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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최선을 다하기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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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6.30 05:12
- 최선을 다하기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르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한 주님의 답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율법 학자의 요청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거부하시는 말씀 곧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에 율법 학자가 따른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기쁘셨을 것입니다.
다른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데
이렇게 따른다고 하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성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따르려면 정말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만 하십니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귀한 집 도련님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이렇게 염려하시며 따르겠다면 이것을 각오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아한 추종이란 없습니다.
낭만적인 추종도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면 애인 추종이나 할 것이지
주님 추종은 아예 생각지도 말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말고도 다른 곳에서 당신 추종에 대해 준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청하자 아주 모진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래서 이 말씀들대로 주님을 따르면
거의 틀림 없이 중간에 회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뭣 하러 따르는가? 이러려고 따르는가?
그래서 따르길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도 계속 따르기로 한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며 새 각오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을 각오하지 않고 당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최악을 각오함이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없고,
최악을 각오할 때 최선도 다할 수 있게 됨을,
최선을 다하기에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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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스승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
“AI에 대한 유일한 대책”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사람만이 영혼이 있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챗gpt에게 없는 것입니다. 요즘 단연 화두는 AI(인공지능)입니다. 챗gpt 유료 사용자가 미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 제2위라 합니다. 정말 AI의 위력은 가공스럽습니다. “먼저 온 미래, AI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바둑계의 고수들도 이젠 AI에게 배운다 하며, 이세돌은 알파고에 패배한 충격으로 프로기사를 접었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늘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 답입니다. 사랑의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함으로 참나의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날로 중요해집니다. 늘 주님 앞에서 깨어 참나로 당당하고 의연하고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의 다음과 같은 확신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맞서야 할 만한 것에 맞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다.”<다산>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부랑자도 무섭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천만 명과도 맞설 수 있다.”<맹자>
이런 이들이 말그대로 천하대장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하면 생각나는 <하늘과 산>이라는 28년전 자작 좌우명 애송시입니다.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7년 동안 요셉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늘 바라볼 때 마다 연상되는 참 많이도 인용했던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날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도 이처럼 깊어질 때 자유롭고 자연스런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지상의 친구이자 제자와도 같은 파트너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도 참 외롭고 쓸쓸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사울아, 사울아!”등 주님께서 친숙하게, 애정과 신롸 가득 담아 불렀던 무수한 인물들이 생각합니다. “수철아, 수철아!” 어릴적 부르던 어머니 음성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은 늘 봐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참사람 아브라함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안에 의인이 쉰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고 용기있는 진정성 가득 담긴 설득력있는 기도인지요! 이어 의인 마흔 다섯, 마흔, 서른, 스물, 열 명까지 내려가고 다음 말마디로 두분의 대화는 끝납니다.
-“그 열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열 명은커녕 한명도 없어 롯 하나만 구출되고 모두가 파멸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새삼 이 세상이 존속함은 곳곳에 ‘세상 지킴이’ 아브라함같은 주님의 참제자이자 참사람의 의인들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참제자는 어떠해야 함을 배웁니다. 다음 두 경우는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우리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율법학자에 대한 대답이지만 주님의 참제자가 되려는 오늘 우리를 향한 물음입니다. 과연 정처없는 예수님만을 정주처로 삼아 무욕과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묻습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 자신을 점검하면서 ‘주님을 따라’, AI에 노예되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서, 소유가 아닌 존재에 충실한, 홀가분한 자유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을 따름의 절박성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은 물론 하느님 나라에 관심없는 온통 땅의 현실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잊고 세상 것들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육적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때로 살아 있는 듯 하지만 실상 죽어 있는, 좀비와 유령같은 헛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깨어 살아있는 참사람 하나 찾기가 그리도 힘든 세상입니다.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주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하며, 참제자이자 참사람의 참나로 살아야 할 절체절명의 작금의 시대같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참제자이자 참나의 의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시편10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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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8,18 참조). 곧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서는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 안에서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삶이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임을 밝히십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과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기둥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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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주보에 ‘치유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명단’이 있습니다. 작년에 와서 명단을 매주 읽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회복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 크기도 다양합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아들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몇 번의 수술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들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걷고 있습니다. 근육 무력증이 찾아와서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이는 형제님도 있습니다. 형제님은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30년 넘게 신장 투석을 하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늘 자매님의 투석을 도와주었던 형제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투석이 걱정된다고 하였습니다. 30년 넘게 간 이식을 기다리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기증자가 나타났고, 30년 만에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 주일 ‘치유를 청하는 명단’을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성경이 있습니다. ‘욥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고통이라는 손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병든 가족을 돌볼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또는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짓눌릴 때,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욥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병까지 얻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게 있겠지. 하느님은 공정하시니까 너의 죄를 벌하시는 거야.” 이런 논리를 ‘상선벌악’과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말합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신학을 거부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의 신비, 창조의 위대함을 보여주시며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고통의 이유를 가르치기보다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부재하시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거두어 보십시오. 그러면 저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시던 분도 주님이시요, 거두신 분도 주님이시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고백은 인간의 연약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외적인 복이 아니라, 욥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였고,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욥처럼 이해 안 되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 실망하거나, “왜 하느님이 이러시나!” 하고 하느님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향해서 울고, 따지고, 물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먼저 따지고 계산하는 길이 아니라, 먼저 따르는 길입니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하느님을 믿는 길, 바로 욥이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욥처럼 이유 모를 고통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저는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이유 모를 일들이 많지만, 그 순간마다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고, 더 깊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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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하느님의 숨
