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2
3월14일[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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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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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doH0bUCWIo
[서울대교구 김광두 고스마(전산정보실 부실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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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화내지 않고 남은 인생 여정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제 마음속에서 자주 머리를 쳐드는 것이 젊은 시절 제 인생 여정 안에서 발생한 실수요,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정입니다. 그때 그 순간 왜 참지 못했을까? 왜 하필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 두고두고 후회할까?
특히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 들으니 더 그런 생각이 커집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돌아보니 얼마나 자주 가까운 이웃들에게 불처럼 화를 냈고, 또 그 화를 제어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표현을 안팎으로 자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씩 화를 내고 있고, 요즘은 겉으로는 그런 표현을 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 여전히 그런 과한 표현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요즘 화날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숨기지 말고 솔직히 화를 내고, 분노할 일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 자신을 돌보고 방어하는 노력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껏이라야지, 틈만 나면 흥분하고, 여기 퍼붓고 저기 퍼붓다가는 주변 사람들 다 떠나가고 철저한 외톨이로 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화나 분노의 성숙하고 균형잡힌 발산입니다. 먼저 분노할 일인가 웃어넘길 일인가 식별이 필요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 목숨 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정말이지 억울한 일,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저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그 무엇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그런 순간은 아이큐가 30퍼센트 급하락 하는 순간이니, 절대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냉각 기간, 짧게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한 후, 이성을 차리고 평상심을 회복한 후, 억울한 일에 대응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 순간 기도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성모송을 천천히 세 번 정도 바치며,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주 좋은 노력입니다.
언성을 높이면 지는 것이니, 일단 편안한 목소리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라며 차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나를 내 스스로 변호하고 배려해주는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보니 화를 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중심에 언제나 자리 잡고 계신다면, 앞으로 남은 인생 여정도 분노 한번 하지 않고 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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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AffXjk2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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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결과>
먼저 시간이 좀 부족할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내일 토요일 복음 묵상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요즘 한국 자살률이 더 증가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특히 연예인들의 자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예인들은 대중의 관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 주요 요인이 한국 교육에서 감정의 아픔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에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힘든 감정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을 외적인 것에서 찾게 만드는 문화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겉으로 보이는 의로움입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며 자신들이 의롭다 스스로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면서 자신들이 의롭다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으로 화를 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요, 속으로 음란한 마음을 품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속은 보이지 않는다고 겉으로만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함’입니다. 거짓을 모르는 솔직함, 이것이 자기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 때문이고 그 욕망을 자아내는 자아 때문임을 보게 합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는 진왕(秦王) 영정(嬴政)이었습니다. 훗날 역사에서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기원전 221년에 전국 시대를 평정하고 천하를 손에 넣으면서 “분열된 중국을 하나로 묶어 세상을 다스린다.”라는 큰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업을 성취한 뒤에도 진시황은 더 큰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죽지 않는 존재, 곧 불사(不死)가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권세가 영원하기를 바랐고, 늙고 죽는 일은 “하찮은 범인(凡人)이나 겪는 것”이라고 여기며 “왕 중의 왕인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는 “혹자가 ‘바닷가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머물며 불사약을 지닌다.’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진시황이 연금술사나 방사(方士)를 불러들이며 “과연 누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줄 것인가?” 하고 재물을 아끼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불사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 진시황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던 이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대표적입니다. 이는 유학 경전을 비롯한 책들을 불태우고, 황제의 뜻을 거스르거나 비판하던 학자 수백 명을 생매장한 일로, 절대 권위와 영생의 꿈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려 했던 극단적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편집증적이 되어 곳곳에서 암살자의 위협을 감지하고, 행차 동선을 비밀스럽게 바꾸며 미신과 처방에 의존했습니다. 연금술사들이 조제한 수은(머큐리) 함유 물질을 약으로 먹었다는 설도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어 병을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기원전 210년, 전국을 순행하던 중 병을 얻어 쓰러져 당시 나이 약 마흔아홉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늙음과 죽음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교만이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의 씨앗이었는데,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는 부끄럽고 두려워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사실 그 근본 원인은 ‘뱀’에게 있었으나, 자신이 부끄러운 이유가 외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 때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행복하지 않은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아 헤매다가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 안에 진정한 고통의 원인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밖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방법이 ‘거짓말’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은 애벌레가 참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서 애벌레 기둥의 맨 위까지 오른 것들은 그곳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것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숨기려고 합니다. 그들을 자신들 불안의 원인을 자신들의 행복이 경쟁에 이겨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게 한 자기 안의 적에 두지 않고 외부의 평가에 둡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그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대 사례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가톨릭 신부였던 브렌난 매닝은 한때 알코올 중독과 세속적 인정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사제로 보이려 했지만, 실제로는 중독으로 인해 내적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며 매닝은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정직하지 않은 삶임을 통렬히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 그는 마치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한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너의 완벽함이나 성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매닝은 이 순간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솔직한 자기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참된 자유와 내적 평화를 경험했고, 『아바의 자녀』와 같은 책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삶을 “불완전한 걸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정직하게 서는 삶”이라고 묘사하며,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매닝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완벽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연약하고 상처 입은 걸인 같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면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정확히 아픈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 병을 고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피가 탁해져서 피부에 뭐가 나는데 피부약만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솔직하게 참 행복을 찾는 이들은 성인이 됩니다.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이런 자기 모습을 벌거벗고 솔직하게 주님께 보여드리는 시간입니다.
