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완 시인의 책 소개입니다.
김완
무수적
-옴마의 입말 2
무수(無數)한 세월 헛살았다
헤아릴 수 없이 서러운
새벽이나 한낮이나
밭에 나가 호맹이질을 해댔으니
동지섣달에도 장터에 나가
종일 쪼그려 앉아 있었으니
무르팍도 허리도 어깨도 팔꿈치도
성할 리가 있것냐
너는 나맹키로 고생고생 살지 마라
구수하고 달달한 무수적맹키로
납작 엎드려서
무수(撫綏)한 세월 둥굴넓적하게 살아라
-「무수적」 전문, 유순예 시집 『당신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 중에서
1연 11행의 짧은 시입니다. 어머니의 입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시입니다. 무수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사전에도 나오지 않아 시인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전라북도 진안에서는 무(무우)로 만든 전을 무수적이라고 한답니다. 해설이 필요 없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하신 말씀(=옴마의 입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시입니다. 소박하지만 구체적인 진실이 담긴 감동이 큰 시입니다. 진실은 늘 구체적이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이 시에서는 중요한 동음이어(同音異語)인 무수가 세 번 나옵니다. 제목의 무수는 무의 전라도 사투리입니다, 첫 행의 무수(無數)는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고생고생하고 살았다는 어머니의 입말입니다. 마지막 행의 무수(撫綏)는 어루만질 ‘무’에 편안할 ‘수’입니다. 나처럼 살지 말고 자식들은 어머님이 평소 즐겨 먹었던 무수적맹키로 구수하고 달달한 삶을 살라는, 대접받으면서 편안한 세월을 살라는 어머니의 염원입니다. 시인 아라공은 「미래의 노래」에서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머니의 고생고생한 삶은 그 과실을 당대의 당신이 누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과실을 자식들에게 나누어줘 더 나은 삶을 살라는 어머니의 희망이며 의지입니다.
유순예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당신이 그곳에 계시는 동안』은 4부 61편의 시가 담겨 있습니다. 1부와 2부의 시들은 부모님에 대한 사모(思慕)의 노래입니다. 바람을 새장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부모님의 큰 사랑을 당할 수는 없지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정을 노래한 다음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피처럼 검붉게 살다 가신
당신, 당신이 사주시던
피순댓국
피처럼 검붉게 살고 있는
당신의 부인이 사주시네요
땡볕 놉 얻어서
농사지은 푸새들 내다 판
피, 피 같은 돈으로
핏줄에게 피순댓국 먹이시네요
고추 따야 한다
배추 심어야 한다
눈만 뜨면 싸우다가도
한쪽이 몸져누우면 애걸복걸하시던
부부, 부부 인연 끊은 지 십여 년
피처럼 검붉게 살다 가신
당신, 당신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세상에서
지그시 내려다보시고
피처럼 검붉게 살고 있는
당신의 부인은 먹어도 허기지는 세상에서
넌지시 올려다보시는
핏빛 그리움 한 대접
-「피순댓국」 전문
5연 30행의 시입니다. 죽음은 보통 아무리 근사한 표현을 가져와도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유순예 시인의 시에서는 그렇지 않고 휠씬 마음에 와닿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먹는 ‘피순댓국’으로 다가옵니다. 10여 년 전 돌아가신 농사 짓던 아버지는 ‘피순댓국’을 좋아하셨나 봅니다. 피처럼 검붉게 살다 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피, 피 같은 돈으로/핏줄에게’, ‘피순댓국’을 사주셨나 봅니다. 이제는 이승에 남아 아버지와 똑같이 피처럼 검붉게 살고 있는 어머니가 그 피순댓국을 사줍니다. ‘피순댓국’을 먹으면서 두 분을 추억하는 시입니다. 아! ‘핏빛 그리움 한 대접’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시를 말할 때 흔히 인용하는 말이 思無邪(사무사)입니다,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시경(詩經) 시(詩) 삼백여 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생각함에 사악함,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란 말이지요.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 않습니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시는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시인의 체험이 녹아들어야 감동이 있습니다.
“검지를 피하는 똥은 중지로/끄집어내고 또 끄집어낸다/피피피, 피 나지 않게 조심조심/어르신 대장에서 쩔쩔매던/똥, 똥 덩어리들 줄줄이 나오신다/관장약으로도 풀어내지 못한/늙고 병든 이의 근심덩어리들!/기저귀에 차곡차곡 누우신다//니들도 병상에 누워 있어 봐라!‘-「피피피, 핑거 에네마」 부분 중에서.
삶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말해야 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 똥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늙고 병들어 요양병원에서 요양보호사의 보살핌이 없으면 안되는 사람들의 ’똥, 가장 큰 근심 덩이‘를 해결해주는 일이 ’핑거 에네마‘입니다. 그 외 「애기 낳은 것보다 더 힘든 것」, 「그녀의 새해 첫 선물」, 제 똥을 주무르는 치매 환자 이야기인 「튀밥」 등. 의료현장에서 건져 올린 정직하고 구체적인 노동 시입니다. 진실은 구체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아픔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는 시집입니다. 죽은 자가 산자를 더러는 산자가 죽은자를 위로해주는 시. 대설주의보 내린 남녘에서 똥보다 못한 내란수괴와 그 잔당들이 줄줄이 수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며 시인의 시들을 재미있게 더러는 가슴 먹먹하게 읽었습니다. 강호제현의 일독을 권합니다.
시인 유순예: 유순예 시인은 전라북도 진안고원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의 지게와 쟁기, 어머니의 호미에서 시론을 배웠다. 2007년 『시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속삭거려도 다 알아』 『호박꽃 엄마』 『나비, 다녀가시다』 등이 있다. 본연으로 돌아간 부모님이 온몸으로 시를 쓰던 전답에다 시 농사를 지으며 평생학습프로그램 「끼적끼적 시작(詩作)」 학습자들과 어우렁더우렁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