리는 남월(南越)에서 생산되니 여름 약(禴)제사에 적합하다고 했습니다.
조선왕실에서쓰던 상준은 세종 원년에 힜었던 작헌문선왕의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세종 이전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실의 제기도설은 중국문헌 「사림광기」,「예서」, 「석전의」를 인용한 것인데,『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사림광기」,「예서」만 실렸고,『 국조오례의서례 』에서는「석전의」가 실려 있다고 하는데 이러합니다.
「사림광기」에서는 상준은 코끼리를 준의 배위에 장식한 것이니 구경의 최대 지름(圓俓)이 1척3치요, 바닥면은 지름(低徑)이 8치이며, 상하의 내부 지름(空徑)이 1척5푼이요, 발(足)의 높이가 2치이다.
「예서」에서는 희준과 상준은 주나라의 준이다. 소는 큰 희생이고, 기름은 향내가 나므로 봄에 알맞다. 코끼리는 큰 짐승이고 남월(南越)에서 생산되니 이것이 선왕께서 희준과 상준을 봄의 사(祠)제사와 여름 약(禴)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
「석전의」에서는 희준은 무게가 10근이고, 발까지 합한 높이는 6치8푼이고, 아가리의 지름은 1치8푼이다. 귀의 너비는 1치2푼이고, 귀의 길이는 1치9푼이며 깊이는 4치9푼이다.
상준은 희준과 한 쌍으로 쓰는데 현주와 앙제(盎齊)를 담아 아헌례에 올리며 봄과 여름 제사에 쓰입니다.
코끼리는 남쪽나라의 대수로 양(陽)에 속하는 지기이며 앙제란 백차주(白醝酒)와 같다 하였는데 이는 오래되어 잘 익은 텁텁한 흰 술이 된다는 뜻으로 잘 담가진 막걸리를 백차주라고 합니다.
상준은 주나라의 술잔을 본뜬 곳으로 희준과 마찬가지로 봄 여름 제사에 쓰입니다.
12.착준(著罇)
착준은 가을과 겨울 제사에 호준과 함께 헌작을 위한 술을 담아 준소상에 올리는 제기입니다.
착(著)은 양(陽)이 내려와 땅에 붙는 것을 의미하는 한자로 착준의 겉 면에는 양기가 위에서 차츰차츰 내려와 서서히 땅에 닿는 모습을 상징하는 문양을 그리거나 새겨 넣었습니다.
또한 착준의 양 어깨에는 양기를 상징하는 동물머리모양 장식을 부착하였습니다.
조선왕실 제게도설의 착준에 대한 것은 중국의 석전의와 예기를 인용한 것으로 이러합니다.
「예서」에서는 착준은 양이 내려와 땅에 부착된 것을 형상화하였으며 호준은 음이 빙둘러서 만물을 감싼 것을 형상화 하였으니 이것이 선왕께서 착준과 호준을 가을의 당(當)제사와 겨울 0(0)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
「석전의」에서는 착준은 무게가 4근 7냥이고, 높이가 8치4푼5리요, 구경이 4치3푼이요, 동체 가운데 지름이 6치2푼이고, 깊이가 8치3푼이다.
중국 문헌에서는 착준에는 파동이 큰 곡선이 동체의 중심을 돌아가고, 여백에 여러 작은 무늬들이배치되어 양기가 내려오는 모습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문양은 중국청동기 문양의 하나로 매미문이라고 합니다.
매미문이라는 것은 매미의 날개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매미문은 음식의 정결함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오례 」에도 석전의와 같은 문양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해지는 착준도 거의 비슷한 형태입니다.
13.호준(壺罇)
호준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가을과 겨울 제사를 치를 때 사용하는 술통으로, 착중과 호준은 쌍을 이루어 호준에는 앙제와 명수를 담고, 착준에는 예제와 명수를 담았습니다.
『조선왕실 제례도설』의 호준에 대한 것은 중국의 석전의와 예기를 인용한 것으로 이러합니다.
「예서」에서는 착준은 양이 내려와 땅에 부착된 것을 형상화하였으며 호준은 음이 빙둘러서 만물을 감싼 것을 형상화 하였으니 이것이 선왕께서 착준과 호준을 가을의 상(嘗)제사와 겨울 증(烝)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
「석전의」에서는 호준은 무게가 4근 1냥2전이고, 높이가 8치4푼, 입지름이 4치5푼이요, 동체 가운데 지름이 6치이고, 깊이가 7치1푼이다.
