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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벤처 부자 100인
2위 손주은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45세(남)
1,544억원
서울대 서양사학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를 시작했다가 사회탐구 영역 명강사
온오프라인 교육사업가로 성장.
공부는 머리 아닌 엉덩이로 하는 것… 어린 딸 장례날엔 눈물의 수업”
입시학원가 20년 생활 동안 ‘야행성’ 인간으로 돌변한 그를 만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작은 체구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음성에서 전달되는 첫인상은 평범함 그대로였다. 하지만 7시간에 걸친 마라톤 인터뷰를 마치고 밤 12시가 다 돼서 자리를 떠날 때 그를 바라보는 눈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괴물’ 혹은 ‘거인’으로 비쳤다.
그는 정말 ‘남달랐다’. 국내 온라인 교육의 절대지존으로 등장한 메가스터디 손주은(46) 사장. 입시학원가의 대스타인 ‘손사탐’(사회탐구영역의 명강사라는 의미의 별명)이 e러닝 사업의 맹주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에는 고비마다 운명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한 남자의 운명을 이끄는 여성이라면 그에게 그들은 ‘여신’일 것이다. 첫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의 인생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친할머니 최무선(1992년 작고) 씨와 어머니 최성례(66) 씨다. 그중 친할머니는 손 사장이 지금도 주저 없이 살아오면서 알게 된 사람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 존재다. 이 두 사람에게서 그는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배웠다. 할머니에게서는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저력을, 어머니로부터 강골 기질을 이어받았다. 1961년 경남 창원군 동면 무성리에서 2남4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총명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영재임을 알아본 담임의 권유로 3학년으로 월반할 만큼 공부를 잘했다. 그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여동생 은희(44) 씨는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여동생 은실(42) 씨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셋째 남동생인 성은(40) 씨는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메가스터디의 온라인사업부문 부사장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넷째 여동생인 은정(37) 씨는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목사가 됐다. 막내 여동생 은진(35) 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메가스터디 커뮤니케이션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손 사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나왔다. 할머니·어머니 그리고 또 다른 ‘여신’들
친할머니는 가끔 1주일씩 금식기도하는 것으로 흩어지기 쉬운 손주들의 정신세계를 바로잡아 갔다. 손 사장은 “할머니가 금식기도를 시작하면 우리는 자동으로 공부하는 분위기로 들어갔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세에 시집온 어머니는 결혼 후 수퍼마켓, 피혁사업 등을 하며 남편과 함께 부를 일궈 갔다. 특히 겨울 한철 여러 지역에 동시에 지점을 차려 가며 벌인 피혁사업은 큰 돈벌이가 됐다. 당시 어머니는 하루 장사가 끝나면 큰 마대자루에 담아 온 돈을 세느라 바빴다.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아무리 조그만 가게를 하더라도 아랫사람 열 몫은 할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을 늘 되뇌었다. 아버지 손용택(71) 씨는 양돈업과 육류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아버지가 30대 후반에 정치에 뜻을 두어 모아놓은 재산을 다 없애 버리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더 큰 부자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업가적 수완이 뛰어난 부모 덕에 여섯 자녀는 넉넉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손주은 사장의 타고난 능력은 집중력을 바탕으로 한 승부사적 기질이다. 어릴 때 한창 축구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14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뛰었다. 대학 시절 당구를 배울 때는 44시간 동안 계속 당구대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집중력은 2~3년은 공을 들여야 갖게 될 실력을 한두 달 만에 갖추는 ‘괴력’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가 과외라는 일과 인연을 맺게 해 준 재수생 시절의 연인 ‘424일간의 그녀’다. 197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그녀는 그가 삼수 끝에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는 1981년 3월3일까지 단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난 ‘424일간의 사랑’이다. ‘손사탐’ 명성을 얻게 해 준 어느 여제자
