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글셋방 기도 / 최아란
동인지가 나왔다. 초대글 자리가 비었다. 책머리 인사말 다음에 오는, 그러니까 가장 첫 작품. 늘 그 자리를 채워주던 작가의 병환, 스승이자 선배 작가이자 현역 동료였던 그는 요즘 글을 쓰지 않는다. 동인 운영진은 초대글 자리를 비워둔 채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마치 전설 같은 운동선수의 영구결번처럼 그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가 없어서.
쓰기는커녕 그는 아마 글을 읽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원고 마감일을 가늠할 지경이 못 된다면 차라리 날짜 세는 것에도 무심하길. 단어들을 엮어 문장을 짓지 못한다면 그 자음과 모음들이 그저 아름다운 그림으로나 보이길. 나는 숨 쉬듯 글을 쓰던, 안 쓰고는 숨 못 쉬던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런 것도 기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얼마 전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나 태어날 적부터 할머니였듯, 그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할아버지였다. 나는 결혼 전에 입던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새댁이었고, 수필 공부는 처음인 학생이었다. 직장까지 관두고 본격적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임신부터 하고 싶었다. 애 키우면서도 장편 쓰는 작가가 얼마나 많을 텐데 여하튼 그런 이유로 짧은 글이 편하겠다 싶었고, 습작 훈련이나 쉬지 말자 싶어 백화점 수필 강좌를 신청했다. 대학 총장님이나 회사 사장님보다도 연로한 분이 칠판 앞에 나가 섰다. 사실 누구 나이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기름진 얼굴로 호방하게 웃으며 신문에 실리길 좋아하는 이들보다 더 나지막하고 수굿하여 그렇게 느꼈을 뿐인지도.
짧은 글은 편하지 않았다. 짧아서 마음이 더 급했다. 긴 서사를 통해 몰입으로 이끌고 갈 시간이 없었다. 미지근한 은유, 천천히 묻고 찾는 복선들로는 원고지 열댓 장 안에 승부를 낼 수 없었다. 이런 조바심을 가르쳐준 이는 그 수굿해 보이던 영감님이다. 이렇게나 작품성에 대한 커트라인이 높은 열혈 전사인 줄 모르고.
그로부터 십여 년 후 아직까지 머리 뜯어가며 수필을 쓰게 만들어놓고 그는 오십 걸음도 겆지 못한 채 칩거 중이다. 중병 진료를 거부하고 원고 청탁을 사양하고 문안 오는 것도 마다하면서 하루 오십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 단 다섯 글자라도 쓸 수 있었다면 제자이자 후배 작가가 보낸 수필집에 잘 받았노라, 애쓰셨노라 문자라도 보냈을 것이다.
열혈 전사에게도 삶의 주인은 결국 따로 있는 모양이다. 모든 생의 주인은 바로 죽음. 우리는 기약 없는 사글세 신세라서 언제 주인이 나타나 제 것을 돌려달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살면서 애정을 쏟는 모든 것엔 벌건 차압 딱지가 붙어 있다. 질환이며 노화라는 점잖은 집행자가 오든, 사건 사고라는 불한당이 오든 그것은 구둣발로 내 집에 들어와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달라 한다. 그 차압 딱지가 눈에 익어 유념치 못한 날들, 기고만장하여 보이지 않던 날들, 악쓰며 찢어발기던 날들이 사람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간 뒤다. 서러운 사글세 처지들끼리 무엇을 어떻게 위로할 수 없어 한숨 쉬며 손톱만 물어뜯는다. 그렇게 내 손톱이 아프면 건넛집 구두 자국 찍힌 이부자리는 또 잊히는 법이다.
그가 다시 강단에 서기를 기다리며 글 여러 편을 더 쓴대도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기적처럼 입맛이 돌고 검은 머리가 돋아도 주위에서는 더 큰 무참함으로 그의 곁을 지킬 것이다. 그가 다시 왕복 세 시간이 걸려 강의실에 나오려는 걸 가족 모두가 말릴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나도 처음 같은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글을 쓰지 못할 바에야 글이며 책이며 그저 한가로운 풍경으로나 느껴지길 바란다던.
하지만 내 기도는 거기서 멈출 수 없다. 사글세 신세란 걸 몰라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 할매들의 치성 속에 귀하게 태어나 귀하게 자라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나는 사글세로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없다. 손에 무언가 쥘 힘 정도만 있어도, 그러니까 태어나 일 년쯤만 되어도 우리는 할매나 엄마가 차려준 돌상에서 원대한 꿈을 움켜잡는다. 그 손의 감각이 그보다 많이 남은 나라도 더 큰 기도를 하리라. 더 대차고 더 요란하게 기도하련다. 이렇게 자꾸 쓰면서, 손톱 물어뜯으면서.
내 글 상, 돌잡이 상을 차려준 유병근 선생님께 이 글을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