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0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은 "I am the bread of life;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가 최고 의회에서 긴 설교를 끝내자,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격분하여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 돌로 쳐 죽인다. 스테파노는 순교하면서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죄를 묻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게 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구원의 양식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열매 하나를 먹는 것은 세상을 먹는 것이다. 그 씨앗을 먹고, 땅에 묻히는 그 죽음을 먹고 열매를 키워 준 흙을 먹고, 바람을 먹고, 태양을 먹고, 비를 먹고, 나무를 먹고, 농부의 땀을 먹고, 어머니의 손길을 먹고 그 열매의 역사를 먹는다. ☆☆☆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부심을 갖고 대답합니다. 만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사막을 떠돌 때, 하늘이 내려 준 음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그 ‘만나’라고 하십니다. 기적의 양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의 자부심을 건너뛰는 말씀입니다. ☆☆☆
사막에서 가장 강한 짐승은 낙타입니다. 다른 동물은 강렬한 태양 아래서 맥을 못 추지만 낙타는 견디어 냅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많은 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느 동물과 비슷한 양의 물입니다.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내부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기억합니다. 그 기억이 희망이 되어 사막의 뜨거움을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가 성하면 영혼도 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는 육체만 건강하면 영혼은 자동적으로 건강해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표어를 너무 많이 들어 온 탓입니다. 이 외침의 본래 의미는 육체와 함께 정신(영혼)도 건전해지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 - 전진 신부-
몇 년 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고, 다시금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꼴입니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7000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현재 아프리카 전 인구의 36퍼센트가 굶주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금강 곰나루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왔습니다. 전국각지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 그리고 교우들 포함해서 한 3,000여명이 함께 했었지요. 하지만 기쁨의 미사가 되어야 하건만, 마음은 그렇게 좋지가 않았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음을 직접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공사가 기득권에서는 4대강을 살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대강 살리기가 아니라,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더욱 더 살리기 위한 사업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시급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정말로 이 땅의 소외받고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문제의 해결보다는 눈에 보이는 업적 위주의 사업만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솔직히 걱정보다도 겁이 납니다. 지금의 이런 모습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일까? 하느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이 땅을 엉망진창으로 인간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에 겁이 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한 번 다녀오려면 긴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간 뒤에는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넙니다. 그리고는 4~50분을 걸어가야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날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강에 다리가 생겼고, 도로가 생겨서 편하고 쉽게 시골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편하게 갈 수 있으니까 지금이 훨씬 좋을까요? 좋은 면도 있지만 그리운 때는 배를 타고 힘들게 걸어갔던 그 시절입니다. 편한 것이 그리고 화려한 것이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불편함이 그리고 꾸며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우리를 더 만족시킬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가득 넘쳐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편한 데로 자기 뜻 데로만 하려는 이기심과 욕심 안에서 주님의 자리는 사라지며 동시에 우리의 행복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아버지 하느님만이 우리의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그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함이고,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창의력이다(찰스 밍거스).
하늘에서 내려온 빵 -오민환-
예수님께서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시는데, 유다인들은 계속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 -전삼용신부-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우게 되어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세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짧은 묵상>> 다른 물고기와는 달리 상어는 피의 냄새를 수km 밖에서도 맡는다고 합니다. 물론 하이에나의 코는 썩는 고기냄새를 누구보다 더 잘 맡습니다. 또 독수리의 눈보다 더 날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자신들의 생존 본능에 의해 먹이를 찾거나 혹은 천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각자 필요한 부분을 진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 바라는 대로 진화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줍니다. 이것은 동물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천사의 두 본능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본능과 영적인 본능입니다. 두 부분 모두 자신의 본능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개인 안에서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라고 할 때 그 사랑이 동물적인 혹은 육체적인 사랑일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사랑일 수 있습니다. “나는 기쁘고 싶다.”라고 할 때도 그것이 육체적으로 웃기를 원하는 것일 수 있고, 영적으로 구원된 이의 기쁨을 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실 때, 육체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는가?’하며 떠나갈 것이고, 영적인 사람들은 이 말씀이, ‘내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면 영원히 영적으로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육체적인 사람은 절대 영적인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변한 사람은, 어떤 수녀님의 경우처럼 12년 동안이나 성체만 영하며 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라고 하실 때, 그 배고픔과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와 사랑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먼저 육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 분을 ‘갈망’하지도 못하거나 갈망하는 것이 육체적인 갈망에 갇혀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찾으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동물들처럼 자신을 진화시켜야합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바라서 자신의 바라는 부분을 진화시켰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열절이 갈망하면 그 부분이 진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갈망하는 부분이 진화되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부분을 진화시키고 있습니까? 정말 내 영혼이 진화되도록 그리스도를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권력과 돈, 쾌락을 원하여 이상한 모양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마지막 미사>
이른 아침 새벽시장에서 일하시는 한 형제분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여그 펄떡펄떡 뛰는 숭어 쪼까 있는데, 얼릉 오씨요. 찌개해서 아그들하고 드시면 좋을꺼요!"
