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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나의 역사 공부, 「나 혼자 가야 여행」이라는 책을 읽다
나는 역사를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역사 공부에 관심은 많다. 역사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거기에 조상들이 살아온 흔적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갈 방향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또 후손들에게 일러줄 뭔가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조상들이 살아온 과거를 안다는 것이 지금 내 생각이나 상식과 너무 달라서 재미있기도 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역사 현장을 답사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박물관에도 시간나면 가 보고,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일을 언제나 재미있어했다.
여러 번 경주에 가서 고분도 답사하고, 박물관에도 가보고 함안, 창녕, 고성, 양산, 합천, 경산, 연산동, 복천동 등 가야와 신라의 고분군을 답사하고, 대전의 계족산성, 담양의 금성산성, 보령의 삼년산성 등에도 올라 역사를 더듬어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겉으로만 , 눈으로만 훑고 말았던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유홍준 교수(중앙박물관장)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런 답사에 두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꼬집었다. 역사를 알고 답사해야 한다고 한 것일 것이다. 그냥 보고 그치는 답사가 아니라 역사를 알고 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그동안 그렇지 못했다. 안다는 것은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가능한 것인데,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百聞以不如一見)’라는 속담도 그래서 생긴 것일테고, 철학자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말한 것일게다. (2026.9.22.)
아무튼 도서관에서 빌려온 「나 혼자 가야 여행」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부터는 가야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 잊혀진 역사, 기록이 부족한 역사 가야사는 다른 삼국사에 비해 그 정체성도, 체계성도 부족하다. 그것은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면서, 가야를 폄훼해 빼먹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연맹체를 통일하지 못한 가야 부족에게도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가야사다. 단편으로나마 기록이 남았고, 유물과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다.
「나 혼자 가야 여행」이라는 이 책은 가야의 역사를 무엇부터 공부해야 하는가부터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광개토대왕릉 비문에 나타나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촉발해 일본의 역사 왜곡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고, 가야는 정작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로왕의 전설과 ‘龜旨歌’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기억할 만큼 대중적인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을 펴낸 〈책 읽은 고양이〉출판사는 저자 황윤 선생의 편견 없는 가설과 여러 문헌자료와 부지런한 발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가야역사는 신라에 패망해 나라 이름까지도 사라졌지만, 신라의 삼한일통 과정에 합류하고 이후에 역사에서 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통합의 역사가 된 것이라고, 그렇게 읽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역사의 기록을 함께 확인하고 풀어내는 과정과 역사 속 장면과 명칭 등의 의미를 함께 알아가는 ‘일상의 고고학’「가야 역사 여행」은 역사에 대한 흥미를 일깨우고, 고고학에 대한 재미와 쾌감을 전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고 전제한,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높이 6.39m인 ‘광개토왕릉비’는 만주 집안에 있다. 접근 못 하도록 갇혀져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아직 가 보지 못했지만, 모조품이랄까 복제품은 국내에서도 여러 곳에 있다. 용산의 전쟁기념관 야외에도,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도 있고, 최근에는 동아대 석당박물관 안에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또 책에서는 소개가 없지만 울진의 비석박물관에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오래전에 가 보았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인 황윤 선생은 부산 출신으로 직접 부민동 소재 동아대 박물관에 있는 복제품에 대해 자세해 소개하고 있다. 언제 한번 가봐야 할까 보다.
모두 1,700여 자가 새겨진 이 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이미 여러 책에서 다루었다. 특히 내가 태어난 해와 육갑이 같은 ‘신묘년 조’기사가 단연 쟁점을 낳는다. 비는 ‘부여 동명왕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고, 왕이 그를 죽이려 함으로 도망하다가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고 하는 부여왕의 전설을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전설로 옮겨 온 것과 같은 추모왕, 즉 주몽으로부터 시작한다. 동명왕 전설은 고구려가 세워진 때부터 300여 년 전에 후한의 학자 왕충(王忠, 27∼87년)이 《논형(論衡)》이라는 책에 기술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시조 주몽의 17대손인 광개토대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많은 공을 세우고, 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썼으며 39세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다. 비문에서 쟁점 부분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으로, 백잔은 백제를 낮춰 부른 것이다. “신라가 과거에 고구려의 속민이 된 이래로 조공을 바쳤다.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로 볼 것이냐인데, 비의 주인이 고구려이므로 주체를 고구려로 볼 것이냐하는 쟁점이 생기는 것이다.