호준은 음이 빙 둘러서 만물을 감싼 것을 형상화 하였 는데 도설과 유물에서 호준의 외면은 곡선과 나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문양이 음의 기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오례 」에 의한 도설에는 좌측 상단에서부터 지류처럼 뻗어 내려오는 선들과 겉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용돌이 문양도 음의 기운을 표현한 형식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종묘의궤에서는 나선문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14.준(著罇)
준은 술이나 명수 등을 담기 위해 만든 그릇입니다.
항아리 모양의 제기로 입이 넓어 술이나 물을 담거나 퍼내기가 편하게 만들어졌으며 표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15.산뢰(山罍)
술을 담는 술통입니다.
조선왕실 제례에 사용하는 5준1뢰에 해당하는 술통으로 몸채애 구름이 낀 산의 향세와 우뢰(雷)문양을 장식하여 산뢰라고 부릅니다.
조선왕실의 산뢰는중국의 산뢰와 산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음복례에 쓰이는 청주와 현주를 담아 준소상에올렸는데 조선후대에는청주를 대신하여 예주를 쓰기도 했습니다.
『 조선왕실 제례도설』 제례도설의 산뢰에 대한 것은 중국의 예서와 주례도를 인용한 것으로 이러합니다.
「예서」에서는 산뢰는 산준이다. 준에 그림을 그려서 산에 구름이 있는 형상을 만든다.
뢰(罍)라고 이르는 것은 구름과 우뢰가 널리 혜택을 베품이 임금의 은혜를 여러 신하들에게 미치게 함과 같음을 취하여 형상화한 것이다. 산뢰는 하라라 우왕의 준이다.
「주례도」에서는 산에 구름이 있는 형상을 그려서 한 개에는 현주를 채우고, 한 개에는 앙제를 채운다.
표면에 산과 구름 그리고 우뢰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널리 천지만물에 혜택을 베푸니 곧 임금이 널리 만백성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산뢰는 춘하추동 사계절 한쌍을 쓰며 하나는 현주를 담고 하나는 청주(양제)를 담으며 종헌례 시 올리는 술을 담는 제기로 종묘나 각 릉의 제향에 가장 많이 쓰이는 술통입니다.
산뢰의 손잡이나 에는 용작의 끝 부분 과 같이 용두를 만들었으며 양 어깨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데 위 사진에서와 같이 손잡이가 새끼모양과 짐승의 머리모양 형태가 있습니다.
산뢰의 문양에 대해서
「예서」에서 이미 운운한 것처럼 산뢰의 뢰(罍)는 우뢰를 뜻하는 雷(뇌)나 壨(뢰)에사 가0한 것으로 것은 구름과 우뢰가 널리 혜택을 베푸는 것이 마치 임금의 은혜를 여러 신하들에게 미치는 것과 같음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서 산뢰에 장식한 구름과 우뢰문양은 제왕의 덕이 신하들에게 미치듯이 제사를 올리는 정성이 온나라에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는 문양이며, 그 중 뇌문은 방형의 나선문으로 우뢰와 번개를 형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입니다.
산뢰는 일반적으로 2개가 한 조를 이루어 사용되는데 한 개에는 현주를 담고, 한 개에는 청주를 담는데 현주는 술이 아니고 검게 보이는 물인데 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이 술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사준(沙罇)
용준(龍罇)이라고도 부르며 임금이 음복을 할 때 어주를 담는 술통입니다.
준의 종류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종류가 많은데 위 용준은 국보급에 준하는 제기로 고궁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데 <국조오례의>에는 사준이라고 명칭되어 있은데 용준은 임금이 제사를 마치고 음복을 할 때 임금의 어주를 담는 술통으로 용준의 표면에는 용2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로 만들어 사용했으며 후기 들어 놋쇠가 만들어 졌습니다.
◎등(㽅)과 형(䤯)
등과 형은 모두 국을 담는 갱으로 양념이나 간을 한 국을 담는 갱을 등이라고 하고, 양념이나 간을 하지 않은 국을 담는 갱을 형이라고 하는데 외관으로 식별하는 방법으로는 갱의 밑 부분에 3개의 다리 즉 삼족(三足)이 없는 것은 등이고, 삼족이 달린 것이 형입니다.
등과 형은 초기에 도자가리 만들어 쓴 것 같은데 정조 때의 기록을 보면 제례를 치르고 난 후 등과 갱인 많이 깨져 두께를 더 두껍게 만들어 파손을 줄였다는 기록 등이 나오기도 합니다.
17.등(㽅)
조선왕실의 등은 양념과 간을 하지 않은 국을 담는 제기로 양념과 간을 하지 않은 소고깃국은 우갱(牛羹), 양념과 간을 하지 않은 양고깃국은 양갱(羊羹), 양념과 간을 하지 않은 돼지고깃국은 돈갱(豚羹) 이라고 해서 등에 담았습니다.
