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에게 위임된 권한
요 5:19-23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 5:19-23 / [아들의 권위]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아들이 마음대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같은 방법으로 따라 할 뿐이다. 20) 그것은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이 사람을 고친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을 아들을 통하여 보여 주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듯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22) 아버지께서는 죄를 심판하는 일들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셔서 23) 모든 사람이 마치 아버지를 존경하듯 아들도 존경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은 형식적인 율법준 수만을 고집했던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과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본문은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22) 19절 이후부터 본장 전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스스로 증거하며 그의 신성을 드러내는 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한 자신의 사역의 기준과 핵심 내용 및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19, 20).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행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 행한 것은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듭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부활 사역에 동참하신다며 사역의 핵심 내용 및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기에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심판의 권세를 위임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성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23)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구원과 심판의 전권을 위임하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같이 아들인 예수님을 공경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공경하지도 않고 거부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23절에 ‘공경하다’는 단어가 4번씩이나 사용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이 영광을 받으실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도 일하시고, 예수님도 일하시기에 우리도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참조 행 10:42, 43).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적 침체에 빠지는 순간이 있고 어떤 때는 신앙 자체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온전히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아멘.
< 설 교 >
하나님의 친아들
요 5:16-20 / 이규왕 목사
인간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어떤 사람은 서로 잘 알며 신뢰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서로 불신하는 적대적인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서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관심한 관계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신뢰의 관계는 만나면 반갑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어도 재미가 있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잘 알지 못하거나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는 만나서 대화는 물론 만나는 것조차 기피하게 되고 만나는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음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교회를 출석하여 예배에 드리고, 주관하는 기도회나, 제자 훈련이나, 전도대나, 각 기관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고, 참석할지라도 별로 흥미가 없고, 할 수 있으면 무슨 핑계나 구실을 부쳐서 참석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대부분 그 이유가 교인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세상은 심지어 부부나 한 가족간에도 불편한 부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면 남남이 모인 교회 안에서 어찌 인간 관계가 늘 좋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를 가도 인간들이 사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대립과 갈등이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며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확립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나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 자신을 영적인 유익을 위해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 첫 단추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나와는 어떤 관계가 있으신 가를 바로 알고 그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안식과 기쁨과 구원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
한 사람을 두고 두 사람이 보는 견해는 각기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만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어떤 사람은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두 얼굴을 가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선례가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지상 낙원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 부르셨다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맨발로 달려나가서 하나님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오셔서 부르셨을 때 아담이 기쁨으로 달려 나가 맞이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수풀 속에 몸을 숨기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습니다.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두렵게 느껴지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만민 가운데 하나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민족보다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즐겁고 기쁜 하나님이 아니라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인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만 골라서 범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하는 부정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많은 선지자들을 세워 회개를 촉구하시고, 마지막에는 독생자 예수까지 보내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하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자기들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보려는 인간적인 제도와 노력들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총 613 개항으로 만들어진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율법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에 대한 시행 세칙을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여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중에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39 개조, 234 장으로 전체의 1/3 이나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는 것은 추수 행위와 같고 그것을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행위와 같고, 의료 행위를 하는 것과,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드는 것과, 매매나 운반을 하는 것과, 1 km 이상 거리를 여행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기적을 베푸셨을 때 유대인들이 기뻐하고 예수님에게 치하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정죄하며 핍박하게 된 배경입니다.
(요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요 5: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과연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것은 그 병자를 고치신 장본인이 하나님이시라면 안식일을 범하신 분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과 그 병자를 고쳐주신 하나님은 서로 다른 분이십니까? 얼마나 편협되고 잘못된 신앙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만 집착하고 하나님의 사랑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마음 속에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은 병자를 보고서도 감동이 없는 몰인정한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생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 대신 징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규정을 만들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하면서 실상은 안식이레 더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고통의 날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생리를 잘 아시면서 일부러 안식일에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은 삼십 팔년 동안 유대인들이 만든 안식일의 규정을 착실하게 지켰지만 여전히 고통 중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러한 사람을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들이 원하는 진정한 안식은 인간들이 만든 어떤 제도를 억지로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 인간들에게 참 안식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의 주인이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관계가 이루어질 질 때만이 진정한 안식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2. 일하시는 예수님
안식일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후 일곱째 날 쉬신 것이 안식일의 기원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도 인간처럼 피곤을 느끼셨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가 완성된 것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누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안식의 복을 인간들과 나누시기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여 지키게 하셨습니다.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이 엿새 동안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셨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며 살게 하시고,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들은 그 같은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엿새 동안 빈둥거리며 놀거나 아니면 안식일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대신 자기를 위하여 여전히 돈을 벌겠다고 일하는 죄를 범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바리새인들처럼 규정을 만들어 강제로 지킨다고 해서 참 안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러운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나 참 안식이 누리지 못했단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안식일의 본질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는 것이면 그 사람에게는 참된 안식과 평화가 있었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이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이라면 그 규정을 가장 많이 위배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만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태양은 공전과 자전을 멈추고, 시계는 정지되고, 세상에 죄악은 더욱 극성을 부리고, 사단은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도 하나님은 안식을 위해 방관하셔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안식일에 인간은 멸망을 당하고 지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발전소의 기술자처럼, 최전방을 지키는 보초병처럼 당신의 백성인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일을 한 순간에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시기 때문에 아직까지 건재하는 것입니다.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핑계로 병자를 고치는 일을 죄악시하는 동안 병자들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이것은 안식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삼십 팔 년 된 병자와 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시켜 줌으로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얻게 하는 진정한 안식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그와 같은 안식의 복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이 안식일을 범한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속죄받게 하시고 안식 후 첫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신 참 안식을 주신 날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모이는 주일인 것입니다.
