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1
3월13일[사순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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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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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NzQggzs8rE
[광주대교구 김명철 요셉(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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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도 성장과 쇄신이 필요합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정말이지 헛되고 부질없는 것,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청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또 전혀 의미 없는 노력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죽기 살기로 청하는 과정에서 응답없음으로 인해 절망하고 탄식하던 중에, 아, 내 청원이 그릇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 이후 다가온 작은 배움 하나는 정말 간절히 청해야 하는 바는 이 세상 그 너머의 것, 보다 이타적인 것, 더 보편적인 것, 더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폭이 넓어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실뿐더러, 그 외의 작은 청들도 덤으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자주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간절히 바치고 있는 기도의 질과 수준은 어떠합니까? 물론 절박한 현실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청도 아버지이신 주님께 열정적으로 청해야 마땅합니다. 나와 가족,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과 안녕, 평화와 성공도 열심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오로지 그 방향으로 쏠리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 안에 함몰되어 있다면 많이 부족한 기도입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상태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기도에도 성장과 쇄신이 필요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의연히 견뎌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모습, 정말이지 성숙한 기도 생활입니다.
희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시선이 늘 주님을 향해 있고, 부단히 절망 속에서도 희망한다면, 기도 잘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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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gLFASqr6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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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웃에게 해주는 것이 주님께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청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받고 있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남'은 이웃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주님께 청하라고 하는 것이니 주님도 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해 주시기를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웃도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때리고 와서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에게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형제에게 그것을 주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친구들을 위해 빵 세 덩어리를 청하는 비유에서 만약 친구들이 없이 그냥 빵만 청했다면, 그 친구는 밤에 일어나서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이기적인 거인'은 사랑과 자비를 통해 결국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거인은 거대한 성을 지닌 자랑스러운 거인으로, 자신의 정원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정원은 아름답고 넓었으며, 봄이 오면 꽃들이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지며, 새들이 지저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인은 자기를 위해서만 그 공간을 차지하며, 어린아이들이 놀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거인의 정원을 찾고 싶었지만, 그는 그들을 쫓아내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정원은 황폐해지고 봄의 기운도 멀어졌습니다. 나무들은 시들고 꽃들은 지고, 날씨는 추워지며, 정원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휩싸였습니다. 거인은 점차 외로움과 불행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인은 한 아이가 그 정원 안에서 뛰어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에게 마음이 풀리면서, 거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 아이에게 정원을 열어주기로 결심하고, 모든 아이들을 다시 초대합니다.
그 순간, 정원은 봄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꽃들이 다시 피고 나무들이 푸르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거인은 이제 자신이 이웃에게 나누지 않았던 사랑과 자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은혜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거인은 더 이상 그 아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거인이 나이가 들었을 때 겨울임에도 흰 꽃이 핀 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곳으로 갔을 때 그때의 작은 아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거인은 그 아이가 봄이 오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에요. 이제 내 정원으로 함께 가요 내 정원은 천국이랍니다.” 다음날 아이들이 정원에 와서 늙은 거인을 보았어요. 하얀 꽃이 가득 핀 나무 밑에 누어 깨지 않는 깊은 잠이 든 모습을 말이에요.
성당에 저에게 찾아오시는 분 중에서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최대한 들어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들 특징 대부분은 신자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신자들을 막 대하면 자신이 이야기하고 안수도 받으려는 사제가 자신들에게 그것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얻고 싶은 만큼 잘해야 합니다. 저는 ‘탕자의 비유’에서 돈을 다 탕진하고 온 둘째에게는 황소를 잡아주고, 자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한 첫째에게는 염소 한 마리 잡아주지 않은 것이 약간은 의아했습니다.
