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이 글은 한겨레신문 6월 28일(목)자 30쪽에 있는 고정 칼럼난인 [유레카]에 정재권님이 "F코드의 낙인"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칼럼입니다. 좋은 글이라 여겨 이곳에 그대로 옮겨 놓았읍니다.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정재권의 [유레카]
F코드의 낙인
정재권(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우리나라에서 정신질환자는 얼마나 될까?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실태조사를 토대로 18살 이상 성인 중 519만명가량이 한번 이상 정신질환을 겪은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 성인의 14.4%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15.3%(79만명)만 의사 등과 상담하거나 치료를 했다고 한다. 미국(39.2%), 뉴질랜드(38.9%) 등의 상담·치료율에 견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왜 그럴까? 정신질환을 남이 알아선 안 될 수치나 비밀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주요한 이유로 거론된다. 제도적으로는 가벼운 우울증 증상만으로 병원을 찾아도 ‘에프(F)코드’가 진료기록에 남는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에프코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정신질환의 질병분류기호로, 우리나라에선 조현병(정신분열) 같은 중증은 물론이고 우울증·불면증·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의 경증 정신질환도 에프코드로 기록한다.에프코드가 찍혀 법적으로 정신질환자로 분류되면 후유증이 상당하다. 민간보험은 아예 가입을 받아주지 않는다. 국가공무원법 등 70여개 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의사, 약사, 변호사 등의 자격증 취득이 불가능하다. 물론 해당 법에 단서조항이 있는 등 숨통은 트여 있지만, 정신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경험이 있다면 심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너대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에서 간음을 한 여성이 가슴에 달고 다니는 글자 ‘에이(A)’와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낙인이다. 외국에선 대부분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해서만 엄격한 절차를 거쳐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엊그제 복지부가 약물치료가 없는 단순한 정신과 상담은 앞으로 에프코드로 기록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새 제도의 대상자는 전체 정신질환자의 70%가 넘는다고 한다. 늦었지만 ‘현대판 주홍글씨’를 걷어낼 조그만 길이 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