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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홍수 직후의 일들
1-17절, 하나님의 복 주심과 언약
[1절] 하나님이[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복 주시며 동일한 말씀을 하셨었다(창 1:28). 복(福)은 좋은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자녀 출산을 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이 많은 자녀를 출산하여 수적으로 많아지고 온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셨다. 다산(多産)은 큰 복이다.
[2-3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살아 움직이는 것]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푸른]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사람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창 1:26, 28). 사람이 그 동안 이 임무를 잘 수행했는지 모르나, 이제 다시 그 임무가 강조된다. 사람은 다른 생물과 본질이 다르다. 피조물들 중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생물들을 섬겨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역사상 사람들은 무지하게 피조물을 조물주처럼 숭배했고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들의 형상들로 바꾸었다(롬 1:23).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음식은 채소와 나무 열매이었다(창 1:29). 그러나 홍수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물고기와 새와 땅의 짐승 등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먹을 수 있게 하셨다. 이제 육식(肉食)은 사람에게 정당한 음식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 허용이었다. 아마 홍수 후 사람들의 기력은 급격히 약해진 것 같다. 사람의 수명은 1,000살에서 100살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아마 이런 이유, 즉 사람의 기력의 쇠약해짐과 더 많은 영양분의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하셨지만, 한가지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고기를 살아 있는 채로, 즉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단서를 두신 까닭은, 아마 산 생명체를 그대로 먹는 것이 잔인한 행동이며 피가 생명이라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특히 피와 생명은 신비하게 연관되어 있다. 피는 곧 생명이다(레 17:11). 짐승의 생명도 피에 있고 사람의 생명도 피에 있다.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인 사람의 몸에는 약 5리터의 피가 있고 그것은 약 46초 내지 1분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온 몸을 한바퀴 돈 후 심장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피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피는 곧 생명이다.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지만 피는 먹지 말라는 것은 후에 모세의 율법에 명문화되었다(레 17:10-11).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그것의 피를 다 뺀 후에 먹어야 했다. 그러나 피를 먹지 말라는 이 법은 구약의 의식법에 속하며 다른 의식법들과 함께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고 본다. 골로새서 2:16-17,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5절]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의 생명의 피를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짐승이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짐승은 죽임을 당해야 한다. 출애굽기 21: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또 형제가 그 형제를 죽였을 경우 그는 사형으로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
[6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마땅히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법이다. 이것은 개인적 보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재판에 의한 사형 집행을 뜻한다. 살인자를 사형으로 응징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살인은 사람에게 죄를 짓는 악일 뿐 아니라, 그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큰 악이며, 따라서 그 악은 사형으로 응징되어야 한다.
물론, 율법에는 고의적이지 않고 부지중에, 실수로 저지른 살인의 경우 그 살인자가 죽음을 모면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자는 이스라엘 땅에 도피성들 중 하나로 피신하여 들어가 살 수 있었다(민 35:15).
사형 제도는 오늘날에도 필요하고 정당한 법이라고 본다. 사형은 극악한 죄에 대한 공의의 징벌과 그와 유사한 범죄의 예방을 위해 또 사회의 정의와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주의 말씀(마 5:39)은 개인적 보복을 금하신 것이며 재판 제도와 사형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에게 1절의 내용을 반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취소하신 적이 없다. 과거에 인구 증가와 자원 문제를 고려하여 산아 제한을 주장한 것이나 오늘날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을 구실 삼아 결혼과 임신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인간적 생각일 뿐이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결혼하여 자녀를 많이 출산하는 것(다산 多産)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이며 복이며, 사람의 의무이며 선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나 경제 여건이 아주 어렵지 않다면 또 특별한 사명의 걸음이 아니라면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복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물론, 낳은 자녀를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바르게 키우고 양육하는 것은 부모의 중요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세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며 또 필수적인 일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키우는 일이다. 바른 인격이 되지 못하고 세상 지식만 갖춘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며 세상의 구원과 평안을 위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8-10절] 하나님이[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언약을 세우셨다. 8-17절의 본문에 ‘내가 . . . 세우리니’ 혹은 ‘내가 . . . 세운’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11, 12, 17절). 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표현하신다(9, 15절).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과 또 그들과 함께한 모든 생물들, 즉 새들과 가축들과 땅의 짐승들, 즉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 자연계 전체이었다.
언약(베리스)은 하나님의 섭리 방식이었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었다(창 2:16-17). 또 그는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며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창 6:18). 또 그는 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 표로 할례를 명하셨다(창 17:7). 또 그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출 24:7; 34:27-28) 그 표로 안식일을 주셨다(겔 20:12). 이것이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옛 언약 곧 구약이다. 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사람들과 새 언약 곧 신약을 세우셨다(눅 22:20). 새 언약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며 세례가 그 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자신을 낮추시며 스스로를 제한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손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사회의 계약과 달랐다. 인간 사회의 계약은 서로간의 동의 아래 이루어지는 쌍방적 약속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 약속이다. 그것은 일종의 명령, 즉 약속 있는 명령이었다.