2025.06.29. 22:3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6월 29일 일요일 - 스물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해방과 정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기보다는 참된 자아를 추구하여 '나' 자신이 되는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복음이 어떻게 해서 특별히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가 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했고 억압받았으며 어떤 식으로는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변화가 필요한 관점에서 읽었지만, 역사 대부분은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었고 해석되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사실 복음은 예수님이라는 인물에서 정점을 이루는 사람들, 즉 노예로 살면서 억압을 받던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편에서 쓰인 대안적 역사서입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 세리들, 죄인들, 그리고 내쳐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경향을 지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 식민 지배자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이들에게 동조한 이들, 즉 내부 사람들과 상위 계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뭔가 의미심장한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나요? 모든 관점은 어떤 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충만한 진리를 보고자 한다면 승자의 관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는 해방 신학은 대개 공적인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무시되곤 합니다. 아마도 지난 1,700년 간 성서를 해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숙고해 본다면 이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권력이 주어진 성직 계급의 사람들은 참으로 엄청난 기대와 희망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던 주변부 사람들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들의 관점을 주입시켰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자(313년 이후), 우리는 대체적으로 성경을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서 읽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의와 진리에 굶주린 사람들의 편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권력에 기반을 둔 이들과 주로 위안을 주는 사제직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권력에 기대는 대신 힘 없은 이들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려는 데 관심을 두고자 하는 것은 권력과 돈, 자기-중심성이라는 일반적인 경향에서 종교를 정화시켜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1]
성서가 연약함의 눈을 통해 읽혀질 때 - 이를 가톨릭 신자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 선택" 혹은 "바닥으로부터의 관점"이라고 함 - 성서는 언제나 해방을 가져다주고 변모를 일으켜 줍니다. 성서는 억압하거나 강요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의 질문은 "내가 어떻게 현상 유지를 할 것인가?" (대개는 '나'에게 이로운 어떤 것!)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성장하고 변화할 것인가?"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는 것을 최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소위 "바닥"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이를 위한 교육과 참된 변화, 그리고 변모를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바닥은 자기를 증명하거나 지키기 위한 특전의 장소가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하고 무언가가 되기 위한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마태 5,3). 도로씨 데이(Dorothy Day)도 이와 아주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안전하게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닥에서 아주 가까운 데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떨어질 곳이 더 이상 없을 것이고, 또 잃을 것도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2]
소수의 사람들만이 선택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변모와 해방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관상은 제가 어렸을 때 배웠던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직감과 직관은 바르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제 마흔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되면서 저는 그 직감과 직관을 재건하기 위해 그런 잘못된 믿음을 해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지면서 자연스럽게 삶이 흘러 가도록 하는 것이 저로 하여금 참되고 동정심 가득하며 해방된 삶을 살게 해 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뿌려져서 씨앗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씨앗처럼 저는 저의 어두웠던 지난 날이 앞으로 있을 제 삶의 여정에 풍요로운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Crystal I.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Yes, And…: Daily Meditations (Franciscan Media, 2019), 37, 39.
[2] Dorothy Day, Loaves and Fishes (Orbis Books, 1997), 86.
[3] Adapted from Richard Rohr, Scripture as Liber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2).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ushil Nash,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ited Kingdom,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주먹은 억압과 불의에 맞서 저항과 연대, 그리고 일치를 위한 강력한 상징입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한 내면의 갈망은 기대치 않게 억압하는 자들을 위한 해방까지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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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참으로 소중한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
하느님의 숨
2025.06.30. 05:25
"자유로운 영혼!"
이 말은 정말로 매혹적인 말이지요?! 그래서 오래 전에 가수 박인희 씨가 번안곡으로 불렀던 "방랑자"라는 노래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것들에 매달려 살면서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 그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는 반면 '자유로운 영혼'은 자기의 참된 원의를 찾아가는 모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 가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어 하지만 여기에는 '나'의 안전을 포기해야 하는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자유]와 [안전함]을 다 원하지만, 이 둘은 함께 병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 새벽에 성체 앞에서 묵상을 하면서 갑자기 "나는 왜 내면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가?" 하는 화두에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저에게 익숙한 생각의 일부였는지 모르지만, "나(에고)"라는 것에 매달려 있는 한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엄연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참으로 의미심장한 '지금'이라는 참으로 수종하고 귀한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참된 '나'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주체로 보고 다른 존재를 객체로 보는 그런 관계성이 아니라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관계성, 즉 '나'와 또 다른 '나'와의 관계성으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모든 존재보다 더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는 '에고'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나'는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다른 모든 존재를 또 다른 '나'의 관계성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내'가 다른 존재들보다 특별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의식하는 순간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존재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다가오더군요. 그러니까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의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모든 존재와의 참된 관계성으로 들어설 수 있는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런 깨달음이 '나'를 해방시켜 주는 진리인데도, 이를 마음에 깊이 품고 살지 못하기에 여전히 '에고'의 '집착' 속에서 방황하며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권고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우리 모두를 포함함)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좀 매몰찬 말씀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시적인 언어를 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풍부한 상상력의 언어, 시의 언어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두고 예수님의 이 말씀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의 아버지는 분명히 이미 죽은 것이 아니라 연로한 상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나를 따라라!"라고요.
무언가를 뒤로 미루는 것은 잘못된 습성이겠지요?! 아마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뒤로 미룰 또 다른 이유가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지금 자유로워져라!"
박인희씨가 불렀던 '방랑자'라는 노래 가사를 이런 의미로 음미해 보면 어떨까요?!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
오늘은 비록 눈물 어린 혼자의 길이지만
먼 훗날(영원히 이어지는 지금)엔 우리 다시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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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평균 온도 섭씨 영하 55도, 공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입니다. 당연히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바로 화성입니다. 화성에 정착해 살아갈 주민을 뽑는다는 ‘마스원 Mars one’ 프로젝트 모집 공고에 세계 각국의 지원자가 얼마나 몰렸을까요? 자그마치 20만 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으며 그곳에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는 편도 티켓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2019년 경영 주체인 마스 원 밴처스가 파산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인류 최초로 화성에 간다는 꿈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꿈꿔서? 모험과 도전을 좋아해서?
