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는 역사상 가장 강렬했던 골잡이와 재회하는 대가로 가장 화려했던 기술자와 작별해야 했다. FC서울은 2015년을 사흘 앞두고 데얀 다미아노비치가 중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2년 만에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2011년부터 3년 연속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대미문의 득점력을 과시했던 데얀의 복귀는 서울 팬뿐만 아니라 K리그 팬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리던 빅뉴스였다. 데얀은 연봉을 대폭 삭감하며 K리그와 서울로 돌아오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2년 계약을 맺은 그는 자신이 가장 빛났던 무대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할 계획이다.
데얀의 복귀를 알리는 뉴스 속에는 누군가와의 이별 소식도 담겨 있었다. 바로 몰리나였다. 이미 외국인 보유 한도가 차 있던 서울로서는 데얀이 온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떠난다는 뜻이었다. 기존 계약이 마무리 됐던 몰리나가 가장 유력한 대상이었고 예상대로 작별을 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만 36세의 나이지만 여전히 기량이 뛰어난 몰리나가 K리그 내 다른 팀으로 갈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콜롬비아의 인디펜디엔테 메데인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올리며 축구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한 출발을 알렸다.
2009년 여름 성남일화(현 성남FC)에 입단해 두 시즌을 뛴 몰리나는 2011년 서울로 이적해 5년 간 활약했다. 그가 K리그에 남긴 기록은 209경기 68골 69도움이라는 엄청난 수치다. 공격포인트 머신, 몰느님, 최고의 왼발로 꼽혔던 그의 K리그 역사를 돌아본다.
■ K리그 입성, 센세이션을 일으키다
2009년 스페인에서 열린 ‘피스컵 안달루시아’를 앞두고 성남일화는 선수 보강에 집중했다. K리그의 클래스를 능가하는 특별한 선수를 찾던 성남 구단의 레이더에 포착된 선수가 몰리나였다. 당시 몰리나는 브라질의 산투스FC에서 주전급으로 뛰던 선수였다. 후일 브라질 대표팀의 에이스로 한국을 찾은 산토스 출신의 네이마르가 몰리나를 서울에서 만나 기념샷을 올릴 정도였다. 2000년대 초반 콜롬비아 국가대표로 남미 코파아메리카,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하며 13번의 A매치에 나섰을 정도로 이름값이 높았다.
피스컵을 통해 성남 데뷔전을 치른 몰리나는 K리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왼발을 이용한 날카로운 킥과 수준 높은 테크닉은 전반기에 평범한 중위권 팀이었던 성남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 포항과의 데뷔전에서부터 골을 터트린 그는 시즌 종료까지 17경기에서 10골 3도움을 기록했다. 성남은 10승 3무 4패를 기록했고 리그 4위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인천, 전남을 꺾은 성남은 그 해 AFC 챔피언스리그와 리그컵을 제패하며 리그 우승까지 노리던 2위 포항을 플레이오프에서 1-0으로 제압했다. 원정에서 열린 단판승부를 성남의 승리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몰리나의 프리킥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특히 빛난 몰리나의 영향력은 당시 관중석에서 무전기로 지시를 하던 초짜 감독 신태용의 무전기 매직과 더불어 ‘몰리나 매직’으로 불렸다. 비록 성남의 선전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전북에게 막히고 말았지만 6강 플레이오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까지 모두 MVP를 차지한 몰리나의 경기력은 다음 시즌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2010년 몰리나의 활약은 그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았다. K리그에서 치른 첫번째 풀타임 시즌에 33경기에 출전해 12골 8도움을 기록했다. 더 돋보인 것은 AFC 챔피언스리그였다. 대회 기간 동안 7골을 넣으며 성남이 아시아 정상에 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토너먼트에서만 5골을 집어넣어 중요한 순간 에이스의 진가를 보여줬다. 만 30세에 아시아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명으로 공인 받는 순간이었다. FIFA 클럽월드컵에서도 3골을 넣으며 자신의 경쟁력을 증명했다.
■ 서울 이적, 데몰리션 콤비 결성
골잡이가 아닌 플레이메이커로서 경기를 좌지우지하는 테크니션의 등장은 K리그를 설레게 했다. 몰리나의 기술은 K리그를 넘어 아시아 전체에서도 인정받을 만 했다. 하지만 성남은 더 이상 몰리나를 안고 갈 수 없었다. 아시아 정복에도 불구하고 모기업의 지원이 크게 줄어들며 비싼 연봉의 선수들을 정리해야 했다. 몰리나도 시장에 나왔다. 포항, 전북 등 다수의 구단이 몰리나를 탐냈지만 그의 K리그에서 두번째이자 마지막 팀은 서울이 됐다. 2010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한 서울은 황보관 감독 체제에서 2연패를 꿈꾸며 데얀, 아디, 제파로프의 외국인 라인업에 몰리나까지 추가했다. 언론과 팬들은 ‘판타스틱4’라 부르며 역대 최고의 위력을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그들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제파로프와 몰리나의 역할이 겹쳤다. 공의 소유권을 주도하며 경기를 풀어야 하는 선수가 둘이 되자 오히려 경기력은 다운됐다. 서울은 디펜딩 챔피언이 무색할 정도로 최악의 출발을 했고 4월이 지나기도 전에 황보관 감독은 물러나고 최용수 감독대행 체제로 전환됐다. 최용수 감독대행은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몰리나와 제파로프의 무의미한 공존을 정리한 것. 제파로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샤밥으로 이적했고 서울의 플레이메이커는 몰리나로 확정이 됐다.
