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예수님이 보여준 기적이 많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을 낫게 하는 등. 그 중에 가장 큰 미스터리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곳은 갈릴리 호수라는 곳이다. 그런데 유대교는 예수님을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갈릴리 호수는 그냥 ‘멋진 휴양지’일 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을 믿고 있었다.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유대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라는 역사서를 보면 유대인이 믿고 있는 천국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천국은 잠도 없고, 슬픔도 없고, 타락도 없고, 걱정도 없는 곳이다. 천국은 시간으로 재는 낮과 밤도 없다. 계절이 생겨나고 변화하게 하는 해도 없고, 달도 없다. 회전하는 곰자리별도 없고, 오리온자리별도 없고, 유리하는 수많은 별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천국은 영원한 곳이란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천국이다. 유대인들은 ‘천국의 바다는 파도가 치지 않으며, 천국 사람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다. 요즘도 수시로 풍랑이 일고 파도가 친다. 천국 사람이라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당연히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때, 배 위에는 제자들이 타고 있었다. 이 장면이 성경에 기록돼 있다. 마태복음 14장33절을 보면 “물 위를 걷던 예수님이 배 위에 올라갔다. 그랬더니 배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엎드려서 예수님한테 절을 했다.”
배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예수’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 외에도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더 깊고, 더 본질적인 메시지가 녹아 있다.
성경에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예수뿐만이 아니다. 제자인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 물론 계속 걷지는 못했다. 베드로는 잠시 걷다가 다시 물속에 쑥 빠져버렸다. 왜 그랬을까. 물 위를 걷는다는 건 단지 믿기 힘든 이적일 뿐일까. “성령의 힘”이라는 한 마디로 묻고 지나가야 하는 일일까. 아니면 그 속에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더 깊은 울림이 숨어 있는 걸까.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바다에서 살아남을 만큼 수영을 잘하진 못했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배에서 바다로 내려갔다. 예수를 향해 다가가기 위해 베드로는 바다 위에 두 발을 디뎠다.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 발, 또 한 발. 예수님께 다가간 거다.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갑자기 바다에 빠져버렸다. 물 위를 계속 걷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며 예수님을 향해서 다가갈 때, 멀리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걸 본 순간, 베드로는 두려워져서 물에 쑥 빠져버렸다. 물속에 빠진 베드로는 허우적대면서 소리쳤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럼 물 위를 걷는 베드로가 주는 메시지는 뭔가. “너의 고집으로 똘똘 뭉친 ’에고의 운전대‘를 한 번 내려놓아봐라. 그럼 우주의 운전대가 드러날 것이다. 겁내지 말고 맡겨봐라. 이 거대한 우주의 운전대에 네 삶의 핸들을 맡겨 봐라. 그럼 네 삶이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파도에 젖지 않게 될 거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처럼 말이다.” 하루하루 겁나는 일도 많고, 걱정 근심도 참 많다. 오늘부터 우주의 운전대에 자신을 맡기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백성호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