꿈과 모험이 그들이 위험한 결정을 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과학자가 불가능하다면서 반대했지만, 생명의 위협도 그들의 꿈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세상 것에 대한 욕구를 모두 내려놓고,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선 프로젝트와 다른 것은 꿈을 향해 나아가면 지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위해 당장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스승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마태 8,18)라고 말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열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감정적인 헌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인 안정을 포기할 각오가 필요하시다고 하십니다.
또 어떤 이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묻히게 해 주십시오.”(마태 8,21)라고 말하지요. 이 요청은 율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무이기에 매우 타당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효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음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생활 전체의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을 하고 나서’ 따르겠다면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도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낸 발자국만으로 내 길을 만들 수 있다(김민영, 황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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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카카오톡채널 ‘갑곶순교성지’- 소식에 들어가시면 다일 묵상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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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https://www.band.us/band/69309768
밴드 “복음 맛들이기”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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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18,20)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라
요셉과 다니엘은 노예였지만, 세상의 속박에서 여러분을 풀어 주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 한, 여러분은 누구의 노예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낮은 신분으로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그분께는 정해진 집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은 당신의 나라에 대해 알고 계시면서도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이제 엑카르트는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한다. 이는 금욕적인 영성가들이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낳음의 영성에 대단히 중요한 주제들이다. 그것은 자기-확신과 자기-사랑이다. 엑카르트는 사람들을 처녀로 남게 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아집에서 시작한 고행을 완수하기 전에는 하느님도 신뢰하지 못하고, 여러분 자신도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신뢰와 확신이 없으면, 버릴 줄도 모르고, 그대로 둘 줄도 모르는 사람, 곧 강박적으로 움켜쥐는 사람이 될 뿐이다.
이러한 확신은 하느님을 믿는 믿음에 꼭 필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믿는 믿음에도 꼭 필요한 요소이다. 여러분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엑카르트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현대 심리학자 윌리엄 엑카르트도 자비에 대한 연구에서 그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박증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반면, 자비는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에서 싹튼다.” 강박증은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고, 자비는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믿음에서 싹튼다.
타락/구속의 신학 위에서 오로지 부정의 길만을 강조하는 영성은 자비와 관련되었든 다른 것과 관련되었든, 낳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자신과 우주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낳을 수 있다. 엑카르트의 영성과 같은 창조-중심의 영성만이 자비의 영성과 예술가의 영성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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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떼이야르 드 샤르뎅
주님, 이번에는 앤(Aisne)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올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 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저희는 모두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하나〉가 되게 해 주소
서”
제가 비록 당신의 성인들처럼 영적 열망을 지니지도 그분들 같이 드높은 순결에 이르지도 못했지만, 당신께서는 저에게 칙칙한 물질 덩어리 속에서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향해 억누를 길 없는 애정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천국의 자녀이기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땅의 아들임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 제 어머니의 희망과 비참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높은 곳올 향해 올라가렵니다. 거기서 저는-당신께서 제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사제 품의 힘을 빌어-떠오르는 태양 아래 인간 육체의 세계에서 이제 곧 태어날 것과 죽어 갈 것들 위에 〈불>을 끌어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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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30.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께서 가신 그 영원한 생명의 길을 따라서
박윤식 [big-llight] 25.06. 29. 21:14 ㅣNo.183120
주님 안에서 허락된 자유인은 세속적,
물질적인 온갖 것에 결코 매이지 않고 썩어갈 것들에 목숨 걸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기적 생각으로 자신마저 질식하는 이는 참된 자유인이 아닐 게다.
신앙인은 질식할지라도 그분이 첫째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너는 그냥 버려두어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자발적인 결단을 요구하신다.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면, 제대로 밭을 갈지도 못하고 엉뚱한 길로만 빠진다나.
사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한 체 세속에만 빠져,
가끔은 무분별하게 거기에만 안주하려든다.
따지고 보자면 그런 것들은 결국 사라질 물거품들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 그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말아야 할 게다.
서슴없이 몸 바쳐, 오직 한 길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차피 장사를 지내야 하는 죽은 이들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길을 올바르게 찾지 못한 이들일 게다.
믿는 이들은 그 어떤 미련도 없이,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의 것이라고 치부한다. 우리 생각으로는 너무 모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올바로 따를 수 있으랴. 그것은 따를 수 없는 것이리라.
자연에 생기 넘치는 계절이지만 낮 시간을 정신없이 지내면서 위안을 찾는 밤이 돌아오면,
‘산다는 것이 무겁고 허전한 마음을 끌고 가는 것이구나!’ 라는 씁쓸함이 가끔은 뇌리를 스친다.
정성을 기울였던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의지할 만한 이들과의 관계가 어느새 짐이 되고 진부해지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서서히 지쳐진다.
아무리 그분만을 바라보는 이라도,
차라리 세상사 다 잊고서, 정녕 자유로우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가끔은 든다.
이처럼 비록 신앙인의 삶일지라도 때로는 허무하고 쓸쓸할 때는,
누군가가 인생이 우주의 위대함과 자연의 순리에 비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고전 몇 줄이라도 읽으란다.
그러나 본디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지내기 쉬울 것 같기도 하단다.
아닌 게 아니라 버림은 부산하게 닥칠 일, 바쁜 마음에서 지친 마음을 쉬는 위로가 된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나마 ‘세상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심장이 뛰듯 들린다.
예수님께서는 대충 쉽게 가르치심으로써,
되도록 많은 이들을 제자로 만들려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들만 참 제자로 받아들이신다.
사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분을 따르려 덤벼든다.
