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0
3월12일[사순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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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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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rsszW-vh-o
[수원교구 최재관 암브로시오(안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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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잘 나갈 때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 비슷한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 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히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네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앗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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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1xF3infS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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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징은 지혜를 찾는 이들의 것이다>
요즘 저희 성당에 저에게 안수받겠다고 많은 분이 타본당에서도 찾아오십니다. 저는 책도 좀 읽으라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안수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책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습니다. 저도 책을 싫어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떤 성당 성물방에는 읽을 책이 한 권도 꽂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표징만 요구하고 지혜는 추구하지 않는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레지오도 교본에 영적독서를 하라고 하는데, 그냥 교본공부만 하고 영적독서는 하지 않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예수님께서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된 사랑과 신뢰 없이 결과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찾지 않고 표징만 바라는 것은 복권을 사지 않고 당첨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1950년대 초까지 육상계는 "인간은 절대 1마일(약 1.6km)을 4분 안에 달릴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육상선수 로저 베니스터(Roger Bannister)는 그 벽을 깨기 위해 도전했습니다.
베니스터는 1929년 영국에서 태어나, 육상선수로서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키우며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체력과 호흡법을 연구했고, 특별히 과학적 훈련 방법을 고안해 반복적으로 시도했습니다. 바쁜 의대 생활 속에서도 매일 시간을 쪼개 훈련하며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1954년 5월 6일, 마침내 베니스터는 옥스퍼드의 한 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부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아 달렸습니다.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그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결국 3분 59.4초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세계 최초로 '1마일 4분 벽'을 깨뜨렸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불가능의 벽을 뛰어넘은 베니스터의 지혜와 노력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공 이후 1년 동안 여러 명이 같은 벽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그 모든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라."(잠언 4,7)
기적은 먼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과 성취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지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저는 키가 작습니다. "키가 크면 믿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건강하게 몸을 관리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찾아야 할 지혜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수천 번 실패를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전구가 세상을 밝혔습니다. 전구를 개발하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면서 청해야 합니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 관계를 맺는 지혜를 배웁니다. 어린 왕자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사막 여우를 만나려고 그 먼 길을 여행한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별에 있는 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해 주는 심부름 센터로 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기적은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적을 얻기 위해 어린왕자처럼 노력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게 되는 참다운 표징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고정원 씨처럼. 이것이 하느님의 표징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저로서는 '하.사.시.'였습니다. 이 지혜를 찾지 않았다면, "다~주었다."라고 하시는 분을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징은 지혜를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표징이 용서 되지 않는 사람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표징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사랑과 자비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만 바라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찾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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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점심 먹고 잠시 쉬려고 하는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본당에 교적은 없고, 성당에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햇빛은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골고루 비춘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본당에 교적이 없어도, 성당에 나오지는 못했어도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효심이 고마웠습니다. 저는 병자성사 준비를 하고 형제님과 함께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92세의 어머니는 기력이 없었고, 이제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못 하지만, 어머니는 사제가 온다는 걸 알았습니다. 성체를 영해 드리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며 웃었습니다. 형제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형제님의 사촌 형은 저의 신학교 선배 사제였습니다. 저는 선배 사제와 신학생 양성을 위해서 함께 고민했었습니다. 지역 교육 담당 신부로 있을 때, 지역 교육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했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성당에 다니지 않으면서 어머니를 위해 병자성사를 청하는 것이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머니가 병자성사를 받았으니, 앞으로 성당에 잘 다니겠습니다. 어머니가 저의 신앙을 위해서 마지막 가는 길에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형제님은 어머니를 위한 장례미사를 청하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도 않았는데 성당에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위해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 우리의 재능, 우리의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어도, 비록 우리가 신앙생활을 게을리했어도, 비록 우리가 인색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따뜻하게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희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희 죄를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
요양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이 침상 밖을 나오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습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자꾸만 침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걱정하였습니다. 어르신이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령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이유를 찾으면 10가지도 넘었습니다. 다들 안타깝게 바라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입니다. 새로 온 막내 간호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신발이 작네요.’ 보니까 할아버지의 신발이 정말 작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드렸습니다. 어르신은 힘은 들지만 신발을 신고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다녀오셨습니다. 걷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은 사람들의 눈에 할아버지는 치매 환자였고, 걸을 수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은 막내 간호사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던 요나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롭도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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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신지, 그리고 메시아이시라면 증명할 수 있는지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루카 10,25; 11,16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 주시는 대신에 그들이 요나의 표징과 “사람의 아들”(11,30)만을 표징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요나는 주님을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스스로 물에 빠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내고 살아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나는 구원은 오로지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요나 2,10 참조). 