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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죽음과 죽어감』
제목이 섬뜩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이란 단어가 우리의 일상과 가깝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박사는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공부했으며 평생을 정신과 의사로 일하다 2004년에 타개했다고 한다. 그녀는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인의 사상가에 뽑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학문적 성과뿐 아니라 삶에 대한 가르침을 펼쳤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석학들, 의사들, 독자들이 이미 찬사를 보낸 바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한 이진 선생은 자신에게 한 줄 평을 허락한다면을 전제해 “우리가 죽기 전에 단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그건 바로 이 책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하고 필요한 책이라는 것일 것이다.
시인이자 부산 광안리 성베네틱토 수녀원 이해인 수녀는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쓰면서 자신은 『죽음과 죽어감』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전제하고 “제가 살고 있는 공동체엔 식구들이 많다 보니 공동체의 수녀든 수녀들의 가족이든 거의 매일 누군가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매일 보도되는 신문의 부음 기사를 보면 개인적인 친분이 없더라도 숙연한 마음으로 잠시 기도하곤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 소식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사람의 부음이 걸려 있는 게시판을 보면, 삶과 죽음이 늘 함께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가을도 아닌데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라는 시구로 그런 상황을 노래하고는 『죽음과 죽어감』은 누구나 한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추천했다.
이해인 수녀는 또 “오늘을 마지막인 듯이 최선을 다해 살고 싶은 새로운 의지와 열정, 일상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살고 싶은 고운 갈망을 심어주신 당신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아픈 사람들을 좀 더 따뜻하게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언젠가 저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잘 준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것도 이 책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 아직 살아 있을 때 잘 죽은 사랑의 겸손을 연습해서 진짜 죽을 때는 고통 속에서도 환히 웃으며 떠나고 싶다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아직도 안 죽을 것처럼 아둔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환히 비추어 주시는데 감사합니다. …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참으로 고맙습니다.”라고도 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 세대만 해도(2018년 책이 재발간 되었으니 아마도 20세기를 지칭하는 듯한데, 로스 박사가 살던 20세기 이전인 19세기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다)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기와 어린이들이 죽는 경우는 아주 흔해서 가족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방의학이 실용화되면서 아동에 대한 치료와 교육도 소아 사망률을 낮추는데 기여했다. 청장년층의 목숨을 앗아갔던 수많은 질병들도 정복되었다. 노년층이 증가했고 악성질환 혹은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들은 이제 주로 노년층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의 문화와 사람들을 연구하다 보면 인간에게 죽음은 항상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만 가능할 뿐, 자연적인 원인이나 노화로 죽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음은 불길한 일이고 두려운 사건이며 그 자체로 심판 혹은 처벌을 요하는 일인 것이었다. 우리의 무의식이 미치도록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과 그 사람을 실제로 죽이는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주지 않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실제로 엄마가 죽었을 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는다. 아이는 항상 엄마를 잃은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이혼하거나 혹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인 경우도 똑같다.
고대 유대인들은 시체를 불길한 것. 만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죽은 자에게는 사악한 혼령이 있다고 믿었으며, 혼령을 쫓기 위해 공중에 화살을 쏘았다. 여러 문화권에서 ‘사악한’죽은 자를 돌보는 예식이 있었고,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그 모든 예식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묘비를 만드는 풍습도 어쩌면 사악한 영혼을 지하에 가두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 두렵고 끔찍한 사건이다.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는다 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권에서 아이들은 감당하기 벅차다는 이유로 소외된다. 충격적인 사건, 믿을 수 없는 어른들 세계와의 접촉,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로 기억할 것이다. 오빠를 잃은 여자아이에게 “하나님이 오빠를 너무 사랑하셔서 일찍 데리고 갔다”고 하는 것은 그 소녀가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해소할 수 없다. 30년 뒤 자신의 아들을 잃게 되었을 때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 과학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죽음의 진실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부정하게 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사회 어떤 요인이 죽음과 연관된 불안감을 가중하는 것일까? 변화하는 의료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의술은 과연 인도적이고 존경받는 직업으로 남았는가? 남을 것인가? 인간의 고통을 들어주기보다 오직 생명의 연장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새롭지만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진화되지는 않았는가? 의대생들에게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와 같은 덕목은 이제 배울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 된 것은 아닌가? 의사의 세심함, 노련함 같은 것보다 IQ와 성적을 중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환자가 던지는 질문에 쩔쩔매면서 연구 실적만으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을 점점 더 비인간적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자유로이 그리고 기꺼이 쳐다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죽을 가능성을 때때로 혹은 마지못해 흘긋 쳐다볼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그런 경우 중 하나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애기를 들으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완치되는 사례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암은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에게 불치병이다. “나는 누구나 실제로 죽음과 맞닥뜨리기 전에 평상시에 습관적으로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병을 앓는 동안 자신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실제로 죽음과 조우하게 되건, 삶이 연장되건 그 시간이 축복일 수 있다.