쟁점 부분이 워낙 크게 부각되다 보니, 비의 마지막 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의 마지막에는 광개토왕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石碑를 세우지 않았기에 수묘인들이 뒤섞이게 되었다. 오직 광개토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墓上에 비를 세우고, 그 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 명하였다.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였고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역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대신 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죽은 왕의 노예로 수묘인, 즉 묘를 지키고 관리라는 자를 대대로 이어지게 한 것인데, 그전까지 이어졌던 순장에 버금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체로 수묘하는 집이 330家였으므로 한 집에 5인 가족으로 치면 1,630명 정도가 자손 대대로 죽은 광개토대왕의 노비로서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비에는 《삼국사기》에 그토록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후연과의 전쟁은 거의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지막에 간단히 기록하였다. 왜 일까? 700여 년 뒤 기록인 《삼국사기》에는 백제와의 전쟁 기록도 있기는 하나, 그보다도 선비족이 세운 後燕(384∼409)과의 전쟁에 더 많은 양을 할애해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후연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무너졌다.
수십 번도 더 다닌 김해지만, 김해에 간다면 무엇을 먼저 봐야 할까? 해반천에서 잉어 떼들을 보면서 트레킹을 해야 할까, 분성산성, 임호산에 올라 너른 김해평야를 굽어봐야 할까? 김해김씨라면 수로왕릉? 김해허씨라면 허황옥릉?을 찾겠지만, 그 두 성이 아니라도 파사탑을 보고, 구지봉에 올라서 ‘龜旨歌’를 읊어야 할까? 아니면 임호산 정상가는 길에 있는 府院寺에 올라서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동종을 봐야 할까? 사적 제1호가 경주 포석정인데 반해, 제2호인 회현동 패총을 답사하고, 고대를 재현한 봉황대에 올라서 아름다운 전설을 새겨보고, 대성동 고분과 박물관, 김해박물관에서 가야 유물을 한 번 더 본 뒤에 전철 타고 돌아와야 할까? 김해박물관 가는 길 가에 새워진 기마상과 조각상을 보는 것은 덤이 될 테고. 아마도 임호산 아래 선조어필을 보관한 전각이 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 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구지가다. 이 시구는 김수로왕과 관련이 있다. “후한 광무제 18년(서기 42년 3월) 목욕재계하고 술 마시던 날에 북쪽 구지봉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2,300명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하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이에 九干들이 ‘우리들이 있습니다’고 하자 ‘내가 있는 데가 어디냐?’고 하여 ‘구지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 왔으니 너희는 봉우리 흙을 파서 모으면서 ‘구지가’노래를 불러라’이에 구간 등이 말 그대로 즐거이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얼마 후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 닿았는데 보니 보자기에 싸인 금궤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절하고 받아, 아도간의 집으로 모셨다가 12일쯤 지난 뒤에 사람들이 모여 함을 열어보니, 알이 여섯 개가 있고 모두 남자로 변했는데 성스러운 용모를 지녔다. 공손히 절하고 하례하였다.”- 이상은 《삼국유사》紀異편 駕洛國記 기록이다.
‘대성동 고분’은 경주와 함안, 창녕의 고분과는 다르다. 제법 크기는 하지만, 다른 고분들보다 작고 봉분도 낮다. 왜 그럴까? 다른 지역의 것은 5세기 이후에 지은 것인데 비해 대성동 고분은 3세기와 4세기, 5세기 전에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무덤을 크게 지을 명분도 여력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무덤을 보는 요령부터 배워야 한다. 가장 흔한 무덤이 ‘널무덤’인데, 나무로 만든 관에 시신을 넣고 땅에 묻는 방식이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 ‘棺墓’라고 하는데,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수준 높은 관묘가 많이 발견된다.
다음 ‘덧널무덤(목곽묘)’은 구덩이에 나무 곽을 짜서 넣어 벽을 만든 뒤에 그 안에 시신을 넣는 것이다. 구덩식에 돌로 덧널을 쌓는 무덤인‘돌덧널무덤’은 좀 복잡한데, 돌로 무덤 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는 방식이다. ‘수혈식석실분’이 대표적인데, 창녕 송현동 고분을 그것으로 볼 것인가, 횡혈식으로 볼 것인가는 논란이 있다. 수혈식은 沿道나 문이 없이 그냥 위에서 바로 땅을 파서 만든 것이고. 횡혈식은 연도나.
문이 있는 경 우다. 대성동에서도 금동관 일부가 함께 출토된 이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발견되기는 했는데, 이것은 400년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온 후에도 금관가야의 명맥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금관가야는 더 이상 한반도 남부의 문화가 집결된 곳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라가 이들을 지배하기 시작하고는 커다란 봉분을 짖고 부장품을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라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김해나 가야지역에서는 6세기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신라에 무릎을 꿇고 난 뒤에 생겼다.
