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5.23 노제 특집(?)
전후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성장과 번영을 누렸다. 45년에서 60년 사이의 국내 총생산은 2천억 달러에서 5천억 달러로 250% 가량 증가하였다. 대공황기 동안 평균 15%에서 25% 였던 실업률은 5% 이하로 유지되었다. 한편, 인플레율은 매년 3% 또는 그 이하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풍요와 함께 인구도 급증하였다. 1950년대 1억5천만명 이었던 인구는 60년대에 1억7천만으로, 10년 동안 거의 20%가량 증가하여 이른바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이러한 급속한 인구증가는 곧 소비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증가시키며 경제적 팽창을 더욱 자극하였다. 부의 분배도 비교적 균형적으로 이루어져 사회 최상위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국민전체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28년 20%에서 46년에는 8%로 감소하였다. 최상위 5%의 비율은 1928년 30%에서 18%로 감소하였다. 평균적인 구매력은 1960년대에 들어 45년에 비해 20% 이상 증가하였다.
이처럼 전후 미국은 전반적으로는 풍요한 사회였으나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1962년 미노동통계국 발표에 따르면 전체인구의 25%인 4,250만명이 빈민에 속하였다. 이들은 연간 소득이 4,000 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4인 가족, 또는 연간 소득 2,000 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독신자를 의미하였다. 또 인종차별의 문제도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재가 남아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1960년 43세의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등장하였다. 4년 전 신념을 갖고 소신대로 살았던 정치인들을 다룬 '용기 있는 사람들'로 퓰리처상을 받았던 이 젊은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존재였다. 개신교 일변인 미국사회에서 카톨릭교도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독특한 생동감과 젊음에서 느껴지는 발랄함, 늘 자신감에 찬 모습,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로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케네디 사후 뉴욕타임즈에서는 그를 "동화에나 나오는 대통령"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내가 좀 마니 간지나지?)

(ㅇㅁㅇ)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선거 기간 동안 외쳤던 구호, ‘뉴 프런티어’ 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하려는 구상을 하였다. 이것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과 트루먼의 페어딜에서 추구해온 진보적 개혁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케네디는 경기회복과 경제성장, 인종차별 철폐, 사회보장제도를 통한 의료와 교육에 대한 연방정부의 원조, 천연자원 보존, 고속도로 건설과 주택 및 지역사회 개발 등에 관한 교서를 의회에 보내 입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이 의회 다수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남부파와 공화당의 연합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큰 결실을 보지 못하였고, 남부에서는 인종차별해소에 적극적인 케네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러한 상황은 얼마 안가 극적으로 변하였다. 1963년 케네디는 재선을 위해, 그리고 남부 민주당원들의 반감을 해소하기 위해 남부 연설여행을 떠난 도중, 11월 22일에 댈러스 거리에서 리 하비 오스월드의 저격으로 암살을 당하였다. 케네디의 예상치 못한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은 상황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요기가 달라스 거리)
여론은 애도와 동정을, 그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달라진 분위기속에서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남은 임기를 채웠다.

(존슨?)
존슨은 여러 모로 케네디와 다른 점이 많았다. 경험 많고 노련한 정치가이며, 세련 되지 못하고 좀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존슨은 케네디와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진보적 정치노선과 사회개혁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는 취임하면서 케네디의 정책을 이어 받아 인종차별과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하여 ‘뉴프론티어’가 내걸었던 법안의 거의 전부를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잇힝~ .~)
1964년 5월 존슨은 ‘위대한 사회’라는 계획을 발표하고, 연두교서에서 위대한 사회는 “얼마나 많이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부를 창조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부를 사용하는 방법을, 어떻게 빨리 가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요구 한다”고 하였다. 존슨의 ‘위대한 사회’ 계획은 뉴딜과 페어딜을 이어받은 것으로, 미국을 복지국가로 탈바꿈 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존슨은 빈곤, 교육, 도시, 농촌, 과학, 예술,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86개의 법안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를!)