저자가 인터뷰했던 200명이 넘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사실이 아닐 거야’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환자는 수많은 의사를 만나며 ‘병원 쇼핑’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의사는 그런 환자를 안심시켰고, 어떤 의사는 의심을 사실로 확인해 주었다. 의사가 사실을 확인해 주건, 그렇지 않건 환자는 똑같은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최초의 진단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진단이 실수였음을 확인해 줄 추가 검사를 하겠다고 한다. 환자의 불안한 부정의 태도는 환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서툴거나, 느닷없이 사실을 전달하거나 환자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고려하지 않고 빨리 ‘해치워버린’ 경우에 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부정은 초기 단계 혹은 그 직후에 모든 환자에게서 나타난다.
K부인은 28세 백인 가톨릭 신자로서 취학 전 자녀 둘을 둔 어머니다. 그녀는 말기 간 질환으로 입원했다. 세심한 식이요법과 매일 간 수치 측정이 그녀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입원하면서 그녀는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애기를 어디선가 들은 상태였다. 가족들은 환자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고 했고, 환자는 입원 다음 날 심령치료사를 찾아갔고, 곧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은 출근해야 했고, 아이들은 먹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였다. 남편의 요구에 의해 병원에서는 정기적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점점 쇠약해졌고, 정신이 맑을 때는 그림이나 공예로 그녀가 소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의료진은 그녀가 심령치료로 건강을 장담할 때도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면 약을 먹고 식이요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금지된 음식을 먹은 다음 날에는 고통이 두 배 더 나타나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병에 관한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의 병을 최대한 오랫동안 부정하려는 그녀의 소망을 의료진이 존중해주리라는 것을 알았고, 감지했기 때문에 비록 상황에 대처하는 데 문제가 있었지만 그녀를 함부로 판단하지는 않았다. 훗날 그녀는 병원의 여러 가지 제약이 죽는 것 자체보다 그 고통스럽고 끔찍하더라고 시인했다. 금지된 음식의 폭식은 일종의 자살행위다. 가족들에게 거부당하고 의료진에게도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하면서도 그녀는 침대 귀퉁이에 앉아 전화기를 붙잡고 부스스한 몰골의 천덕꾸러기였다. 돌이켜보면 나에게(저자)는 과연 그녀의 ‘부정’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기꺼이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성장과 성숙에 도움이 될 것이다. 중증환자나 연로한 환자, 혹은 죽어가는 환자를 만나는 것보다 적합한 일은 세상에 없다. 죽음에 이르는 1단계 ‘부정’의 사례를 살펴본 것이다.
글자 수가 많고(467페이지) 딱딱하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책은 각 단원을 시작하기 전 ‘타고르’싯귀를 하나씩 배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저자 혹인 편집인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도 독자를 배려한 것이거나, 죽음과 연결된 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세상을 잘못 읽고서 세상이 우릴 속였다고 말한다”- 타고르 「길잃은 새들」75
“위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열매줍기」
끔찍한 소식을 접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리 없어’라고 하며 부정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아 그렇군요’하면서 수긍하려 하면서도 진단이 착오이기를 기대한다. 첫 번째 부정의 단계가 유지될 수 없을 때, 분노, 광기, 시기, 원한의 감정으로 채워지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왜 하필 나야”다. 부정의 단계와 달리 이런 분노의 단계에서는 가족이나 의료진 입장에서도 대처하기가 무척 힘들다. 분노는 거의 사방으로 분출되고 때로는 무작위로 주변에 투사되기도 한다. 의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간호사들은 더욱 빈번히 분노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간호사의 일은 전부 잘못한 것이 된다.
이 시기 환자는 어디를 보아도 불만스러울 뿐이다. 이전에 부유했거나 성공했던 사람이라면 이때도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데, VIP야말로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된다. 삶을 안락하게 만들던 바로 그것들을 모두 잃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똑 같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겸허하게 죽음에 도달할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들은 거부로 분노를 유발하고, 정작 그들 자신이 가장 비참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부정과 고립, 분노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협상’의 단계에 접어든다. 환자는 슬픈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신에게 분노하며 그다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을 조금 미룰 수도 있다는 협상 단계가 된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거면 좀 더 공손하게 부탁하면 들어주실지 몰라’라고 생각하는 시기다. 이는 처음에 고집을 부리다가 나중에 애원하는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다. 시한부 환자가 자신의 병을 부정할 수 없을 때, 수술이나 입원을 강요당할 때, 명확한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수척해지고 허약해질 때, 이제 자신의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다. 어떤 극기심도 분노와 광분도 곧 엄청난 상실감으로 대체된다. 상실감을 느끼는 유형은 여러 가지다.