첫 학기를 보내고 난 뒤 휴교령이 떨어져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가난했던 그녀의 2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를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는 다시 서울대에 도전하기 위해 삼수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단 두 달 만에 국보위에서 과외 금지조치를 내려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동안 여자친구 등록금의 2배 정도 되는 돈을 모았고, 모두 그녀에게 건넸다. 1981년 3월3일 그가 서울대에 합격해 입학식을 치르던 날, 다른 남자친구가 생긴 그녀는 절교를 선언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고, 그는 1984년에야 가슴으로부터 그녀를 떠나보낸 뒤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다. 그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서정의 시대였다. 세 번째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과외 선생이 천직임을 알게 해 준 첫 제자 임모 씨다. 1987년 결혼 후 손 사장은 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던 동생 성은 씨를 돌보는 조건으로 부모로부터 생활비 80만 원을 지원받았다. 세 식구가 넉넉히 먹고살 정도의 액수였다. 하지만 동생이 대학에 합격해 신촌 쪽으로 자취방을 옮기자 생계가 막연해졌다. 그 무렵 그의 돈벌이 사연 하나. 서울대 졸업식장에서 커피장사를 하기로 결심한 그는 5,000원어치 인스턴트 커피를 사고, 동네 아주머니에게 커피포트를 빌려 장사에 나섰다. 다른 커피장수들은 부스 속에서 손님을 기다렸지만 그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포트를 들고 찾아다니며 몇 배의 수익을 올렸다. 한 잔에 500원씩, 그날 두세 시간 만에 그는 무려 3만 원을 벌었다. 커피장사를 계기로 그는 이제 가장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1987년 3월2일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면서 그는 고2 여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이 여학생이 바로 임씨다. 의사의 딸인 그 여학생은 공부와 삶에 다 의욕이 없는 학생이었다. 반에서 중간도 안 되는 실력에 얼굴이 몹시 어두운 그녀는 처음 마주앉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손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와 수업을 하러 왔지만 너무 충격받았다. 내가 지금부터 딱 5분만 말할 테니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해라.” 그는 그녀에게 공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힘들여 설명했다. 그렇게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돈으로 싸서 시집보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창녀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지독한 독설’도 퍼부었다.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며 펑펑 울었다. 그 뒤부터 놀라운 변화가 시작됐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실력은 중학교 2~3학년 수준밖에 안 됐던 그녀는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수업할 때는 회초리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그녀는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참아 냈다. 과외 두 달 만에 치른 중간고사에서 그녀는 반에서 10등을 차지했다.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성적은 놀라울 만큼 나날이 향상돼 마침내 전교 10위권 안에 들 정도가 됐다. 그녀의 실력 향상은 그에게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불어넣는 확실한 계기가 돼 과외가 천직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어머니가 “한 2년 더 벌어 유학자금을 마련하라”며 그룹과외를 제안했다. 그가 부전공인 철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을 그녀의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지방대에 다니던 아들까지 학업을 중단시키고 그에게 맡겼다. 1988년 1월 그녀와 그녀의 오빠, 그리고 다른 학생 3명으로 구성된 5인 그룹과외는 그렇게 시작됐다. 첫 제자 임씨는 그해 이화여대에 합격했고, 그녀의 오빠 역시 일류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네 번째 ‘운명의 여신’은 아내 김정미(46) 씨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내는 두 아이를 사고로 잃는 비극을 함께 이기며 그가 ‘손사탐’으로 등장할 때까지 묵묵히 동반해 준 고마운 존재다. 그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84년 만난 동갑내기 아내는 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구애에 냉정했던 그녀는 그가 밤을 새워 쓴 2m 길이의 연애편지를 받고는 감동해 그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1986년 7월 결혼했다. 내조에 충실하겠다며 교사직을 버리고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안정돼 갔다. 그러나 그 평화는 결혼 5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1991년 9월15일 일요일. 주일이면 아내는 아이들을 승용차에 태워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가 차를 가지고 나가는 바람에 가족들은 택시를 이용하게 됐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태운 택시가 교각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던 것이다. 이 사고로 뇌간을 다친 아내는 한 달 만에 깨어났지만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9월22일 세상을 떴다. 생후 9개월이었던 딸은 뇌 속에 보조기구를 끼고 살아야 하는 장애아가 됐으나 다음해 5월 연이은 사고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아이 잃고 다시 얻은 두 아이
