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다가가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대중탕의 열탕과 냉탕과 같다. 곤룡포 입고 용상에 앉아 있던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서 밀려난 어린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 청령포 유폐지에서 사약을 받았고 광해군은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쫓겨 가서 자연사했다. 하물며 고관대작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신하들이야 말할 나위 없다. 이런 면에서는 무지렁이들은 유배를 걱정하지 않아 다행이라 할까.
조선시대 유배는 오늘날 감옥의 징역형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나 흑산도같이 절해고도 위리안치 된 경우도 있긴 했으나 적소에서 생활은 자유로운 편이다. 조선후기 김려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가 그 고을 유력인사 자제들을 가르쳤고 관기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이후 창원 진동으로 이배 어민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정약전의 ‘자산어보’보다 앞선 ‘우해이어보’를 남겼다.
김려보다 앞서 부령으로 유배 간 이광사는 현지까지 몰려온 제자들을 가르친 죄목이 추가되어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되어 그곳서 나오지 못했다. 김만중은 남해 작은 섬 노도에 유배되어 국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남기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추사는 제주도 대정 유배 적소에서 인고로 보낸 세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제자 이상적은 스승을 뵈러 넘실거리는 파도를 헤쳐 갔다.
앞에서 유배 현장을 꺼냄은 다산 정약용을 다시 새겨보기 위함이다. 불과 200년 전 인물 다산에 대한 정보는 흔하고 흔하다. 조선 후기 천주고 박해 신유사옥 때 셋째 형 약종은 순교하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이배 그곳서 돌아갔다. 아우 다산은 처음엔 1801년 봄 포항 장기로 유배 가서 그해 말 전남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곳에서 18년간 은둔하다 1818년 풀려났다.
다산은 경상우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따라 소년기는 진주에서도 잠시 보냈다. 젊은 날 조선의 문예 부흥기였던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측근 관료였다. 잘 알려진 대로 기하학적 원리로 거중기를 발명해 수원성을 축성하였고 능행길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놓는 현장에서 인문과 자연을 융합시킨 소질을 발휘했다. 이후 금정찰방, 곡산부사, 경기도 암행어사를 역임하고 유배를 떠났다.
상처 입은 조갯살이 진주를 만들 듯이 다산에겐 유배의 형벌이 더 큰 성숙을 가져왔다. 흔히 1표 2서로 통하는 방대한 저술은 그에게 유배가 아니었다면 남길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이었다. 국가의 기본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경세유표’였고, 생명을 중시해 억울한 옥살이가 없도록 한 인간관계 저술이 ‘흠흠신서’고,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은 민생의 고통을 헤아리라는 웅변이 ‘목민심서’다.
다산 연구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석무가 대가다. 그는 현재 서울 소재 대학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만 성장지와 주요 활동 무대가 다산 유배지인 강진과 가까운 광주와 무안이었다.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고산서원 원장과 다산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산과 관련된 그의 몇몇 저술은 진보 사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즈음서 책을 한 권 소개하련다. 정민의 ‘다산의 재발견’이다. 저술로나 신문지면 칼럼에서 널리 알려진 정민이라는 중견 국문학자가 있다. 그는 한문 원전을 해독하는 능력이 탁월해 주로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남긴 서책을 쉬운 우리말로 풀어내고 있다. 한때 연암 박지원의 저술을 풀어내다가 이제 다산으로 옮겨왔다. 아마 다산 연구에서 박석무 다음 가는 학자로 꼽아도 될 듯하다.
정민은 다산이 남긴 편지와 한시를 수집 열람해 우리말로 풀어냈다. 유배지에서 18년간 보내면서 아들과 오간 편지가 여러 통이었다. 다산초당과 그 이전 거처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백련암 혜장은 물론 초의와 은봉과 같은 스님들과도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들과 나눈 방대한 편지들을 수집, 대상과 주제별로 분류해 독자들이 웅숭깊고 높아 보인 다산에 다가다가도록 해주었다. 1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