흔히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고 있지만, 3세기 후반에 진수가 쓴 《삼국지》와는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은 정사가 아닌 소설이다. 진수의 《삼국지》〈왜인전〉에 있는 기록이다. “대방군에서 왜로 갈 때 해안을 따라서 바닷길로 가는데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면 ‘구야한국’이 나오고, 여기서 바다를 건너 1천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 1천여 리를 더 가면 ‘말로국’에 이른다.”고 했다. 여기서 대방군은 한사군의 하나로 황해도 지역이고, ‘대마국’은 대마도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말로국’은 규슈 북부 후쿠오카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왜인전〉에 다른 재미있는 기사가 있다.
“238년 6월, 왜 여왕이 대부 難升米 등을 대방군에 보내 천자에게 인사드리기를 청하니, 대방군 태수 유하가 이들을 위나라로 호송하였다. 그해 12월 황제가 詔書를 내려 왜 여왕에게 답하기를 親魏倭王 ‘하미코’에게 칙령을 내린다. ‘大夫 난승미와 次使 都市牛利를 호송하고, 그대가 바친 노비 4명과 여자 노비 6명, 斑布 2필 2장을 가지고 도착하였다. 그대는 물 너머 멀리에 있으면서도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이는 그대의 忠孝일지니, 나는 그대를 심히 기특히 여긴다. 이제 그대를 친위왜왕으로 삼아 금도장과 紫繡를 내려’대방태수가 그대에게 수여토록 한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여왕이 다스리던 나라를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이라고 하였는데, 이 국가는 3세기 전반에 주변 20여 개국을 다스린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기록을 바탕으로 일본은 야마타이국이 ‘야마토’정권이라고 하면서, 간사이 지역까지 넓혀 해석하기도 하는가 하면 규슈에 위치한 국가였다는 주장도 있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어쨌던 3세기 전반에 김해가 일본과 연결고리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고구려가 313년 낭랑군을 몰아내고, 314년에는 대방군마저 무너뜨렸으니 기존 ‘중국-낭랑·대방-김해-일본’으로 연결된 해상 루터는 중간에 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에 4세기 중후반 한반도 북부와 중국과는 별개로, 금관가야와 일본 간의 교류가 더욱 친밀하게 강화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3세기 가야, 즉 변한에 12개 국가가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 유물은 남원과 장수까지 각기 세력을 가진 가야가 20여 개 국가라고 하기도 한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6가야를 명시하고 있다. 《삼국지》의 변한 12개국 중에서 대표적인 가야국은 금관가야(김해), 독로국(동래 복천동),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안라가야), 비화가야(비사벌-창녕)등이 있다. 이외에 소가야(고성), 성산가야, 운봉가야 등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지역을 정확히 명시하기 어려우므로 추정하고 있다.
3세기 중반이 되자 드디어 세력을 키운 삼한의 큰 세력들이 황해도에 위치한 대방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대방군 태수가 죽는 등의 치열한 전투 기록이 《삼국지》에 있다. 중국이 고구려와 삼한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 일본의 히미코 여왕은 사람을 보내 중국 황제를 높여주고는 무역을 청하니, 이를 높게 평가하고 대우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 모두 한반도 세력을 견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크게 부족하다. 그래서 진수의 《삼국지》를 참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삼국지》에는 진한과 변한이 각 12개국 총 24개국이었다고 하고, 그중 큰 나라가 4∼5천家라고 했다. 금관가야는 경주 정도의 주요세력으로 인구가 2∼3만 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본다. 주변의 소국까지 포함하면 그보다 많았을 수도 있겠으나, 연합체를 만들어 서로 공동이익을 추구했다는 기록은 없다. 경주와 김해가 딱 그 정도였다고 볼 때 대마국과 그 남쪽에 있던 이키섬에 위치한 일지국의 인구를 합치면 4,000호라고 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많았음을 보여준다. 식량이 부족했던 이들 섬의 주민들은 가야와 신라를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삼국사기》〈실성왕조〉에 그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408년 봄 2월 왕은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하고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미처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를 치고자 하였다.”실성왕 다음 왕이 눌지왕인데, 실성왕 때 삽량간이었던 박제상이 눌지왕 때 눌지왕의 동생 卜好와 未斯欣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것을 구출하고 결국 일본에서 참형되었다는 기록은 박제상의 유적지인 양산 ‘孝忠祠’에도 있다.