당시 그는 양재동에서 입시 전문 보습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새벽 3시에 병원에 들러 잠든 딸아이를 면회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 막 눈을 붙이려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날 오전 딸의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눈물을 삼키며 바로 학원으로 나가 강의를 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학생들의 흐느낌으로 강의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 이후의 삶은 차마 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그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시간은 강의할 때뿐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그는 1주일에 60시간을 강의하는 초인적 스케줄을 소화해 냈다. 그 사이 축복처럼 다시 아이들이 태어났다. 1993년에 딸 희소, 1996년에 아들 희재를 낳으면서 그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운명의 여성들의 손에 이끌려 삶의 방향이 제시되었다면, 그는 자신의 타고난 두뇌와 열정을 엔진으로 그 길을 질주해 왔다. 전 과목 과외선생으로 한창 뛰던 36세 당시 그의 재산은 이미 3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1997년부터 대중강사로 나서 ‘손사탐’으로 한창 주가를 날리던 2003년에는 150억 원이 되어 있었다. 2004년 메가스터디가 코스닥에 상장되자 그가 보유한 주가총액만 1,200억 원(31%)을 넘어섰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룹과외 선생으로 나선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988년 1월이었다. 그해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한 그는 음악교사 출신인 아내에게 피아노 학원을 열자고 제의한다. 부부가 힘을 합해 좀 더 빨리 재산을 불려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이들 사이에는 이미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전셋집을 정리하고 그간 모은 돈을 합해 2,500만 원을 들여 작은 방이 딸린 학원을 인수했다. 그러나 피아노 학원 운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겨울 우연히 아들이 가정부에게 맞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돈보다 자식 돌보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 재산을 쪼개 월셋집을 얻고 남은 1,750만 원으로 서울 삼성동에 있는 독서실을 인수했다. 150석 규모 독서실의 한 달 순수익은 150만 원. 이 돈을 활용해 서울 역삼동에 있는 80석 규모의 독서실을 또 인수했다. 2년 뒤 삼성동 독서실 운영권을 3,100만 원에 팔아 적지 않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1988년 그룹과외를 처음 시작할 때 그는 1인당 전 과목 과외수업비로 월 25만 원을 받았다. 그러나 5명으로 시작한 전력투구 과외가 소문나면서 곧 10명으로 불어나 수익도 두 배로 늘었다. 그는 이들을 모두 대학에 합격시켜 다음해에는 1인당 100만 원을 받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지옥훈련을 통해 9명을 합격시켰다. 그해 과외비는 그의 목표대로 1인당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모든 돈벌이는 치밀한 사업적 목표를 토대로 추진되었다.1995년 그는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 근처 빌딩 두 개 층을 얻어 ‘진리와 자유’라는 보습학원을 열었다. 송파에는 대학친구 강주승(46) 씨와 함께 ‘참배움터’라는 학원을 열었다. 1990년에 경인학원을 세운 이후 5년 만에 3개의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된 것이다. 그는 그 무렵 고3 학생 1인당 전 과목 과외비로 200만 원씩을 받아 한 달 평균수입이 3,000만~4,000만 원대에 이르렀다. 당시 강남 유명 학원가의 초특급 강사에게 들어가는 과외비는 과목당 300만~400만 원 정도, 1년에 과외비로만 4,000만~5,000만 원이 들어가는 살인적 규모의 과외시장이 열려 있을 때였다. ‘손사탐’이 된 1997년을 그는 ‘신화 창조의 원년’이라고 부른다. 그즈음 그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삶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 뒤 남은 인생의 원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31일,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방의 한 호텔에서 밤을 새우며 1997년 새해를 맞았다. 곧 닥칠 2000년이면 그의 나이 마흔, 이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잘나가는 과외선생이었고, 재산도 3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지만 고향에도 못 내려가는 ‘부끄러운 아들’이 돼 있었다. “과외선생 하는 아들 고향 내려오지 말라”