[11절]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육체](원어)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 즉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5절에서도 그는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약속이었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자가 자동차 운전을 두려워하고 꺼려하듯이, 홍수 심판 후에 사람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비가 많이 오면 혹시 다시 홍수로 인한 멸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 그들에게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평안과 위로를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언약은 모든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호의와 은혜이었다.
물론, 세계적 홍수 심판은 다시 없을 것이나, 부분적, 지역적 홍수는 있을 것이며, 소돔과 고모라 성의 유황불비 심판이나 가나안 땅의 완전한 진멸 같은 지역적 심판도 있을 것이다. 또 마지막 날 세상에는 불 심판도 있을 것이다(벧후 3:6-7). 그러나 오랫동안 평안이 지속될 것이다. 본문 12, 16절에서, 이 언약은 “영세(永世)까지”(레도로스 올람) 세우는 언약이며 “영원한” 언약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8:21-22에서 암시되었었다: “. . .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2-17절] 하나님께서는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표]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 혹은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무지개’라는 원어(케쉐스)는 ‘활(bow)’이라는 뜻이다. 무지개(rainbow)는 물방울로 만들어진 활 모양이다. 무지개는 언약의 표로 주어졌다. ‘증거’라는 원어(오스)는 ‘표(sign), 증표(pledge)’라는 뜻이다. 17절도 무지개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증표임을 말한다. 증표는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함과 견고함을 나타낸다.
무지개는 비가 온 후 아직 공중에 물방울이 많이 있을 때 햇빛이 물방울에 굴절되어 일곱 가지 색깔을 내는 신비로운 모양이다. 비가 개었어도 사람들이나 새들과 짐승들이 홍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만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주실 것이다. 줄과 화살이 없는 활 모양의 그 무지개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활이 아니고 위로를 주는 활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보실 때 그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며(15, 16절)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실 것이다. 무지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복이다. 1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결혼과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며 복이며 또한 사람의 의무요 선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고의로 그 뜻을 저버리고 거스르고 있다. 우리는 결혼과 자녀 출산이 짐스러운 일이 아니고 귀하고 복된 일임을 깨닫고 사모하며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음식은 채소와 과일이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 아마도 사람의 기력이 쇠하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허락하셨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먹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살생은 죄가 아니다.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을 주셨다. 그는 노아의 자손들에게 다시는 모든 생물들을 홍수로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 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이것은 홍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위로이었다. 그러나 비록 홍수 심판은 없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이 남아 있다(벧후 3:7). 불의한 자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 회개치 않는 모든 죄인들은 마침내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명령대로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18-29절, 노아의 실수와 저주와 축복
[18-19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중요한 지식이다. 인류는 아담의 자손이며 또한 노아의 자손이다. 인류는 한 아버지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 가족같이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노아의 세 아들을 말할 때 “셈과 함과 야벳”의 순서로 말한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그러나 출생 순서는 야벳, 셈, 함의 순서인 것 같다(Poole). 왜냐하면 (1) 창세기 9:24는 함을 ‘그 작은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원어에서 형용사에 관사를 붙이면 ‘가장 작은 아들’이라는 뜻이 되고(NASB, NIV), (2) 창세기 10:21은 원문에서 “[셈은] 형 야벳의 동생”이라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KJV)(MT 액센트에 맞음), (3) 창세기 11:10(“셈은 1백세 곧 홍수 후 2년에”)은 노아가 500세 때 셈이 아직 출생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셈과 함과 야벳”은 중요성의 순서일 것이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고 표현된다. 22절에도 함을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고 말한다. 또, 25절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는 노아의 말과, 26절과 27절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리라는 말씀을 기록한다. 창세기 10:15-20은 함이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 네 아들들을 낳았고 또 가나안은 북쪽 시돈에서부터 남쪽 가사까지 흩어져 살았던 가나안 자손들의 아버지라고 자세하게 증거한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반복해 표현하고 또 가나안에 대한 예언을 반복해 기록한 것은 장차 그들이 들어가 얻을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 누구의 자손이며 그들이 왜 저주를 받아 진멸(殄滅)되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왜 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물론, 후에 그 땅의 거주민들이 매우 우상숭배적이었고 음란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웠다(레 18:3, 25; 신 7:1-5).
창세기에는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이 32번이나 나온다.18)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고(창 11:3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나(창 12:5),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했고(창 12:6)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에게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을 뿐이었다(창 12:7).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창 13:12; 16:3). 후에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고(창 31:18; 33:18; 35:6; 37: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묻혔다(창 50:5, 1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다.
