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답답했던 관계로 술도, 물도 벌컥벌컥 켤 일이 많았던 며칠, 덕분에 잘 마시지 않는 맥주를 꽤 마셔댔습니다. 뭔가 정신적인 충격이 있으면 여유롭게 와인을 음미하는 것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거죠. 역시 잘못 방향을 잡는 정치는 스트레스의 근원 맞습니다.
그러니, 술도 '양으로 들어가는' 걸로 골라잡았겠죠. 하긴 제가 사는 미국은 와인의 나라라기보다는 맥주의 나라입니다. 보통 미국 맥주 하면 버드와이저나 밀러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정말 '공장 맥주'일 뿐입니다. 국토의 광대함과 식민지때부터 맥주를 즐겨온 역사 때문에 소규모(라고는 하지만 단지 대량 맥주생산 공장만큼 크지 않다는 말입니다) 맥주 양조장도 1천 4백개 이상 되고, 사실 '진짜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곳이 미국입니다. 우리나라에 막걸리가 있었다면, 미국엔 맥주가 있었던 셈입니다.
하긴, 신대륙에 처음으로 정주 목적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하게 된 것도 배 안에 싣고 왔던 맥주가 그곳에서 떨어져서였다고 하니 이 사람들의 맥주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고향이 맥주의 나라인 영국이라곤 하지만, 사실 영국 스타일의 맥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맥주와는 크게 다릅니다. 버드와이저나 밀러 같은 맥주는 사실 원래 미국인들이 마시던 맥주가 아니라, 체코와 독일의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이 마시던 하면발효식 맥주를 만들어 마신 거고, 마시기에 보다 편하고 청량감이 있는 이 맥주가 인기를 끌자 결국 대량생산의 길로 가면서 지금처럼 별 특징없는 맥주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실제로 버드와이저 같은 미국 대량생산 맥주는 따라 놓으면 거품이 형성됐다가 사라지는 것이 꼭 청량음료를 보는 것 같고, 미국인들도 거의 청량음료 수준으로 즐긴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미국에도 '진짜 맥주'를 만드는 술도가들이 꽤 되고, 그러다보니 그런 이름 있는 술도가들의 맥주들을 찾아 마시는 재미도 있습니다. 특히 영국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는 IPA(인디언 페일 에일), 혹은 거의 커피나 코코아 같은 진득함이 느껴지는 포터 같은 맥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맥주를 마셔온 사람들에겐 처음엔 거부감까지도 들 수 있지만 일단 맛을 들여놓으면 라거 맥주를 마시는 것이 싱거워서 못견딜 정도가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상식으로 아시겠지만, 맥주는 발효 과정에서 효모를 가라앉혀 맑게 발효시키는 라거 스타일이 있고, 영국식 맥주의 대표격인 에일은 효모가 술 위로 뜨면서 산화되고, 그 과정에서 맥주의 색깔이 어둡게 나옵니다.
어쨌든, 저는 라거 스타일보다는 에일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것은 맥주에서 느껴지는 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잘 만들어진 윈터 에일 같은 건 전나무의 바늘잎사귀를 툭 꺾어 비빈 후에 맡을 수 있는, 그런 매력적인 향이 나기도 합니다. 홀짝거리며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와인보다 꿀꺽꿀꺽 마셔야 제맛이 나는 맥주는 그 이유 때문에 이곳 주당들에게 더 사랑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설하고, 이 며칠동안 저는 도저히 와인을 홀짝거릴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술을 퍼 마시고 싶었습니다. 와인을 그렇게 마셨다면 아마 며칠은 몸이 죽어났을 것입니다. 에일을 마시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맥주 좀 사올께요." "맥주는 무슨 맥주? 아니 이 아저씨가 안하던 짓을 다 하네?" 라고 저를 한번 흘겨보던 아내가 제 얼굴을 다시한번 보더니 말합니다. "그래, 나도 맥주 마실래요."