오늘 복음대로라면 형은 동생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도 몰라주고 동생을 비난한 형에게, 그가 비록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염소를 잡아줄 마음이 생길까요? 우리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기 전에 내가 형제들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는지, 무엇을 주고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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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년간 있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전쟁의 끝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다쳤습니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경제는 망가지고, 재건이라는 명목으로 외국의 기업들이 들어올 겁니다. 전쟁에 큰 비용을 제공했던 미국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이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참된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한국도 지난 3개월간 큰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몸은 멀리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였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결의했고,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결의했고, 대통령은 탄핵당하였습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도 비상계엄의 진통을 넘어서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는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틀리면 빠른 속도로 갈지라도 목적지와는 멀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향’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청한다면, 타인의 재물과 명예를 억지로 빼앗으려고 한다면, 국가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국민을 도탄에 빠트릴 수밖에 없는 문을 열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시지 않을 겁니다. 설령 목적을 이룬 것처럼 보일지라도 끝은 늘 비극이 될 겁니다. 지향도 중요하지만 ‘인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르려야 할 것들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재물과 장수를 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재물과 장수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이 백성이 바라던 자비를 베푸시고 천상 은혜를 내리시어 청해야 할 것을 올바로 알고 또한 청한 것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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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는 아버지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빵을 청하면 거저 빵을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청한 것을 무조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좋은 것을 우리가 바라지 않거나 피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실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제 발목이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전날 발목을 삐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병원에 간 저는 간단한 약 처방만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제 발목에 깁스를 하고, 저에게 이틀에 한 번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으라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더 좋은 처방을 준 의사 선생님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덕분에 저는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만성 염증을 관리하려면 발목 건강에 가장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비록 십자가 죽음을 피하시고 싶었을지라도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믿음의 표본을 따라, 청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일상에서 키워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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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7-12: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으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리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으로 설명하신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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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는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이고,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는, “아버지께서 ‘이미’ 자물쇠를 풀어 놓으신 문을 열고 들어가라.”입니다.
‘기도’는 안 주시는 하느님께 달라고 떼를 쓰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것과 내가 바라는 그것이 일치하는 사람은, 또 아버지께서 정하신 ‘그 때’와 내가 생각하는 ‘그 때’가 일치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또 언제가 가장 좋은 때인지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모를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고, 그것이 무엇이고, 그때가 언제인지를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면서, 겸손하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되,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기도하는 동안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평화와 힘과 용기’를 얻는 체험을 하는 신앙인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평화와 힘과 용기를 얻는 체험을 한다면, 그것은 소원이 이루어진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얻은 것이고, 그 힘을 통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또 주님께서 언제 주시든지 간에, 주시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수많은 신앙인들의 생생한 증언입니다.>
3)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와 같은 계명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은,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그대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당신이 먼저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인간들을 사랑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이지만, 실천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너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네가 먼저’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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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 문을 두드리고 찾고 청합니다>
마태오 7,7-12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당신께 문을 두드리고 찾고 청합니다>
당신께
문을 두드립니다
당신께서
여실 수 있는 문을
당신께서
여시고픈 문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홀로가 아니라 함께의
밀침이 아니라 스밈의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당신께
찾습니다
당신께서
지니실 수 있는 것을
당신께서
지니고픈 것을
가짐이 아니라 베풂을
가름이 아니라 이음을
버림이 아니라 품음을
누름이 아니라 세움을
당신께
청합니다
당신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픈 것을
무응답이 아니라 믿음을
무기력이 아니라 희망을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을
무모함이 아니라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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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류충희 대철 베드로 신부님]
<선하신 하느님>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말씀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모두 같은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청하는 사람의 자세와 청원 내용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이나 청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항상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빵을 달라는 아들에게 돌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도 없습니다. 세상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야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보호하시는 하느님께서 참새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6절-7젛)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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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시편의 기도자는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습니다.”(시편 138장 [137장] 3절)라고 고백하고, 오늘 독서와 복음도 청원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따라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청원을 아룁니다. 그렇게 우리가 청원을 드리면 하느님께서 항상 들어주셨나요?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의 청원을 들어주신 기억보다, 들어주시지 않으셨던 기억이 더 많지 않은가요?
청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체험으로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 신앙의 자존감을 우리 스스로 낮추게 됩니다.