[20-21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포도원을 만들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는 포도원을 만들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원어는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노아는 포도 수확을 했고 포도주를 만들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의 부끄러운 실수이었다.
성경은 술에 대해 많이 교훈한다. 성경에서 술은 주로 포도주이다.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음료수로 여겨지기도 하지만(신 14:26; 시 104:15), 술취함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큰 죄로 분명하게 정죄되어 있다(고전 6:10; 갈 5:21). 술취함은 사람으로 올바른 정신과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게 하고 범죄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말했고(엡 5:18),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말했다(잠 23:31). 또 교회의 장로가 되려는 자들은 절제하며 근신해야 하는데, 이것은 술 취하지 말아야 함을 내포하며 또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해야 했다(딤전 3:2, 8).
노아의 실수는 사람의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을 잘 드러낸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했지만(창 6:9) 엄격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노아에게도 사람의 연약성이 있었다. 노아도 실수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없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어느 정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노아의 술취함과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금주(禁酒)의 교훈을 준다. 술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또 오늘날의 술은 적은 양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기 때문에, 또 술은 건강을 해치고 경제적 낭비도 적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인의 완전 금주(禁酒)와 완전 금연(禁煙)의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좋다.
[22-23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하체’라는 원어(에르와)는 ‘벌거벗음 혹은 음부(陰部)’라는 뜻이다(BDB). 함의 잘못은 이중적이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부족을 또다른 사람에게 알린 것이었고,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족과 실수가 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부족을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특히, 부모의 실수와 부족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라면 부모의 실수와 부족을 덮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그것을 덮지 않고 다른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달랐다. 그들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가렸고 얼굴을 돌이켜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올바른 태도이었다.
[24-27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학카탄)[막내](NASB, NIV)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고 말했고 또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26절) “가나안은 그의[아마 ‘셈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7절)고 말했다.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가장 낮은 종이라는 표현이다. 모세는 노아가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하였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셈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을 암시한다.
함의 아들에 대한 노아의 저주는 함에 대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이었다. 부모와 자녀는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0:5). 복된 부모의 자녀는 복되지만, 저주받는 부모의 자녀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모가 범죄하면 그 자녀들에게 화가 미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한다.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실제적으로도 가나안 족속들은 심히 음란하고 우상숭배적이었다(레 18:24-25; 신 7:1-2). 저주는 의인들에게 임하지 않고 악인들에게 임한다. 노아의 저주는 예언적이었으나, 또한 공의롭게 성취되었다.
한편, 노아는 셈을 축복하였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복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께서만 사람에게 복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셈과 함께하시니 셈은 복을 받은 자이다. 과연 셈족은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될 것이다. 참 종교는 셈족에서 발견될 것이다. 참 경건은 셈족을 통해 전달된 유산이다. 하나님의 복은 셈족을 통해 이어져 왔다. 이스라엘 민족은 셈족이었고 그 족속을 통해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롬 9:5).
노아는 야벳도 축복하였다. 그에게는 창대케 되는 복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특히 문화적, 경제적 번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야벳 족속은 서구 문명을 건립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번창하는 복을 받았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야벳 족속이 셈의 종교적 복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예언이다. 야벳의 자손들인 유럽인들은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셈의 장막, 곧 셈의 자손인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 들어왔다.
[28-29절] 홍수 후에 노아가 350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950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아담 후 천년경에 출생하여 이천년경에 죽었다. 그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획을 그었다.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노아와 128년간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세상의 초기 역사가 아브라함에게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인류는 아담의 자손이며 노아의 자손이다. 그들은 홍수 심판 후 남은 자들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면 다 한 조상의 자손이며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술 취하지 말아야 한다. 노아는 술취함으로 실수했고 그것은 그의 생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았다. 술취함은 방탕한 일이며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며 또 천국 길을 가로막는 큰 죄악이다. 술 취한 자들은 천국을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 우리는 완전 금주와 완전 금연의 경건한 기독교 전통을 귀히 여기며 술과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함은 아버지 노아의 실수를 덮고 감추려 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알렸다. 그것이 함의 부족이고 그가 저주를 받은 이유이었다. 우리는 이웃의 부족과 실수를 볼 때 그것을 또다른 사람에게 알리려 하지 말고 그것을 가급적 덮어두어야 하고 특히 부모님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그러해야 한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넷째로, 노아의 저주와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함의 자손들, 특히 가나안 족속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되어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반면에, 셈은 종교적으로 복을 받았다. 셈족에서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야벳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창하였고 셈의 종교적 복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한 축복과 저주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셈의 복을 얻었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녀들도 이 복을 누리도록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며 본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