니네베로 다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니네베로 들어간 요나는 살아 있는 구원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한 요나를 만난 니네베 사람들은 기꺼이 회개하였습니다.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구원의 표징이 된 요나를 보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배척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 구원의 표징이 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한 이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셨지만, 사실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더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이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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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솔로몬 왕 때, 스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스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 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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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표징이신 분입니다.>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1)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표징만 요구하지 말고 회개부터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것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는 말씀은, “회개는 하지 않고 신기한 기적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요나 예언자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난 일을(요나 2장) 뜻하는데, 여기서는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은, “요나의 선포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표지판 같은 역할을 한 것처럼”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의 복음 선포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표지판 역할을 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구원 쪽으로 가면 구원받을 것이고, 다른 쪽으로 가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2)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했습니다.(요나 3,4) 그리고 요나는 자기가 예언한 대로 니네베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멸망이 내리지 않자 하느님께 화를 냈습니다.(요나 4,1)
요나서에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나 3,10),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결정을 취소하신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아마도 요나에게 선포하라고 시키신 일은, 단순한 멸망 선포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멸망 선포였을 것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도록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런데 요나가 자기 마음대로 ‘회개하지 않으면’을 빼고 멸망만 선포했을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마태 18,14)
요나서에 있는 다음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 것은, 단순히 멸망을 예고하게 하신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회개를 했고, 그래서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3)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 될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표징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 강림 때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또 그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고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자, 그날 삼천 명가량이 그 증언을 믿고 새로 신자가 되었습니다.(사도 2,41) ‘삼천 명’은 대단히 많은 수인데, 아마도 안 믿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4)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이 세대는 유죄다.’라고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 예언자의 한 번의 선포만 듣고서도 회개했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메시아 예수님의 말씀들을 들었으면서도, 또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았으면서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탄절이 국가 지정 공휴일이고, 매주 ‘주님의 날’을 공휴일로 지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몰라서 못 믿었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방 여왕에 관한 말씀은 니네베 사람들에 관한 말씀과 뜻이 같은데, 그 여왕은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왔다가 직접 보고 직접 듣고 나서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1열왕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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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그러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그때에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다만 그러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29-30)
빛은
빛을 요구하지 않고
비추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비출 뿐입니다
온누리 빛이도록
그리하여 빛입니다
참은
참을 요구하지 않고
참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참될 뿐입니다
온누리 참이도록
그리하여 참입니다
선은
선을 요구하지 않고
선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선할 뿐입니다
온누리 선이도록
그리하여 선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고
믿어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믿을 뿐입니다
온누리 믿음이도록
그리하여 믿음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요구하지 않고
희망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희망할 뿐입니다
온누리 희망이도록
그리하여 희망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요구하지 않고
사랑하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사랑할 뿐입니다
온누리 사랑이도록
그리하여 사랑입니다
살림은
살림을 요구하지 않고
살리라 다그치지도 않으며
다만 살릴 뿐입니다
온누리 살림이도록
그리하여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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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심판 때>
어느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당신은 3가지 금(金)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낮은 순서에서부터 말하자면, 3번째 금은 황금이고, 2번째 금은 현금이며, 1번째 금은 ##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어서 한번은 수도회 형제들에게 첫 번째 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장난삼아 어떤 형제가 비상금 아니냐고 하자 어떤 형제는 비자금이냐고, 어떤 형제는 상금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여러분은 어떤 금을 제일 좋아하세요? 넌센스 퀴즈 같기도 하겠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금은 “지금”입니다. 강론 중에 그 신부님이 말씀하셨던 요지와 같은 이유입니다.
“나” 자신이 살아가는 이 순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죠. 그것은 먼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 살아있다는 감사의 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기쁨의 순간이며, 하느님을 향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이 때로 힘들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포기하고 주저앉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지금 일어나 용기를 낸다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쁘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내가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일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의 굴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기계처럼 일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 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지금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32절)라고 말씀하시며, 심판 때에 일어날 일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구원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Hic et Nunc"를 말합니다. 곧 “아직 그리고 지금”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구원의 시간은 아직 완전히 우리들 안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구원의 때가 되었을 때 완전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지만, 또한 분명히 지금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이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기쁨의 순간이며, 지금 바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분의 나라를 지향하는 희망의 순간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심판의 때 역시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심판 때란 니네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우리를 심판할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아직” 우리에게는 다가오지 않아 기다리고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며, 동시에 “지금” 요나의 설교를 들으며 돌아설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하느님을 향해 살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순간입니다.