이에 반해 양념을 하고 채소를 넣은 갱을 화갱(和羹)이러고 해서 소고깃국은 우화갱 (牛和羹), 양고깃국은 (羊和羹), 돼지고깃국은 돈화갱(豚和羹)으로 형(䤯)에 담았습니다.
본래는 진흙을 다듬어 구워서 만든 제기로 와두(瓦豆)라고 했으며 정확한 규격은 없었는데 지금은 모두 유기로 만들며 형태는 목두와 비슷한 모양과 작은 항아리 모양이 있습니다.
제상 서쪽부터 돼지고기와 무를 넣고 끓인 시대갱, 양고기와 무를 넣고 끓인 양대갱, 소고기와 무를 넣고 끓인 우대갱을 올립니다.
밑 부분은 둥굴고 넓은 받침 형태이고 위로는 국을 담을 수 있는 모양으로 몸체 가운데는 짐승 얼굴 무늬의 띠를 두르고 있으며 도설에는 뚜껑이 있으나 현재는 뚜껑이 없습니다.
18.형(鉶)
국(갱)을 담는 술병 모양의 제기로 위의 등과 다른 점은 등은 양념을 하지 않은 갱을 담는 반면 형은 화갱을 담아 올리는데 화갱이란 무, 다시마, 채소 등을 넣어 다섯가지 맛을 갖추어 끓여 간을 한 국을 말합니다.
밑에 받침 역할을 하는 짧은 다리가 3개 달려 있어 간료등과 구분을 합니다.
몸통은 밋밋한데 등과같이 짐승 얼굴문양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 관세기(盥洗器)와 세뢰(洗罍)
제관들이 손을 씻기 위한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입니다.
제례에서 제관들이 손을 씻는 행위는 단지 청경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손을 씻는 행위만으로도 공경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제례에서 집시관들이 손을 씻을 때 물을 담은 대야를 관세 또는 관세기(盥洗器) 라고 합니다.
손을 씻는 대를 관세위라고 부르는데 관세위에는 물을 담아 둔 항아리인 세뢰(洗罍), 세뢰에서 물을 떠서 관세기에 담는 국자형태의 작(勺), 세를 올려두는 세대, 손을 닦을 수건을 담는 대나무 바구니를 폐라고 하고 폐에 담아두는 수건을 비라고 합니다.
왕실제례에서 세와 세뢰를 사용하는 의식은 제사에서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 전 불결한 것을 씻어내고 공경하는 태도를 갖추기위한 행위였습니다.
19.관세기(盥洗器)
제례에서 집시관들이 손을 씻을 때 물을 담은 대야를 관세 또는 관세기(盥洗器) 라고 합니다.
손을 씻는 물과 작을 씻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으로 표면에 구름과 우뢰모양이 그려져 위엄과 공경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으며 손을 씻을 때 작으로 물을 떠서 부으면 한 사람씩 손을 씻는게 원안이나 종묘대제 때 제관의 수가 300여명이 되므로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서 세뢰를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관세기에 물을 부어 놓고 손을 씻도록 하고 있습니다.
관세기는 손을 씻을 때 쓰는 그릇으로 안쪽에는 물고기를 양각하여 물이 흘들리면 마치 물고기가 뛰어 노는 모양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용작으로 세뢰의 물을 떠서 부어 손을 씻었는데 영조 대에 이르러 용작대신 세작이 사용되었는데 용작은 끝부분에 용머리가 있고 세작은 꽃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20.세뢰(洗罍)
제례에서 집시관들이 손을 씻는 대를 관세위라고 부르는데 관세위 위에는 물을 담아 둔 항아리를 세뢰(洗罍) 라고 하는데 세뢰라는 이름은 물을 담는 물통 외형 표면에 구름과 우뢰무늬를 장식했기 때문 입니다.
원래는 한자로 표기할 때 우뢰를 뜻하는 雷를 써야하는데 뇌문을 장식한 항아리 형태의 뢰(罍)를 사용했는데 이같은 건 산뢰에서도 같습니다.
운회에서 설명하기를 씻을 때 사용하는 관기에 구름과 우뢰문양을 사용한 것은 운뢰의 위엄을 취하여공경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뢰는 항아리 형태로 물을 뜨기 위한 국자 모양의 작이 필요한데 이를 세작이라고 부르며 제를 집행하는 집사들이 용작과 세작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한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는 용작과 세작을 분리하여, 용작은 손잡이 끝부분에 용머리를 새기고 세작은 손잡이 끝부분에 꽃모양을 새겨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21.이(匜)와 이반
이(匜)는 왕이 손을 씻을 때 쓰는 대야를 말하는데, 조선왕조실록 종묘의궤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하며 이반은 이(匜)와 이를 받치는 받침으로 구분되며 몸체에는 뇌문이 가득 채워져 있으며 위로 기하학 문양을 배치했습니다.
