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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동시 주가 약세] 일본인이 모르는 '금융위기'가 반복되는 이유 / 8/6(화) / 현대 비즈니스
왜 국제금융위기는 반복되는가. 세계사 속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금융 위기의 이면에 있는 스토리로부터 국제 금융의 기초 지식을 그려낸 화제서 「교양으로서의 금융 위기」저자로부터 지금 필요한 지식이나 사고방식을 배운다.
◇ 방치되어 실패로 돌아간 위기
정확히 100년 전인 192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럽 국가들이 고통받는 가운데 미국이 번영을 누리며 주식 거품으로 치닫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거품이 붕괴된 후인 1930년대는 대공황과 전쟁으로 상징되는 세계 역사상 최악의 비극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후세부터 돌아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들은 하나의 큰 위기를 형성하는 파츠이며, 위기는 점점 확대되어 경제·금융에서 정치·군사에 이르는 복합 위기가 되어 마침내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위기는 방치되어 실패로 끝난 위기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국제사회의 공통된 인식입니다.
국제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위기의 원인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1) 국제 금융 시스템을 지탱하는 제도가 경직적이었다
(2)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자금 흐름이 역류했다
(3) 각국이 자국 제일주의에 서고, 국제적 리더가 부재했다
◇ '금본위제'가 무엇이었을까
먼저 당시 국제금융제도의 기반이었던 금본위제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19세기 금본위제는 금화를 발행·유통하는 대신 지폐(태환지폐라고 합니다)를 발행하고 그 지폐와 금으로 교환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지폐를 보유한 모든 사람이 금과의 교환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폐 발행량은 반드시 금 보유량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도 되는데,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발행 지폐량의 최소 40%를 커버하는 양의 금 보유가 법으로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통화 발행량은 금 보유량 증감에 영향을 받으며 궁극적으로 전 세계 금 산출량 증가와 전 세계 통화 발행량 증가가 연동됩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통화발행량이 무규율로 확대되지는 않으므로 초인플레이션 등은 발생하기 어려운 반면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충분한 통화가 공급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성장력이 억제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금본위제를 채택하는 나라 사이에서는 금을 매개로 환율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파운드는 순금 113그레인(1그레인=1/480트로이온스=약 64.8밀리그램), 1달러는 23.22그레인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에 환율은 1파운드=4.86달러입니다.
사실상 금본위제는 주요국 간에 단일 통화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환위험은 극소화되고 국경을 초월한 무역과 투자가 촉진되었습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인 1914년 시점에서 무역이 세계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1%로, 블록경제화가 진행된 제2차 세계대전 전야(1938년)의 9%에 비하면 얼마나 국가 간 상호의존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상호의존적인 국가 간에도 전쟁이 일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금본위제 이론에서는 무역수지의 불균형은 자동적으로 조정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오히려 적자국에서의 공황이나 도산·실업, 그로 인한 노동자의 참상은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하고 바람직한 과정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상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1918년 개혁까지 남성의 일부와 모든 여성에게 선거권이 없었기 때문에 약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비인간적인 프로세스가 유지되는 한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정지된 금본위제의 '돌아가는 법'
금은 국가의 마지막 결제 수단이기 때문에 위기 시에 가볍게 놓을 수 없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각국이 금 유출을 금지하고 금본위제를 중단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 '총력전'을 거쳐 국민 전체의 국가에의 공헌을 중시하는 풍조가 된 전후에, 경직적이고 비인간적인 금본위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기운은 고조되었습니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전과 함께 각국은 금본위제 복귀를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감각으로는 금본위제가 통상적이어서 전시에 일시적으로 정지했으니 종전 후에는 다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전쟁 중에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어 통화의 실질적 가치는 전쟁 전부터 상당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돌아가는 방법입니다.
영국을 예로 들면, 당시의 정통파의 논의는, 영국의 위신에 걸쳐 구평가(이전의 금 가격. 실질적으로는 파운드화 환율을 나타내는)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인플레이션 퇴치가 필수적이므로 건전한 금융정책(긴축)을 채택해 국내 불황을 감수하고 물가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볼드윈 내각의 재무장관 처칠이 이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지대 수입이나 투자 수익이 실질적으로 줄어든 귀족·부유계급의 이익을 도모할 의도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신진 경제학자 케인스는 현 실력에 상응해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하고 전쟁 전보다 파운드화 약세 형태로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미국 달러화와의 관계를 보면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영국보다 낮았다(즉, 파운드화의 실질적 가치가 달러 대비 약세였다). 따라서 케인스는 10% 정도 낮은 금값(즉 파운드화의 10% 절하)으로 금본위제에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통파가 주장하는 금융 긴축 정책으로 일반적 물가 수준을 10% 정도 낮추겠다고 하면 실업 증가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회 정의에 어긋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영국의 '이탈'
케인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5년 영국은 구평가로 금본위제에 복귀해 아니나 다를까 파운드화 강세에서 오는 경쟁력 저하와 환율 유지를 위한 고금리에 시달리게 됩니다.