부모님의 장사도 자식에게는 어쩌면 아주 중요하지만,
그나마 예수님 따르는 건 죽기 살기의 결단이 요구된다.
장애가 되는 건, 과감히 물리쳐야 하리라.
좌우간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자유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이끌어 갈 바른 기준을 스스로 가진다.
그런 신념이 없으면 늘 핑계나 구실로 자신 합리화에만 급급할 테니까.
그러니 믿음의 삶을 살려면 자신만의 마음을 정말 독하게 가져야한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저 세상 길도 물론 공짜는 없다.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따라 그분만을 보면서,
‘산 자가 가야 할 그 길’만을 보면서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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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길 위의 돌멩이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스크랩 인쇄
서하 [nansimba] 2025-06-29 ㅣNo.183123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마태 8,20)
인간의 깊은 욕구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을 '욕구를 따라 성장하는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정을 원합니다.
먹을 것, 쉴 곳, 나를 보호할 울타리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소속감을 원합니다.
사랑받고, 어디엔가 속하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안전과 소속의 욕구는 인간의 본능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넘어서는 존재 방식으로 사십니다.
주님의 길은 불안정하고, 떠남의 연속이며, 어디서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여정입니다.
불안 위에 서는 용기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안전이 사라졌을 때, 나의 존재를 지킬 수 있는가?
소속과 인정받음이 흔들릴 때, 나는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불안 위에서도 '깨어 있는 나'로 설 수 있는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머리 둘 곳 없는 존재'는 결코 안전욕구를 무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불안을 이겨내는 더 깊은 용기, 존재의 뿌리를 세우는 내적 자유를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불안정함을 마주하되, 그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머리 둘 곳 없는 자리'에서 깨어나는 길입니다.
왜 주님을 따라나서는가?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안전을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그분을 따라 불안정한 길로 나섰습니다.
왜 따라나섰을까요? 어떻게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존재의 근원,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이기에,
그분 안에 영원한 소속, 흔들리지 않는 안전이 담겨 있기에,
성인들은 외형적 불안정 속에서도, 내면의 깊은 안정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굴과 둥지를 떠나는 불안한 걸음이지만, 그 걸음 끝에 우리는 발견합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자리조차, 결국 하느님 품 안이었다."
이 깨달음이 나로 하여금 불안 위에 서는 용기를 내게 합니다.
세상의 안전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 안에 머무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주님,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소속되고 싶고, 안전하게 머물고 싶은 저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런 저를 당신은 '머리 둘 곳 없는 자리'로 저를 부르십니다.
주님,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불안 위에서도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그 길의 끝에서,
세상의 안정이 아닌,
당신 안에 머무는 깊은 평화를 만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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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율법 학자에게는
따라오라고 흔쾌히 대답하지 않으시지만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을 청하는 제자에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즉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누구에게는 허락되고
누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경우에 복음은 그를 율법 학자라고 소개합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이 평탄하지 않음을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삶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로서의 명성이나 권위와는 먼 삶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시면서
그런데도 선택할 수 있는지 물으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두 번째 경우에 복음은 그를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미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했는데
계속해서 가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걱정한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작은 아버지의 장사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땅 위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삶은 안정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삶을 선택하고나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명성이나 권위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안정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그 길이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걷는 여정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느님과 함께 걸을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이미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함에 초점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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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8,18-22 “너는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세에서 서로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사회에서 종교 지도자로서 기득권을 누리던 율법학자는 예수님을 ‘스승’이라 부르며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을 따르겠다’고 하지요. 반면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며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룹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종교 지도자로서의 기득권까지 기꺼이 내려놓고 나를 따르겠다는 율법학자의 모습이 기특해보여 ‘나를 따르라’고 했을 겁니다. 반면 이미 내 제자단에 속해있음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따라나서기를 주저하는 이는 서운하고 괘씸하여 ‘따르기 싫으면 마라’고 밀어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저와 정 반대되는 선택을 하십니다. 먼저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율법학자에게는 그 원의를 즉시 들어주시지 않고, 선택에 신중을 기하라며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의 마음 안에 ‘호가호위’하려는, 즉 예수님의 능력과 인기를 등에 업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감추어져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추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가 분명히 드러나지요. 즉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이용하여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을 견뎌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받고 배척당하면서도 그 고된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데, 내가 그 길을 걸어갈 굳은 각오를 지니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청하는 제자에게는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는 건 지금 당장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셔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상중(喪中)이었다면 이미 장례를 치르고 있었겠지요. 그렇기에 그가 예수님께 그런 청을 한 진짜 의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주님을 따르겠다며 ‘출가’(出家)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지금 당장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집을 나서면 남겨질 가족의 생계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지요. 또한 유다인에게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중요한 의무이기에 차마 그 의무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예수님이지만, 그에게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어라.”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그 무엇보다 앞서 ‘첫 자리’로 모시는 일입니다. 다른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내팽개치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는 이에게 사는데 필요하고 중요한 다른 것들을 곁들여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은 모두 그분께 맡기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데에만 전념하면 되지요.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안다면 그것을 ‘지금’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집착 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도 현재를 망치지요. 그렇게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잃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그분 뜻을 충실히 따르며 오늘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영원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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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70
6월30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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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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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최현식 라우렌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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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합시다!>
성인(聖人)들이 지녔던 성성(聖性)의 덕목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극단적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 보스코 역시 청빈한 삶과 관련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길거리 가난한 청소년들의 보금자리 마련과 교육을 위한 모금에 전념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날 때 호주머니 속에는 동전 한 푼조차 없었습니다.
청빈 생활과 관련해서 돈 보스코께서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소박한 식사를 하는 것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크나큰 영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 청빈생활과 관련해 저희 수도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봉헌 생활에서 청빈은 ‘방벽’이자 ‘어머니’입니다.