3. 사랑받는 아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단순히 미워한 정도가 아니라 그 때부터 예수님을 어떻게 하든지 죽이려는 증오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여기서 ‘죽이고자’ 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계속하여 찾고 있는 미완료 상태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 같이 미워하고 핍박한 이유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만 아니라,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면 어떻게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같은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요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삼십 팔년 된 병자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물을 가지고 극상품의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과, 가버나움에서 죽어 가는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더욱 큰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권세입니다.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입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인간 세계에서 아버지의 것이 곧 아들의 것인 되는 것같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받아드리지 않는 것은 결국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며, 거절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곧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으며,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 가는 분기점은 죽은 이후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권세와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구원이 확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서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계속해서 구원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뜻하며,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이미 동작이 완료된 상태가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원죄로 말미암아 삼십 팔 년이 아니라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인생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천국에 가게 되며, 어떻게 죽을지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되는 영생의 축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친아들이시라면,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덩달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한번 부자지간의 관계가 맺어지면 어느 누구도 깨드릴 수 없는 것처럼 확고 불변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아들 때문에 영광을 받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아들 때문에 속을 썩고 욕을 먹는 부모도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1)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2)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증거해야 합니다
.요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3) 참 안식일인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참 안식일인 주일날이 되면 자신을 위한 일은 접어두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날인 동시에,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 안식을 주셨던 예수님을 닮아 고통 중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당신은 안식을 누리는가
요 5:16-24 / 이동아 목사
어느 교회 대학 부에서 대천 해수욕장에 수양회를 갔었는데 매일 오후에 해변에 나가 전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트럼펫을 불어도 합창을 불러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잘 모이는 방안 중에 한가지가 "싸움판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을 연출할 두사람은 연습을 한 뒤에 대천 해수욕장 옆 큰 길거리에서 서부활극처럼 서로 맞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시작하는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왔습니다. 그러던 중 한 형제가 사과 궤짝을 들고와서 그 위에 올라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때 남자만 7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어떤 상황하에서도 복음은 들어야 하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교육적인 상황을 설정하십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료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면 반드시 당시에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이 생기곤 했습니다.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는 트집이었습니다.
(렘17:21-2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찌어다
유대법에 의하여 이처럼 안식일은 모든 일상적인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모인 날입니다. 예를 들면 생명이 위독하게 되어 빨리 손을 써야 하는 경우나 아이를 출산하는 일들처럼 부득이하고 긴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안식일에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집대성한 구전법 모음인 `미쉬나`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미쉬나라고 하는 책, 이것은 구전으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전해진 율법을 다 수집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속에 안식일에 대한 것만 39개조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그런데 이것이 또 다시 그 다음에 부칙이 나옵니다. 원칙이 있고 또 부칙. 그래서 마침내 이백열아홉가지라고 하는 그런 금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이 서른아홉가지를 다 말씀드리진 않습니다만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씨 뿌리는 일, 수확하는 일, 곡식을 단을 묶는 일, 타작하는 일, 키질하는 일, 곡식 고르는 일, 맷돌질하는 일, 체질 하는 일, 반죽을 만드는 일, 빵 만드는 일, 양털 깎는 일, 끈을 매는 일, 바느질하는 일, 뭐 쭉 이렇게 자세하게 서른아홉가지를 말합니다. 이제 또 부칙이 나옵니다. 그 부칙 중에는 이런 넌센스 같은 얘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안식일에 안아주는 건 좋으나 어린아이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안아주면 책을 들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바느질을 하다가 어쩌다 실수해서 바늘을 옷에 꽂아 놓은 대로 입고 나가면 바늘을 운반한 죄가 있다. 이것도 안식일을 범한 거예요. 장님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눈 뜬 다음에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 건 안식일 범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형식과 인본주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명이 위협받고 있지도 않는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사람들이 이미 오랫동안 병석에서 누워 있던 병자였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죽을병이 아닌데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골라 그를 치료하였을까요?