현금도 좋고, 황금도 좋고, 비자금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나 자신과 같이 하며 기쁨과 감사와 희망을 이야기하며 내가 살아가는 행복에 대해 함께 웃어주는 지금 이 순간만큼 중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자주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다는 것이죠. 오늘은 다른 금(金)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 “지금 주님과 함께” 일어나 세상을 단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당신이 있어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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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류충희 대철 베드로 신부님]
<요나의 표징>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듣고 보면서도 그분을 믿으려하지 않고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 한 가지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옛날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니네베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땅 속에 묻히셨다가 사흘 후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종말에 내려와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는데(요나 3장) 이스라엘 백성은 요나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니 종말에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인 스바 여왕(열왕기 상권 10장 1절-13절 / 역대기 하권 9장 1절-12절)도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찾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종말에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자 그것을 듣기 거북해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요한 복음 6장 66절-68절)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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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구약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이름으로 예언서를 가지고 있는 예언자는 모두 열다섯 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 기준으로, 우리 성경의 애가, 바룩서, 다니엘서는 제외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요나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요나가 큰 도시 니네베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임금부터 모든 백성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회개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고 예고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회개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런데도 군중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럼 이제 주님의 자기소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어봅시다. 예수님을 요나보다 더 크신 분으로 생각하나요? “예!”라는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을,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분을 만나고 있나요? 이 질문에 우리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미사는 은총이 가득한 시간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성인보다, 성경의 인물보다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분께서 바로 미사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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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 영국 방직 공장에 방직 기계들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자기 일을 기계가 돕는다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기고 말았고, 노동자들은 해고되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공장을 습격해 기계를 부쉈습니다. 이것이 1811~1817년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계를 때려 부순 공장만 망했고, 계속 기계를 사용한 공장은 더 잘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인공 지능으로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을 때려 부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더 좋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일자리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거리는 없어지더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게 됩니다. 예전에 버스를 타면 운전사만 있지 않고, 버스 안내원이 있었습니다. 만원 버스의 승객들을 꾸겨 넣듯이 안으로 밀어 넣고 “오라잇~”을 외쳤었습니다. 현재 이 직업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망했을까? 아닙니다. 발전 속에서 더 많은 직업이 생겼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며 부정하면 시대의 변화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에 어긋날 때는 잠시 멈춰서서 또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도 그 시대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구약시대의 하느님과 신약시대의 하느님이 너무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하느님 뜻을 마음에 담으며, 지금 시대에 맞게 생활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표징을 제대로 읽으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밖에는 따로 보여 주실 것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요나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며 하느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알아보아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표징입니다. 지금 자기들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 역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맞게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그 활동을 위해 많은 예언자를 나의 이웃으로 보내셨습니다. 내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웃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 예언자를 받아들여서 구원되었던 니네베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그들을 받아들여야 구원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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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군복무를 하던 시절 야간 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간 훈련과 달리 야간 훈련 중에 금기시되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간처럼 담배를 편하게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간에 담배 불빛은 아주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는 강한 빛을 내 뿜는다고 합니다. 즉 작은 담배 불빛이 자신의 위치를 노출할 수 있고 함께 하는 전우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작은 불빛 하나가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표징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하늘의 커다란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혹은 사람이 이룰 수 없는 기적 같은 것을 눈앞에 보여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나의 기적을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요나의 기적은 작은 것으로 보이지만 요나의 작은 목소리가 성읍 모든 사람의 회개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표징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기적같이 이루어지는 표징이 필요할까요? 이미 작은 표징들이 우리 삶 곳곳에 들어차 있습니다. 작은 표징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다면 커다란 표징은 그저 우리를 유혹과 교만으로 이끌 뿐입니다.
요나의 표징에 귀를 기울이세요. 작은 소리와 작은 마음의 움직임에 집중하세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보세요. 요나의 표징은 커다란 삶의 기적을 우리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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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내려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정상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절벽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에 서 보셨나요?
한발 더 나아가면 내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절벽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내리막을 걷다 보면 다시 오르막을 만날 것이고
그 오르막의 끝은 다시 정상일 것입니다.
오히려 정상에 오래 있지 마세요.
