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516) - 선운사에서 만난 여행친구들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의 시상이 떠오르는 가을, 지난주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선운사에서 반가운 손님들과 정겨운 시간을 가졌다. 캐나다에 사는 여행친구가 고국을 찾은 길에 만났으면 하여서 운치 있는 선운사의 우체국수련원을 숙소로 정한 것이다.
젊은 시절 체신부에 근무한 인연으로 가끔 이용하는 곳, 조용하고 쾌적한 시설이 마음에 들어 이틀간 머물기로 예약하였는데 멀리서 오는 손님들은 사정이 생겨 하루 늦게 오겠단다. 수요일, 아내와 다른 일행 네 명이 광주터미널에서 만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선운사로 향하였다. 날씨 좋고 시간도 많은 편, 가는 길목에 있는 월봉서원과 필암서원에 들렀다.
광산구 임곡동 너브실마을에 있는 월봉서원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요 문인인 고봉 기대승을 배향한 곳, 스물여섯의 기대승은 쉰여덟의 퇴계 이황과 13년간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에 관하여 치열한 학문적 논쟁을 펼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임곡에서 장성으로 가는 도로에서 600여 미터 들어간 백우산자락에 있는 월봉서원과 주변의 한옥들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향교, 서원활용사업의 본보기로 마을전체가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보고 전시실 앞의 다실에서 환담을 나눈 후 돌아서는 발걸음이 뿌듯하다. 이곳에 비치된 ‘고봉 기대승, 빙월(氷月)로 기억되다’는 팸플릿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눈 내리는 달밤에 얼음같이 맑은 마음을 가졌던 사람, 정조는 고봉 기대승을 빙심설월(氷心雪月)이라 불렀다. 그 이름을 딴 빙월당에는 고봉선생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조선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문인이었던 고봉 기대승의 빙월과 같은 정의로움은 500년의 시간을 타고 흘러 광주의 인문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왔다. 고봉 선생의 숨결을 간직한 월봉서원은 미래 세대들이 선비들의 지혜와 삶의 자세를 융, 복합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으로 성장하고 있다.’
월봉서원에서 가까운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필암서원이 있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와 그의 사위 양자징을 배향한 곳, 지난봄에 찾은 적이 있는데 서원의 지붕을 헐고 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경내에 있는 전시실과 평생학습센터를 살핀 후 노령산맥 줄기인 솔재를 넘어 고창 선운사로 접어들었다. 선운사에 도착하니 오후 네 시, 전망 좋은 숙소에 여장을 풀고 맑은 공기 숨 쉬며 느긋한 휴식을 취하였다.
이튿날 도착하기로 한 일행 중 한 명이 서울에서 이른 아침에 버스 편으로 출발하였다. 10시에 선운사 오는 길목의 흥덕정류소에 내린다기에 먼저 온 일행들이 환영피켓을 들고 마중을 나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문화탐방 길, 선운사 가는 길목에 있는 인촌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을 찾기로 하였다.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 있는 인촌생가는 건국 초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삼양사를 창립한 수당 김연수가 태어난 집터,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된 정운천(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 씨도 이집에서 태어났다니 명당(?)이라 할 만하다.
이곳에서 가까운 아산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미당 서정주는 이 땅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옛 초등학교 자리를 문학관으로 개조하여 그의 시와 사진들을 전시한 시문학관과 그 옆에 작은 초가의 생가가 있다. 생가의 벽에 그의 애송시, 선운사 동구와 국화 옆에서가 새겨져 있고 문학관에는 푸르른 날과 동천(冬天)을 비롯한 수많은 시와 사진, 그를 칭송하는 문인들의 헌사가 가득하다. 어떤 이는 서양음악의 거장 모차르트와 한국어의 귀재 서정주가 쌍벽을 이룬다고 적기도.
점심 후 뒤늦게 도착한 일행들과 함께 선운사 경내에 들어섰다. 봄에는 동백과 산벗꽃, 여름에는 복분자, 가을에는 꽃무릇과 단풍, 겨울에는 포근한 백설 등 언제 찾아도 푸근하고 아늑한 정취가 가득한 산사로 고향이 가까워 더 정겹다. 대웅전 뒤편 동백군락지의 푸른 숲이 울창하고 대웅전 앞 만세루의 다향이 그윽하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도솔암까지의 산책로가 일품이고 천년신비를 간직한 장사송과 수직 단애의 마애불이 먼 길 나선 길손을 반긴다.
동백 숲이 울창한 선운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저녁식사는 복분자 막걸리를 곁들인 갈치조림정식, 선운사 주변에 풍천장어음식점이 널려 있는데 부산에서 온 일행들이 낮에 장어정식을 들었다기에 택한 메뉴다.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에 담은 막걸리 풍경을 떠올리며.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일행들에게 내가 쓴 책, 인생은 아름다워(Ⅶ)과 아내가 모은 유머집 ‘유머는 아름다워’를 한 권씩 전하였다. 재회를 기약하며 떠나는 발걸음이여, 평안하시라.
* 서울에서 오는 죤이 버스에서 보내온 카톡이다.
‘이른 아침 고속버스를 타고 고창 선운사로 향한다. 길동무들이 보잔다. 앤디 행지 샘 마이클 올리브 비비안 스텔라 그리고 나, 번역하면 캐나다 이민자 대학교수 의사 또 대학교수 간호사와 선생님 또 간호사 그리고 안전지킴이 나 죤.
인도차이나 반도의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길을 30일 돌고 미얀마 길은 10일 걸었다. 남인도와 스리랑카도 30여일 함께 했다 그런데 누구와 어느 길을 걸었는지 분별이 안 된다. 나이 탓일까 너무 재미있어서일까 도통 모르겠다. 만나면 물어보자‘
승용차로 선운사 입구에 도착한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다
첫댓글 봄에 직원연수차 고창 선운사에 간 일이 있었는데...여름이라 그랬는지 초록빛이 참 예뻤던 걸로 기억해요.
사계절이 뚜렷한 선운사의 절경에 잠기셨을 벗님들이 부럽습니다. ㅋ참 이상하지요? 좋은 글을 대하면 내가 쓴 글도 아님서 어쩜 내 맘만 같은건지...그래서 저도 한 마디!
^^그리움이 깊어가는 가을, 그리운 날엔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