그는 30시간 동안 호텔방에 처박혀 식사도 거른 채 아버지의 인생 역정과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전 재산을 투자해 사립 고등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으로 취임하면 부친이 원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방법이야말로 돈으로 명예를 사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지난 인생을 글로 정리해 봤다. 그러자 세 가지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만큼 떳떳하게 살지 못했다. 다른 학원과 마찬가지였다고 핑계를 댈 수는 있었지만 세무 문제도 깨끗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까지 외면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억울했다. 과외는 혜택받는 사람들에게는 선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으로 치부되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자식을 잃어 가면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이었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정했다. 이 두 가지 생각 끝에 그는 “삶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의야말로 내 체질”이라는 소신을 굳혔다. 고등학교 때 부흥회 찬양시간을 이끌면서 목사가 되려고도 했던 그는 자신이 대중연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한정 힘을 불어넣어 주는 원천이었다. 그는 지금도 “강의는 내 목숨과 같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한다. 그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결론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강의와 장사”라는 것이었다. 대신 ‘깨끗한 장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인생과 사업을 1997년의 각성에 두겠다는 의미로 ‘ROOT 97’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Resonable(합리적으로), Organic(조직적으로), Open-minded(열린 마음으로), Together(다함께)’라는 의미였다. 그는 이 슬로건을 늘 가슴에 되새기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마다 아크릴 판에 새겨 걸었다. 그가 이런 결심을 굳히자 아버지도 변했다. 그 즈음부터 아버지는 평생 거르지 않는 새벽기도 때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손 사장은 자신을 ‘장사꾼’이라고 표현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다. 1997년 벽두의 각성 이후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떳떳한 ‘투명 세무’를 지켜 왔고, 메가스터디의 경영 원칙으로 삼고 있다. 또 고객이 만족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떳떳하게 경쟁하는 장사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낸 일화는 수없이 많다. 서초동에 낸 학원 ‘진리와 자유’에서 학생을 모집할 때의 일이다. 그는 수강신청 조건으로 어머니들이 1주일에 두 번씩 자신의 교육 프로그램을 들을 경우 자녀의 학원비를 10% 깎아 주겠다고 했다. 또 대학에 떨어질 경우 다음해에는 수강비의 50%를 깎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했다. 두 개 층 중 한 층의 절반을 음악감상실로 만들고는 어머니들을 상대로 클래식·미학·철학·국사 등을 강의했다. 또 30명의 학생 어머니들에게 돌아가면서 밤 11시에 30명분 간식을 싸 오게 했다. 이렇게 할 경우 고객인 어머니들과 자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자신의 강의 실력을 확인시킬 수 있으므로 학생들의 동생들까지 뒤를 이어 등록시키기 때문이다. 학원 운영하다 대중강사 일에 ‘올인’
그는 또 ‘본질’로 승부했다. 다른 학원들은 학원차량을 마련해 심야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래다주는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그는 부모들에게 직접 데리러 오라고 했다. 대신 그 비용으로 최상급 강사들을 영입했다. 또 평일에는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30분까지 수업을 계속했다. 주말에는 오후 1시에서 새벽 1시까지 수업을 했다. 쉬는 날은 없었다. 새벽 2시30분에 수업이 끝나도 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새벽 4~5시까지 혼을 낸 뒤 귀가시켰다.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은 차 안에서 몇 시가 되든 자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학부모들이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의 열정적인 수업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는 가르치는 일 역시 질긴 엉덩이로 해냈다. 그가 22시간 연속 강의로 두세 달 걸릴 국사 등 암기과목을 하루에 끝내는 수업을 했던 것은 학원가의 유명한 일화로 떠돈다. 지옥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방학 중 9박10일간 한 학생의 집을 빌려 매일 한 과목씩 암기과목을 끝내는 프로그램이다. 함께 밤을 새우며 25점 만점에 20점 이상 받아야 잠을 허락했다. 이렇게 공부시킨 학생들은 대부분 명문대에 합격했고, 강남 어머니들 사이에서 그의 몸값은 나날이 올라갔다. 