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의 계기가 된 노구교 필자제공
1862년 중국 쓰촨 성 청두 곰보 아줌마가 개발
문화혁명 때 시련 겪으며 문승두부로 바뀌기도
마파두부는 우리 장병도 좋아해서 전투식량에까지 포함돼 있다. 그만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다. 하지만 마파두부는 중국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그것도 서울에서 무려 2240km나 떨어진 중국 쓰촨 성 청두(成都)가 본고장으로 약 150년 전, 한 곰보 아줌마가 만들어 팔았던 두부다. 이런 곳에서 만든 음식이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 입속에까지 들어오게 됐을까?
마파두부가 세계로 퍼지는 과정을 보면 그 속에 중국의 근대 역사가 녹아 있고, 또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이 전부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 또 다른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세상 일이 변화무쌍해 좋고 나쁨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파두부가 바로 그런 음식이다. 지금은 그저 맛있게 먹는 음식에 지나지 않지만, 마파두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의 과정이다. 마파두부가 중국을 벗어나 세계인이 즐겨 먹게 된 과정 역시 전쟁의 고비 고비가 기회로 작용했다.
마파두부를 중국 음식점에서 시켜 먹으면 값이 싼 편은 아니다. 또 한자로 마파두부라고 하니까 그럴듯한 요리이름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마파두부는 쓰촨 성 청두에 살았던 곰보 아줌마가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마파라는 말 자체가 마(麻)는 중국어로 마마, 즉 곰보라는 뜻이고 파(婆)는 부인, 할머니라는 뜻이다. 마파두부는 그러니까 곰보 아줌마가 만들어 파는 두부라는 의미다.
마파두부는 처음 만들어진 역사부터가 기구하다. 진씨라는 곰보 아줌마의 남편이 기름을 운반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생계가 막연해진 진씨 부인은 시누이와 함께 남편의 동료를 대상으로 두부에 고추와 후추, 양고기와 고추기름을 섞어 맵고 얼얼한 두부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청나라 말기인 1862년의 일이었다. 과부가 된 진씨 부인이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두부 장사였는데 맛이 좋았기 때문에 남편 동료가 다니며 입소문을 퍼뜨렸다. 곰보 아줌마 진씨의 두부가 맛있다는 소문이 청두를 넘어 쓰촨 성 전체로 소문이 나면서 마파두부라는 이름이 생겼다. 첫 번째 고난의 극복이다.
쓰촨 성에서만 널리 알려졌던 명물요리가 중국 전체로 퍼진 것은 일본 때문이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지역을 장악했던 일본이 1937년, 베이징 부근에 있는 다리인 노구교에서 발생한 중국군과의 작은 충돌을 핑계 삼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이 시작되면서 베이징ㆍ톈진ㆍ난징 등 대도시가 차례로 함락됐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결국 1938년 수도를 난징에서 쓰촨 성 충칭으로 옮겼다. 그러자 중국의 고급 관료ㆍ부자들과 함께 수많은 피난민이 임시 수도인 충칭으로 몰려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피난민들이 충칭을 비롯해 쓰촨 성 각 도시로 와 보니 그곳에 값싸고 맛있는 마파두부라는 음식이 있었다. 전쟁을 피해 옮겨 다니면서 혹은 전선이 안정돼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피난시절 먹었던, 값은 싸지만 맛은 특별했던 마파두부 조리법도 중국 전역으로 퍼지게 됐다. 역설적이지만 마파두부가 본 고장 쓰촨 성을 벗어나 중국 전체로 퍼지게 된 계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한몫했다.
중국 전체로 소문난 마파두부가 중국을 넘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게 된 계기는 또 다른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은 국민당의 정부군과 공산당 군대가 치열한 국공내전을 벌인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됐다.
내전이 벌어지면서 그리고 대륙이 중국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국민당을 따르던 고급 관리와 자본가, 지주들은 타이완으로 또 홍콩으로 혹은 아예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이들을 따라 유명 요리사들도 해외로 옮기면서 마파두부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마파두부를 즐겨 먹게 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마파두부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무상몰수ㆍ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모든 것이 국유화됐다. 분배라고는 하지만 이용권만 인정할 뿐,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국가가 소유하는 계획경제가 시작된 것이다.
청두의 마파두부 본점도 몰수돼 국유화가 이뤄졌다. 워낙 유명한 음식점이었기에 없애지 않고 계속 유지는 됐지만, 공산 중국에서 국영기업은 손익에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으니 그저 이름만 이어갔을 뿐이다. 그나마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 때 마파두부도 시련을 겪는다. 홍위병이 구시대의 잔재라며 옛날 것을 모조리 파괴하면서 마파두부 역시 이름을 문승(文勝) 두부로 바꾸어 버렸다. 문화혁명 승리를 기원하는 두부라는 것이다. 정치의 광풍에 빠지다 보니 음식 하나에까지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마파두부가 되살아난 것은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부터다. 두부요리 하나도 전쟁과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부침을 겪었다.
<윤덕노 음식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