예수님은 이 사건이 유대교와 충돌이 불가피하고 마찰이 있을 것을 아시고도 38년된병자가 자기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간 일은 분명히 안식일의 법을 깬 중대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요5:8-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38년된 환자에게 `자비의 집`이란 베데스다가 은혜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은혜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베데스다임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며 동시에 오늘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 규레를 지키면서 진정한 안식을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논증하기 위한 사건인 것입니다. (요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 지라" 핍박을 자초하면서 교육적 상황을 설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는 누구인가?
예수님은 베데스다 사건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예민한 문제를 터치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귀납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접근해 나갑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일관성 있게 우리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책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표적을 행하십니다.(요4:48) 이 표적의 경험적인 사실 위에 그 의미를 깨닫게 하고 그 행하는 일들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의 목적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 시켜 줍니다.(요2: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두 번째 표적은 시공간을 초월한 능력의 역사를 통하여 온 가족이 믿음을 갖습니다(요4:53).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병자를 고친 표적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됨(요5:15)을 논증하기 위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의 환자를 걸어가도록 치유하신 장본인 것을 안 유대인들은 예수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반응을 예상도 하고 기대한 상황입니다.
(요5:17-1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분명히 쉬셨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계속 일하고 계셨습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것도 쉬지 않고 있으며 햇빛이 비치는 것이나 산소의 공급도 쉬지 않고 있습니다. 안식일 날도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생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비를 내리십니다. 눈도 내리게 하시고 바람도 불게 하십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나님의 활동이 쉰다면 자구 상의 생물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쉰다는 말은 엿새동안 창조를 완성하시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는 정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역사가 더 구체적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교회에 나아가 말씀을 들으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은 구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며 세상에서 찌들어진 영혼들이 새힘을 얻어 소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쉼은 다양합니다. 쉼의 목적은 회복과 소생입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은 편히 앉아 일손을 놓고 쉬며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걷는 것입니다. 이래야 다음 일을 위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는 일을 다 멈추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성도와의 교제를 나누며 봉사를 통하여 이웃을 도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며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입니다. 내속의 영으로 충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는 것입니다.
어떤 중년을 넘긴 분이 한번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된 이유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삶과 자기의 삶을 비교해보고 무언가 심각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로는 예수 믿는 자기 친구는 어릴 때부터 하루를 쉬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였는데, 자기는 일주간이 얼마나 바쁜지 이레 동안 공부하고 사업을 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면서 악착같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50이 넘어서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쉬지 않고 살아온 자기나, 7일 중 하루를 쉬면서 살아온 자기 친구나 사는 형편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친구는 어려워도 늘 감사하며 사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해서 이러다가는 자기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이제야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일주일 다 일하고도 요모양이고 자기 친구는 일주일에 하루를 꼭꼭 쉬고도 저 정도라면 결국 자기만 멍청한 생활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께는 안식일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하나님은 안식일의 휴식의 법으로부터 제외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안식일의 법에서 제외 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사람으로만 알았던 랍비들은 "네가 어찌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고 예수님을 질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쉬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의 결과를 해결하기 위하여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죄의 결과로 고통 당하는 한 사람을 고쳤다고 비난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지금도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랍비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법으로부터 예외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는 신성을 모독하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다고 보아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사건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로 참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주의의 율법주의 형식주의를 깨고 사랑으로 율법을 이루신 자기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참 안식의 주인이 여기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내안에 새로운 생명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돼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난 날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죄인의 몸이 됐기에 좀처럼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하게 됐습니다. “지난날을 회상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산맥을 넘을 때였지.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지.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다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다네”
천하의 나폴레옹도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탕자같이 방황했던 어거스틴도 주님 품에 안긴 후에야 참된 평안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무엇을 행하시는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자기도 하신 다는 것입니다.(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이 이 지상에서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이신 신성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아들은 그보다 더 큰일도 한다는 것입니다.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 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심으로 그의 행하는 일을 보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한 것입니다.
비밀이 없이 다 보이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일과 같이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아버지의 심판권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십자가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심판하셨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심판을 맡겼습니다.
아들을 존경하는 일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오직 생명을 얻고 심판을 피하는 길은 오직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본 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으며 내 음성을 들은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무엇을 주셨는가?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 안에 주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주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안식의 표입니다.
애굽에서 고역이 끝나고 가나안에서 자유로운 삶이 시작되는 상태를 안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구원의 날이요 치료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장차 올 위대한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히4:1-11)
물론 단 한번의 베데스다의 사건으로 안식일을 성취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신약성경에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영원한 안식을 이루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 주었고, 심령이 메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어 해갈함을 주시고 삼십팔년된 병든 자에게 고침을 주시고 배고픈 자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생명의 떡이 되신 주님을 만나면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만족함을 주시며 눈먼자를 보게 하시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참된 안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안식을 이루신 분입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결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 안에 영원한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기독교의 3대 자유인 율법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한 구속으로 참된 안식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생명 안에 기쁨과 자유와 행복과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그가 죄인이나 의인이냐 선했느냐 악했느냐 계명을 지켰느냐 못지켰느냐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안믿었느냐하는 십자가가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생명을 얻고 죄사함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애창하는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자는 미국 시카고 무디교회의 회계집사이자 법리학 교수이며 변호사였던 스페훠드였습니다. 시카고 대화재로 미시간 호수변에 투자했던 부동산을 다 잃은 그는 병을 얻은 아내를 요양시키기 위해 구라파 여행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과 네 명의 아이를 먼저 보내고 화재 뒤처리로 나중에 출발하기로 한 그는 가족을 태운 배가 영국의 철선과 정면 충돌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웨일스에 도착한 아내는 그에게 전문을 띄웠습니다.