뚜껑에는 10개의 구멍이 뚫린 날개가 중앙을 가로로 부착되어 있으며 양 옆으로 단추 모양2개, 안상문 모양2개의 꼭지가 달려 있습니다.
몸통은 전체적으로 나뭇잎 문양 등이 새겨져 있으며 한쪽 측면에 2단으로 된 날개가 부착되었고 용머리가 장식된 손잡이를 부착하였습니다.
반은 이(匜)와 같은 용도로 쓰였지만 이는 임금이 손을 씻기위한 물음 담는 제기였다면 반은 왕이 아닌 제관들이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는 제기로 제사를 지내기 전, 왕은 제관들과 같은 곳에서 손을 씻지 않고 별도로 마련된 물동이인 관세이와 대야인 관세반을 사용했는데 손잡이 위는 용머리로 장식을 했습니다.
◎보(簠)와 궤(簋)
보(簠)는 벼(稻)와 기장(梁米)을 담는 제기이고, 궤(簋)는 매조(黍米)과 차조(稷米)를 담는 제기입니다.
서로 조형적 관계가 깊은 보와 궤는 서로 한 쌍이 되어 나란히 제상에 진설되는데 보와 궤는 변과 두와 함께 제기를 대표하는 기물입니다.
『역경 』에서는 막중한 제향에는 보와 궤가 우선이 된다고 하였으니 보와 궤를 강조한 것입니다.
『 고려사 절요 』에서는 종묘 제사에 쓸 보와 궤 그리고 변과 두를 담당하는 관인이 있다고 언급했으니 고려시대에도 좀요제례에서 보와 궤 그리고 변과 두를 중하게 여기며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보(簠)
보는 쌀과 수수를 담는 그릇이며 궤는 메조와 차조를 담는 그릇으로 제상 중앙에 진설합니다.
보(簠)의 한자를 보면 위에 대나무 죽(竹)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제기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보는 옛날 중국에서 대나무를 쪼개서 보를 만들었으므로 한자표기에 대나무 죽(竹)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궤는 위에서 볼 때 입구가 둥글게 만들어 하늘을 뜻하는데 보는 궤와 달리 사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선인들은 지구가 4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천원지방, 즉 보는 땅의 모양을 본떠 사각으로 만들었습니다.
몸체 중앙에 짐승 머리 장식을 부착하고 손잡이가 달렸으며 뚜껑은 몸체를 뒤집어 놓은 것과 흡사하며 뇌문과 파도문 등이 새겨져 있으며 뚜껑 윗부분은 물결모양의 굽장식을 부착했는데 여의두문양과 삼각형문양이 있습니다.
보의 그릇이 되는 아래부분으로 위에서 본 모습이고 궤와 같이 아래 부분과 위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뚜껑 위에는 장식이 되어 있으며 아래 몸통 각 면마다 짐승 머리모양의 장식이 되어 있고 그 아래받침이 달려 있습니다.
조선왕실에서는 보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문헌 『석전의 』, 『주례 』, 『삼례도 』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이러합니다.
「석전의」에서는 '보는 구리를 사용하여 주조하였는데 뚜껑까지 아울러 무게가 13근2냥이요, 뚜껑까지 전체의 높이는 7치, 깊이는 2치, 속의 너비는 8치1푼이며, 동체 가운데 직경은 1자1푼이다.' 고 하였으며
「주례」에서는 '네모난 것은 보라 하고, 둥근 것은 궤라 한다.' 고했으며
「삼례도」에서는 '보는 밖은 네모지고 안은 둥굴며 다리의 높이는 2치, 네모서리는 죽이고 붉은 칠을 하여 벼와 기장을 담는다. 모두 거북 덮개가 있다.' 고 하였으니 천원지방을 말함입니다.
위에서와 같이 무게는 13근2냥이니까 kg로 환산하면 7.8kg이며 음기(陰器)로서 궤가 천원인 반면 보는 지방, 즉 땅은 네모지다는 선인들의 생각에 따라 사각형으로 만들어 졌으며 신주 한 위당 한쌍의 보에 쌀과 양미(기장쌀)을 각각 담아 제상 가운데 올려집니다.
조선왕실 전례서에서 규정하는 보는 금속제이지만 금속이 귀했으므로 지방은 금속이 아닌 분청사기, 백자, 합금유제가 사용되다가 세종 때 차차 권역을 넓혀 지방에서도 금속데 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23.궤(簋)
보는 쌀과 수수를 담는 그릇인데 반해 궤는 메조와 차조를 담는 그릇으로 제상 중앙에 진설합니다.