만약에 김해박물관을 다시 찾는다면,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것으로 바람개비 모양 銅器와 靑銅劍(투겁창), 통모양 銅器, 그리고 흔하다시피 많은 가야 土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 가야지역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람개비 모양은 김해에서도 출토되었지만, 일본 나라현의 대형 고분에서도 출토되었고, 투겁창은 실제 무기가 아니고, 제의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과하게 크다는 것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규슈의 중형 고분에서 츨토된 것이다. 통모양 동기도 간사이 지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통에 막대를 꽂아 사용한 깃발대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도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다시 광개토왕릉비로 보자. 서기 400년 고구려는 5만 명 대군을 파병해 한반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백제에 대해서는 일본과의 외교력을 고구려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원정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광개토왕이 죽자, 백제의 격을 낮추기 위해 왜가 한반도 남부(백제,신라,가야)를 침략했다고 하고는 이에 고구려가 퇴치했다는 내용으로 역사를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백제는 후진국이었던 왜에게도 끌려다니는 힘없는 나라라고 하고, 대신 일본을 격퇴한 고구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오죽하면 백제를 ‘百殘’이라고 했을까. 殘은 ‘잔인하다. 흉악하다’는 의미인데, 백제 근초고왕 때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죽은 수모를 잊지 않기 위해 원수의 나라인 백제를 곱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의 편견과 재해석이 담긴 광개토왕릉비는 그가 죽은 2년 뒤인 414년 왕의 무덤 앞에 세우고는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 대부분은 백제 출신으로 대를 이어 죽은 광개토왕의 노비로서 이어가게 했다. 우리는 《일본사기》를 허구로 가득한, 그들 입맛에 맞게 적은 역사라고 한다. 고구려 또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역사적 정당성으로 삼아 비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대의 역사는 그만큼 실증이 어렵다. 그래서 고고학이 중요하다.
김해 구산동 구지봉 아래는 김해박물관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인 ‘지산동 고인돌’도 있다. 또 수로왕의 비인 허황옥의 릉도 있다. 허황옥 릉에서 한 5분쯤 올라가면 ‘구산동 백운대’고분군이 있다. 고분들은 5∼6세기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일지 모르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있다. 552년인 법흥왕 19년 기사다.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나라의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를 갖추어 상등의 관위를 주었으며 본래 그들 나라를 식읍으로 삼아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나라를 바쳐 항복함으로 그가 다스리던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김구해는 금관가야로 다시 와서 죽었을 수 있다. 산청의 지석묘 구해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는 하지만, 김해에서 죽었다면 지산동 고분이 생긴 시기와 딱 맞는다. 구산동 고분이 김구해와 그의 가족릉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이유다. 릉은 앞에서 본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이 구산동 고분이 김구해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수로왕릉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대성동 고분보다 이전 사람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올려잡아도 6세기의 무덤인 것이다. 물론 수로왕 무덤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후대에 새로 다듬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조선 광해군 때 조선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李睟光(1563∼1628)이 지은 《芝峯類說》에 작은 단서가 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적이 수로왕릉을 파헤쳤다. 무덤 안은 매우 넓었고, 큰 대야만 한 頭骨이 있었으며, 손발의 脛骨도 몹시 거대했다. 왕의 시신 옆에는 두 구의 여자 시신이 있었으며, 그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는 둘 다 20세 전후로 무덤에서 꺼내자 곧바로 소멸되고 말았다. 아마도 순장된 여자 종인 듯하다.”
