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적으로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면 사람들은 나이를 밝히기를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서른이 되면 이제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한 청년이 어떤 자리에서 “벌써 제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는 사실에 슬퍼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로 보이는 다른 청년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역시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저는 제 나이가 스물아홉이라는 사실에 웃을 수 있습니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어떻습니까? 아마 이보다 더 나이가 많은 분들은 “참 좋을 때다.”라고 하면서 부러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대의 아이들에게는 “와~ 노땅이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반응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을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똑같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지만 슬픔과 기쁨으로 나눠질 수 있는 이유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른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지 아니면 절망하면서 좌절에 빠질 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미래는 똑같습니다. 즉, ‘죽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죽음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기쁨과 행복의 삶이라는 시작을 맞아야 함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똑같은 ‘죽음’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그 구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죽어서 해 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죽을 때에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말입니다. 이 역시 소중한 나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시겠습니까? 지금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