그 형제님의 따뜻한 마음이 오늘 제 아침을 훈훈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쁘고 고된 와중에도 틈만 나면 뭔가 나눠주지 못해 안달이 난 그 형제님의 천사 같은 마음이 참으로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영원한 생명의 잔치-매일의 미사가 지닌 핵심적인 의미는 "나눔"입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눌게 없는데..."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크게 그릇된 생각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뭔가 나눌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꼼짝없이 휠체어에 앉아서 지내는 한 형제가 많은 것을 나누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간병인들에게 늘 환하게 미소짓는 일, 작은 친절에도 정성껏 감사의 인사를 하는 모습, 이웃의 하루를 축복해주는 기도,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 신뢰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나눔이자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요셉 과드리오 신부님(1921-1963, 이탈리아 태생, 살레시오회 사제)께서 갓 서품된 한 후배사제에게 선물로 주신 "다섯 가지 권고" 가운데 "매일의 미사" 부분을 소개해드립니다. 오늘 하루 영적인 양식으로 삼으시기 충분한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에게.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미사는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부디 그대가 봉헌하는 미사가 입술만으로 봉헌되는 미사가 아니라 진지하게 음미하는 미사, 무엇보다도 삶 한가운데서 생활화되는 미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가장 훌륭한 미사는 가장 잘 준비된 미사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그대가 집전하는 미사는 그대 생애 안에 유일한 미사, 최초이자 최후의 미사처럼 여기십시오.
그대의 모든 미사가 성전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대의 삶 안으로 연장되는, 삶 가운데서 계속 지속적으로 거행되는 미사이길 바랍니다. 그대가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행전 7,51-8,1) -양승국신부- <마니산 자락너머 저녁노을> 강화도 함허동천이란 곳을 가보셨는지요? 1박 2일간 저는 형제들과 함께 함허동천 야영장으로 뒤늦은 엠마우스 소풍(부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함허동천은 마니산 남단에 위치한 계곡인데, 세종대왕때 이름을 떨친 함허대사가 수도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상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맑은 계곡 물 바로 옆에 텐트를 치고 1박 2일 내내 족구시합을 즐겼지요. 안가보신 분들은 가족들과 함께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실속 있는 소풍이 될 것입니다. 어제는 너무나 많은 인파가 야영장에 몰려들었기에 저녁 5시까지는 각기 찢어져서 여가를 즐겼습니다. 일부는 자전거 하이킹을, 일부는 마니산 등반을, 저희 "꾼들"은 함허동천 근처의 저수지를 찾았습니다. 낚시터에 도착한 저희는 저수지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좌대가 그럴듯한 포인트로 여겨져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한시간이 지나도 붕어들은 전혀 협조를 해주지 않더군요. "진정한 낚시란 고기를 잡는 것이기보다 세월을 낚는 것이다. 진정한 낚시는 스스로를 비워내는 행위이다. 잔잔한 수면과 끊임없이 흔들리는 찌를 도구로 내적인 긴장을 가다듬는 수련이 낚시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을 가져보려 했지만 한 마리도 안 잡히니 은근히 짜증이 나더군요. 그렇게 뙤약볕 아래서 한참을 앉아 있다보니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에라 모르겠다"며 좌대 위에 대자(大字)로 누워 깊은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마침 저수지 건너편 마니산 자락이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제방 너머 해변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오후 내낸 붕어는 단 두 마리밖에 잡지 못했지만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장엄한 일몰광경을 바라보며 "우리 인생의 마무리도 저렇게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을 한참동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못지 않게 숭고하고도 고결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적대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기 일보 직전에 스테파노가 어떻게 처신했었고 어떤 말을 했는가를 한번 보십시오. 빗발처럼 날아오는 돌팔매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에 얹고 눈동자는 하늘을 향했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내 영혼을 아버지,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며 하느님 아버지를 찾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 역시 저녁노을처럼 찬란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을 때부터, 건강할 때부터 미리미리 죽음을 잘 준비해서 고결하고도 깨끗한 임종,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는 최후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 역시 스테파노의 최후처럼 주님을 쳐다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다운 마침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수수깡 색안경 -정명숙 수녀- 어릴 때 색안경을 끼고 놀던 생각이 납니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겉에
생명의 양식 -전삼용신부-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워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새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서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Alter Christo인 스테파노 -김찬선신부-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생명의 빵
- 오정순- 사람들은 ‘먹는다.’ 또는 ‘먹힌다.’라는 말을 다양한 경우에 사용한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채울 때 그 행위의 상징으로 먹는다고 표현한다. 성이 고픈 남성이 여성을 취했을 때도 먹었다고 말하고, 운동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도 ‘1등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합병했을 때도 ‘먹었다.’고 표현한다. ‘먹었다.’는 것이 곧 ‘채워졌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과잉친절의 하느님> 언젠가 형제들과 농가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점심 식사로 도시락까지 맞춰 갔었는데, 홀로 사시는 할머님, 막무가내셨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큰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냄새부터 다르더군요.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흘렀습니다. 후덕하신 할머님, 아니나 다를까, 밥공기 크기부터 달랐습니다. 놋쇠로 된 무거운 밥그릇은 보통 식당 공기그릇의 거의 두 배였습니다. 그런 그릇에 밥을 꽉꽉 눌러 담은 다음, 또 다시 애써 고봉으로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껄쭉하게 잘 끓인 청국장을 큰 대접에 한 대접씩 퍼주셨습니다. 밥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밥공기에 든 밥은 통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저희 모두는 하나같이 밥그릇, 국그릇, 비운다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았다, 이제 다 먹었다, 했는데, 비호처럼 다가오신 할머니, 어느새 제 밥그릇 안으로 밥 한 주걱을 더 얹어주시며 하시는 말씀. “덩치는 산만한 장정들이 밥 먹는 게 통 시원찮여! ” ‘밥 고문’ 당할 당시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일방적인 할머니가 엄청 미웠지만,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할머님으로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겠지요. 