이곳에서 맥주 포장은 일반적으로 12온스짜리 여섯 개가 묶여 나오는 것을 식스팩, 이런 게 열 두개가 들은 걸 하프 케이스, 24개 들은 것을 풀 케이스라고 하는데, 저는 그냥 두 파인트가 채 나오지 않는, 그러니까 우리나라 맥주병 사이즈로 몇 병의 맥주를 사들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한 병만 빼고는 모두 서북미 맥주로. 아내를 위해선 스텔라 아트와 한 병을 샀고, 레드훅, 피라밋, 닌카시 등의 서북미 맥주들을 사왔습니다.
쌉싸름합니다. 그 쓴 맛이 제 가슴의 씁쓰레함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는 IPA를 무척 좋아하는데, 아마 그 쓴 맛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맥주는 식민지 인도로 싣고가던 영국인들이 맥주의 장기보관을 위해 보관성을 높여주는 쓴 홉을 보통 맥주 만들 때보다 훨씬 많이 넣어 만든 것이 유래가 됐다고 합니다. 그 쓴 맛이 오히려 사람들의 인기를 끌어서 '더블 홉'이니 '트리플 홉' 스타일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곳 워싱턴주가 밀과 더불어 미국내 홉의 가장 큰 산지이기도 합니다. 좋은 홉과 밀, 보리로 만드는 이 맥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일반 버드와이저 같은 맥주가 치즈로 치자면 크래프트에서 나오는 노란색 싱글 슬라이스 치즈라면, 이런 맥주는 제대로 된 파마잔 치즈나 콩테 치즈 정도로 비유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하면발효되어 깔끔한 독일식의 맥주는 깔끔하고 탱탱한 에담 치즈 정도에 비유된다고 할까요?
어쨌든, 그 청량감, 그리고 그 쌉싸름함. 이런 것들이 짭조름한 안주와 어울리면서, 생각은 오히려 더 깊어질 때도 있고 아니면 그냥 피곤해져 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맥주 한 두어 파인트 마시면서 와인과는 전혀 다른 취기를 가져오는 맥주는 며칠간 제 벗이 되어 주었고, 저는 이걸로 한시름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 맥주병들을 다 치워 내고 나서, 언젠가는 다시 천천히 와인을 음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말 속상해서 마시는 술보다는 축배를 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마시고... 당분간은 술과 멀리해야겠습니다. 물론 이 결심이 얼마나 갈 지는 모르지만... 기왕에 마시는 술, 언젠가 다 함께 축배로 함께 잔을 들고 싶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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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
첫댓글 좋은데 사시네요^^
답답한 심정은 장소를 가리지 않나봐요?
거긴 지금 오후?
오후 한 시 다 되어갑니다.
저역시 끊었던 오징어를 한 팩 사와서 버더와이저를 마시고 또 마시면서 답답한 가슴을
달래 보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이었습니다.
총선기간동안 하루게 잠을 서너시간 밖에 취하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된 기요미 땜에 역시
온 기운을 다 쏟고 났더니 이제 입안이 다 헐고 집에 오면 그냥 쓰러져 잡니다.
어제도 소파에서 5시간을 곯아 떨어졌네요. 그리고 한 밤중에 들어오는 가족을 위해 밤참준비를
하고 또 아침 늦도록 잠에 취해있다 부랴 부랴 이렇게 업소로 나왔습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리니 몸이 많이 아프네요.총선 후유증을 심하게 겪고 있는 또 한사람.
여긴 토론토입니다.^^
저두 아직 제 자릴 못찾았나봅니다.
한국시간 새벽3시30쯤 잠에서 깨어 이러구 있네여.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아무튼 빨리들 추스리시고... 힘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게 국민을 위한 국가입니까?
깡패 양아치집단이지?
솔직히 외국 사시는분들 요즘처럼 부러운건 처음입니다. ㅜㅜ
어제 라디오에서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없습니다." 이노래 듣는데 가슴이 무너질듯 했습니다.
휴~~
저도... 차라리 여기 사는 게 다행인가... 싶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