`혼자만 살아 남았음. `
그는 네 자녀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데리러 가는 그는 자녀들이 목숨을 잃은 해상을 배로 통과하며 이 찬송가의 가사를 작사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 참을 수 없는 슬픔 앞에 이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 것입니다. 이 안식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최후의 재림을 통한 부활이 장차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 안식일이 상징했던 그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평안이 우리 안에 넘치길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무죄 석방하시고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관계 동시에 영생을 사는 사람은 자기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새새명의 신비입니다. 주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참으로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성직이란?
요한복음 5:16-29 / 송영태 목사
한국교회는 “성직”에 대한 논쟁을 끝없이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목사는 성직자인 것이 분명하지만 장로도 성직자인가 하는 것으로 심각한 갈등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회 전통도, 성경의 가르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장로제도를 교회정치의 근간으로 삼는 장로교단의 헌법에 따르면 직제에서 목사는 장로가운데 설교와 성례집례, 축도 그리고 치리권을 행사하는 자이고, 장로는 치리권만 행사하는 자입니다.
그 의미는 목사와 장로는 그 직에 있어서는 동등하나 기능면에서 다를 뿐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의 안수와 장로의 안수가 다르다고 생각하나 목사의 안수는 성례가 아니고 기능 구별의 위임 예식이기 때문에 개신교 전통은 목사안수가 목사에게 어떤 성스러운 것이 생겨난다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전통은 만인 제사장직을 교역(ministry)의 중심신학으로 보기 때문에 성도들 즉 세례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공동체를 모두가 하나님의 교역을 담당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교역자라고(minister)라고 믿는 것입니다.
※ 교역: 설교, 전도 등의 종교적 사업. 교역자: 신교에서 종교사업에 전문으로 종사하는 목사, 전도사의 총칭.
목사의 교역은 교회의 질서를 위한 기능상의 구별이며, 목사의 교역만을 성직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근거는 개신교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모두 신자를 성도라고 부름으로써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서 수행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로마서6:3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속에서 떠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경의 가르침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성도가 되며 성스러운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성스럽게 변화를 받은 자들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 곧 성직을 행하도록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는 일이나 안수 받는 일들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 즉 성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모델로 보여주고 있으며, 성도들의 교역의 모형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즉 성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어떠한 자세로 일해야 하는가? 성직을 수행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반드시 대답하여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성직의 모형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몇가지 대답을 찾고자 합니다.
1-8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저주의 삶을 살아온 환자를 고치시고 그가 이제까지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불법인데 어째서 불법을 행하는가” 하는 점, 즉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그 사건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 일에 연루된 것을 알고는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즉 예수를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랑할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자랑한 만한 율법을 주셨는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에 영의 눈이 가리워서 하나님 일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가리워진 심령의 눈을 열어 진정으로 보아야할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이 우리의 눈을 열어 영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탄식했듯이 고후3:15절에 보면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얼굴에 가리워져 있는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져서 진정으로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처방을 내립니다. 처방전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후3:16-17절에 보면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든지 예수님께로 가면 수건이 벗어지고 주의 영이 함께 하면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갖게 되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될 것이며, 이러한 성도는 그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서 어두워진 마음들이 열려서 진정으로 보아야할 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 안에 계신 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기를 원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 순종하여 사는 성도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세상과 이웃과 나 자신을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시각을 바르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보는 것을 함께 보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을 함께 하면서 그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볼 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주님과 함께 보는 눈이 열립니다. 유대인들의 눈은 율법에 매여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탐하고, 물질을 탐하거나,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17절) 에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하시는 그 일을 이 땅위에서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눈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보며 그 일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5:30절 말씀에 보면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작정하신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두 교역의 모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 해답은 신, 구약 성경을 다 이야기해야만 온전할 것입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묵상하려고 합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44-45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행위보다 큰 것이 무엇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분별하지 않고 해를 비추어 주시며, 의로운 자에게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 주십니다.