할머님과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더 잘 먹이려고, 더 많이 먹이려고, 더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망을 가고, 우리가 외면을 해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과잉친절’의 하느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위로를 주셨습니다. 격려를 주셨습니다. 새 출발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살과 피를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비와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풍요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되풀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바를 관대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싫다고 해도 쫓아가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임준기 신부- ‘동문서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받는 사람, 내주는 사람 - 김우정 신부-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기가 찬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더 큰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흥미로운 것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생명의 빵 -오상선신부- 나는 생명의 빵이다!
영이 가르다 -김찬선신부- 오늘의 사도행전은 유다의 원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과 <독서> :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한 스테파노 오늘 그리고 영생을 살아가는 신앙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 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 문병찬 신부- 군중들이 예수님께 믿을 만한 근거로 기적이나 일을 요구합니다.
- 김웅태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좀처럼 믿지 않는 완고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그와 아주 대조적으로 예수는 참으로 의인이시며, 예언자이시고, 사람의 아들이시며 주님이심을 피로써 증거하고 죽어간 스테파노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예수님 자신의 증언을 듣게 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박해해 왔던 조상들의 완고한 마음을 상기시키면서 또한 그 시대에도 하느님의 중개자를 거부하고 그 뜻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참된 일은,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을 따르며 그 분을 믿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자이며, 사람들이 기다려 오던 메시아이심을 믿고 받아들일 것을 또한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을 군중들이 들었을 때, 그 사실을 입증해 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굶주린 그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가져다가 먹였고, 또 메시아가 오시면 시편 78, 24의 말씀과 같이 그 백성을 만나로 배불리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 사실을 증명해 보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며,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또한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나 스테파노를 죽인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신가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으나,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신앙을 찾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한테서 큰 능력을 보여주는 기적이나 징표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영원한 빵
-김유철 신부- 오늘 요한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믿으라 하고
생명을 주는 빵 -이세영 수녀- 삼십 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해온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는 딱 한 번 주어지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공동생활을 해나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고, 제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성장의 시간 가운데 제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주님이 내 안에서 더 찬미를 받으실 수 있도록 ‘나’를 포기하며 ‘나’를 낮추는 기도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김경욱 신부 - 어제는 하루라도 성체의 의미를 살려서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셨는지요. 어제가 아니라면 오늘이라도 우리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사랑의 웃음을 선사해보도록 합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종살이를 떠나 광야에 들어서서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하느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불평을 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매일매일 제공해 주셨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주어지는 양식은 맛없고 충분히 질릴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기가 그립다고 불평까지 합니다. 그들은 에집트 종살이 시절에 겪었던 노예가 먹는 가마솥 음식까지 그립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들도 결국 하느님이 주시는 음식의 표징을 모르고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그 빵, ‘만나’를 먹었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기에 모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그렇게 죽어갈 그런 빵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원한 것은 눈에 보이고 확인하고 먹을 수 있는 ‘썩어 없어질 빵’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서 알고자 했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눈으로 보고서 믿는다는 말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눈으로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서 믿는 자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라고 하셨듯이 믿음은 눈으로 보지 않고 하는 행위입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이들은 하느님의 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는 그 말씀을 ‘만나’처럼 노동없이 먹을 수 있는 빵으로 착각했습니다. 기적으로 군중을 먹이셨던 그 빵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성체의 삶은 바로 세상에 살면서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또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성체를 받아 모신 사람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내 이웃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하루 봉헌하며 삽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양승국신부 <대책 없는 예수님> 가끔씩 대책 없는 어르신들을 뵙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날들’을 생각해서 당신 들 몫을 잘 챙겨놓으셔야 하는데, 이 자식, 저 자식 다 마음에 걸립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다 나누어 주다보니 이제 남은 재산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더 못줘서 안달이십니다. 