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털털한 여자와 섬세하고 꼼꼼한 남자가 만나는 곳, 신림동 순대타운은 참으로 따뜻하다.
순대와 소주 한잔, 그리고 추억을 공통분모 삼아 함께 좋아하고, 때론 서로의 ‘다름’ 까지 아껴주게 되는 신림동 순대타운
이야기.
유독 토종음식만을 고집하는 전통파 미식가가 아니라 하루쯤 허름한 식당에서 솔직 담백한 이야기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상대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신림동 순대타운이 제격이다. 지저분한 앞치마를 걸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둘만의 새로운 데이트 코스가 될 순대타운. 눈빛만 봐도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은 오래된 연인처럼 편안하고, 지저분한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게 아늑한 느낌이 바로 이곳 신림동 순대타운이다. 저렴한 가격에 우리 순대의 고소한 맛과 주인 아주머니 혹은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을 서비스 받을 수 있는 곳.
서울시 관악구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인근에 위치한 순대타운. 92년에 민속 순대 타운이 생기면서 재래시장에 흩어져 있던 순대집
들이 한 곳으로 입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하철에 내려 ‘순대타운’이라는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2분 이내에 순대타운이라 불리
는 큰 건물 두 개를 발견할 수 있다. 두 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 건물을 중심으
로 주변에도 작은 순대전문점들이 분포돼 있어 좁은 이 구역 안에 순대전문점만 수십
개에 이른다. 건물을 마주보고 서서 조금 지저분해 보이는 오른쪽 건물은 자칭 순대 마니
아들이 ‘백순대’를 찾는 양지 순대 타운. 비교적 깔끔한 느낌의 왼쪽 건물은 순대 초보들이 빨간 양념으로 버무린 ‘순대 볶음’을
찾는 민속 순대 타운이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양보충을 핑계 삼아 순대태운을 내 집 드나들 듯했던 나는 사회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한달에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알아보고는 달려 나와 손목을 잡아 끄는 양지타운 4층 ‘하버드’의 주인아주머니 손길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교복 입은 어린 아르바이트생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정겹다.
서비스로 내주는 병 콜라 한 병에 각박한 현실에서 느끼던 답답함이 싹 사라진다. 군대와 곱창, 쫄면 사리와 양배추가 이루는
기가 막힌 조화를 먹어보지 않은 이가 어찌 알까.
순대는 우리의 고유 먹거리로 돼지 창자에 찹쌀, 야채, 당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서 찌거나 삶아낸 것을 말한다.
넣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일반적인 순대는 작은창자를 사용한다. 순대 골목이 유명한 것은 순대를 이용한
갖가지 메뉴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인데, 최고의 인기 메뉴는 순대 볶음. 순대에 돼지 간, 양배추, 떡, 쫄면 사리, 파, 마늘, 깻잎,
당근 등을 푸짐하게 담아 새빨간 양념장을 더해 볶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순대볶음’.
신기한 것은, 순대 마니아들만 찾는다는 순대타운 오른쪽 양지 타운 건물에 가보면 빨간
순대볶음을 먹는 사람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는 사실. 이곳에서는 10명 중 9명은 백순대
볶음을 먹고 있다. 백순대 볶음은 일반적인 순대볶음에서 고추장 양념을 뺀, 말 그대로
하얀 순대볶음을 말한다.
양지 타운에서는 2인분을 시켜도 족히 3인분은 더 돼 보일 만큼 푸짐한 양으로 일단 배를
부르게 한다. 거기다가 말만 잘하면 음료수는 무제한 서비스다. 양이 부족하면 당면과
양념을 덤으로 얹어준다. 이렇게 양이 푸짐하다 보니, 5명이 가서 3인분을 주문해도 충분
할, 아니 남을 정도다.
다 익은 백순대 볶음을 깻잎에 싸서 입에 넣으면 깔끔하고 고소한 순대의 맛과 상큼한 깻잎향이 은은하고도 강렬하게 퍼진다.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정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다. 자칫하면 그 맛은 너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추장이 없이 순대와 어울린 들깨와 마늘은, 어느 한쪽으로 조금만 더 치우쳤어도 무척 부담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내가 처음
백순대를 접했을 때 이처럼 불안정한 조합이야말로 이 정체불명의 맛을 더욱 사랑하는 이유가 됐다.
마치 순대계의 까르보나라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백순대는 술안주로도 좋지만 한끼 식사로도 양이나 영양 면에서 빠짐이 없다.
좀 더 특별한 것을 찾는다면 오징어 순대나, 구수한 순대 국도 메뉴에 있지만, 아무래도 순대 타운의 백미는 순대볶음 이다.
기자가 되어 매일같이 메마른 세상살이 취재만 하다가 이 곳, 순대 타운 골목을 들어서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여러 해 전부터 경기가 어렵다는데 여전히 장사가 잘 되는 것도 반갑고, 순대를 먹으면서 유쾌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표정도
흐뭇하다.
오랜만에 만난 좋은 친구와 푸짐하게 순대 볶음을 먹고, 기분 좋게 술도 한잔 했는데 2만원도 안 되는 계산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고민인 적이 없다. 광우병 파동에 조류독감이 온 나라를 흔들더니 이제는 트랜스지방이 난리다.
도대체 뭘 먹어야 할 지의 고민을 넘어 외식을 하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때에 안전한 먹거리, 맛도 있고 거기다 저렴하기까지 한 메뉴가 있다면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다.
설명은 길었지만 결론은 순대다.
멀어져 가는 겨울 먹거리들의 뒷모습이 아쉽다면, 신림동 순대타운으로 가보자.
고민할 건 매콤한 순대볶음을 즐길지, 고소한 백순대를 즐길지, 오직 그것 뿐.
(글 사진_ 이여영)
첫댓글 순대계의 까르보나라... ㅋ
빨간 순대볶음은 순대도 아니라며, 고등학생 때 교복 입고 지하철 타고 꾸역꾸역 신림역까지 가서 먹고 오곤했는데...ㅎㅎ 진짜 오래됐네요 ^_^
언제 순대타운에서 TNN 번개 한번 해도 재미있겠는데요? 저는 아직 백순대를 먹어보지 못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