보세요! 우리는 선하고 악한 행위, 의롭고 불의한 행위는 우리의 눈으로 얼마든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우리의 눈으로 보면서 그 행위에 합당한 판단을 내리고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행한대로 보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 행위보다 더 큰 것을 보고 계십니다. 즉 그 행위의 주인이 되는 사람 그 자체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햇볕과 비가 필요한 것을 보고 필요한 것을 골고루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길 목숨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씀하셨고 뿐만 아니라 목숨을 행위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시하여 그 목숨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생명을 율법의 영이요,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며, 돌봄과 양육의 중심인 것입니다. 생명은 어떠한 장애도 극복할 만큼 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을 사랑하시기에 생명을 구원하시며, 돌보시며, 양육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오직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생명을 구하고, 필요를 채우며, 그래서 성장하게 하시고, 생명으로 풍성한 은혜의 바다에 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욕을 먹고, 저주를 당하고, 핍박을 받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고, 자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인류에게 주어 그 생명을 성장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 운동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아이러니(비꼬는 것)를 보이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생명을 열매로 생산하듯이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이 되어 자기 생명을 버리심으로 온 천하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득하게 만드셨습니다.
성직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하나님의 생명운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저주, 수치와 열등감, 죄책감과 가책, 분노의 원한, 죄악과 타락 등으로 얼룩져 있는 생명을 품어 안고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에 참여시키는 생명운동은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요, 성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직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거듭나 사명을 받은 성도들이여! 우리 속에 있는 감정들 - 원수에게 향한 원한과 분노, 핍박하는 자에게 향한 모든 악의들, 억울함, 정의감, 시기와 질투의 감정들 - 이 모든 것들을 오직 예수님만이 이기게 하실 수 있는 것들인데, 바로 그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십니까?
우리의 감정보다도 큰 생명 사랑운동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합니다. 성직은 생명 사랑운동입니다. 그러면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떠한 과정을 따라야 할까요? 우리 예수님이 모델이며, 그 모델은 분명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절)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눈은 아버지께 고정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천둥과 번개가 몰아쳐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고 아버지께 자기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일을 보기 전에는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으셨습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서야 거기에 참여하여 그 일을 수행하실 뿐이셨습니다.
성경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반영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자기를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자기의 이상과 뜻과 계획을 포기해 버린 분이올시다. 사실 예수님은 빌2: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본체였지만 하나님과 동등될 것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버린 분이십니다.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자신을 비웠기에 거기에는 자신의 뜻과 의지와 꿈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비워 있는 자신의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것으로만 가득 채우고자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소원이며 꿈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자기의 뜻이요, 아버지의 일이 자기의 일이며, 아버지의 꿈이 자기의 꿈이셨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것으로만 자기 속에 가득 채워 아버지의 일만을 하려고 작정하고 그렇게 사신 분이 우리 주님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직자의 길인 것입니다. 성직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나를 몽땅 비워 버린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일로 가득 채운 사람들입니다. 꿈도 죽고, 이상도 죽고, 판단기준도 죽고, 감정도 죽고, 의지마저도 죽여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꿈, 하나님이 이상, 하나님의 판단으로 채워서 하나님 아버지의 삶을 살며, 아버지의 일만 하려는 자가 성직자인 것입니다.
성스러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작정한 자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는 고백과 선언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여 모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들, 하나님의 일들이 아닌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욕망들을 하나 하나 태우고, 씻고, 정결케 하며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성도여러분! 이걸 아셔야합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으로 채우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그 일을 나의 일로 삼고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결국 성령충만은 그리스도 충만이요, 그리스도 충만은 하나님 충만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로 하나님의 성스러운 일에 참여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성령은 우리의 못난 자아들을 태우시고 씻으시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성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안에 종교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인도의 캘커타시를 방문한 사람들이면 꼭 찾아가 보고, 꼭 찾고 싶은 곳이 있답니다. 그곳은 지금은 돌아가신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운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Dying)입니다.
이곳은 폐허가 된 사원을 고쳐서 만든 곳으로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는 순간만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돌보는 집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 처음으로 왔을 때 테레사는 이곳에서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 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충분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와줄 사람도 별로 없으며, 특별하게 내세울 재능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생각은 이곳 낯선 인도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간절한 열망뿐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 시내를 걷는 중에 길가에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이 홀로 죽어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돌보아 주지 않는 그 사람을 보면서 참으로 불쌍한 생각을 가지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만났다면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해주실까?”
테레사 수녀는 이런 응답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어떤 일을 하였을지라도 죽어 가는 순간만큼은 존중과 돌봄의 사랑을 받으며 죽어야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게 됩니다.
그래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는 즉시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는 그 일에 참여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는 길가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끌다시피 하여 근처에 있는 폐허가 된 사원 안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테레사는 그 곳을 청소하여 죽어 가는 순간만이라도 청결한 분위기 속에서 죽을 수 있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테레사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가 어떻게 살았든지 적어도 죽어 가는 순간만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만 받는다고 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집은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이는 환자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환자들은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망이 없던 환자들이 소생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제 한 간호사는 이 집이 이름을 생명을 주는 집(Home for Living)으로 바꿀 생각이라고 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기를 원하는 그 일을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수행하기를 원하시는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요 5:17-21 / 손상률 목사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매우 분주하게 쉴 틈 없이 전개되었습니다.
