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죽에 얽힌 추억
임애숙
며칠 째 몸살을 앓고 나니 어릴 때 고향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문어죽이 생각난다.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봄앓이 한다고 가족들을 위해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표 보양식이다.
그 당시 우리집 사정으론 문어는 초 여름이면 아버지가 잡아 말려놓은 것이 늘 있었지만, 쌀은 많이 귀할 때였다.
어머니는 어디에 보관을 해 두셨는지 꼭꼭 아껴 두었던 얼마 않되는 쌀을 꺼내 찬물에 불러 두었다가 몇 배의 물과
마른 문어 불린 것 마늘 몇조각 함께 가마솥에 넣고 죽을 끓이셨다.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몇번이고 먹었던 그 문어죽,
내가 아기낳고 몸조리 할 때도 아버지가 잡아 말려 놓은 문어를 서울까지 들고 오셔서 피를 맑게하고 회복이 빠르다며 만들어 주셨던, 너무나 그리운 부모님표 문어죽, 기억 저편에 문어를 말리시던 아버지 모습이 선하고 그립다.
아버지는 해마다 논에 벼 이삭이 피어나고 호박꽃이 필 때 쯤이면 문어 잡이를 하셨는데
그 때마다 내 동생들과 나는 작은 대나무 낚시대를 들고 호박꽃을 따 미끼로 써 개구리 낚시를 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 마루에 걸칠때면 개구리들이 벼논에서 노는데 논두렁 밭두렁이 우리들의 낚시터였다.
조그만 자루에 풀과 남은 호박꽃을 넣고 개구리들을 넣어두면 새벽까지 개굴거리며 노래를 부르곤했다.
요즘은 문어잡이도 많이 진화하여 소라 껍질이나 둥주리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때는 낚시도 자연의 순리를 따랐던 것 같다. 그 당시 문어잡이는 주로 새벽부터 오전 까지 였는데 그 때 사용하던 미끼가 살아 있는 개구리였다.
낚시바늘은 손바닥 보다 좀 작은 정도의 직사각형 얋은 대나무에 검지 손가락 길이 만한 철사를 구부려 끝을 쉿돌에 갈아 바늘을 만들어 대나무 끝에 묶어 썼는데, 개구리를 그 대나무 판 위에 살짝 묶어 자유로이 헤엄을 치게 했다.바닷 물에서도 개구리가 오랜 시간 살아 헤엄 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문어 잡이를 통해 배웠다.
아버지의 문어 잡이가 시작 될 즈음이면 가끔씩 새참 당번 심부름을 하곤 했다.
밥과 된장국 몇가지 간단한 반찬을 어머니가 싸 주시면 아버지 배와 약속된 시간에 맞춰 바다와 인접한 바위에서 기다렸다가 식사가 끝나면 빈 그릇을 들고 오는 일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집 마당에는 대나무로 엮은 발위에 문어들이 햇볕에 말려지고 있었는데, 하루 볕에 다 마르지 않기에 한 삼일은 걷었다 널었다를 반복했다.
고향 마을은 농사와 어업을 통해 생계수단을 삼아 살아가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 한철 생계를 책임지던 어업이 문어 잡이였다. 문어를 잡아 잘 말려 축으로 엮어 수협을 통해 판매를 하는 방식이었는데, 문어 외에도 참복어를 잡아 말려 팔기도 하고 주로 건어물 위주였다. 요즘 처럼 냉동이나 오래 보관 할수 없었기 때문에 건어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 방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고향마을 사람들은 참 부지런 했던 것 같다. 여름은 여름대로 농업과 계절 어업을 하였으며 겨울은 겨울대로 바다 김농사를 동시에 하는 곳이라 사철 일이 끊일 날이 없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들에서 바다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덕분에 우리 고향 아이들은 학교가는 시간 빼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며 자랐다.
지금은 가끔씩 그 시절을 그리워 하기도 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하면 이 지긋 지긋 한 곳을 벗어 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이렇게 물고기 한 마리라도 돈을 만들어 내야만 자녀들의 교육과 생계를 이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아버지가 잡아오신 문어 한마리 한마리는 정말 귀한 것이었다. 문어 한마리를 어떻게 해서 말려야 값을 더 받을 수 있는지 아버지는 잘 아셨기에 여덟게의 다리를 간격을 잘 맞추고 다리를 쭉쭉 펴고 내장을 빼낸 머리에는 대나무를 얇게 벌려 모양을 동그랗고 보기좋게 만들어서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대나무 발에 널곤 하셨는데, 아버지의 문어가 제 값을 받는데에는 이런 수고가 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나와 내 동생들이 부모님 없는 사이 말라가고 있는 문어들에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었다.
한 열마리 정도 되었던것 같은데 말려놓은 문어에서 가운데 븥어있는 배꼽(입)과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다리 한개씩을 다 떼서 몰래 먹어 버렸다. 어린 마음에 이 많은 다리 중 작은 다리 하나 없어도 모르겠지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마른 문어를 보시자 말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문어들이 어떻게 된 것이냐 배꼽은 어디가고 다리가 하나씩 없냐는 것이다. 우리는 문어 다리가 그대로 많은데요! 라고 우겼다.
부모님은 어이가 없으신지 이 일에 아무 관련도 없는 큰 언니부터 다 불러 앉히고 어차피 이 문어들은 제값에 팔 수도 없고
팔아봤자 삼분지 일 값도 못 받는다며 조용히 타이르셨다. 어차피 먹은 것 어쩔 수 없고 앞으로 정 먹고 싶으면 부모님께 허락받고 한마리를 가지고 다 같이 나눠 먹자고 하셨다. 문어 배꼽은 엄지 손톱 크기정도지만, 값을 받는데는 큰 차이가나고 문어는 다리가 여덣게가 달렸으니 한개만 없어도 않된다고 하셨다.
그 일 이후부터 우리 집에서는 배꼽 떨어지고 다리 일곱달린 문어는 더 이상 없었다.
그 당시 부모님이 포기한 열마리의 문어의 값은 제법 많은 돈이긴 했어도, 이 일이 우리 자녀들에겐 큰 교훈이 되었다.
그 때도 엄마는 팔지 못한 문어들을 가지고 가끔씩 우리들을 위해 맛있는 죽을 만들어 주셨다.
어른이 되어 세 자녀와 손주들까지 자주 집안이 북쩍거린다.
아차 하는사이 아이들이 크고 작은 웃지 못할 실수를 저질를 때가 있는데,
가끔씩 문어 사건을 떠 올려보며 허 참, 하고 웃고 만다.
때리는 매보다 사랑의 매가 더 큰 효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으로 사랑의 문어죽을 쓴다.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의 문어 죽을 먹을 수는 없지만, 우리를 향하신 더 없는 사랑은 참기름 떨어뜨린 문어죽처럼
우리들 가슴에 사랑의 향기 그리움의 향기로 영원히 꿇고있다.
첫댓글 다리 하나 떼서 묵어볼까예~
묵어도 모릴겁니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