궤는 보와 서로 한 쌍이 되어 나란히 제상에 올려지는데 고려시대에는 유교식 제사의 영향으로 보와 궤를 사용했고, 조선시대에서는 종묘나 문묘, 그밖에 나라 제사에 사용했습니다.
궤의 기원은 중국 상나라 때부터라고 하는데 '하늘은 둥굴다'라는 천원(天圓)의 뜻을 담아 겉은 둥굴고 속은 네모진 외원내방(外圓內方)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며 안과 박이 모두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유제로 무거운 편으로 몸체에는 곡선문양과 수면 문양을 음각했으며 손잡이에는 짐승의 머리 형상과 같이 만들었으며 뚜껑은 궤를 뒤집은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모서리마다 꽃잎 모양의 장식을 부착하였습니다.
궤의 뚜껑에는 4개의 꼭지가 달려있고 4다리에는 수면문 또는 눈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를 사목문이라고 합니다.
사목(四目)이란 4개의 눈을 뜻하는데 이는 임금이 민생의 실상을 눈으로 보듯이 훤하게 아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궤의 문양은 사목이외의 기하학적인 형태나 무늬가 없는 무문형태도 있습니다.
다리의 4목 형태는 조선시대 전체적으로 나타나는데 4목은 역귀를 쫓는 벽사의 의미로도 사용된 것이라고 하는데 조선왕실의 관례, 흉례, 나례에서 역귀를 쫓는 가면에서도 4목이 사용된 것은 역귀를 쫓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조선왕실에서는 보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문헌『석전의 』,『주례 』,『대명집례 』를 참고했다고 하는데 이러합니다.
「석전의」에서는 '궤는 구리를 사용하여 주조하였는데 뚜껑까지 합하여 무게가 9근이요, 뚜껑까지 전체의 높이는 6치7푼, 깊이는 2치8푼, 속의 너비는 5치이며, 가운데 직경은 7치9푼, 너비는 5치6푼이다.' 고 하였으며
「주례」에서는 '보는 방형이고, 궤는 원형이다.' 고 했으며
「대명집례」에서는 '궤는 구리로 만든다. 무게는 11근이고 뚜껑과 발을 합한 높이는 7치3푼이다. 아가리 지름은 긴 쪽이 8치3푼이고, 가로 너비는 6치8푼이다.' 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실의 궤의 모양은 사발 형태로 2개의 손잡이가 좌우 대칭으로 달려 있고 4개의 높은 굽이 있습니다.
24.촉대와 와룡촉대(燭臺와 臥龍燭臺)
우리가 초를 꽂는데 사용한다 해서 촛대로 부르며 한자표기로는 촉대(燭臺)입니다.
촛대는 제상이나 준소상에 불을 밝히는 조명기구로 쓰이는데 제기도설을 보면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실려있지 않았고, 인조 대에 만든 제기악기도감의궤에서 처음 실렸고, 이후로 종묘도설에도 실리기 시작한 것을 본다면 조선초기에는 촛대를 필수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기도 했으나 지금은 놋쇠로 만드는데 촉대는 높이가 한자(30cm)로 제향을 모실 때 황초를 꽂아 제상 좌우 및 필요에 따라 적소에 불을 밝히는데 사용하며 와룡촉대는 높이가 3자(90cm)로 제향을 드릴 때 황초를 꽂아 관지통 좌측에 세워 혼백이 오르는 길을 밝힌다고 하며 축관이 축을 읽을 때 주위를 밝히는데 쓰입니다.
와룡촛대는 예전에는 쓰지 않았던 이름인데 현재 쓰는 와룡촛대는 조선이 망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할 때부터 부르고 있습니다.
제례는 원래 밤에 치르는 행사이므로 불을 밝히는 도구가 필요했으니 이 중 하나가 촛불이었고 촛불을 꽂는 대가 촛대로 요즘은 종묘대제를 낮에 올리고 있지만 이는 사람들에게 조선시대에 이렇게 제를 올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낮 시간에 드리는 것입니다.
원래 종묘제례는 새벽2시경 시작하여 다음날 오전 7시 또는 9시까지 거행했다고 합니다.
25.향로와 향합(香爐와 香盒)
향로는 향을 피우는 제기입니다.
향을 태운 연기로 천상의 혼을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제기이며 향합은 향을 담아 보관하는 제기 입니다.
조선왕실에서 주로 사용했던 향로는 아래 사진에서와 같은 용머리 뚜껑이 있는 향로로 일반적으로 용향로(龍香爐)라고 부르며 학술용어로는 용뚜껑 3개다리가 달린 향로라는 뜻의 용개삼족향로(龍蓋三足香爐)라고 합니다.