이렇게 되니 ‘배짱 장사’가 가능했다. 그는 어머니들에게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니 두 명씩 조를 짜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율학습을 감독해 달라”고 했다. ‘당번’에 걸린 어머니는 아침 8시까지 나와 교실 청소부터 시작해야 했다. 모두 강남의 ‘사모님’들이었지만 자식의 일이기에 순응했다. 물론 그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손사탐’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기회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1997년 초, 당시 그가 운영하던 학원 ‘진리와 자유’의 기획실장이었던 이모 씨는 그의 열강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원장님은 작은 학원에서 썩어서는 안 된다”며 대중강사로 나설 것을 설득했다. 이 실장은 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력서를 들고 서울 시내 유명 학원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모두 외면했다. 대중강사들은 모두 단과반으로 승부를 거는데 그는 전 과목 과외선생이라는 인정할 수 없는 경력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경력을 중시하는 대중학원가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였다. 결국 그는 지인의 추천을 받고서야 강남의 모 학원에서 강의를 맡을 수 있었다. 3개 반을 맡았는데 등록생은 모두 8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 수에 개의치 않고 열강을 했다. 그즈음 여전히 3개 학원을 운영하던 그가 대중강사 일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벌어진다. 그해 5월 검찰이 고액과외를 문제 삼아 학원을 덮쳤다. 그는 약식기소되었고, 벌금형을 선고받아 1년간 학원 운영 자격을 박탈당하게 됐다. 이것이 그가 수능 단과반 대중강사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94년부터 도입된 수능시험은 무조건 외우기만을 주입하던 일반 강사들보다 큰 그림으로 설명하는 명문대 출신의 강사들을 주류로 등장시켰다. 덕분에 과외로 실력을 다진 그는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데뷔 5개월 만에 그의 강의는 등록 첫날 2,000명의 좌석이 매진되는 대박 행진에 나서게 된다. 연간 20억 원을 버는 스타 강사 ‘손사탐’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메가스터디 출범의 계기도 사소한 것 하나 그냥 놓치지 않는 그의 현실감각에서 시작됐다. 1998년께 그는 홈쇼핑 채널을 보고 인터넷 강의 시대가 올 것을 예감한다. 이런 그에게 모 기업에서 전자칠판 방식의 강의를 제안했다.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인터넷 강의의 성공 가능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2000년에는 당시 잘나가던 정보기술(IT)업체 대표로부터 10대를 대상으로 한 ‘틴 스터디’를 50대 50의 지분으로 합작해 만든 후 대표이사로 경영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귀가 번쩍 뜨인 그는 몇몇 학원장을 만나 공동 출자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조인식 바로 전날 만난 투자 전문가 후배는 “증자 과정에서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조언과 함께 차라리 직접 회사를 설립하라고 권유했다. 그것이 바로 메가스터디를 독자적으로 출범시키는 계기가 됐다. 입시 사이트 메가스터디 인기 폭발
고액 스타강사의 강의를 한 강좌에 2만~8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는 강점으로 5년 만에 유료회원 20만 명을 달성했다. 이런 저력을 몰아 2004년에는 코스닥 등록에도 성공했다. 2002년 매출 203억 원, 2003년 매출 460억 원, 2004년 매출 502억 원, 2005년에는 매출 710억 원을 달성했다. 메가스터디가 이렇게 빨리 기반을 다지게 된 데는 오랜 현장경험에서 나온 그의 사업전략 덕분이다. 사업 초기 다수 강사들은 학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엔터테인먼트 개념을 접목한 에듀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제공하자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본질’이 경쟁력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손 사장은 강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원칙이 통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타강사 영입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손사탐으로 ‘등극’한 자신의 위치를 십분 활용해 이 또한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보통 수강생들은 학원에서 2과목 이상을 듣는다. 스타강사의 강의 앞뒤에 배치된 강의가 일찍 마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메가스터디에 참여하는 강사에게 자신의 강좌 앞뒤 시간을 배정해주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대형 강사는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직접 섭외에 나섰다. 5명으로 시작한 온라인 강사는 현재 100명이 됐다. 그중 최상위급 10명은 연봉 10억 원이 넘는다. 