‘내가 아직 부족한 신앙인이라서’ 또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또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돌을 달라고, 뱀을 달라고 청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과 뱀을 주겠습니까? 우리는 돌과 뱀이 아닌 빵과 생선을 주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한다고 무조건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돌을 달라고 청하여도 빵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였던가요? 내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과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도 함께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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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가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90년대 이전의 생활상이 담긴 영상을 보게 됩니다. 학교 앞에서 팔던 불량식품을 먹고 싶어서 손수레 근처에 모여 있는 아이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있는 모습, 동네잔치와 같은 가을 운동회, 동네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도 보입니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산과 계곡에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해 먹는 등산객, 아무렇지도 않게 무단횡단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직접 살았던 저로서는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는데, 요즘의 어린아이들은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비칠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고 또 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는 성장합니다. 과거의 불편함을 극복하면서 살기 좋은 곳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성장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과거의 나보다 못한 모습, 그냥 불편함을 간직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후회를 반복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성장하듯, 우리도 성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세상 기준으로의 성장만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돈, 명예, 세상의 지위 등의 성장만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잊지 말라고 하시지요.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이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사랑의 삶, 하느님과 일치의 삶, 평화의 삶을 사는 우리의 성장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뜻에 철저하게 맞추어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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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한 줄을 꼽으라면 이것일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위의 말씀처럼 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이런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번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 적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얻고자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우리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줄 세상 것들을 청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삶이 없다면, 우리의 하루가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 주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도 남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마음과 행동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른 이를 도와주거나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내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나보다 누군가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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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격언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 내 마음대로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오히려 그렇게 된 적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만족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중간 만난 것 안에 행복과 위로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고 합니다.
우리 목적지가 ‘행복’이라면…. 설령 잘못 탔더라도 그대의 기차는 결국 그곳에 데려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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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오 7,7)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받은 그 열쇠를 교회를 통하여 우리도 받았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하늘의 문은 열려 있지만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이미 다 풀었지만 우리는 풀지 못합니다. 여전히 매여 있습니다. 우리가 두드리는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옆구리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두드리는 하늘의 문은 주님께서 열어 주셨고,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우리 마음의 문은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하늘의 문을 여시기 위하여 주님은 당신의 옆구리를 여셨고, 이 땅의 문을 열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욕심을 청하면 주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은 청하기도 전에 아시는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 주셨지만 우리가 받았음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찾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과 세상이 선물이 되지만, 우리의 뜻을 먼저 찾으면, 주어진 사람과 세상이 곁에 있어도 얻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오늘입니다. 하늘의 삶은 내일입니다. 오늘의 삶은 우리의 몫이지만 내일의 삶은 주님의 몫입니다. 매여 있는 우리 마음을 오늘 풀어야 주님의 날인 내일도 잘 풀립니다.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텔. 4.17) 축복받은 이 땅에서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열기만 하면 청하는 것과 찾는 것을 모두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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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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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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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히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시편 138,4)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입니다.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기도와 회개의 때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지 죽으면 기도도 못합니다. 기도하라고, 회개하라고, 사랑하라고 연장되는 날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확증편향,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무엇보다 길을, 희망을, 빛을 잃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사순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성규 49,3-4)
참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할 때 겸손과 더불어 본연의 참나를 회복합니다. 하느님 없으면 참된 겸손도 불가능합니다. 사람이라면 종파에 관계없이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도올의 시국선언도 하나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서두와 끝부분만 인용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위기가 덮여 있습니다. 나는 이땅을 사랑하고, 이 나라의 문화와 역사, 도덕과 장구한 질서의 가치를 존중하는 한 사람으로서 심중한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피 끓는 호소가 남녀노소, 이념과 관계없이 민족의 양심을 깨우기를, 우리의 시인 한용운의 시 한 구절을 읽습니다. ‘나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말하고 노는 때에 더 울게 됩니다. 님 있는 여러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여 좋은 말을 합니다마는, 나는 그들의 위로하는 말을 조소로 듣습니다. 그때는 울음을 삼켜서 눈물을 속으로, 창자를 향하여 흘립니다.’”
저 또한 재작년 2023년 8.15 광복절부터 기상후 만세칠창으로 시작하고 만세칠창후 잠자리에 듭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이어 자신의 신원을 새로이 확인합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 ‘사랑의 전사’이다.”