종묘제례에서 향로가 사용한 기록은 광해군 때 의 제기도간의궤에서 처음 기록되었으며 종묘 향로의 변천이 일기 시작한 것은 숙종 대였는데 용문양의 뚜껑이 달린 용개삼족향로의 등장도 숙종대에서부터인데 시대별로 향로의 특징은 시간이 지나며 후대로 가면서 뚜껑이 있는 용의 목이 점점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숙종32년에 편찬한 종묘의궤에서는 세밀하고 정확한 용개삼족향로 실려있는데 현존하는 향로는 종류도 다양하고 향로의 수도 많지만 종묘의궤에 실린 향로와 같이 펴면의 문양이나 회문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향로는 없으며 용머리 뚜껑이나 삼족이 달린 형태를 갖춘 향로는 다수가 있다고 합니다.
향로의 몸통을 받치는 다리는 천지인의 원리에 따라 셋으로 만들어졌고 뚜껑은 용으로 조각을 했는데 용의 머리가 우뚝 솟아 위엄을 나타냈으며 향을 피우면 연기가 구름위를 피어오르는 형상과 같으며 몸통 양쪽에는 손잡이 역할을 하는 기둥이 솟아 위엄을 더해줍니다.
강신례 때 초헌관이 향을 세번 집어넣으면 향내음이 그윽히 풍기는 연기를 타고 천상의 혼이나 귀를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숯불을 담는 제기입니다.
종묘의궤에서 향로의 높이에 대해서는 기록되지 않아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으나 30cm 전후로 추정할 뿐입니다.
향을 담는 향합에는 목합과 옥합이 있었으나 지금은 놋쇠로 만들며 향을 담아 뚜껑을 덮어 보관하는 제기입니다.
종묘제향에서 향합의 위치는 향로 동쪽(우측)에 설치합니다.
속제용 향합이 은제로 제작되고 다양한 문양을 몸체에 새긴 것에 비해 젱제용 향합은 장식이 절제되고 유동합금제로 만들어졌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26.비(篚)와 폐비(弊篚)
대나무를 잘개 쪼개서 만든 일종의 바구니로 폐라는 예물을 담아 폐비라고 합니다.
<향로 뒷쪽에 있는 비인데 흰 명주가 폐라는 예물입니다.>
모시를 규격대로 한 필을 만들어 비에 담아 신주 한 위에 한 필씩 담아 올리는데 종묘대제에는 한얀 백폐를 담아 올리고, 사직이나 원구단 등에는 파란 청폐 또는 검은 빛의 흑폐를 담아 올리는 제기입니다.
비에 폐를 담으면 폐비, 작을 담으면 작비, 건을 담으면 건비라고 부르며 폐비가 놓이는 위치는 위 사진에서와 같이 제상 중앙에 놓는데 희생을 담은 조와 나란히 놓습니다.
중국에는 비에 뚜껑이 있는 반면 조선왕실 폐비는 뚜껑이 없습니다.
◎찬기용 제기
정제용 제기 중 각종 찬물을 담는 제기를 찬기용 제기로 구분하는데 찬기용 제기에는 변, 두, 보, 궤, 등, 형, 조, 생갑, 모혈반 등이 있습니다.
◈변(籩)과 두(豆)
변과 두는 제기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제기입니다.
삼례도에 따르면 변(籩)은 대나무를 얽어 만든 제기로 마른 음식을 담는데 쓰이고, 두(豆)는 나무를 깎아 만든 제기로 물기가 있는 음식을 담는데 쓰인다고 했습니다.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변과 두는 소박한 재질, 원형을 유지하는 형태 등 재질이 천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양 강조하여 변 (籩) 을 죽변(竹籩) 이라고도 하고 두(豆)를 목두(木豆)라고도 합니다.
두는 원래 높은 다리나 발을 가진 접시의 제기로 이아의 석기편에는 목두를 두라하고, 죽두를 변이라 하며 와두를 등이라 한다. 라고 3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27.죽변(竹籩)
죽변 (竹籩)의 본래의 이름은 변(籩)으로 변은 마른 음식을 담는 제기인데 위는 접시 형태로 제물을 담을 수 있도록 했으며 원통형의 높은 다리가 달려 있습니다.
제기도설에 기록된 변은 입구지름이 4치9푼(14cm), 받침다리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치9푼(16.9cm), 음식물이 담기는 내부의 깊이는1치4푼(4cm),받침다리의 지름은 5치1푼(14.6cm)인데 이러한 변의 치수는 석전의에서부터 조선시대 세종실록 오례, 대한예전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실의 제기도설은 중국의 문헌 석전의, 예기 교특생, 주례, 삼례도 등 4건을 참고하였는데 이러합니다.