현재의 수로왕릉은 그가 활동하던 1∼2세기 무덤과 전혀 맞지가 않다. 그래서 수로왕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높아진다. 과연 그는 신화 속 인물일까? 아니면 실제 존재한 인물일까? 성이 김씨인 이유는? 그래서 우리는 한 번 더 《삼국유사》를 읽어 보게 되는데 《삼국유사》〈가락국기〉에 그의 탄생과 활동 내용이 단편으로나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연 스님이 〈가락국기〉를 쓰기 100년 전쯤에 고려 문종 때에 금관주지사, 즉 김해에 파견된 지방관이던 한 문사가 〈가락국기〉를 썼고 그는 《開皇曆》이라는 책을 인용했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 이는 13세기에 쓰인 《삼국유사》〈가락국기〉부분이 이미 11세기 〈가락국기〉를 요약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한편 〈가락국기〉는 《개황력》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개황력》이라는 책에는 어떤 책일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역사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1. 開皇이 수나라(581∼600년)의 연호이므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뒤인 진흥왕(579∼632년)대에 나온 책이라는 의견
2. 《개황력》은 금관가야의 역사가 담긴 책으로 가야계 신라인이 가장 전성기였던 문무왕(661∼681년)대에 나온 책이라는 의견
3. 신라말 고려 초에 지방에서 발호한 호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지은 책이라는 의견과 수로왕 설화와 구형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라는 의견 등이 그것이다. 개황은 금관가야가 황국을 개창했다는 의미라는 설도 있기도 하지만, 학자마다 다른 주장을 펴고 있으나《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원천이 《개황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황력》을 인용하고 ‘수로왕의 성은 김 씨, 금색 알에서 나온 까닭로 金을 性으로 삼았다’고 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또 허황옥의 渡來와 수로왕과의 결혼담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기 쉽지 않다. 진짜로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가 맞을까? 그 먼 길을 배를 타고 왔다는데 사실일까? 신라의 예를 볼 때, 두 세력은 금관가야와 외부세력인 즉, 복천동에 있던 독로국 간의 결합은 아닐까? 어디까지가 본래의 모습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어제(9.27) 다시 김해박물관을 찾았다. 먼저 박물관에 들러 ‘기마형뿔잔’을 찾았으나 그것은 김해 대동에서 출토되기는 했어도, 기증자가 경주박물관에 기증해 거기 있다고 한다. 이어서 수로왕비릉이라고 전해지는 곳도 가보고, 지산동 2호 고분에도 가보았다. 2호분은 무엇 때문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주변을 판넬 벽으로 꽁꽁 막아 놓아 그냥 구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고 내려와 김해향교에 들러보고 수로왕릉에도 가봤다. 어제 다시 김해에 가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설명하자면 길다. 생략한다.
저자는 경주에서도 금관가야와 관련된 흔적을 찾기 위해 안양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경주에 들렀다. 경주에서 ‘김수로’라는 이름과 김씨 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신라 제23대 진흥왕의 이름은 《삼국사기》에서는 三麥宗, 천전리 각석에는 深麥夫智다. 그렇다면 그의 성이 三이나 深일까? 이름은 맥종일까? 진흥왕의 큰 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인 법흥왕은 牟卽智 또는 무즉지(另卽智)라고 금석문에서 보인다. 이를 두고 중국 사서에서는 법흥왕의 성을 募, 이름을 秦이라고 기록했다. 이름에서 智는 아무개 ‘님’으로 쓰인 존칭이다. 성과 이름을 함께 쓴 중국에서는 당연히 성과 이름이 함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자신들의 방식대로 신라왕의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募秦이라고 쓴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도 진흥왕의 이름인 삼맥종 대신에 성은 김, 이름을 진흥으로,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북제서」무성 하청 4년(565년) 기사에서 ‘신라 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금은 귀하고 비싸다. 최고위층을 상징하는 금은 권력자만이 사용한 최고의 보물이었는데, 이를 신라 왕의 성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선택이다. 김알지 전설에서 ‘금궤에 넣어진 아이’는 6세기 중반에서야 만들어진 전설이다. 김 씨는 당시 금의 활용도 만큼이나 귀중하고 고귀한 의미를 지닌 성이었다. 한반도에서 금이 김으로 바뀐 것은 14세기가 되어서다. 이것은 여러 사서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일본서기》에서는 김의 발음이 ‘코무(コム)’금에 가까웠으며, 중국도 5호 16국과 수·당 시대 金을 금이라 불렀으며, 신라 역시 금이라 불렀다. 이런 사례는 성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본래 駕洛 또는 伽耶로 불리던 김해 금관가야 지역은 532년 법흥왕에게 항복하면서 가야군이 되었고, 문무왕 때 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 금해경이 된 후, 고려시대인 995년 금주가 되었으며, 1308년 금주목으로 부르다가, 1310년에 김해부가 되었다. 이 무렵이 되어 금이 김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고려가 한때 원나라 부마국이 되면서 징기즈칸의 후예들이 자신들은 ‘황금 씨족’을 자처할 정도로 금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데서도 발견된다. 그 결과 몽골인 이름에 金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인의 ‘금’발음이 Khin 이었으므로, 여기서 Kim 이라는 발음이 등장한다. 이는 고려 왕자 및 상류층을 중심으로 영향을 받아 김이라는 발음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다. 이후 금 씨라고 부르던 것은 모두 김 씨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성이 아닌 경우는 金을 그대로 ‘금’이라고 부르는데, 금이라고 하면 흔히 화려한 신라 금관을 생각하게 될지 모르겠다. 화려하지 않지만 가야에도 금관이 있었다. 어제 가본 김해박물관에서도 볼품없는 가야금관을 보았다. 가야금관은 신라금관에 비해 최소 100년 이상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야, 특히 대성동과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금관이 그렇게 허무한 것은 아니다. 고분도 그렇다. 경주, 함안, 창녕 고분보다 1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면 볼품없다고 무시할 일은 아닐 것이다. 신라 왕족들은 금을 좋아하고 아꼈지만 4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금을 몰랐다고 《삼국지》는 말한다.