봉헌 생활을 지켜 주기에 ‘방벽’이고, 성장하도록 돕고 올바른 길로 이끌기에 ‘어머니’입니다.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수도자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과 교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는지 모릅니다.”
교회의 미래인 예비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뼈아픈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나 수녀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제 개인비서 신부님은 어딜 가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고급 승용차를 갖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단을 구성해서 3년 가까이 전도 여행을 하셨는데, 모든 것을 잘 갖춘 여행단이 아니라 하루하루 도움의 섭리에 맡기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이곳 저 곳 다니시다가 환영하면 머무시고, 여의치 않으면 노숙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렇게 극단적 청빈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1)
청빈의 서원은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정말이지 큰 도전이고 풀어야할 과제입니다. 청빈과 관련해서 우리 수도자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형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청빈을 외치지만 절대로 청빈한 법이 없습니다. 수도자들 역시 청빈을 서원하지만 결코 청빈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청빈을 덕을 자신의 삶과 비교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부를 죄악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된 부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자 선물로 여기셨고, 그 축척된 부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셨지만 가난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가난을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가난은 자랑꺼리요 찬미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사실 가난은 뭔가 결핍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참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가난입니다.
오늘날 이 물질만능의 세상 앞에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악령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난을 범죄시하고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투쟁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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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channel/UCkiWu8_ctudLqP81Yng1v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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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하는 법 = 예수님을 이용하는 법>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단호한 요구를 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이 말씀들은 세상의 안정과 인간적인 도리마저 뒤로하고 오직 당신만을 따르라는 초대입니다. 이는 곧 제자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기쁨과 가치를 합친 것보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더 크게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길을 선택하며, 마침내 그 길 위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 익히는 삶의 여정입니다.
한 분야에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수학 강사 정승제 씨는 수많은 학생들을 최고의 대학으로 이끄는 ‘일타 강사’입니다. 그의 삶은 오직 ‘수학’이라는 한 길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잠들기 전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강의를 준비하고 수학 문제를 연구하는 데 쓴다고 합니다. 조교들과의 회의, 촬영, 교재 연구로 하루가 꽉 차 있습니다. 심지어 쉬는 날에도 머릿속은 온통 학생들을 어떻게 더 쉽게 가르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고된 일상이지만, 그는 그 과정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며,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투신하는 삶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만다라트’라는 목표 달성표를 작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중앙에 ‘8개 구단 드래프트 1순위’라는 궁극적 목표를 적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8가지 세부 목표(몸만들기, 제구, 구위, 멘탈, 스피드, 인간성, 운, 변화구)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8가지 목표 각각을 이루기 위한 8개의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빼곡히 채워 넣었습니다. ‘쓰레기 줍기’(운), ‘인사하기’(인간성), ‘하루 10시간 자기’(몸만들기), ‘술과 담배 안 하기’ 등 그의 일상은 오직 ‘최고의 야구선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통제되었습니다. 그는 야구라는 한 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그 결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들처럼,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다는 것은 그 길 자체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그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욥은 우리가 아는 대로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고, 훌륭한 자녀들과 건강까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녀, 재산, 건강, 명예를 모두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내마저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세요.”(욥 2,9)라며 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욥이 한 고백은 위대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거두어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이 고백은 단순히 고통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욥이 평생에 걸쳐 ‘하느님 한 분만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연습해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의 마음속에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재산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소유물이 있을 때 빛나는 장식품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홀로 빛나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느님을 처음부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욥은 하느님이 세상 모든 즐거움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되도록 매일 연습하여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복자 피에르 조르조 프라사티(Pier Giorgio Frassati)의 삶이 그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는 20세기의 젊은 이탈리아 청년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등산을 광적으로 사랑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농담하기를 즐기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을 모아 토리노의 가장 가난한 빈민굴에 사는 이들을 위해 약과 음식을 사서 직접 날랐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왜 늘 돈이 없는지, 왜 그토록 낡은 옷을 입고 다니는지 몰랐습니다.
프라사티는 자신의 젊음과 건강, 재능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남김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산을 오를 때 “높은 곳을 향하여(Verso l'alto)!”라고 외쳤는데, 이는 단지 산 정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삶의 궁극적인 정상을 향한 그의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는 조금씩, 매일매일, 자신의 삶의 기쁨의 원천을 세상의 즐거움에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꾸준한 ‘이용’과 ‘노력’의 결과, 그의 내면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고, 24살의 나이에 소아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몰래 도와주었던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프라사티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이용’해야 합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위로를 얻기 위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이용’하십시오.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기쁨을 봉헌하기 위해 그분을 ‘이용’하십시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지혜를 구하기 위해 그분을 ‘이용’하십시오.
‘이용한다’는 말이 다소 불경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용’이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으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평화를 위해, 나의 기쁨을 위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은 예수님을 이용해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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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주보에 ‘치유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명단’이 있습니다. 작년에 와서 명단을 매주 읽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을 회복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 크기도 다양합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아들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몇 번의 수술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들도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걷고 있습니다. 근육 무력증이 찾아와서 지금은 손가락만 움직이는 형제님도 있습니다. 형제님은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30년 넘게 신장 투석을 하는 자매님도 있습니다. 늘 자매님의 투석을 도와주었던 형제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사랑하는 아내의 투석이 걱정된다고 하였습니다. 30년 넘게 간 이식을 기다리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기증자가 나타났고, 30년 만에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 주일 ‘치유를 청하는 명단’을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성경이 있습니다. ‘욥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고통이라는 손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병든 가족을 돌볼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또는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짓눌릴 때,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욥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병까지 얻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합니다.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게 있겠지. 하느님은 공정하시니까 너의 죄를 벌하시는 거야.” 이런 논리를 ‘상선벌악’과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말합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신학을 거부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고통은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의 신비, 창조의 위대함을 보여주시며 인간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말씀은 고통의 이유를 가르치기보다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부재하시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을 거두어 보십시오. 그러면 저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시던 분도 주님이시요, 거두신 분도 주님이시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 고백은 인간의 연약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느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는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외적인 복이 아니라, 욥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대면하였고,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욥처럼 이해 안 되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 실망하거나, “왜 하느님이 이러시나!” 하고 하느님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하느님께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향해서 울고, 따지고, 물어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너는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먼저 따지고 계산하는 길이 아니라, 먼저 따르는 길입니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하느님을 믿는 길, 바로 욥이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욥처럼 이유 모를 고통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 저는 지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이유 모를 일들이 많지만, 그 순간마다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고, 더 깊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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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독서에는 아브라함과 하느님 사이의 협상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절박함은 탁월한 협상가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공정”(창세 18,25)의 논리로 자비를 청하면서 하느님을 설득하려 애쓰는 아브라함의 간절함도, 그의 말에 설득되신 듯 짐짓 양보하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감동적입니다.