초기 삼십 년 동안은 나사렛 동네에 있는 사가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등 인간적인 일들로 이루어졌습니다(눅 2:51). 공생애 삼 년 동안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제한된 시간과 환경의 틀 안에서 그가 하셔야 될 일을 계획대로 진행하여 나갔습니다. 그 일들은 주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쳐주는 일이었습니다(마 9:35).
이와 같은 주님의 사역은 바닷가에서나(마 13:11), 산에서나(눅 6:2), 회당에서나(눅 4:16), 빈들에서나(막 6:35), 집에서나(마 13:36), 어디서든지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이루어졌고 그런 일들로 인하여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막 3:20).
그렇지만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모두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을 책잡았고 하시는 일에 문제삼고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며 시비를 벌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이 구덩이에 빠져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안식일이라고 구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하물며 사람이 병들고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안식일이라고 손을 못쓰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2:12).
여기 인식일 문제로 시비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여야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딛 2:14). 또한 그로 인해서 어느 정도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하여야 될 일에 주춤거리거나 소홀히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을 강조하는 뜻입니다.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세속에 빠져 나태하여 지기 쉬울 때 주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하여야 될 성도의 사명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Ⅰ. 일을 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3:2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주적인 대권 자로서 일을 기획하시고 실행하시고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 내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계시는 전능성(全能性)과 전지성(全知性)과 무한성(無限性)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1) 드러나지 않게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것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그 업적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요란하게 나타내거나 이를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태양계를 운행하시며 지구를 하루 한바퀴씩 자전(自轉)시켜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하십니다. 인력(引力)에 의하여 천체를 공중에 매어 달고 바닷물을 움직이게 하시지만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십니다.
욥기 26:7-10에 보면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계시지만 사람들이 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 창조하시고 구속(救贖)하십니다.
창세기 1:1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소요리 문답 제9문답에는 “창조하신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창조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엿새동안에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그 권능의 말씀으로써 만물을 지으신 일인데 매우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26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그 모든 일을 마감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보존하시며 그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지금도 생성 변화하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섭리에 따라서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재창조하시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21:5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오염되고 파괴된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고 새롭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게 하시는 일입니다(롬 8:1-2).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3) 의(義)를 이루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과적으로 공동선(共同善)을 이루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자기에게만 좋고 다른 사람에게 좋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공존 공영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사도행전 17:25-26에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 세계에까지 다 유익 되고 선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마 6:33).
Ⅱ. 하나님의 일에 동참 하여야됩니다.
예수께서 삼십 팔 년 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시며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일이 안식일에 이루어졌다고 문제를 삼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써 재창조하는 사역입니다. 인간의 질병은 범죄의 결과로 일어난 현상으로써 정상적인 생리작용에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창조 원형이 파괴되고 망가져 버린 불행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이를 고치신 것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심과 동시에 죄에 감염된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일입니다. 여기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일하셔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요한복음 5:21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죽음 아래 놓여 있는 인생을 살려내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죄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5:20에 보면 사람들이 메고 온 중풍병자에게 예수께서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수족이 마비되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에게 사죄의 선언을 함으로써 회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유대인들은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고 비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하고 중풍병자를 향하여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눅 5:21-26). 사죄함을 받은 그 사람은 그 즉시 질병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곧 영혼도 육체도 다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2) 성도가 하여야 할 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이 있습니다. 디도서 2:14에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일은 많으나 일군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7-38에는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를 부르실 때 그들에게 중요한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죄악의 바다에서 죽어 가는 생명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구원받게 하는 일로써 곧 전도자의 사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주님께 받은 이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4;2). 그는 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하였습니다(딤후 4:5).
(3) 교회가 하여야 할 일
예수께서 지상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정부나 사회 단체에서 하는 일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 나라에서 하는 일은 정치적 영역에서 민생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는 일이지만 교회는 종교적 영역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적 기능을 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관리하는 일에 우선을 둡니다.
정부나 국가기관은 국민의 총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헌법을 시행하지만 교회는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성경말씀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며 실천하며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쳐주신 일을(마 9:35) 그대로 계승하여 교육과 선교와 봉사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Ⅲ. 일하는 자가 유의할 점
그리스도의 일군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일군이 된 것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았습니다. 에베소서 3:7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하여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15).
(1) 사명에 대한 인식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반드시 그가 수행하여야 될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존재 가치요 목적이 됩니다. 로마서 14:7-8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다거나 남이 대신 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 오셔서 “내 어린양을 치라”고 분부하실 때 자기 친구 요한을 두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요 21:20-22).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끝났다거나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2)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9:4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할 때 자기의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의도에 따라 지체 없이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됩니다.