“삼한에서는 구슬을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러나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삼국지》위서동이전
김수로와 김알지 모두 황금알에서 태어났으니, 알의 후손이고 황금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후손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다. 6세기 중반 신라 왕은 김씨 임을 대외에 알리고, 왕비족은 박 씨임을 대외에 알렸다. 박혁거세, 김알지 등 이름이 이때야 비로소 소급한 것이다. 혁거세는 ‘붉은 큰 세상’을 말하는데, 한자로는 弗矩內로 이것은 이사부, 거칠부와 같이 발음에 기초한 것으로, 불구내도 붉은 세상=혁서세와 같은 의미다. 이렇게 6세기 인물부터 하나 같이 내가 누구의 몇 대 후손임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사부는 내물왕의 4세손, 가야를 멸한 장본인 사다함은 내물왕의 7세손, 진평왕 때 병권을 쥔 김후직은 지증왕의 증손 이런 식이었다.
이 무렵 가야계 신라인도 자신의 성을 김 씨로 추존하였는데, 김무력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은 진흥왕의 아우 肅訖宗의 딸과 결혼하니, 595년에 태어난 김유신은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 최상위 왕족과도 피를 나눈 존재가 되었다. 가문의 격을 높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결혼이었기에 《개황력》을 통해 가문의 격을 높인 것도 이 시기였다. 김유신은 진천에서 태어났으나, 15세 때 경주로 와서 왕가의 사랑을 받으며 화랑의 풍월주가 되는 과정은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기억난다.
6세기 중반, 신라 진골 중 한 사람인 거칠부가 《국사》라는 책을 통해 계보를 정리했듯이, 금관가야인들은 비록 신라에 흡수되었으나 《개황력》을 통하여 자신들의 계보를 정리했고, 당시 혈족 중심의 흐름에 함께 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신라인들의 이름과는 달리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김춘추의 아들인 김법민과 김인문, 김유신의 아들인 김삼광, 김원술 등은 지금도 어떤 거리감이 없는 이름이다. 한자식 작명법이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다. 가야계는 신라에 망함으로써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통일신라시대 김춘추 이후 진골 김씨는 자신들이 소호금천씨 후손임을 자부하게 되는데, 문무왕릉비에만 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당나라 묘지석에도 발견된다. 중국도 가야계를 포함한 신라 김 씨를 소호금천씨 후손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금궤 이야기는 약화되어 7세기 이후에는 모두 소호금천씨 후손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김해박물관에 있는 줄 알고서 찾았던 국보 제275호 ‘말탄무사모양뿔잔’(기마인물형각배)는 김해 대동면 덕산리에서 1980년 발굴되어 고미술 시장에 나돌다가 당시 경북대 의대 교수 이양선 선생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1986년 600여 점 수집품을 경주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5세기 무장 기마병의 모습인 이것은 물고기 비늘같은 미늘 갑옷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그 모습이 마치 광개토왕의 군사가 5만 대군을 끌고 원정 올 때와 김유신 등 가야계가 입고 한강 유역을 정벌해 결국 삼한일통을 이룬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가야의 일이 하나 더 있다. 부여, 고구려, 신라 등 많은 건국 시조가 알과 관련이 있다는 전설에 비해, 가야 시조는 알이 무려 6개나 된다. 시조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는 국한된 힘을 시조에게 부여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럼에도 무려 6명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가야의 전설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삼국유사》에는 ‘구지가’와 거의 같은 노래가 하나 더 있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클까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고 말리라
《삼국유사》‘수로부인전’에 나오는 이 노래로 성덕왕 시대 한 고위층 부인을 동해 용이 잡아가자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부인을 다시 데려왔다는 전설로 한자는 다르지만 ‘수로’왕과 발음이 똑 같다. 또 수로부인은 실재했던 인물이다. 그녀의 딸이 신라 왕비가 되어 왕의 장모가 되었던 수로부인, 구지봉과 ‘구지가’역시 노래와 견주어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저자가 아닌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진흥왕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김진흥’이라고 불렀다지만, 사실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지가 그의 이름이다. 그는 신라가 성장해져 삼한을 통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기도 하지만, 순수비라는 금석문을 남겨 생생한 역사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삼한을 통일한 왕은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으로, 조선시대까지를 통틀어도 진흥왕과 문무왕처럼 훌륭한 왕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유언이 적혀 있다.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앞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사책에 비방만 남길 것이다.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다. 죽은 뒤 열흘이 되면 바로 왕궁의 고문 밖 뜰에서 서역의 방식대로 불로 태워 장사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이야 본래 정해진 규례가 있을 터이나, 장례 절차는 검약하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또 죽어서 동해 용이 되어 신라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유언도 남겼다.
