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도·잎사귀
장만영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은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작품해설]
장만영의 시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이 시가 발표된 1930년대를 풍미했던 모더니즘 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모더니즘 시가 본디 도시와 기계문명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것에 비해, 그의 시는 농촌을 중심으로 한 자연을 소재로 하여 그림과 같이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다.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즘에 속하는 작품 경향을 드러내면서도 도시보다는 전원을 소재로 하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시는 ‘순이’라는 토속적 이름의 여인을 처음과 끝에 등장시켜 시상을 개폐하는 이중적 기능을 부여하는 한편, 시 전편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적 자아가 여인을 부르는 이 문답(問答) 방법은 자신의 깨달음을 독자에게 확대시켜 자신에게 동참시키는 호소력을 함축하는 화법(話法)에 해당한다.
‘벌레 우는 고풍한 뜰’은 바로 생성과 성숙을 제공하는 모성(母性)의 표상이며, 포도가 익어가는 그 속에 포용되어 있는 시적 자아는 ‘순이’라는 순진무구한 여인(모성)을 끌어들여 자신과 함께 자연속에 융화, 합일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푸른 / 가을 / 밤’ 에 달빛을 머금고 익어가는 포도는 생성 이미지와 성숙 이미지를 단면적으로 보여 주며 작품의 정점을 이룬다. ‘뜰에 고요히 앉아 있’는 ‘달빛’에 ‘과일보다 향그러운’ 후각을 가미시켜 신선함이 느껴지게 했으며, 한 행으로 처리할 수 있는 ‘푸른 / 가을 / 밤’을 세 행으로 나누어 배열함으로써 시각적 인산을 부여하는 한편, 평면적 구조를 입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을밤의 신선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적 전통시와 회화적 모더니즘의 표현 기법이 결합하여 탐스런 포도처럼 생성·성숙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작가소개]
장만영(張萬榮)
초애(草涯)
1914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32년 경성제이고보를 거쳐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 rhed과 졸업
1932년 『동광』에 「봄 노래」가 김억에 의해 추천
1937년 제1시집 『양(羊』) 간행
1953년 서울신문 출판국장으로 있으면서 『신천지』 주재
196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5년 사망
시집 : 『양』(1937), 『축제』(1939), 『유년송』(1948), 『밤의 서정』(1956), 『한국시집』(1957)
『저녁종소리』(1957), 『그리운 날에』(1962), 『장만영시선집』(1964),
『저녁놀 스러지듯이』(1973), 『양』(1974), 『추억의 오솔길』(1975), 『어느 날의
소녀에게』(1977), 『놀 따라 들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