하느님의 독백은 아브라함과 당신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에게 당신 마음을 털어놓으시며 그를 당신 계획을 논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하고 간절하며, 주님의 약속대로 다른 민족들을 위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진실한 기도가 정말로 다른 이들을 악에서 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면서 중요한 신학적 원칙 하나를 제시합니다. 곧 의로운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칙은 단연 탁월한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돌아가실 때 결실을 거둡니다.
공동체를 죄와 악에서 구하려면 의인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앞에 머물러 기도하면서 모든 인류를 위한 기도의 중재자들이 되라고, 또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의인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먼저 저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이 사명에 충실하겠다고 오늘 새롭게 다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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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18-22: 제자 됨의 본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신다.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출이다. 그때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 학자는 그분이 가시는 곳을 알지 못했다. 막연한 짐작뿐이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고 계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20절) 그분은 차림새도 수수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 나라에 대해 알고 계셨지만, 임금이 되기를 마다하셨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주십시오.”(21절)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섬기려면,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카인처럼 둘째가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22절) 이 말씀은 죽은 것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콜로 3,5) 이런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던져버려야 한다. 몸 전체에 병이 옮지 않도록 베어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당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신 분이다. 당신이 하느님이심까지도 모두 버리시고 당신을 낮추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곳에 즉 아버지의 뜻 안에 당신의 거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도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철저히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 안에 머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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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금자리>
마태오 8,18-22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보금자리>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보금자리
보금자리를
바라지 않는
보금자리
보금자리를
찾지 않는
보금자리
보금자리에
주리지 않는
보금자리
보금자리에
매이지 않는
보금자리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보금자리
보금자리로써
보금자리인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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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때에 한 율법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8,18-22)
1)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는 일인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추종’이면서, 동시에 ‘동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걸어가는 길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보다 더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더 편안한 길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신앙인들이 걸어가는 길이 예수님의 길보다 더 힘든 길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2)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어떤 율법학자의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뜻인데, ‘어디로 가시든지’ 라는 말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삶’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소망 자체는 훌륭한데, 제자의(신앙인의) 삶이 어떤지 잘 모르면서 일시적인 감정으로(즉흥적으로) 따르겠다고 나섰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일시적인 충동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학교나 수도원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전에 예비신자 기간이 필요하고, 신학교 입학이나 수도원 입회 전 성소자 모임 기간이 필요합니다.>
3)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는 말씀은 “잠시 앉아서 쉴 곳조차 없다.”이고, 그만큼 당신의 삶이 인간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런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8장을 보면,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는 말이 있고(루카 8,1-3), 루카복음 7장에는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이야기가 있고(루카 7,36), 루카복음 10장에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들였다는 말이 있습니다(루카 10,38).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단 한 순간도 편하게 쉬실 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을 뿐이고, 예수님의 삶은 분명히 전체적으로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었던’ 삶이었습니다.
<그 율법학자가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또 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런 생활을 할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랐는지, 아니면 포기하고 되돌아갔는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뒷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포기하고 되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4)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은, 십자가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신앙인들을 고생시킨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생길만’ 있는 생활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는데, 힘들 때는 신앙생활을 멈추고 편안할 때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살든지 죽든지’(로마 14,8), 또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 4,2),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변함없이, 그리고 흔들림 없이 꾸준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5) 22절의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들어섰다면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은, 집에 다녀오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 뒤를 따르는 생활을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제자의 삶을 중단하고,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장례를 치른 다음에는 곧바로 되돌아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제자는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였다고 전해집니다.(사도 6,5)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다음에 곧바로 되돌아왔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필리포스는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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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삶에 어중간은 없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느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 한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말하자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데 그만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느님이냐? 세상이냐? 의 갈림길에서 갈등합니다. 하느님을 따르자니 세상의 것이 아쉽고, 고달프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자니 왠지 마음이 걸립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몰랐었더라면 마음이나 편안했을 것인데....하는 생각도 합니다.
자녀의 결혼, 출산 문제, 재물이나 교육문제, 공동체의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 매번 선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어중간이나 양다리 걸치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분명 구별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당에서 미사와 함께 주님의 축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예식장의 화려한 곳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로 변하고 있습니다.