자기 고통의 원인과 자아를 발견하는 광야의 시간을 가톨릭적 ‘명상’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명상을 하며 자아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겉돌고 맙니다. 광야의 예수가 곧 명상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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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서 ‘회의’를 하게 됩니다. 사목회의, 구역장 회의, 꾸리아 회의, 직원회의, 세대별 모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회의는 ‘시작기도, 안건토론, 공지 사항, 건의 사항, 사제 강복‘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구역장 회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회의가 진행됩니다. 시작기도, 복음 나누기, 안건토론, 공지 사항, 건의 사항, 사제 강복’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복음 나누기는 33년 전 서울대교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2000년대 복음화’라는 주제로 2000년을 복음화의 차원에서 맞이하려고 준비했습니다. 2000년대 복음화의 핵심 과제는 ‘복음 나누기’였습니다. 2000년대 복음화는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의 힘으로’ 시작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1993년에 복음 나누기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서 필리핀으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당시 연수에서 복음 나누기는 ‘Seven Step’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복음 나누기가 7개의 단계를 거쳐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일 단계는 회의에 주님을 초대합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자유롭게 주님을 초대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암송 기도에 익숙해서 자유롭게 하는 기도를 어색해 하지만, 주님을 초대하면서 회의의 주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단계는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세 번 정도 복음을 읽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복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신앙인으로 지내면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삼 단계는 침묵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 겁니다. 엠마오로 가는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 단계는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을 3번씩 선포하는 겁니다. 복음이 이제 나의 마음 안에 머무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오 단계는 마음에 와닿은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그 밭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 복음 나누기는 말씀이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찾은 보물을 나누다 보면 모임이 풍성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말씀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육 단계는 공동체의 나눔입니다. 공동체가 하였던 일, 공동체가 하는 일,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눕니다. 본당의 사목 방침을 알려줍니다. 본당의 공지 사항도 알려줍니다. 공동체의 의견을 본당에 알려주기도 합니다. 칠 단계는 마침 기도입니다. 참석한 인원 중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는 초대 교회가 살았던 신앙의 삶입니다. 30년이 지났지만, 달라스 구역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습니다.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품격보다 자본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고 해도, 좋은 미생물을 주입한다고 해도, 유전자를 변환시킨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규정과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길이도 분명 중요합니다. 남들이 사는 만큼의 수명을 누리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원하는 만큼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강은 바다에 이르듯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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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마태 5,17-20 참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더 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율법을 단순히 지키는 것을 넘어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여 완성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5,21)라는 율법 조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본디 율법이 지키고자 하였던 가치가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육체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으니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까닭 없이 심하게 모욕하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살인이 될 수 있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율법까지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교회도 신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을 근거로 주일 미사는 빠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말 그대로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에만 몰두하고, 미사에 다녀와서는 온종일 온갖 걱정과 근심에 싸여 있다면 어떠할까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계명의 본뜻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주일 미사를 드리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롭게 일주일을 시작할 수 있는 영적 위로와 힘을 얻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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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신다. 예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이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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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26)
1)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예로, 21절-26절에서는 십계명 제5계명을 실천하는 일을 말씀하시고, 27절-30절에서는 십계명 제6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 제5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분노까지 모두 없애야만 제5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간음죄를 안 짓기만 하면 제6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음욕까지 모두 없애야만 제6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위선자들은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분노는 그대로 놓아두고,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위선자들은 “나를 화나게 만든 저자들은 죄인들이고, 저자들을 죽이지 않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다.”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미움과 분노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십계명을 겉으로 보이는 행동으로 지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지키는 것과 ‘온 삶으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그 증오심과 분노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보는 일입니다.