그리고 그해 11월, 대선에서 존슨은 역대 대통령 후보중 가장 많은 61%의 지지를 받아 3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데헷 ~ .~)
존슨은 민권법을 제정해 공공시설과 고용에서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본래 국적을 이유로 시민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법에 따라 직장에서의 차별관행에 대한 불만을 조사하고 심판하기 위한 고용기회평등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인종차별을 하는 공공기관에 대한 정부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미선거권법을 재정해 소수인종의 투표권 행사를 보장하였다. 1965년에는 이민법을 개정하여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사람들이 차별없이 동등한 조건으로 미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또 ‘미국에서 빈곤에 대한 조건 없는 전쟁’을 선언하고, 이를 위해 135억 달러를 방출하여 추진하였다. 1965년에는 도시빈민들을 위해 주택법을 제정하여 주택 도시개발부(HUD)를 설립하고 첫 장관으로 최초의 흑인 출신 각료인 로버트 위버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65세 이상의 노령자를 위해 연방 정부가 치료비와 입원비를 보조하는 노령의료법이 제정되었고, 그 다음해 사회 복지 수혜자와 모든 연령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확대하는 ‘빈민 의료 보조’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1965년 연방정부가 교육에 대해 전체적으로 지원금을 주기 시작한 초중고등학교 교육법이 제정되었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인의 자립 노력에 대한 지원책으로 직업훈련과 재교육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경제기회청 (OEO)을 창설하여 10억달러의 기금을 배정하였다. 경제기회청은 이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방안들을 내놓았다. 고등교육법을 제정하여 대학진학을 원하는 가난한 청년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직업봉사단과 지역 청년봉사단이 설치되어 청년들에게 취업에 필요한 기술과 근로 경험, 보수 교육, 상담소를 제공하였다. 실직한 가장과 여성들을 위해서는 근로경험과정이 설치되었고, 가난한 미취학 아동을 위한 예비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조기교육계획이 수립되었다. 그 밖에 빈곤퇴치 사업으로 빈민법률구조단과 국내평화봉사단을 설치하여 빈민들 스스로가 자기 지역의 개발사업계획을 세워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자리를 마련토록 하였다.
물론 ‘위대한 사회‘ 계획에는 시행착오와 한계,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특히 ‘빈곤에 대한 전쟁’ 계획이 도시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농촌지역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또 ‘빈곤에 대한 전쟁’ 계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빈민이 존재하여 1963에서 1969년 동안에도 1,100만명의 빈곤층이 남아 있었다. 특히 미국이 배트남 전쟁에 개입한 이후 국방예산과 함께 위대한 사회는 연방 예산의 큰 재정적인 부담을 주었는데, 1961년 연방정부는 944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1970년 대에는 1966억으로 증가하였다. 전쟁과 복지정책을 동시에 시행하게 되면서 인플레율도 급증해 1967년에는 3%, 68년에는 4%, 69년에는 6%로 올라갔다. 결국 위대한 사회 정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이후 존슨에 대한 비판 여론에 함께 떠밀려져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많은 비용과 계획들의 시행착오를 겪었음에도 '위대한 사회'는 나름의 주요한 성과와 업적을 남겼다. 그동안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수백만의 노인층과 빈민들이 의료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기아와 빈곤이 크게 줄어들었다. 1959년 전체 인구의 21%가 공식적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었으나, 1969년에는 12%로 감소하였다.
명암과 희비가 엇갈리기는 하나, 케네디에서 존슨으로 이어진 60년대 진보 정치의 흐름과 그들이 취한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미국 사회 전반에 거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30년대 뉴딜정책에서 태동한 사회 복지와 소수자, 약자에 대한 관심이 이 시기를 거치며 뿌리를 내렸고, 오늘날 미국의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첫댓글 저 애니 제목이 먼가염.
아라카와 언더 더 브릿지임 ㅃ우 다리밑 숙자들의 이야기
아아아 그 아슷흐랄한 애니.... 만화책도 상당히 멍...