옛 현자의 충고도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수없이 많은 용서를 받았다. 그러니 타인에게도 관대하라.”<다산>
“사람이란 어리석더라도 남을 꾸짖는 데는 밝고, 총명하더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기 마련이다.”<송명신언행록>
타인은 물론 자신을 용서하며 자신에게도 관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기도와 믿음, 삶에 대한 참 귀하고 필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결코 좌절이나 절망함이 없이 칠전팔기, 백절불굴의 투지의 자세로 항구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요 믿음이요 삶의 자세입니다. 끝까지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부단히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이래야 비로소 영적 탄력좋은 삶입니다.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지 않고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고 살다보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바에 이르게 되고 그대로 응답됩니다. 우리 방식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참 좋은 최상, 최선의 방식대로 응답됩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삶의 뒤안길을 보면 저절로 응답된 삶이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분은 초월자 철학의 차가운 하느님이 아니라 너그럽고 인자하신, 다정하고 따뜻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대한 한없는 신뢰와 사랑을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행복의 고백기도입니다. 몰라서 불만에 불행이지 알면 알수록 감사요 행복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감사와 행복의 자각에서 저절로 황금률의 지혜와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참사람의 기초가 되는,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과 삶의 모범이 제1독서의 에스텔 왕후입니다. 언젠가 갑자가 이런 기도가 아니라 평소 기도로 축적된 내공의 믿음의 삶이 기도로 표출된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요 삶입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형성하고 이런 믿음과 삶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우리의 영원한 정주처이자 피신처이자 안식처는 주님뿐이요, 이런 주님께 바치는 에스텔의 기도가 참 절박합니다. 흡사 인격화된 “한반도의 대한민국”이 드리는 기도같습니다. 위기중에 있는 작금의 이 나라의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필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핵무기를 능가 압도하는 기도의 힘, 믿음의 힘, 미사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미친 광신도狂信徒가 아닌 참 빛의 광신도光信徒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께 피신처를 둔 백절불굴의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 살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 주소서.”(시편51;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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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에스델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만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청하라고 하시며 그러면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청하지 않으면 주지 않으시는가?
인간사의 경우, 말하지 않으면 상대가 알지 못하니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찾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겠지요.
그런데 하느님도 그러시느냐 이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아시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샅샅이 다 아시잖습니까?
그리고 아실 뿐 아니라 주시잖습니까? 그런데 왜 청해야 하고 찾아야 하고 두드려야 합니까?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신의 표시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가 아니라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셔도 받지 않겠지요. 원하지 않으면 청하지도 찾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하느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도무지 받으려 하지 않겠지요.
아무런 원의가 없는 사람이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원의가 없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난하지 않고 배부른 사람은 밥을 주십사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가난하고 배가 고픈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파도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으면 하느님께 청하지 않고, 인간에게 얻을 수 있는 사람도 하느님께 청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은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하느님밖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고, 하느님밖에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며, ㅔ나의 필요를 잘 아시고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늘 에스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이 유일한 분이신가?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인가? 나는 에스델처럼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믿는가? 나의 필요를 다 아실 뿐 아니라 주시는 좋은 분이라고 나는 믿는가?
그런데 만일 이런 믿음이 내게 부족하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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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자!>
오늘 복음(마태 7,7-12)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라는 말씀과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황금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았습니다.
누구에게 청하고, 누구를 찾고,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하느님께 청하고, 하느님을 찾고,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결코 가져갈 수 없는 것들, 곧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온갖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들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쓰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진지하고 그리고 끈질지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적당히 그리고 필요할 때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찾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 찾는 것을 얻게 해 주시는 분,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그 시간(때)도 하느님께만 절대적으로 유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청할 뿐이고, 찾을 뿐이고, 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렇게 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청하고 있고, 무엇을 찾고 있고,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를 한번 성찰해 보고, 정말로 이제와 영원히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황금률)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에스 4,17/ 오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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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마태 7, 8)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노력과
정성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노력과 정성이
있기에 우리는
결코 겉돌지
않습니다.
이렇듯
친근한 아버지
하느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장 좋으신
사랑은
누구든지
아버지
하느님을
지향하게
만듭니다.
아버지
하느님이 계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닮아 갑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막연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누구든지
청하면 주시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립니다.
기도로 엮어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교감(交感)은
기도로
깊어집니다.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드러내며
이 관계는
진심어린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됩니다.
기도의 사순이며
마음의 사순이며
만남의 사순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청하는 기도로
하루를 엽니다.
무엇이나
나눌 수 있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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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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