훌륭한 문무왕은 자신의 어머니가 외삼촌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자신에게는 가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마도 이는 처음 듣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다시 보자.
661년 3월, 문무왕이 조서를 내려 자신의 피에 가야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가야를 세운 수로왕을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에 수로왕의 17대손 급간 갱세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제전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 것인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왕위 계보에 따르면 김유신이 수로왕의 12대손으로 되어 있고, 급간 갱세는 그보다 5세 뒤 인물이다. 문무왕이 살았을 때 내린 조서라면 김유신 등 당시 인물에게 명령했을 텐데, 그보다 5대 뒤의 인물에게 제사를 맡겼다는 것은 문무왕의 일이 아니고 그 후 윤색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대야성(합천)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딸과 사위를 잃는 등 수모를 당한 김춘추는 백제를 징벌할 요량으로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첩자로 몰려 옥에 갇혔다. 고구려왕은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달라. 그렇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김춘추가 ‘저는 신하로 그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하면서 버텼다. 그러면서 김춘추는 청포 3백 필을 고구려왕이 아끼는 신하 신도해에게 뇌물로 바쳤다. 신도해는 김춘추를 따로 불러 농담처럼 이런 말을 했다.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병이 들어 앓고 있었는데, 의원 말이 토끼 간으로 약을 지어 먹으면 능히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용왕이 거북을 육지로 보내 토끼를 구슬려 등에 업고 용궁으로 데려 오라고 했다. 이에 거북이 토끼를 꼬셔 등에 업고 오던 중, 뒤를 돌아보고는 실은 토끼 네 간이 필요해 가는 것이라고 바른말을 해 버렸다. 이에 토끼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요즘 마음이 심란해 간을 씻어 말리려고 바위 위에 늘어놓고 왔다고 하며, 가봐야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거북이 곧이곧대로 믿고 토끼를 태우고 다시 육지로 갔다. 토끼는 거북을 조롱하며 숲으로 달아났다.”
요즘도 굿거리에 등장하는 〈별주부전〉이야기다. 이는 7세기에 이미 한반도에서 유행하고 있었으니, 그 연원이 오래됐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기원전 3세기 인도에서는 부처의 전생 이야기로 전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처는 전생에 원숭이로 살고 있었다. 근처 물가에 악어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악어 부인이 원숭이 심장을 먹고 싶어 했다. 남편은 꾀를 내어 강 건너에 맛있는 과일이 있다고 원숭이를 꼬셔 등에 태우다 강을 건너고 있었다. 원숭이를 등에 업은 악어가 강 중간쯤에 이르러 사실은 너의 심장을 꺼내 아내에게 주고자 한다고 바른말을 해 버렸다. 깜짝 놀란 원숭이가 내 심장은 나무에 걸어두고 왔다고 둘러댔다. 이에 악어는 원숭이 심장을 가지러 다시 물가에 이르고 원숭이는 육지로 달아나면서 어리석은 악어를 비웃었다.”
이야기는 3∼5세기경 중국으로 전해져 〈불설별미후경(佛說鼈彌猴經)〉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악어가 자라로, 거북이로 바뀌었다. 〈수로부인전〉과 〈별주부전〉에 모두 거북이 등장한다. 악어는 중국에도 우리나라에도 귀한 동물이었으니 그렇게 바뀐 것일게다. 〈수로부인전〉은 8세기 버전 별주부전인 것이다. 수로 부인 대신에 토끼로 바뀌면 바로 같은 노래가 된다. 따라서 〈별주부전〉은 기원전 3∼4세기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러다 10세기쯤에 이야기에 주목한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김해다. 김해의 민가에서는 수로부인 노래 일부를 개사해 〈구지가〉라는 이름으로 널리 불렀다. 그 후 고려 문종 때 김해, 즉 금관주지사로 온 지방관이 《개황력》을 집필하면서 민간에 유행하던 이 노래를 〈가락국기〉에 넣고, 다시 일연스님이 그것을 《삼국유사》에 실었다. 구지가는 별주부전을 바탕으로 신라에서 인기를 끌고 가야로 넘어간 것이다. 지금도 부산에는 거북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구포, 구명, 구남, 구락, 등구, 구봉산 등. 거북은 오리 등 새처럼 저승과 이어주는 동물이기도 하고, 십장생에 포함될 정도로 장수한다는 동물로 알려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하기야 요즘은 부캉이 바람에 사람들은 ‘죠스’영화를 잊어버리고 상어까지 좋아하지만.