세상에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비중 있게 생각하여야만 됩니다. 지금 당장 하여야 될 일을 다음으로 미룬다거나 자기 일을 먼저하고 교회일을 뒤에 하려고 한다면 낭패를 보는 수가 있습니다. 기회가 마냥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은 시간이나 외부적인 상황만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건강이나 물질이나 가정 환경이나 현재의 조건이 갑자기 어두움으로 휩싸일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4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마음에 비상을 걸고 빈틈을 주지 말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엡 5:15-16).
(3) 실적에 따르는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7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나 양과 염소의 비유는 모두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각 사람의 행한 실적에 따라 상벌을 받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겨서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마 25:30). 한편 착하고 충성된 종의 경우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하고 최상의 영광을 같이 누리게 됩니다(마 25:21).
이와 같은 충성스러운 일군들의 실적은 금과 같고 은과 같고 보석과 같이 자랑스럽게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3:12-14). 그들의 행한 일과 남긴 업적은 해와 달과 별과 같이 자자손손 두고두고 누리는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고전 15:41).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 5:19-29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42)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라”며,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감히 자기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요8:40)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 중 빌립이 “(요14:8)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며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11-12)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는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심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그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 고난을 받게 되면 제자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남게 되겠지만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16:32)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 말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는 말씀도, 간단히 말해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예수께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께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본다’라는 단어는 지금 현재,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있는 현재,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서 세상에 온 자신은 부자 일체(父子一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자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께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라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장 그곳으로 가시지 않으시고 며칠을 더 머무시던 곳에서 계시다가 유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 사이 나사로는 사망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요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두고 잠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당도해 보니 벌써 죽은 나사로를 장사(葬事)했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 아쉬움을 안고 “(요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1:23-26)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요11:27)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마리아도 예수께 와서 자신의 안타까움을 말합니다.
(요11:32)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사랑하던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며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며 만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11:40)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지 않았느냐시며 돌을 옮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요11:41-42)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도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인 그대로 였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가 생전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고 말씀하신 그대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큰 일”은 바로 죽은 나사로의 부활을 말합니다. 이같은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6:39-40)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 즉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보게 된 많은 유대인들이 그제서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습니다.
(요11:45)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고, 그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16-1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에 이르게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을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씨”, 곧 생명의 성령이 심령 속에 내주(內住)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여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보시고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씨”, 곧 생명의 성령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여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씨’가 여러분 심령 속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믿음으로 낳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부르는 것은 나의 생명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8:14-16)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봅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며, 생명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옮겨진 것입니다. 다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12: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예수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거룩한 장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희생되신 것을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사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모두 자신이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사는 세상은 사망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즈음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여 건강 100세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100세를 산다 해도 결코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 속에 피바람을 일으키며 정권을 탈취했지만, 전광석화와 같이 지나가 버리고 지금은 무덤에 비석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입니다. 힘이나 세력 따위가 아무리 성할지라도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하여진다는 것입니다.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花無十日紅 人不百日好),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사람은 백일을 한결같이 좋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육체는 이와 같이 곧 시들고 말라지는 풀과 같은 인생입니다.
(벧전1:24-25)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흙에서 돋아난 풀은 밟혀도 죽고 토끼나 병아리 같은 짐승이 뜯어먹어도 죽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추락한 비행기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고, 지나가는 자전거에 치어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면도하다가 코털하나 뽑았는데, 파상풍으로 그 이튿날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 약한 존재인데, 몇 천년이나 살 것처럼, 욕심을 내고, 육신의 생활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세계는 지금 초고층 빌딩 홀릭(holic, 중독증) 중입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빌딩은 부바이의 부르즈 할리파입니다. 높이 829m, 160층입니다. 현대판 바벨탑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보면 고층 빌딩도 성냥곽을 세워놓은 것 같습니다. 작년 파리 모터쇼에서 컨셉카로 나왔던 람보르기니의 세스토 엘레멘토는 5200㏄ 10기통 엔진으로 최대출력 570마력, 최고속도는 시속 322㎞ 이상이며, 찻값은 무려 31억3450만원으로 세계 최고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차도 높은 산에서 바라보면 개미 기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구름 저 너머 비행 고도 10,000m에 이르면 초고층빌딩도, 세계 최강, 최고의 전함도, 세계 최고급의 유람선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 내린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이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흙에서 난 인간이 풀과 같고, 그 영화도 풀의 꽃과 같이 짧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들의 풀과 같이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입술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하여 믿으면 사망의 세력이 떠나고 영원한 생명이 그의 생애를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게 되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이 지배하는 삶이 되어 모든 삶의 영역이 창조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기를 영접하는 것은 생명이고, 자기를 배척하는 것은 곧 사망이라고 아주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의미로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참된 의미에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존재(exit)는 하고 있지만, 살고(live)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를 영접하고 사랑하게 되면 삶의 질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이려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에 눈이 어두워진 사울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 사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며 묻자 “(행9:5-6)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게 된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행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 믿는 믿음을 훼방하던 자, 그리고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그릇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울은 살았으나 죽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울이 변화되어 바울이 된 그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음성을 들음으로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 주의 음성을 듣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오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에 이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요 5:19-29 / 오정호 목사
부활의 주님께서 주님의 자녀들에게 선물하시는 은혜와 평강을 회복하고 재발견하는 올해의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정보를 제공합니다.