자녀 출산과 교육에 관한 관심 또한 소홀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주일학교 미사참례자 수가 부쩍 줄어듭니다. 시험이 먼저입니다. 공부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입니다. 부모님마저 그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먼저 기도하고 공부하면 꼭 필요한 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재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해야 하지만 나를 위한 것에 우선하고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생색내기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대접해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내 것인 양 사용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빈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와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너감’ 곧 새로운 파스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제자’는 ‘죽은 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언제나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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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열 명만 있었다면 그곳은 비록 죄악이 가득했지만 구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합니다. 의인 쉰 명에서 시작해서 깎고 깎은 끝에 의인 열 명으로 하느님과 합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은 말 그대로 파멸됩니다. 의인 단 열 명이 소돔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 수가 제법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 단 세 사람뿐입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구약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단 세 명만이 그 이름이 언급되면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은 적은 수였을까요? 아니면 많은 수였을까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드라마인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단 세 명만이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죄악이 가득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은 매우 많은 수였습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죄로 가득한 도성에도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의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 의인은 얼마나 될까요? 열 명의 수가 많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부터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어 보면 어떨까요? 그 발걸음은 나와 우리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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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
율법학자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에 감동하여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19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오 복음 8장 20절)
주님의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8장 21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오 복음 8장 22절)
이 대목은 우리에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이해가 되기 쉬운 것은 가상이지만, ‘너는 나를 따르고 남은 식구들이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라면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기준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서 하느님께 청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 좁은 마음이 되고 신랄한 비판을 앞세우는 세상에 살다 보면 비판을 멈추고 부모님처럼 너그럽게 대해 주시는 큰 사랑의 마음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웃의 잘못을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만 나 자신을 살필 때에는 엄한 기준으로 비판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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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종섭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율법학자는 느닷없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 율법학자가 보기에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군중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웅변가였을 것이고, 아픈 사람을 낫게하는 신통한 능력을 지닌 용한 의사였을 것이고, 인생의 이치를 통달한 참다운 스승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열의를 가지고 배우려는 사람에게 정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래 참 잘 생각했다’고 기쁘게 받아 주시거나, ‘너는 자격이 안된다’며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불교에서 고승들이 제자들에게 주는 화두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율법학자의 얼굴이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됩니다.
이 대목을 접하고 있자니 마태오와 마르코 두 복음서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제베데오의 두 아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바로 제베데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훗날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기를 청탁했을 때,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나무라시는 대목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조르는 율법학자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따라나서는 그 길이 어떤 길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떤 한 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어렴풋이 알 듯도 하지만, 당장 해결해야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슬픔에 잠긴 제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슬픔을 달래는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는, 어떻게 보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장례를 앞두고 있던 제자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요?
성당에 나오는 우리 신자들에게 ‘왜 성당에 나옵니까?’라고 물어보면 많은 수의 신자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애원하면서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래 잘 생각했다, 열심히 한번 해봐라’하며 도닥여주는 말 한마디가, 그리고 부모님을 잃고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는 ‘고생이 많제?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며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일진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고 계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거예요’라고 큰소리로 대답하는 초등부주일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멋도 모르고 떠든다고 나무랄 신자가 어디 있겠으며,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어찌 예수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실제로 가족의 죽음을 계기로 하느님 품에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한 제자의 경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느님께 좀 더 다가오도록 원하십니다.
말로만 신자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는지 깊이 묵상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위험에서 지켜준다고 십자가 목걸이를 부적처럼 걸고 다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죽음을 달게 받기도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얻고자 하는 마음의 위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아주 좋은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위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중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원하지 않는 물음을 던지시면 나는 어떻게 할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난감해하는 율법학자와 한 제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며 해답을 찾아보는 것도 오늘 하루 중에 할 수 있는 좋은 묵상거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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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균 온도 섭씨 영하 55도, 공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입니다. 당연히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고 생명에 대한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바로 화성입니다. 화성에 정착해 살아갈 주민을 뽑는다는 ‘마스원 Mars one’ 프로젝트 모집 공고에 세계 각국의 지원자가 얼마나 몰렸을까요? 자그마치 20만 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으며 그곳에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다는 편도 티켓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2019년 경영 주체인 마스 원 밴처스가 파산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린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인류 최초로 화성에 간다는 꿈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꿈꿔서? 모험과 도전을 좋아해서?
꿈과 모험이 그들이 위험한 결정을 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과학자가 불가능하다면서 반대했지만, 생명의 위협도 그들의 꿈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세상 것에 대한 욕구를 모두 내려놓고,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선 프로젝트와 다른 것은 꿈을 향해 나아가면 지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을 위해 당장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스승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마태 8,18)라고 말합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열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감정적인 헌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인 안정을 포기할 각오가 필요하시다고 하십니다.
또 어떤 이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묻히게 해 주십시오.”(마태 8,21)라고 말하지요. 이 요청은 율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무이기에 매우 타당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효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마음의 열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생활 전체의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을 하고 나서’ 따르겠다면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도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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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의 주제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랬고, 요한 세례자의 제자였던 이들이 ‘선생님 어디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주님께서는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오라는 말을 단순히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오라는 말씀은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듣고 숨 쉬고 기도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르는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한 번에 주님의 마음을 모두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주님의 사랑을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그분을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면서 실수와 잘못을 범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너도 용서하여라.’라고….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나서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담아내고 주님의 사랑을 우리 손으로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자연의 힘
얼마 전 일본에서 지내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말했습니다.
얼마 전 작은 지진이 있었어. 지진이 일어나면 그 두려움은 말로 설명 못 하는 것 같아 그 후 빈번히 일어나는 여진도 심장을 떨리게 하지. 그런데 그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껴. 자연 앞에 우리는 참으로 작은 존재라는 것을….
우리나라는 지진에서 조금은 안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진에 대한 공포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땅에도 큰 지진이 온다면 우리도 같은 마음이 될 것입니다. ‘자연 앞에 인간은 참으로 작은 존재구나.’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나 봅니다.