각국에서도 금본위제 복귀 후에는 고정환율 유지가 금융정책의 대목표가 되기 때문에 국내 경제의 동향에 관계없이 긴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대공황의 영향으로 실업률이 15% 정도까지 상승하고 유럽 대륙의 은행 위기로 인해 금이 유출된 1931년 영국은 마침내 금본위제를 이탈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33년 3월에 금본위제를 정지했고, 1928년에 전쟁 전보다 프랑화 약세의 환율로 금본위제에 복귀한 프랑스도 1936년에는 이탈했습니다.
덧붙여 일본은 1930년에 구평가로 금본위제에 복귀(이른바 금해금)했지만, 대공황의 폭풍 속에서 창문을 연 것과 같으며, 다음해인 1931년에 금본위제를 재정지했습니다. 각국에서는 금본위제에서의 이탈에 따라 드디어 디플레이션이 종식되고 물가가 상승해 갑니다.
금본위제는 경직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평시의 안정적인 경제 환경에는 적합할지도 모르지만, 쇼크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후 부흥이나, 큰 거품과 그 붕괴라고 하는 경제의 격동을, 금본위제라고 하는 제약 속에 밀어 넣으려고 해도 무리한 상담이었습니다.
각국은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 하고, 국민에게 많은 희생을 강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제 기반에 스스로 피해를 주고, 그것을 리커버하기 위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적 행동에 빠져, 국제 금융 시스템의 붕괴에 가담해 갔습니다.
미야자키마사토
https://news.yahoo.co.jp/articles/017202e60538d6ed110a093dd3077c5521e1138d?page=1
【世界同時株安】日本人が知らない「金融危機」が繰り返される理由
8/6(火) 7:30配信
現代ビジネス
〔PHOTO〕iStock
なぜ国際金融危機は繰り返されるのか。世界史の中で起きたさまざまな金融危機の裏にあるストーリーから国際金融の基礎知識を描き出した話題書『教養としての金融危機』著者からいま必要な知識や考え方を学ぶ。
【写真】日本がいつの間にか「モノを売って稼ぐ国」から変貌していた…!
放置されて失敗に終わった危機
〔PHOTO〕gettyimages
ちょうど100年前の1920年代は、第一次世界大戦の余波で欧州諸国が苦しむ中、米国が繁栄を享受して株式バブルへと突き進んだ時代でした。そしてバブルが崩壊した後の1930年代は、大恐慌と戦争に象徴される、世界史上最悪の悲劇的な時代となりました。
後世から振り返ってみると、大小様々な困難は一つの大きな危機を形作るパーツであり、危機はどんどん拡大して、経済・金融から政治・軍事に至る複合危機となって、ついに世界は第二次世界大戦へと突入します。
その意味で、第一の危機は、放置されて失敗に終わった危機でした。第二次世界大戦後、現在に至るまで、このような失敗を繰り返さないことが、国際社会の共通認識となっています。
国際金融の観点から見ると、危機の原因は、大きく以下の三つにまとめられます。
(1)国際金融システムを支える制度が硬直的だった
(2)米国から欧州に向かう資金の流れが逆流した
(3)各国が自国第一主義に立って、国際的リーダーが不在だった
「金本位制」とは何だったのか
〔PHOTO〕gettyimages
まず、当時の国際金融制度の基盤であった金本位制の仕組みを見ていきましょう。
19世紀の金本位制は、金貨を発行・流通させる代わりに紙幣(兌換紙幣と呼ばれます)を発行し、その紙幣と金との交換を約束するものです。
紙幣を保有するすべての人が金との交換を求めるわけではないので、紙幣の発行量は必ずしも金の保有量と完全に一致しなくてもよいのですが、例えば米国では発行紙幣量の最低40%をカバーする量の金の保有が法律で義務付けられていました。
従って、個々の国の通貨発行量は金の保有量の増減に影響され、究極的には、世界中の金の産出量の増加と、世界全体の通貨発行量の増加が連動することになります。
金本位制下では通貨発行量が無規律に拡大することはないので、ハイパーインフレーション等は起こりにくい反面、成長の可能性がある分野に十分な通貨が供給されるとは限らないため、成長力が抑制される側面があります。
金本位制を採る国の間では、金を媒介にして為替レートが固定されています。例えば、1ポンドは純金113グレーン(1グレーン=1/480トロイオンス=約64.8ミリグラム)、1ドルは23.22グレーンと定義されていたので、為替レートは1ポンド=4.86ドルとなります。
事実上、金本位制は主要国間に単一通貨があるのと同じため、基本的に為替リスクは極小化され、国境を越えた貿易や投資が促進されました。
