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강론>(2024. 9. 6. 금)(루카 5,33-39)
복음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3-39)”
1)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엄격하게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을 했고, 그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본받아서 자주 단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바리사이들은 그렇다 치고,
요한의 제자들은 왜 그런 단식을 했을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지 않았는가?
사실 실제 상황을 보면, 요한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 사람들, 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조금은 있긴 한데(요한 1,37), 그냥 세례자 요한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요한 3,25-26).
<그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요한의 증언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든 그랬습니다.
어쩌면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요한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2)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기준으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 사도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그들이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루카 24,41),
곧바로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루카 24,42).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사도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단식을 합니다.
3) 예수님의 수난 당시의 신자들 가운데에는, 모든 것이 다
허망하게 끝나버렸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고, 수난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단식을 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행하는 단식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부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4) ‘새 옷’과 ‘새 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앞의 단식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새 옷’과 ‘새 포도주, 새 부대’는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사는 ‘새로운 신앙생활’로,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낡은 신앙생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그것이 곧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부하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만 살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기준으로는 ‘헌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묵은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의 생활은
같을 수가 없고, 같은 생활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5)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 승천과 성령강림 후에도
유대교에 속해 있으면서 유대교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안의 한 분파 같은
모습이었는데, 스테파노 순교자의 순교 후에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심하게 박해하면서 결국 갈라서게 됩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갈라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느냐, 아니냐?”, 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느냐, 아니냐?”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비록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구약성경을 함께 사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두 종교는 그냥 ‘서로 다른 종교’일 뿐입니다.
[출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