석전의에서는 '변은 대나무로 만든다. 입구지름이 4치9푼(14cm), 받침다리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치9푼(16.9cm), 음식물이 담기는 내부의 깊이는1치4푼(4cm),받침다리의 지름은 5치1푼(14.6cm)이다. 건(巾)은 모시를 쓰는데 겉은 검은색이고 속은 붉은색이며 1폭짜리 원형이다' 라고 했으며
예기 교특생에서는 '정과 조는 홀수로 하고 변과 두는 짝수로 하는데 이것이 음양(陰陽)을 구분하는 뜻이다.'라고 하고
주례와 삼례도에서는 '변에는 마른 물건을 담고, 두에는 젖은 물건을 담는다.'고 했습니다.
변은 대나무를 잘게 결대로 쪼개서 장구형으로 만들었는데 양기(陽器)로 그 계절에 생산되는 생과실과 열두가지(분자, 구이, 흑병, 능인, 진자, 율황, 백병, 녹포, 검인, 건조, 어수, 영혐) 마른 제수를 담아 올리는 데 사용하는 제기이며 제상 동쪽에(신위쪽에서 보면 우측, 제주가 볼 때 좌측) 2종 6행으로 진설합니다.
28.목두(木豆)
변과 함께 제사에 가장 기본이 되는 제기로 재질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목두는 음기(陰器)로 음(陰)에 속하는 12가지(토해, 근저, 녹해, 삼식, 이식, 돈박, 청저, 탐해, 구저, 비석, 어해, 순저) 젖은 음식을 담아 제상 서쪽(신위쪽에서 보면 좌측, 제주가 볼 때 우측) 에 2종 6행으로 진설합니다.
두의 형태는 다양하여 접시형, 주발형, 다리가 긴 고배형 등이 있으며 재질의 형태도 다양하여 옥, 나무, 대나무, 도자기, 금속재 등이 있습니다.
제기의 밑은 둥근 받침이 있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그 위로 가느다란 목 부분이 있으며 그 위로 넓고 둥근 그릇 모양의 음식을 놓거나 담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며 뚜껑이 있고 뚜껑 중앙에 손잡이가 있습니다.
조선왕실의 제기도설은 중국의 문헌 석전의, 예기 교특생, 예기 빙례, 주례 등 4건을 참고하였는데 이러합니다.
석전의에서는 '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높낮이, 깊고 얕음, 입구의 직경, 발의 직경이 모두 변의 제도에 의거하였고 변과 두의 높이는 모두 5치9푼으로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고 했습니다.
예기 교특생에서는 '변과 두의 물품은 물이나 흙에서 나는 것으로 한다.'라고 하고 주석에는 '변은 두의 짝이되는 물건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기 빙례에서는 '모든 찬물은 두에 담는 것이 기본이 된다.' 하였으며
주례에서는 '천관에 변인(籩人) 조가 있는데 두는 해인(醢人) 조가 들어 있다.' 고 했습니다.
◎조(俎)와 생갑(牲匣)
29.조(俎)
조는 사각형의 판에 네개의 다리를 달아 그 위에 다른 제기를 올려 놓은 수 있도록 만든 제기로 아래 사진의 밑 받침에 해당하며 천조갑(또는 생갑-牲匣)은 나무로 만든 상자를 3칸으로 막아 서로 다른 제물을 올릴 수 있도록 했으며 조위에 올려 놓게 됩니다.
오래전 조(俎)는 도마 기능을 하였으므로 조라는 이름은 한자로 도마 조(俎)로 조 위에 고기를 올려 놓고 자르는 작업을 하고 그 위에 고기를 받쳐 올리기도 했으니 처음에는 제기가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일상 식자재였는데 이후 고기를 올리는 제기로 변모했습니다.
석전의에서는 '조의 길이는 1자8치, 속의 너비는 8치, 높이는 8치5푼이다. 양쪽 끝은 주색(朱色)으로 칠하고 가운데는 흑색(黑色)으로 칠한다.' 고 했습니다.
30.생갑(牲匣)
생갑은 희생을 담는 나무상자로 나무에 흑칠을 하여 만들었습니다.
생갑은 대생갑과 소생갑으로 나누는데 대생갑에는 삼생(소, 양, 돼지)의 날고기를 담아 제상 앞쪽 좌, 중앙, 우에 두었고 소생갑에는 익힌 삼생을 담아 제상 서편에 올렸습니다.