중요한 정보는 그 정보를 전하는 사람과 사건의 향방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사건의 정보야말로 인간사에 가장 중요합니다. 왠가하면 영생과 영벌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① 부활 사건에 대한 정보입니다(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9절). 여기 심판의 부활은 저주의 부활 또는 정죄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도 부활하고 예수 믿지 않는 자도 부활합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부활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생명의 부활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믿는 고백이 없으면 심판의 부활을 맞게 된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정보입니다(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자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밌게 표현하시면서 성부하나님처럼 자신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분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면만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붙잡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아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여기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그 미래가 확실하기에 한사람도 예외 없이 영생의 선물을 체험할 뿐 아니라 살아서도 주의 자녀로 살고, 죽어서도 영생의 선물을 확실하게 받는다는 것을 주님이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절). 예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요 ‘살려주는 영’(Life giving spirit)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45). 요새는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가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드세게 나와도 비진리가 진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구세주이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고린도전서 15:2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정보를 가진 자들은 정보를 가지지 못한 자처럼 살면 안 됩니다.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信行一致). 세 가지 실천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잘 믿어야 됩니다(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 나오리라”(29절). 여기 선한 일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선한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요한복음 6:28-29).
우리교회, 나아가서 우리한국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회내의 중년남성 교우들의 영적무장이 절실합니다. 영적무장의 핵심은 우리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리되고 분명한 선언적 고백위에 교회생활은 생기를 가집니다.
우리교회 어떤 남자집사님의 자기진단의 고백입니다.「10여년이 넘는 그동안의 오랜기간에 교회는 다녔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확신이 없었으나 근년 새로남교회에서 신앙생활가운데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또 어떤 남자교우는「예수님은 나를 절망 속에서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내게 죄를 깨닫게 해 주셨고 나의 인생이 무의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으며 나의 중심에서 내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간에 늘 함께 계시고 나를 주관해 주셨습니다.」모든 교우들의 신앙고백이 분명하고, 뜨거워야합니다. 중년의 남자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새출발하면 그가 속한 가정과 직장생활의 변화는 눈부시게 다를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건강은 물론 직장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주역으로 쓰임받을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중년남자성도들에 대한 영적대안(靈的代案)을 제시하는 교회로 든든히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남자성도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 ‘바로 지금’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보장해주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성경의 중심 주제는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주제를 압축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주님의 십자가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도 압축하면 예수님만 남는 복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존중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주로 믿는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향기가 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듯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세상보다 탁월한 윤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가운데 신앙적인 역사관과 신앙의 영향력을 가지고 새롭게 나라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도전하면서 담대하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17). 일한다는 것은 주저앉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행하심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음해하고 핍박했습니다(16절).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담대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담대하고도 용기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를 위해 봉사하다가 조금만 어려우면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골프계의 살아있는 전설 잭 니콜라우스(Jack Nicklaus)는 “인생에게 우리가 저지르는 최악의 일은 포기하는 것이다. 인생에 포기하면 진짜 늙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포츠맨들에게 요구되는 도전정신이 있다면,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 희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힘을 내십시오!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8). 경제 문제 자녀문제 혹은 남모르는 인생문제로 포기하고자 하는 맘이 드는 자는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으로부터 능력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충분히 일할 수 있고 마땅히 일해야 합니다. 어려움은 우리의 영적인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에 안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주심과 사랑하심을 온몸을 던져 신뢰하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나라의 미래를 맡겨주십니다.
넷째,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주님의 뜻을 좇아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into the world) 보내었고”(요한복음 17:18). 기독교 역사 2천년은 복음전파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바로 영적으로 추수할 때가 되었기에 더더욱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요한복음 4:35).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론 달려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붙들어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귀한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생명의 전달자로 우리 모두를 불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부활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는 우리는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을 더욱 사랑합시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답게 윤리적인 탁월성과 아울러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면서 담대하게 살아나갑시다. 부활의 주님만이 나와 우리 가족과 민족과 인류에게 소망이 되시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부활의 주님만을 신뢰하고 전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우리교회는 만년동시대를 눈앞에 앞둔 중요한 시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영광의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쓰임받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부활의 주님을 위하여 마음껏 복음사역을 펼쳐갑시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성도의 정도(正道)를 실천합시다. 우리와 우리교회를 통하여 대전광역시민의 인생이 복되도록 합시다. 사도들처럼 온몸과 재산 드려 예수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으로 쓰임받읍시다. 할렐루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神靈)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2-4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