이때부터 서울은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콤비인 데몰리션이 가동됐다. 데얀의 검증된 득점력과 그것을 받쳐주는 몰리나의 놀라운 어시스트 능력이 만났고, 데몰리션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막강한 파괴력으로 이어졌다. 2011시즌 데얀이 24골 7도움, 몰리나가 10골 12도움을 기록하며 효과는 확실히 나왔다. 몰리나의 위력이 가장 빛난 경기는 홈에서 열린 강원과의 23라운드였다. 그는 이 경기에서 3골 3도움을 기록, K리그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영상보기->아디,데얀,몰리나로 이어진 서울의 황금라인
뒤늦게 상승세를 탔지만 전북, 포항을 따라잡지 못한 채 2011시즌을 마친 서울은 한층 강력해진 데몰리션 콤비를 앞세워 2012시즌을 정복했다. 이 시즌 몰리나의 리그 기록은 41경기 18골 19도움. 도움 1위에 득점 3위였다. 데얀은 31골을 넣으며 역대 단일 시즌 최다골 기록을 깼다. 몰리나와 데얀은 공격포인트에서도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이 막강한 콤비에 하대성, 아디, 김용대, 김진규의 활약이 더해진 서울은 2위 전북을 무려 승점 17점 차로 누르며 압도적 우승을 차지했다. 몰리나가 지닌 절정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인 스콜피온킥에 의한 득점도 이 시즌에 나왔다.
::: 영상 보기->몰리나의 환상적인 전갈킥
■ 불꽃처럼 자신을 태운 성실한 테크니션
2013시즌은 몰리나에게 있어 롤러코스터 같은 시즌이었다. 데얀이 부상과 부진으로 에이스의 활약을 못했지만 몰리나가 공격을 풀어주며 다양한 득점 루트로 팀을 구했다. 2012시즌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9골 13도움을 기록하며 여전한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후반기에 무릎 부상으로 경기력이 흔들렸다. 결국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 2차전에서 최악의 플레이로 자신을 응원하던 서울 팬들마저 실망하게 만들었다. 경기가 끝난 뒤 상대팀인 광저우 헝다의 외국인 선수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원정 다득점에 의해 아쉽게 우승을 놓친 팬심을 분노케 하는 오해를 샀다.
시즌 말미에는 부산과의 홈 경기 중 상대 선수와 머리끼리 충돌하는 아찔한 상황에 의해 그라운드에서 잠시 기절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관중석에 있던 아들 알레한드로는 아빠의 사고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행히 큰 사고를 면한 몰리나는 시즌 종료 후 도움왕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축구를 하는 도중 목숨을 잃었거나 병마와 싸우고 있는 선수들에게 상을 바친다”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년 연속 도움왕을 차지했지만 2014시즌부터 몰리나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릎 부상의 여파, 노쇠화가 겹쳐졌고 최용수 감독은 과감히 구상에서 몰리나를 제외했다. 많은 연봉(13억원-2014년, 2015년 K리그 전체 1위)이 부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몰리나를 영입하려는 팀이 없어 서울은 그를 안고 가야 했다. 포항의 황선홍 감독이 임대 영입을 추진했지만 역시 연봉 문제로 불발됐다. 2014시즌 전반기를 거의 날린 몰리나는 후반기에 돌아왔고 위기에 빠진 팀을 구하며 중요한 순간 공격포인트를 올려줬다.
서울과의 계약 마지막 해인 2015시즌 몰리나는 영리한 경기 운영과 예리한 패스, 결정적인 한방으로 여전히 팀을 떠받쳤다. 후반기에 아드리아노, 다카하기가 가세하며 몰리나의 위력은 배가됐고 리그 35경기에서 4골 11도움을 기록했다. 몰리나는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즌에 서울을 위해 또 한번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남겼다. FA컵 우승에 일조한 것. 특히 결승전에서 2-1로 앞선 경기 종료 직전 코너킥을 그대로 골로 연결하는 진기명기를 선보이며 우승에 방점을 찍었다. 팀 내 입지 축소에도 불구하고 늘 성실한 자세로 훈련에 임하며 동료들의 신뢰를 받았던 그가 팀에 안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 영상 보기->서울에 FA컵을 안긴 몰리나의 코너킥 득점
최용수 감독은 2015시즌에 보여준 몰리나의 능력을 보며 한번 더 그를 믿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재계약을 고민했다. 하지만 데얀의 복귀라는 변수가 발생했고 나이, 연봉, 팀의 미래 등을 고려해 결국 몰리나와의 작별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데몰리션이라는 K리그 역대 최고의 콤비를 구축했던 두 선수의 운명이 엇갈리는 아이러니한 장면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몰리나는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좋은 추억, 고마움을 남기며 마지막 예의를 보여줬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가 할 일은 K리그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