유방암에 걸린 여자라면, 자신을 여자라고 여기지 못할 것이고, 오페라 가수였던 환자는 이를 뽑고 얼굴을 수술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이것들은 환자가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상실 중에서 한가지일 뿐이다. 광범위한 치료와 입원으로 재정적인 부담도 가중된다. 사치를 누리기는커녕 나중에는 필요한 것들도 감당할 여력이 없어지게 된다. 노후에 마련한 집을 팔아야 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도 힘들어질 것이며, 많은 꿈들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어서 직장을 잃거나, 아내가 아픈 경우라면 아이들은 전과 같은 보살핌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점차 환자의 슬픔과 죄책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협상의 단계를 거치면 환자는 우울에 빠지게 된다.
의사 : 선생님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좀 어려운 질문이지만, 선생님은 대답할 수 있으실 것 같아요.
환자 : 죽음이 무엇이냐고요?
의사 : 선생님에게 죽음은 무엇이죠?
환자 : 죽음! 죽음은 가치 있는 행위의 중단이죠. 제가 말하는 가치는 아내가 말하는 가치와 다릅니다.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니까요.
목사 :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말하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들요.
의사 : 그런가요.
환자 : 전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고,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어요. 지금 제 삶을 덧없게 만드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건 제가 저 자신을 지난번 의사가 말한 대로 몸쓸 암에 걸렸으니, 이제 벼랑 끝에 선 것과 같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다시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우울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돌아가신 부모와 일찍 죽은 자식에 대한 애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우울했던 것이다. 이미 엄청난 고통 속에 있을 때 보태어진 고통은 건강하고 고통이 없을 때 보태어진 고통만큼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환자의 모든 고통과 우울을 환자 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환자의 고통을 조금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치병 환자들이 느끼는 다음 단계는 ‘수용’이다. 자신의 병을 이해하고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행복한 상태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런 단계는 거의 ‘감정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사라지고 투쟁이 끝나고 나면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시간이 온다. 이 시기에는 환자보다 가족들에게 더 많은 도움과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게 된다. 죽어가는 환자는 평화를 얻고,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관심사의 범위가 줄이고 혼자 있고 싶어 하거나 외부 세계 소식이나 문제들로 인한 혼란을 원치 않는다. 문병객도 반갑지 않고 수다 떨 기분이 아니다.
물론 마지막까지 싸우려는 환자도 있다. 그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후의 순간에, 그들이 싸우기를 멈추는 날, 싸움이 끝나는 순간 그들은 ‘더는 도저히 못하겠다’라고 말할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피하려 할수록, 죽음을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평화롭고 품위 있는 마지막 수용의 단계에 도달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이런 환자들에게 투지 있고 강하다고 여기고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투쟁하라고 독려하면서 은연중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겁한 것, 배신이며, 심지어는 가족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한다.
환자가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소망과 이제 그만 편히 쉬면서 평화롭게 죽기를 원하는 환자의 소망이 충돌할 때 환자가 포기한 상태인지, 수용하는 단계에 있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때 우리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해를 끼치게 되고, 환자를 위해 애쓰는 과정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환자의 죽음을 고통스러운 체험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삶의 마지막을 수용한 어떤 환자 이야기다.
환자 : 누군가 당신에게 한 번 이상 총을 쐈는데 총알이 빗나간다면, 초월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란 쉽지 않겠죠. 저는 항상 착하게 살았습니다. 욕을 하지도 않았고 험한 말은 쓰지도 않았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웠습니다.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여자를 쫓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항상 반듯하게 살았죠. 그러다 보니 그 목사님이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는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3천 명 정도 신도들이 참석한 예배였어요. 예배가 끝날 무렵 지금은 그날의 예배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목사님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라고 하더군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전 앞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그후로 저는 주일 예배에도 꼭 참석하고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면 꼭 들어 주실거라 믿고 있어요.
의사 :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환자 : 아뇨. 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어요.
인터뷰에서 의사는 로스 박사 자신을 말한 것일 것이다. 위의 인터뷰 후에 쉰 살인 환자의 아내와도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간호사 출신이고 남편과 같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남편의 병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를 갖고 있었는데, 4개월에서 14개월 내에 남편이 죽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그저 담담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에 의사가 물었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그녀가 답했다. “병원 서비스 개선을 위해 이런 일을 하시는 건가요?”