저자는 친절하게도 300페이지 넘는 이 책을 정리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3∼4세기 한반도 남부에 최고 수준의 문화와 군사력을 가진 곳이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부여, 고구려 등 북방과 연결되고 바다 건너 일본과도 연결되었다. 그들은 수 세기 전 인물을 선조로 의미 있게 포장했으며, 신라보다 오랜 전통을 가진 국가로 올라서게 하려고 하였다.
1세기경 유적·유물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붓이 나왔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라이벌이던 신라의 왕이 되는 석탈해와 싸워 이긴 김수로는 결혼 동맹으로 더 큰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고구려가 대방군과 낙랑군을 몰아내면서 고구려에 밀리게 되는데, 이에 일본과 무역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백제와 연결을 트게 되고, 4세기 후반 백제가 고구려와 반목하는 사이, 일본을 지원해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기 400년 힘을 키운 광개토대왕 5만 군대가 김해까지 내려오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 간다. 이후 신라와 국력이 현격히 차이 나면서 급기야 대가야로 중심이 이동한다. 대가아는 형으로 금관가야는 동생으로 전락한다. 532년 근근이 버텨오던 금관가야는 결국 신라에 항복한다. 그러나 신라는 구형왕 김구해와 아들들을 왕족으로 대접한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이자 구해왕의 아들 김무력은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신라 것으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고, 명문 가문이 된다.
김무력의 내력은 진흥왕 때 세운 ‘단양 죽성비’에 잘 나타나 있다. 무력의 아들 서현은 진흥왕의 아우 숙홀종의 딸과 혼인해 김유신을 낳았다. 아마도 이 무렵에 구해왕의 후손인 금관주지사가 《개황력》을 지어 금관가야 김 씨가 신라 왕실 못지않은 귀한 혈통임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결혼 동맹을 맺은 가운데 7세기 중반, 새로운 전설이 만들어졌으니 금관가야와 신라의 시조가 중국의 삼황오제로부터 나온, 같은 김 씨 조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 시조는 한반도로 넘어온 ‘중시조’라고 한 것이다.
10세기가 되자 신라는 분열의 시대를 맞는다. 호족들이 자신들 조상의 전설을 만들면서 세력을 키웠다. 실력이 있으면 호족이 되고 호족이 되면 위대한 선조 만들기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김수로의 전설에 관심을 가지는 세력이 경상도 지역에 여럿 등장하고, 이런 요구로 여섯 개의 알에서 여섯 가야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수로왕의 전설에 추가되었다. 김해 지역에서 유행한 ‘거북이 노래’를 가져와 수로왕 전설에 덧붙였다. 11세기에는 《개황력》〈가락국기〉에 집어넣은 것이다.
또 다른 세력인 금관가야 왕비 가문이던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8세기 후반부터 전해진 ‘아유타국’이라는 인도 지역을 가져와서는 전설의 격을 높이게 된 것이고, 이 과정에 수로왕은 영원불멸의 이름을 지닐 수 있게 되었는데, 1∼2세기 인물이 11세기에도 언급될 정도가 되었으니 가히 ‘스토리텔링’의 힘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아무튼 내게도 흐를 것 같은 신라사람의 피는, 김유신과 문무왕이 이룬 업적을 ‘삼한일통’이라 불렀다. 사실은 삼한이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으로 알고 배웠기에 고구려를 뺀 것이므로 그 의미가 이상하다. 그러나 고구려를 포함한 것이란 의미라는 것은 신라말 최치원이 태사시중에게 올린 글에서 ‘삼한이 곧 삼국이며,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했다는 것인데, 이는 6세기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자 이들을 진한으로 흡수하면서, 고구려를 삼한에 포함하려고 한 인식이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김유신전〉에는 ‘삼한은 한 집안이 되었고, 백성은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고 한 내용이 있다. 조선 전기까지 삼한=삼국이라는 인식이 여전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틀 동안 금관가야 지역과 경주박물관 등을 답사하고 이 책을 썼지만, 나는 그것을 9일 동안이나 읽고 이 글을 썼다. 참 수고했다. - 10.1 오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