정상은 춥고 외롭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내리막을 걷고 오르막을 걸으세요.
이것이 정상으로 가는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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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루카 11,29,30)
맨 처음 요나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육지로 뱉어내게 하시어 요나가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악한 길과 폭행을 멈추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외치자,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심지어 임금마저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이처럼 니네베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요나의 표징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으나, 우리 세대는 주님의 그 많은 주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듣지만 회개하지 않기에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니네베 사람들은 마음을 움직였지만,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우리는 마음을 굳게 닫고서 회개를 거부합니다.
사순시기는 특히 우리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기입니다. 무한한 자비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하면, 아무리 굳은 우리 마음도 부드럽게 만드시는 힘이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 내리는 비처럼, 특히 사순시기에 우리가 듣는 주님의 말씀은 굳은 우리의 마음에 내리는 단비와 같을 것입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새로운 표징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혼란스러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요나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회개와 단식을 통해 가난한 이웃과 나누고, 무엇도 바라지 않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며 산다면, 이것이 곧 주님 말씀의 힘을 이 시대에 드러내는 새로운 요나의 표징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요나의 표징이 되도록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현실을 회피하는 큰 물고기 속에 갇힌 요나가 아니라, 말씀에 마음을 열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의 표징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3.10)
사순시기는 회개를 통해 우리 삶이 요나보다 더 크신 주님의 표징이 되도록 초대받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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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지명하시어 니네베 사람들에게 엄한 징벌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고, 요나 예언자는 그 말씀에 순명하여 아시리아 대제국의 수도 니네베를 찾아가지요. 하느님께서 그러라고 하셨으니 순명하긴 했지만, 요나 예언자는 아마 속으로 의구심을 가졌을 겁니다. 당시 근동지방에서 제일 잘나가던 강대국의 백성들이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리 없을 거라고, 본인이 어떤 메시지를 전해도 귓등으로도 안듣다가 결국엔 멸망에 이를거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정말 뜻밖의 일이 발생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요나의 선포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즉시 회개를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본인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모든 세속적인 유흥을 끊어버리고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힘껏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그처럼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당신을 향하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셨던 재앙을 거두셨지요. 인간 편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심판을 자비로 되돌린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들이 당신을 믿게 해보라며 끊임 없이 더 신기하고 놀라운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악한 세대’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도 없으면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심지어 그분을 고발할 구실을 만들려고 표징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당신을 대하는 그들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은 그가 대단하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서가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가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듣고 즉시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요나가 한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을 통해 어떤 현상 안에 숨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알아보고 그것에 따라 자기 삶을 변화시킬 때, 비로소 그 현상은 내 삶에 구원의 표징이 되지요. 그러니 더 놀라운 기적으로 나를 믿게 해보라며 주님께 표징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나의 마음이 그분을 향해 열려있는지를, 주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살폈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은 상태로는 아무리 놀라운 기적도 나에게 표징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요나보다 더 큰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변방의 약소국에서 온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변화됨으로써 구원받았는데,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복음 말씀을 듣고도, 그분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도 왜 그분이 주님이심을 믿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신 겁니다. 우리도 그분의 탄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방식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지 않고 흘려버린다면, 당장 내 호기심과 욕망을 채워줄 세속적인 자극들만 찾아다닌다면, 그러면서 정작 하느님을 닮은 자녀로 변화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심판의 순간 그토록 그리던 하느님 나라를 저 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해 후회와 절망의 탄식을 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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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시며 한탄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시어 구원의 소식을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표징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율법에 얽메이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메시아, 가진 것 없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메시아셨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메시아가 당시 유다인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음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는 로마의 억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메시아, 타민족을 정복해 지배권을 얻게 하는 메시아, 젖과 꿀이 흐르는 현세의 지상 낙원을 실현시켜주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자꾸만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표징은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 혹은 미래의 구원이 아닌, 현실의 목마름을 당장 해결해 줄 수 있는 세속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묵묵히 온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고자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셨으며 이를 뒷받침하고 증명해주는 여러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것을 찾기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눈이 어두워진 그들은 그 뜻을 못 알아듣고 외면해 버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상기시키십니다. 남방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자 땅 끝에서 솔로몬을 찾아 온 사람이며 니네베 사람들은 오늘 독서에 나오듯 쾌락과 세속에 빠져있었으나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단 한 번만 듣고서도 회개한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솔로몬과 요나에 비할 수 없는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외면하고 거절하는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기에 당시의 유다인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구원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교회의 가르침과 해석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얼마든지 알아보고 찾을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성인전은 하느님의 존재와 기적을 여러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당시의 유다인들과 같이 현실적인 문제들에 눈이 어두워 참다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기도 중에 원하는 것들 역시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바라고 당장 이루어질 표징만을 원하기에 구해야할 은총을 청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치기도 합니다.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브루스는 사회적으로 안락한 뉴스 앵커의 지위를 꿈꿉니다. 하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 하고자 노력하지만 자꾸만 실수를 저지르고 다른 동료가 주목을 받습니다. 이에 브루스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하느님을 저주하며 당신이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냐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이에 하느님이 나타나 신의 권한을 그에게 맡깁니다. 이에 브루스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일념아래 사람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줍니다. 그런데 세상은 오히려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로또 당첨이 수 천명이 되어 1등 배당액이 조금만 책정되자 폭동이 일어나고 특정 미식축구팀이 우승하자 폭동으로 경기장이 무너집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일어나 세상이 혼란스러워 지고 맙니다.