손 사장의 다음 꿈은 메가스터디를 종합 e러닝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성인들까지 교육 연령대를 수직계열화하는 형태로 확대해 나가고, 이와 함께 오프라인 학원을 함께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2003년 자회사를 설립해 런칭한 중등부 사이트 ‘엠베스트’는 이미 중학생 온라인 교육시장에서 1위를 기록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7, 9급 공무원시험에서 공인중개사시험, 토익·토플, 치의대·법대 등 전문대학원 등의 온라인 교육부문으로도 사업을 확장 중이다. 2005년 3월에는 공무원 고시 전문 사이트인 ‘메가고시’와 자격증 전문 사이트 ‘패스메카’ 등 2개의 사이트를 오픈했다. 직영 오프라인 학원도 확장 중이다. 지난해 말 노량진 학원의 문을 엶으로써 모두 7개의 오프라인 직영 학원을 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에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00억 원 들여 교육문화재단 만드는 것이 꿈 그는 연예인과 다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회원이 7,000명에 이르는 막강한 팬클럽인 ‘손사모’를 갖고 있는 인기 스타다. 손사모가 유지되는 것은 학생들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손사모 회원인 김지원(23) 씨는 “손 선생님은 ‘정모’가 있을 때면 아무리 바빠도 나타나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연구실이나 집에 데려가 재울 정도로 세심하게 보살핀다”고 했다. 바로 옆에서 그의 성장사를 지켜보는 그의 친구들은 그가 성공한 요인으로 명석한 머리와 승부사적 기질,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을 꼽았다. 여기에 살인적인 학원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체력과 설득력, 그리고 적을 만들지 않는 용인술까지 갖췄다고 한다. 사업 확장을 위해 그는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강의를 곧 접을 것이라고 한다. “안 되면 목숨을 건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일하다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추진 중인 교육사업에서 1조 원 이상의 매출이 달성되는 단계에 가면 2,000억 원 정도를 투자한 교육문화재단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꿈이라는 손주은 사장. 이 ‘열혈남아’가 교육시장을 정복한 후 내딛게 될 다음 행보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늦은 밤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 3층에 자리 잡은 사장실을 나설 때 그의 사무실 밖에는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흩어져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족히 여섯 팀은 넘어 보였다. 늦은 시간 강의를 끝낸 강사들과의 면담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남들이 꿈나라를 헤맬 시간, 손 사장은 이들과 면담을 하며 밤을 하얗게 새울 것이다. |
손주은 사장이 제시하는 성공의 5대 원칙 |
사업에 뛰어든 사람 10명 중 9명은 실패하는 것이 현실이다. 살아남은 ‘한 명’, 그중에서도 대박을 터뜨린 몇 안 되는 사업가인 손주은 사장. 그에게는 철저한 경영원칙이 있다. 첫째, 발상을 유연하게 가져야 한다 = 사업을 머릿속에서 그린 그림대로 하면 안 된다. 변화하는 흐름에 한발 앞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둘째, 무모한 고집을 버려야 한다 = 자신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고집을 부리는 사업가는 성공할 수 없다. 자신의 단점을 지적받으면 이를 수긍하고 즉각 궤도를 수정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셋째, 현실적이어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 메가스터디에서도 비슷한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지난해 오프라인 학원 중 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부하직원에게 현장의 원인을 진단하라고 했더니 그 직원은 문제를 일으킨 원장을 만난 후 보고서를 써 왔다. 문제는 여전히 시정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현장은 고객인 학생과 교사였다. 그는 직접 현장에 가서 고객을 만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결과 나온 답대로 문제를 시정했다. 그 지점은 현재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고 있다. 넷째,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늘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 다섯째,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 늘 예상대로 안 되었을 경우를 상정해 리스크를 줄이는 준비를 해야 한다. |
메가스터디 신상훈 고종훈 샘 완전 좋았긔!!!!!
나보고 늙어보인다고 했던말 아직도 기억난다....-_-
나한텐 어려보인다고 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용재가 맨날 손돼지손돼지 허리40인치라 그러고ㅋㅋㅋㅋ 뭐 예시만들려하면 손사장예시들고ㅋㅋㅋㅋ
사람들이 많이 욕하긴하지만.. 손주은 좋아요.고삼내내 과외나 학원안다니고 어둠의 경로말고 내돈주고 메가에서 인강 들었음.사탐기초잡을땐 손주은꺼 들었었고 도움도 많이 됬어요..ㅎㅎㅎ.아무튼 저한텐 괜찮은 분..ㅋㅋㅋㅋㅋ
메가 신상호 좋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훠 ! 저도 신상혼 선생님 팬이었는데 ㅋㅋㅋ 지금도 강의하세여..?
물론이죠 ㅋㅋㅋㅋ 지리 지존은 신상호선생님이긔!
신상호쌤 마이클잭슨닮지 않았냐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짱이라구!!!!!!!!! 정말정말 최고!!!
스눕독 닮았쌈 ㅋㅋㅋㅋㅋㅋ
신상호 쌤 진짜 최고!!!!!!!!!!!!!!!!!!!!!!!!!!!!!!!!!