많은 사람들(특히나 오른쪽 아저씨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뉴프런티어 정책에도 저런 면이 있었군요. 잘 보았습니다. 역시나 사회적 현상은 여러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걸 잘 느끼게 해 주는 글이네요. 이X복 아저씨의 딴나라 너네나라 미국사에선 너무도 짤막하게, 그리고 부정적 관점만 언급해서 갸우뚱 하고 있었습니다-_-;;;;;;;;;;
그건 오른쪽 아저씨들이 모르는'척' 하는 겁니다. ㅋㅋㅋ IT혁명을 제외하면 말할것도 없고 이를 포함해도 성장률은 비슷하고(그래도 적습니다) 분배구조는 말할것도 없지요. 그쪽은 고작해야 인플레이션 막았다는걸로 큰소리치면 모를까, 그 외로는 다 밀려요.
이 시기가 바로 자본주의의 황금기(Golden Age)입니다. 당시 성장률 또한 상당히 높았죠. 이른바 성장과 분배를 다 잡았던 시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쓰잘때기 없는 전쟁놀이(베트남전쟁은 2차대전보다 배 이상 갖다박았습니다)와 갑자기 오른 석유가격(한달만에 15배가 올라봐요. 그 어느체제가 버티나)으로 해서 무너진게 그 패인이지 이 황금기는 포드주의를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체제였습니다. 이 이후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IT혁명기까지 성장이고 분배고 다 못잡죠. 이후 IT혁명을 바탕으로 성장을 했다고 하지만 분배는 끝까지 못잡죠. 결국 이 체제는 금융을 기반으로 하는 주주자본주의로 변화합니다
베트남전은 성장하는 북베트남과 몰락해가는 남베트남의 불균형의 결과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은 물론 국내의 정책들에까지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존슨 정부의 무리수 였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본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좆ㅋ망ㅋ ㅡ.ㅡ 세계를 겁탈한 오일쇼크는 머 그저 안습이죠;;
희망에 차 약진하던 제3세계를 잘근잘근 밟아버렸듬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다수 학파의 이론으로 볼때 황금기때의 문제는 국가의 역할이 너무 과했다는 겁니다. 시장은 놔두면 투기의 장으로 변질하고 행정기관은 놔두면 지 멋대로 늘어나는 본질적 속성을 가지거든요. 행정부의 비대함은 조직변화의 둔함을 가져오고 이는 변화에 적응이 어려움을 가져오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부적자를 가져옵니다. 인플레이션? 황금기때의 특징은 물가상승에 따라 실질임금이 변화했다는 겁니다. 까놓고 인플레이션은 '가진자'에게는 치명적이나 '덜가진자'에게는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임금상승률과 상쇄만 된다면 별 상관없는 문제거든요.
에.. 보통 가진자들은 실물자산 위주가 아닌가요? 덜 가진자들은 주로 고정수입자들이 대부분이고 인플레이션에 타격을 받는 것 역시 그들인 경우가 보통일텐데요..
좋은 지적임다. 그건 현재 한국에는 적용되나 당시 천조국에는 적용이 안됩니다. 부동산투기는 규제당해 막혀있었죠, 금융또한 칸막이법등 여러 규제로 작살나있던 상황입니다. 따라서 가진자들은 돈을 쓰느냐 아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고 낮은 이자인 은행에 쳐박느냐의 선택에 걸려버렸죠. 그리고 무산자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의 수입은 '물가에 연동되는 실질임금'입니다.
그래서 새로 대두되는 네오케인지언(좌파케인지언)들중 눈에 띄는 이론중 하나는.. 시장이나 정부나 다 실패했으니 이제 제 3섹터, 즉 시민사회(거버넌스)를 통해 황금기때 국가가 하던 역할을 시민사회에서 해보자!란 이론을 전개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이는 높은 시민의식과 적당이 일해도 지역일에 관여할수 있을정도의 임금,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복지가 가능해야 하는 문제점을 가집니다. ㅋㅋㅋ
정부 실패가 결국은 현실화 되면서 레이건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에 무릎을 꿇죠. 좌우 같은거도 좀 넓은 시점을 보면 사이클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해먹는 거 같습니다.
당시 민주당이 남부파 지지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