정조 시대에 들어 간편하게 하기 위해 삼합생갑이 등장했는데 하나의 생갑을 3칸으로 막아 간편하게 제례를 치렀는데 이후 조선말까지 삼합생갑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천조갑에 올리는 제물은 소와 양의 장위폐(내장, 위, 폐)와 시부(돼지껍질)을 삼숙이라하여 삶아서 각 칸에 담아 황보를 덮어서 천조상에 받쳐서 올리며 음복례 때는 음복 안주로 바치기도 합니다.
31.모혈반(毛血盤)
희생의 털과 피를 담아서 제상에 진설하는 둥근 접시형태의 제기입니다.
제사에 올리려고 짐승을 잡을 때 우, 양, 시(소. 양. 돼지)의 털과 피를 조금씩 거두어 담아서 신실밖 준상 위에 두었다가 천조례 때 제상 신위전에 올리고 천조례가 끝나면 모혈반을 물려서 신실 밖에 두었다가 제례가 끝나서 분축할 때 땅에 묻습니다.
희생의 털과 피를 담아 올리는 것은 희생을 직접 도살했다는 증거이며 희생이 온전하고 정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혈반에 희생의 털과 피를 준비하고 있다가 신을 맞는 절차인 신관례가 끝날 무렵 모혈반을 제상에 올려 신께서 희생을 살피게 하고, 제향이 끝난 후 폐백을 태울 때 모혈반의 털과 피는 땅에 묻습니다.
32.망료기와 망료저(望療器와 望療著)
망료기는 놋쇠로 만든 둥근 접시 모양으로 축폐를 태우기 위해 이 그릇에 담이 이동을 하는데 쓰이며 망료저는 놋쇠로 만든 젓가락으로 굵고 길이가 2척(60cm)이되며 제향이 끝나고 축폐를 태울 때 집어 불에 넣거나 들어 올려 축,폐가 잘 타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종묘 제기
종묘대제에 쓰는 제기는 재료도 다양하다.
놋쇄, 나무, 도자기, 대나무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종류도 63종이나 된다.
종묘제향, 공신전제향을 모두 합하면 그릇이 5,000개가 필요하다.
현재는 모두 간소화해서 올리고 있고, 종묘 정전1실과 영녕전1실만 원형 그대로 진설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제기가 모두 유기(놋그릇)로 바뀌었다고 한다.
종묘제례는 벼농사 위주의 한반도 생활양식보다는 중국 주나라 예법인 '주례'에 근거한 예법이었으므로 황하지역의 생활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기를 크게 분류해 보면,
고기를 담는 조, 생갑
땅과 물의 산물을 담는 변, 두
고깃국을 담는 등, 형
곡식을 담는 보, 궤
제려의식 진행 관련된 향, 향합
어둠을 밝히는 촛대, 등잔
신실 밖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술을 담는 항아리, 이, 준, 뢰 등이 있다.
흥미로운 술항아리의 문양을 살펴본다.
'계이'는 닭 모양이 새겨진 제기로, 울창주(울금주)를 담는 잔으로 봄에 사용하였다. 울창주(鬱鬯酒)는 고대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땅에 뿌려 신을 부르는 의식에 쓰이는 술을 의미한다. 검은 기장에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이다.
'조이'는 봉황이 새겨져 있으며, 명수(明水)를 담는 잔으로 여름에 사용했다. 명수(明水)는 왕실의 제향에 올리는 깨끗한 물이다. 본래 보름달이 떴을 때 생긴 이슬을 음감(陰鑑)으로 받은 물을 가리킨다. 음감은 처음에 조개껍데기를 사용하다가 유기로 그 모양을 만들어서 사용했다. 명수(明水)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자 정화수(井華水)로 대신하였다.
'가이'는 벼이삭이 새겨져 있다. 가을에는 명수(明水)를, 겨울에는 울창주(鬱鬯酒)를 담는 잔이다.
'황이'는 황금눈을 새긴 술잔으로 가을에는 가이와 반대로 울창주를 담고, 겨울에는 명수를 담았다.
황은 중앙을 뜻하며 陽에 속한다. 눈 무늬가 의미하는 것은 잔에 술을 부으면 맑은 기운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문양은 음양과 오행을 기반으로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산뢰는 산과 구름 문양이 새겨진 술동이다.
뇌는 구름과 우뢰가 비를 내리게 함이 임금의 은혜가 신하들에게 미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착준은 陽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붙는 모습을 새긴 술항아리이다.
가을, 겨울 제사에 사용되었다.
호준은 陰의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만물을 감싼 모습이다. 이것도 가을, 겨울 제사에 사용되었다.
'상준'은 코끼리 모양이고, '희준'은 소 모양으로 제작된 술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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