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89 - 가장 완벽하게 등반하다 9명이 모두 마칼루에 오른 프랑스(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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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1. 05:09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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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가장 완벽하게 등반하다
9명이 모두 마칼루에 오른 프랑스(1955년)
요약 마칼루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1954년 미국대와 뉴질랜드대의 경쟁에도 정복되지 않았던 마칼루는 1955년 프랑스대에게 정상을 허락했다. 처음에 2명, 다음날 3명, 그 다음날 4명이 모두 정상에 선, 사고 없이 일어난 가장 완벽한 등정으로 남았다.
마칼루
마칼루(8,481m)는 1955년 5월 15일 프랑스 원정대에게 정상을 허락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을 처음 오른 장 프랑코 대장을 신문기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런 얘깃거리도 가져 오지 못했습니다. 눈구덩이에 빠진 일도 없고, 눈사태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랄 모험담을 기대했던 기자들은 실망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었군."
미련없이 자리를 뜨는 기자들의 등뒤에서 프랑코는 이렇게 뇌까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왜 묻지 않는가."
프랑코의 말은 곰곰이 되씹을 값어치가 있다.
마칼루는 절대로 오르기 쉬운 산이 아니다. 마칼루에서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은, 프랑코 일행이 안나푸르나 초등에서 많은 것을 배운 까닭이다. 그들은 고산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말할 수 없이 고된 훈련을 쌓았다. 사고를 당하지 않으려고 눈물겨운 훈련을 이겨낸 등반대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신문기자 간의 간극을 프랑코는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마칼루는 초모룽마에서 남동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마칼루 Ⅱ(캉슝체) · 초모렌조 등 7,000m가 넘는 봉우리들과 거대한 바룬 빙하에 둘러싸여 있다. 마칼루에 처음 눈독을 들인 나라는 뉴질랜드이다.
초모룽마에 처음 오른 뉴질랜드 출신 힐러리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멀리 남동쪽에 솟아 있는 거대한 봉우리를 발견했을 대부터 역사는 시작된다. 힐러리가 보기에 북서쪽 능선을 따라 오르면 어렵지 않게 정상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이란 이런 것
마칼루에 도전한 프랑스 등산대는 완벽한 등산을 위해 6,000m 넘는 산을 열 군데나 오르내리며 고산 적응 훈련을 했다.
힐러리는 이듬해인 1954년 뉴질랜드 원정대를 만들어 마칼루로 떠났다. 그러나 뉴질랜드말고도 마칼루를 겨냥한 등반대는 둘이나 더 있었다. 미국과 프랑스였다.
1954년 4월 5일 미국대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윌리엄 시리 대장이 이끈 미국대는 제1 캠프(5,000m), 제2 캠프(5,500m)에 이어 4월 26일 제3 캠프를 6,400m에 세웠으나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 베이스 캠프(4,700m)로 철수했다.
거의 같은 무렵 힐러리가 뉴질랜드대를 이끌고 미국대의 베이스 캠프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그들은 미국대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것을 보자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뉴질랜드대에는 초모룽마의 영웅 힐러리말고도 그때 함께 갔던 찰스 에번스와 조지 로가 끼어 있어 대단한 강팀이었다.
뉴질랜드 원정대는 자신만만하게 도전했지만 4월 27일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한 대원이 크레바스에 떨어져 크게 다치고, 그를 구하려던 힐러리마저 갈비뼈를 다쳤다. 뉴질랜드대는 마음이 급했지만 두 주일 넘게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5월 5일 미국대가 다시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제3 캠프를 거쳐 산등성이에 혹처럼 튀어나온 바위와 맞닥뜨렸다. 이 바위는 높이가 한 600m쯤 되어 보였다. 미국대는 중간까지 올랐으나 나쁜 날씨에다 눈이 자꾸 흘러내려 그 이상은 오를 수가 없었다.
미국대는 어쩔 수 없이 6,700m에서 일단 굴을 파고 제4 캠프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미국대는 그 바위벽을 끝내 타넘지 못한 채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뉴질랜드대가 또 다른 어려움에 부딪혔다. 지난번에 다친 힐러리의 갈비뼈 상처가 갑자기 덧나 서둘러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5월 19일, 끈질긴 미국대의 세 번째 도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나쁜 날씨 속에서도 용케 7,500m 지점에까지 이르러 캠프를 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미국대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기서 또다시 험한 눈보라를 만나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프랑스 원정대가 마칼루를 찾은 때는 미국과 뉴질랜드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간 그 해 가을이었다.
프랑코 대장은 준비 단계로 9월 중순부터 10월 초순가지 6,000m짜리 봉우리를 여덟 군데나 올랐다. 10월 23일에는 마칼루 Ⅱ봉(7,660m)에, 10월 30일에는 초모렌조(7,797m)에도 올랐다. 초모렌조에서 관찰한 마칼루 북쪽 벽에 관한 자료는 뒷날 그들이 마칼루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도 프랑스대는 마칼루 7,800m 지점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1955년 4월 프랑코는 지난해의 원정대를 더 보강하여 다시 마칼루에 도전했다. 석 주일 동안 둘레의 높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컨디션을 조절한 뒤 5월 5일부터 시작한 등반은, 이틀 만에 제3 캠프를 세우리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진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비탈의 기울기가 심한 데다 얼음마저 덮여 미끄러운 바위 벽을 대원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번갈아 달라붙어 고정 로프를 설치했다.
해발 5,000m가 넘으면 공기 속 산소 양이 평지의 절반밖에 안된다. 7,000m를 넘으면 산소가 40%를 밑돌아 사람의 신체가 자연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에 치명적이라는 것이 의학계의 정설이다. 프랑코 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7,000m가 넘는 곳에서는 절대로 머무르지 말고 반드시 캠프로 내려와 푹 쉬도록 했다. 덕분에 대원들은 지치지 않고 한 걸음씩 정상에 다가갈 수 있었다.
5월 8일에 제4 캠프, 5월 9일에 제5 캠프가 세워졌다. 프랑코는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년 전 초모렌조에서 마칼루 북벽을 관찰한 자료에 따라 북벽 7,800m 지점에 마지막 캠프를 세웠다.
5월 15일 장 쿠지와 리오넬 테레이가 1차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8,000m를 돌파하여 북동쪽 산등성이를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조차 없었다. 너무나 좋은 날씨의 덕을 톡톡히 보며 그들은 정오에 정상에 이르렀다. 그곳은 연필 끝처럼 뾰족해 한 팔로 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제2차 공격대원 3명도 정상을 밟았다. 셋째 날에는 나머지 4명이 팀을 둘로 나누어 또다시 정상에 섰다. 그리하여 원정에 참가한 모든 대원(9명)이 다 꼭대기에 오르는 희한한 기록이 세워졌다. 사고가 없어 기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 마칼루 첫 등정은, 이처럼 히말라야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82년 / 허영호 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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