자연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늘에 순응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하늘 아래 작은 존재로서 겸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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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자,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8,18 참조). 곧 제자들을 군중으로부터 떼어놓으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아직 제자교육을 받지 못한지라 군중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러 가겠다고 나서는 제자입니다. 여기에서, 제자 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자세가 드러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따라나서는 율법학자 안에서 화려한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이 감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이처럼, 당신을 따르는 삶이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임을 밝히십니다.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참된 제자 됨의 본질’이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사는 삶이요,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썩어 묻힐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생명을 따르는 길임과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에누리 없이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진정, 나는 대체 어디에 머리 기댈 곳을 찾고 있는가? 아니. 대체 어디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가? 혹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혹 여전히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에 애착하고 매여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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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 8,22)
주님!
오랏줄로 꼭꼭 저를 당신께 묶으소서.
당신은 저의 보금자리오니
당신을 따라 내려가 아래에서 살게 하소서!
대우보다 천대 받을 줄을, 존중보다 무시 받을 줄을,
인정보다 멸시 받을 줄을, 배려보다 모욕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형제들을 떠받드는 발판이 되고, 머리기댈 기둥이 되고,
당신의 제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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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스승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
“AI에 대한 유일한 대책”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사람만이 영혼이 있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챗gpt에게 없는 것입니다. 요즘 단연 화두는 AI(인공지능)입니다. 챗gpt 유료 사용자가 미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 제2위라 합니다. 정말 AI의 위력이 놀랍습니다. “먼저 온 미래, AI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바둑계의 고수들도 이젠 AI에게 배운다 하며, 이세돌은 알파고에 패배한 충격으로 프로기사를 접었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늘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 답입니다. 사랑의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함으로 참나의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날로 중요해집니다. 늘 주님 앞에서 깨어 참나로 당당하고 의연하고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의 다음과 같은 확신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맞서야 할 만한 것에 맞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다.”<다산>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부랑자도 무섭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천만 명과도 맞설 수 있다.”<맹자>
이런 이들이 말그대로 천하대장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하면 생각나는 <하늘과 산>이라는 28년전 자작 좌우명 애송시입니다.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7년 동안 요셉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늘 바라볼 때 마다 연상되는 참 많이도 인용했던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
날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도 이처럼 깊어질 때 자유롭고 자연스런 참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지상의 친구이자 제자와도 같은 파트너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도 참 외롭고 쓸쓸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사울아, 사울아!”등 주님께서 친숙하게, 애정과 신롸 가득 담아 불렀던 무수한 인물들이 생각합니다. “수철아, 수철아!” 어릴적 부르던 어머니 음성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은 늘 봐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참사람 아브라함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안에 의인이 쉰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고 용기있는 진정성 가득 담긴 설득력있는 기도인지요! 이어 의인 마흔 다섯, 마흔, 서른, 스물, 열 명까지 내려가고 다음 말마디로 두분의 대화는 끝납니다.
-“그 열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열 명은커녕 한명도 없어 롯 하나만 구출되고 모두가 파멸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새삼 이 세상이 존속함은 곳곳에 ‘세상 지킴이’ 아브라함같은 주님의 참제자이자 참사람의 의인들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참제자는 어떠해야 함을 배웁니다. 다음 두 경우는 우리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우리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
율법학자에 대한 대답이지만 주님의 참제자가 되려는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정처없는 예수님만을 정주처로 삼아 무욕과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묻습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 자신을 점검하면서 ‘주님을 따라’, AI에 노예되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서, 소유가 아닌 존재에 충실한, 홀가분한 자유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을 따름의 절박성은 장례의 의무까지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만큼 우선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을 찾지 못한 이들은 물론 하느님 나라에 관심없는 온통 땅의 현실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잊고 세상 것들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육적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때로 살아 있는 듯 하지만 실상 죽어 있는, 좀비와 유령같은 헛것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으로 깨어 살아있는 참사람 하나 찾기가 그리도 힘든 세상입니다. 주님과의 우정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주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하며, 참제자이자 참사람의 참나로 살아야 할 절체절명의 작금의 시대같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참제자이자 참나의 의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시편10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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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최선을 다하기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르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한 주님의 답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율법 학자의 요청에 대한 대답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거부하시는 말씀 곧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에 율법 학자가 따른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기쁘셨을 것입니다. 다른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데 이렇게 따른다고 하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성소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따르려면 정말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만 하십니다.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귀한 집 도련님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겠느냐? 이렇게 염려하시며 따르겠다면 이것을 각오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아한 추종이란 없습니다. 낭만적인 추종도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면 애인 추종이나 할 것이지주님 추종은 아예 생각지도 말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말고도 다른 곳에서 당신 추종에 대해 준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청하자 아주 모진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래서 이 말씀들대로 주님을 따르면 거의 틀림 없이 중간에 회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뭣 하러 따르는가? 이러려고 따르는가?
그래서 따르길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도 계속 따르기로 한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며 새 각오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을 각오하지 않고 당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을 각오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최악을 각오함이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없고, 최악을 각오할 때 최선도 다할 수 있게 됨을, 최선을 다하기에 앞서 최악을 각오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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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나를 따라라."(마태8,22)
<의인 한 사람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8,18-22)의 제목은 '예수님을 따르려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일깨워 주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8,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마태8,21) 라고 청하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아들에게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을까? 이 크고 중요한 아버지의 장례에 집착하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난해한 말씀입니다. 난해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런 의미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임박한 현세적 종말의 시간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된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느님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 내 안에서 항상 하느님이 첫째 자리에 계셔야 한다.'
오늘 독서(창세18,16-33)는 제가 어제 필사한 말씀입니다. 타락한 소돔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입니다. 이는 소돔 안에 있는 의인을 보아서라도 소돔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는 '아브라함의 간청'입니다. 하지만 끝내 소돔은 멸망하고 맙니다. 소돔 땅 안에 의인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통해 의인 한 사람을 보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의인 한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용서를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이런 하느님을 나의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는 의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의인 한 사람에게 감사드리고, 나도 의인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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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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