그제야 브루스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며 다시 하느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하느님이 나타나 이야기합니다.“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지? 신의 임무 말이야.” 그리고 이어서 이야기 합니다. “과연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서 제대로 소원을 비는 걸까? 두 가지 일로 허덕이는 미혼모가 아이를 축구수업에 보내려고 없는 시간을 짜내는 것이 기적이야. 십대가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면 그게 기적이야. 사람들은 이미 주어진 기적의 능력을 갖고도 그걸 알지 못하고 나에게 소원을 빌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저마다의 소중한 지향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기도 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 힘을 주는 가족 혹은 동료들을 만나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내 주변 가족들이 건강하다면 그 또한 기적이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적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며 기적인 것입니다.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모두들 알고 계실겁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상처와 십자가를 갖고 있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며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얼마나 커다란 은총이며 기적이었습니까? 오늘의 복음 앞에서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나에게 이미 베푸신 은총의 표징은 무엇인지 기억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기적들을 사랑으로 베풀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힘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자비에 지치지 않으시는 주님은 오늘의 복음 환호송과 같이 오늘도 우리에게 손짓하십니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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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완고함을 벗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방인 성읍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의 병렬구문에 따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군중이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친 ‘회개의 때’에 대한 표징이요,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나온’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당신께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으로 ‘구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징을 읽을 줄 아는 믿음의 눈’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적을 찾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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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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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무지의 병病에 대한 약藥은 회개뿐이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시편 51,19ㄴㄷ)
화답송 후렴처럼, 주님은 회개하는 영혼을 용서하시고 품에 안아 위로와 치유를 주십니다. 아주 예전 제 강론에 대한 두 분의 평이 고무적이라 잊혀지지 않습니다.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신부님 강론은 쉽고, 깊고, 아름답고, 울림(감동)이 있습니다.”
어느 평신도 신학자의 평이었는데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이뤄지는 삶이 이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부님 강론은 단순simple하고 다채롭고colorful 현실적practical이요. 좋은 메시지good message를 줍니다.”
20여년전 로마에서 수도자 모임시 호주 수녀님이 수 차례 제 영문 강론을 들은 후 평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의 삶 역시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그렇게 만들겁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요 안으로는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이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삶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은 그대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회개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로운 삶이 바로 무지에 대한 답입니다. 명상기도시 자주 되뇌는 “강”이란 자작시가 있습니다.
“강이
강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맑게 흐르는 강이에요.”
정주의 산처럼 반가부좌 자세로 앉아서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성구를 반복하는 명상기도를 바치다 보면 내면은 늘 맑게 흐르는 강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안으로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살아 있는 삶은 바로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해 실현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회개이니 흡사 수도원의 기도를 중심한 일과표가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교황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마음의 부패를 막아주는 회개의 수행이요, 회개와 더불어 마음의 순수와 사랑입니다.
엊그제 말씀의 주제는 “사랑”이었고 어제는 “기도”였으며 오늘은 “회개”입니다. 사랑할 때 기도요 기도할 때 회개이니 셋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요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거역하여 도주하다 사로잡히자 회개하여 살아나 니네베에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앞서 2장은 요나의 긴 회개의 기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주님의 명령에 즉시 응답하여, 요나는 외칩니다.