저도 메가 신상호 좋아했어요 수업 진짜 재밌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들 그거 아세여? 신상호 부인 17살 연하래요. 신상호한테 강의받던 학생이라는데.... 메가 선생이 얘기해준거니 확실한거임. 근데 난 신상호 강의 들을때 진짜 잘생겨보였어 ㅋㅋㅋㅋㅋㅋㅋ 부인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부인 17살연하 사실맞삼.ㅋㅋㅋㅋ제자라고함.ㅋㅋㅋㅋㅋㅋㅋ악 미치겠다 마이클잭슨 ㅋㅋㅋㅋㅋ
아아아아악 나만의 신상호인줄 알았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강듣고 싸인받고 맨날 앞자리 앉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신상호 말투 캐웃기지 않냐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토나올정도로 ㅋㅋㅋ이게 입에 붙었다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상호쌤 진짜 쳐 사랑했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신상호 스눕독닮앗다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눕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훠 나두좋아 내것
zzzzzzzzzz스눕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상호선생님 진짜좋아열 ㅋㅋㅋㅋㅋㅋ 스눕독진짜 닮았네여 ㅋㅋㅋㅋㅋㅋㅋㅋ
졍말 사랑했었닥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열라 웃겨 ㅋㅋㅋㅋㅋㅋ 진짜 독하고 집념있는것같아요 성공할 이유가 있음 어쨌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해요.진짜..ㅋㅋ
난 손주은 선생님 완전 존경했는데...
미친 친할머니 최무선 --- 할머니가 미쳤다는줄 알고-_-;
어익후 손돼지씨 여기서 볼줄은...나 당신강의 듣고 사회문화 망했긔_☆
손주은 쌤!!나 진짜 손주은 쌤 너무 좋아했다규~~~~~~~쌤덕분에 수능도 잘 나왔다규!!ㅋㅋㅋㅋㅋㅋㅋ나는야 03학번
난 손사탐 제일 싫어하긔...욕이나 찌끄리고 자기 자랑이나 하고........평이 극과 극이쥐만 난 윗님들과 달리 제일 싫어하는 강사긔ㅠㅠ
난 손사탐 웃고 있는 사진이랑 김기훈 사진 잘라다가 책상에 붙이고 공부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아서
딸아이를 안고 있던 한 친척이 그만 아이를 떨어뜨렸고, 그 와중에 딸아이의 보조기구가 깨지면서 어떤 조치를 취해도 회복하지 못한 채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 어익후 이 친척 뭐냐규 ;;;
손사탐 최고...!!
ㅋㅋㅋㅋㅋㅋ 난 손주은 멋지더랔 ㅋㅋㅋㅋ 손짓과 넉넉한 배가 참 인상적이시지 ㅋㅋ 손짓 잊을 수 없삼!! 머리 쓰다듬고~~
손주은선생님사랑합니다!!!!!!!! 정말 자상하시고 아껴주세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정이많은분이세요~!!
2222222222 내가 젤 존경하는 분이시라긔!!!
와 메가 ㅋㅋㅋㅋㅋㅋㅋㅋ졸라 저안에 내돈얼마나많을까............................에라이...ㅠㅠㅠㅠ..........
나 손사탐 들었을때 메가스터디 첨 시작할땐데 그땐 인터넷 활성화 돼있지도 않았음..진짜 미래를 내다보고 돈 벌은 대단한 사람 휴
김기훈 머하냐...........리딩스킬인지 먼지 그거까지 들었는데 외국어 씨바ㅋㅋㅋㅋㅋㅋ
난아직도 이선생 대단하던데..발상의 전환이라고해서 근현대사듣고 여러방향으로 역사를 생각할수있어서 좋았음.. 뭔가 체계적이고~사업수완 정말 대단함.
나 이선생님 덕좀봐서 사탐 영역 중 하나 점수잘 나와다긔 ㅋㅋㅋㅋㅋㅋ 뭐였더라
우와.. .이거 읽으니깐 진짜 조녁ㅇ스럽네...근데 난 손사탐님 욕이랑.. 돈벌라면 강원도 가서 장사하란 말밖에 기억이 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신상호 너무 좋아서 한국지라 조낸 못하면서 재수할때도 한국지리만 고집했음.근데 또 망함; 아.이제 과목을 바꿔야하나.한국지리 다 쉬워하는데 나만 졸라 어려워ㅠㅠ
손주은 진짜 웃겼는데ㅋㅋ 강의 들을때 마다 배째져ㅋㅋㅋㅋㅋㅋ
난 로즈리만 ㄷㄷ 들어봤는데...로즈리가 이 사람 애기 하는데 ㄲㄲ 웃김
헉,,,, 로즈리???? 혹시 영어 가르치는 젊은 여 선생님이요?? 저 고 3때 다니던 노량진 고시학원에서 경력 속여서 짤렸었는데....;;;
메가에서도 속이다가 걸렷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