実際、第一次世界大戦前夜の1914年時点で、貿易が世界経済全体に占める割合は21%であり、ブロック経済化が進んだ第二次世界大戦前夜(1938年)の9%に比べると、いかに国同士の相互依存が進んでいたか分かります。もちろん、そのように相互依存の進んだ国家間でも戦争が起こったことも事実です。
金本位制の理論では貿易収支の不均衡は自動的に調整されると考えられました。むしろ、赤字国における恐慌や倒産・失業、それによる労働者の惨状は、輸出競争力を回復するために必要かつ望ましいプロセスである、というのがその時代の常識であったと言えます。
英国では1918年の改革まで男性の一部とすべての女性に選挙権がありませんでしたので、弱い立場の人々の声が政治に十分反映されなかったことも、こうした非人間的なプロセスが維持される一因とな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停止した金本位制の「戻り方」
金は、国家にとって最後の決済手段ですから、危機時に軽々と手放すわけにはいきません。第一次世界大戦勃発とともに、各国が金の流出を禁止し、金本位制を停止したのは当然です。
では、「総力戦」を経て国民全体の国家への貢献を重視する風潮となった戦後に、硬直的で非人間的な金本位制ではなく、新しいシステムを作っていこうという気運は盛り上がったのでしょうか?
残念ながら、そ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終戦とともに、各国は金本位制への復帰を考え始めます。当時の感覚では、金本位制が常態であって、戦時に一時的に停止したのだから、終戦後はまた常態に戻るのが当たり前ということだったのだと思います。
しかし、多くの国では戦争中にインフレが進んでおり、通貨の実質的価値は戦前から相当目減りしていますから、問題は戻り方です。
英国を例にとると、当時の正統派の議論は、英国の威信にかけて旧平価(以前の金価格。実質的には、ポンドの為替レートを示す)で金本位制に復帰すべきであり、そのためにインフレ退治が不可欠だから、健全な金融政策(引き締め)を採って国内不況を甘受し物価を引き下げるべきだ、というものでした。
ボールドウィン内閣の蔵相チャーチルが、この政策を推進しました。インフレで地代収入や投資収益が実質的に目減りした貴族・富裕階級の利益を図る意図も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一方、新進気鋭の経済学者ケインズは、現状の実力相応にポンドを切り下げ、戦前よりもポンド安の形で金本位制に復帰すべきだと主張します。
特に米ドルとの関係を見ると、米国のインフレ率の方が英国よりも低かった(すなわち、ポンドの実質的価値が対ドルで目減りしていた)ので、ケインズは、10%程度低い金価格(すなわちポンドの10%切り下げ)で金本位制に復帰すべきだと論じました。
正統派の主張するような金融引き締め政策で一般的物価水準を10%程度引き下げるとすると、それは失業の増加をもたらすので社会正義に反する、とも主張しました。
英国の「離脱」
写真:現代ビジネス
ケインズの反対にもかかわらず、1925年に英国は旧平価で金本位制に復帰し、案の定ポンド高からくる競争力の低下と為替レート維持のための高金利に苦しむことになります。
各国でも、金本位制復帰後は固定為替レートの維持が金融政策の大目標となりますので、国内経済の動向にかかわらず、厳しい引き締めが行われることも珍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
大恐慌の影響で失業率が15%程度まで上昇し、欧州大陸の銀行危機によって金が流出した1931年、英国はついに金本位制を離脱します。
同様に、米国はルーズベルト大統領就任直後の1933年3月に金本位制を停止し、1928年に戦前よりフラン安のレートで金本位制に復帰したフランスも1936年には離脱しました。
なお、日本は1930年に旧平価で金本位制に復帰(いわゆる金解禁)しましたが、大恐慌の嵐の中で窓を開けたようなものであり、翌1931年に金本位制を再停止しました。各国では金本位制からの離脱に応じて、ようやくデフレーションが終息し、物価が上昇していきます。
金本位制は硬直的な制度ですから、平時における安定的な経済環境には適し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が、ショックに対して柔軟に対応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戦後復興や、大きなバブルとその崩壊という経済の激動を、金本位制という制約の中に押し込もうとしても無理な相談でした。
各国は、戦前の常態に戻ろうとして、国民に多大の犠牲を強制したのみならず、かえって経済基盤に自らダメージを与え、それをリカバーすべく自国の利益を優先する利己的行動に陥って、国際金融システムの崩壊に加担していきました。
宮崎 成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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