의사 :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증 환자들을 통해 그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한 거죠. 환자들이 어떤 두려움, 환상, 외로움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한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지, 여기서 인터뷰한 환자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문제와 갈등을 갖고 있었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직원들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지금처럼 가족들도 이따금 만나보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죽음이란 우리 모두에게 슬픈 일인 것임이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 있을 때 바르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해주려고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인 것 같다. 그러나 책을 다 읽었다 해도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특히 내 것으로 만들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로르의 시 하나를 더 보자.
아버지가 장례식에서 돌아왔다.
일곱 살 난 그의 아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목에 부적을 걸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자 소년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디 있어요?”
“천국에”하늘을 가르키며 아버지가 대답했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리둥절한 소년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천국이 어디 있는데요?”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별들은 무심히 어둠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타고르 「탈주자」2부 21
이상과 같이 우리는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할 때 여러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신의학적 용어로 방어기제라고 하기도 하고, 극단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대응 기제라고 하기도 하는 이런 모든 단계에서 집요하게 남아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이라는 것이다. 〈안네의 일기〉에서 어린 안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희망이었다. 처음 심장이식을 받은 환자처럼 자신이 약을 사용하는 특별히 선택받은 환자가 되고, 자신이 아주 특별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희망이 이따금 환자에게 일종의 사명감을 주고, 중압감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수많은 검사를 견뎌낼 힘을 준다. 희망은 고통에 대한 합리화이기도 하고 일시적이지만 부정의 형태로 지속되기도 한다.
시한부 환자라고 해서 항상 죽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환자 가족이라 해도 오직 환자 곁에만 있기 위해 다른 인간관계를 모두 배제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남편도 아내가 절실히 필요할 때 좀 더 잘 대처하려면 때로는 슬픈 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필요가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종인 죽음이 내 집 문 앞에 와 있습니다. 그는 미지의 바다를 건너 당신의 부르심을 받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밤은 어둡고 나의 마음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등불을 밝히고 문을 열고 그에게 환영의 인사를 하겠습니다. 대문 앞에서 서 있는 자는 바로 당신의 전령이니까요.
두 손을 모으고 눈물로 그를 경배하겠습니다. 내 심장이라는 보물을 그의 발치에 놓아 그를 경배하겠습니다.
임무를 마치면 그는 나의 아침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겨놓고 돌아갈 것입니다. 쓸쓸한 나의 집에는 오직 버려진 나의 자아만이 당신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 타고르 「기탄잘리」86
다음은 83세 유대인 노인 E씨를 저자인 로스 박사가 인터뷰한 것이다. 그는 극심한 복통을 호소했고, 몹시 야위고 지쳐 보였다. 종합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므로, 레지던트가 정신과적 소견을 물어오기에 이른 경우였다. 그는 넉 달 전까지만 해도 무척 건강했다. 갑자기 늙고 외로운 노인네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주 전에 며느리가 죽었고, 증상이 나타나기 2주 전에 휴가를 간 사이에 별거 중이던 아내가 죽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면회를 올 것이라고 믿었던 가족들이 오지 않았다. 간호사들에게도, 어떤 치료를 받았건 전부 불만이었다. 몇천 달러를 물려주겠다고 하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자신이 외로운 건 가난과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임대 주택에서 단체로 여행 갈 때는 무조건 같이 간다는 것에도 불만이었다. 아내가 입원 중이었을 때 곁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은 휴가를 계획한 사람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에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인간적인 감정은 누구나 갖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고통은 어쩌면 분노와 좌절을 안으로 삼켜서 생긴 것일 수 있다’면서 수치스러워하지 말고, 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박사는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는 이튿날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고 신체도 정상을 회복했다.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오라고 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주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이제 자신의 ‘죽음을 좀 더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평온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자면 떨어지는 별들 중 하나가 짧은 순간 확 타오르다가 이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죽어가는 환자의 곁을 지키는 호스피스(치료사)가 된다는 것은 광활한 우주에서 개별 인간의 고유함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 우리 삶의 유한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 중에 70을 넘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이 책은 1969년 최초 발간됨)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대부분 특특한 일대기를 만들고, 우리 자신을 인류 역사라는 직물에 짜 넣는다.
“배 안의 물은 반짝이고 바다의 물은 어둡습니다.
작은 진실에는 분명한 말이 있고 커다란
진실에는 위대한 침묵이 있습니다.”- 타고르 「길 잃은 새들」1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