“이제 40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사순시기 40일과 일치합니다. 사순시기 우리 대한민국에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좌우의 내전적 대결로 격화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거국적인 회개와 화해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었고 위의 임금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주민은 물론 짐승까지 회개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임금의 호소에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정말 니네베 주민들처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 사순시기 대한민국 전국민이 회개의 삶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명실공히 사순시기는 회개와 정화, 화해의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모여드는 군중들은 예수님의 인기에 따른 호기심 때문이지 결코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기위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주님의 질타는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향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病 무지에 대한 치유제인 약藥은 회개뿐입니다. 예수님은 현자 솔로몬을 찾았던 남방 여왕을 예로 들면서, 또 요나의 선포에 회개로 응답한 니네베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우리 악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삶전체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고 살리신 예수님 자체가 빛나는 회개의 표징인데, 또 눈만 열리면 도처에 주님의 빛나는 회개의 표징들인데, 가톨릭교회내의 무수한 성인들, 주변의 거룩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무수한 신자들 역시 빛나는 회개의 표징들인데, 도대체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저에게는 충실히 살아가는 여기 수도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예수님 그분이, 예수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참 좋은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게 하시고, 회개의 표징이,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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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회개의 은총을 청하는>
오늘 표징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주님께서는 순순히 응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군중이 악하다고 꾸짖으시며 오히려 군중이 바뀌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보여 줄 표징은 솔로몬의 표징이 아니라 요나의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우리도 군중과 같지 않은지 봐야 하는데 우선 우리도 군중처럼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자가 아닌지 봐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군중도 우리도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하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요구하지 않고 요청해도 악하다고 꾸짖으실까요? 아니면 좋다고 들어주실까요?
제 생각에 표징을 요구하지 않고 요청한다면 자세가 악하지 않기에 들어주실 뿐 아니라 청하는 표징도 좋은 것이기에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제게 마치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달라고 요구하면 주겠습니까? 그런 교만한 자세로 요구하면 누가 주겠습니까? 줘야 할 것도 주고 싶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무도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중과 달리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표징은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요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도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기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회개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널려 있는 하느님의 표징들과 기적을 보지 못하고 새로운 표징을 기적처럼 보여달라고 요구하는데 널려 있는 하느님의 표징들과 기적을 보지 못하는 내가 볼 수 있는 나로 바뀌는 나의 회개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우리는 너무도 악하여 악한 것만 봅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그 선들을 선으로 보지 못하고 악하게 보고, 선한 것들에서 선을 보지 못하고 욕심 때문에 결핍만 봅니다.
또 장미에서 꽃을 보지 않고 가시만 보며 나쁘다고 악평하고 하늘에서 무지개는 보지 않고 구름만 보며 불평합니다.
그것은 내 안에 악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악하다고 하시며 바뀌라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솔로몬처럼 바뀌지 말고 요나처럼 바뀌라고 하시며 당신이 보여 줄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요. 솔로몬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다가 이방의 신들에게 돌아섰지만 요나는 하느님을 피해 도망쳤다가 하느님께 돌아서며 회개했고, 무엇보다도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돌아서고, 니네베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가 아니라, 이런 회개를 하라고 주님께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Ref. 내일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묵상글이 많이 늦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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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ㄴ)
<회개의 표징!>
오늘 복음(루카 11,29-32)은 '요나의 표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루카 11,16 참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규정하시면서, 요나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 타락한 니네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처음에 요나는 주님의 이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타르시스로 도망갈 때 물고기 배 속에 사흘 동안 갇혔다가 다시 살아난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뜻(회개)을 전했습니다.
'회개의 표징!'
'요나의 표징은 회개의 표징'입니다. 요나 자신이 먼저 회개했고, 요나를 통해 주님의 뜻을 전해 들은 니네베 사람들 모두가 회개했습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가 회개한 '회개의 표징'입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2.4ㄴ)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하느님 아버지의 간절한 뜻,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표징(기적)은 바로 '나의 회개'입니다.
"이것만 해주시면 제가 잘 믿겠습니다." 하며 주님과 흥정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바라는 내 뜻만을 찾고 청하는 그런 믿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구체적인 회개를 통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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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사람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회개입니다.
역사의
현장 속에서
요나보다
더 큰 이를
봅니다.
지난 시간을
아프게
되짚어 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우리 힘만으로
살아낸 시간이
아니었음을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회개의 기쁨을
이 사순에
뜨겁게 다시
만납니다.
참사람이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회개의 길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보아야
사람을 얻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얻는
회개이며
하느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어디에서
보고
찾아야 할지를
깨닫는
사순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회개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회개를 사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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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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