나중에 어떡하려고 하시는지 정말 대책이 안섭니다. 이리 떼이고 저리 뺏겨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태,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이제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더 대책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나눠주고 이제 그분께 남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은 마지막 몸뚱아 리조차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 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시며 우리에게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엇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애가 타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 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내내 음식과 무척이나 관련이 있었습니다. ‘빵집’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말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들이대던 곳, 건초가 가득담긴 말구유에 뉘어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허기 진 백성들의 해결사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들의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해주시기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보다 강건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나약한 인간에게 당신의 신성 (神性)을 공유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죄인인 우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내어놓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 여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목숨인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생명의 빵으 로 인해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과분한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그 큰 사랑, 측량할 길 없는 감사의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주님 현존의 장(場)이 어디 있을 까요? 의외로, 또 은혜롭게도 그 장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 다.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되풀이하십니다. 매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시는가 하면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성체성사에 참석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의 신비에 깊이 침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홍해를 통해 죽음의 땅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 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어제의 나와 결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악습으로 물든 지난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때 마다 우리 는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반복해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과감하게 아래쪽을 포기하고 위쪽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죄와 암흑이 지배하는 죽음의 나라를 통과해서 은총과 빛이 흘러넘치는 생 명의 나라로 부단히 넘어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별도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 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굳이 비행기 삯을 들여서 최후의 만 찬이 거행되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은 이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 일 주어지는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동물들이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필요한 사료가 아니 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 인간의 영혼들 을 영생의 창공으로 비상하게 할 참된 양식입니다. "생명의 빵"
-이수철신부- 늘 새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들은 차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덜된 동물은 차갑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살이 딱딱한 뼈를 에워싸고 있지만, 진화가 덜된 거북이, 게, 가재 같은 동물은 딱딱한 뼈가 살을 에워싸고 있다는 이야기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이들, 진화가 덜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이제나 쇠붙이 무기들 들고 전쟁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진화가 덜 된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처럼 무익하고 무모한 전쟁을 하는 동물들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군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문명화된 야만인일 수뿐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내면은 진화로 말하면 최고의 절정상태입니다. 다음 스테파노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백성, 원로들, 율법학자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차고 어둡고 거칠고 딱딱해져 완고하고 인색해 질 수뿐이 없습니다. 반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참 거룩한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임종어와 똑같은 스테파노의 두 임종어가 그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단순성,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결같이 성령 충만한 결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빵, 생명의 빵인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와 말씀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존재하는 온 세상의 피조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인 다음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성체성사의 진수를 밝혀줍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육이 배고프고 목말라도 채워지지 않아 차가워지고 굳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실 때 일거에 해결되는 영육의 배고픔이요 목마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빵인 당신 자신과 더불어 성령을 충만히 선사하십니다. 아멘.
기적 중의 기적 -강영구신부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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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주의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