2) 23절-24절의 말씀은, ‘내가’ 누군가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의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그 형제’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은, ‘내가 그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그가 나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즉 그에게 가서 내가 용서를 청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를 하는’ 일만 생각하고,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은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살면서 한 번도 용서를 청할 일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앞의 21절-22절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의 폭언과 모욕과 분노 때문에 그가 큰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큰 고통을 겪고 있고, 몹시 힘들어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폭언과 모욕과 분노 때문에 정신적으로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된 것.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위선자들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라는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하면 누구든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다고 해서 나는 잘했고, 잘못은 그쪽에만 있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아니라 ‘그 형제’를 기준으로 삼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랑’은 항상 ‘나’를 기준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너’를 기준으로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편안한 것과 ‘양심’이 편안한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의 양심은 늘 살아 있고, 뭔가 잘못되었을 때 양심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바로 느낍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양심이 마비되어서 양심의 소리를 못 듣거나, 양심의 소리를 들어도 무시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너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먼저 가서 용서와 화해를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에서는 자존심을 눌러야 하고, 누구의 잘못이 더 크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화해는 항상 ‘내가 먼저’ 청해야 합니다.
3) 25절-26절의 말씀은, “회개를 미루지 마라. 지금 당장 회개하고 보속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법정으로 가는 도중’은, 우리 각자의 ‘지금의 인생’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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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처럼>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처럼>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
하느님께
가는 길은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길이니
하느님을
품는 마음을
하느님처럼
품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건네는 눈길을
하느님처럼
건네는 눈길로
하느님께
내미는 손길을
하느님처럼
내미는 손길로
하느님께
내딛는 발길을
하느님처럼
내딛는 발길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하느님처럼
함께하는 삶으로
하느님께
가는 길은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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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세상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그러한 의로운 사람들보다 악인들이 잘 보이고, 또 악인들이 저지른 악행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께서는 왜 악인들의 악행을 가만히 두고 보시는가?’ ‘하느님께서 계시기는 한 것인가?’와 같은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의문과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독서 말씀인 에제키엘 예언서가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죽음이 아닌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 또는 ‘회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현재를,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은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상 여정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라, 지상 여정을 마친 뒤에도 지속되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삶을 향하여 우리는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영원한 생명에 올바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악인과 그들의 악행이 만연하는 세상 때문에 하느님을 불신할 수 있습니다. 의인보다 악인이 더 성공하는 모습에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가 사라짐을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시간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삶의 방향이 악이 아닌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특별히 기울이는 시간이 사순 시기입니다. 악이 아닌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가려는 우리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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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한준 롯젤로 신부님]
내 의로움의 기준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마태오 복음 5장 20ㄴ-26절)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앞에? 아니 안에!” 스치듯 지나간 TV 광고 속 문구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왜 갑자기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광고 문구가 떠올랐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추구하는 의로움이란 눈 ‘앞에’ 놓인, 글로 적힌 율법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살인하지 않았음에 만족하지 말고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해서도 안 되는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하고 세밀한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몸이 기억하는 형식적인 예배보다 곰곰이 생각해야만 떠오르는 형제에 대한 원망이 더 중요하니,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눈 ‘앞에’ 놓인 율법이 아니라 형제의 마음과 자신의 내면을 면밀히 살피는 세심한 성찰, 그리고 구체적인 화해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언명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인 하늘 나라는 눈 ‘앞에’ 있는 율법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과 내면 ‘안에’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의로움을 능가하라는 말씀은 형식과 규정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신의 내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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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회개>를 이야기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키엘 예언서 18장 21절)
악인이건 의인이건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삶의 과정 안에서 비록 죄악에 물들었어도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모든 이에게 주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십니다.
<"공정과 정의의 실천">
회개의 증거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정과 정의의 실천으로 표현됩니다. 가던 길을 돌이켜 주님께로 방향을 바꾼 이는 그분의 마음이 바라시는 것을 함께 지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불의하고 불공정한 기득권자들에 의해 가난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 정의와 공정만이 희망인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연민의 강물이 늘 흐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제키엘 예언서 18장 26절)
회개하는 악인에게 그처럼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지만, 한때 의인이었다가 도중에 주님의 길을 저버린 이에게는 매우 단호하십니다. 한때의 의로움이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돌아서되 주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 주님께서 반기시는 진정한 회개가 되겠지요.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24절)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혀 원망 받을 일을 저질러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하느님 앞에 나아오는 이들에게 일단 멈추라고 하십니다. 지금 주님께 중요한 건 예물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입니다.
사람에게 저지른 악행을 주님께 드리는 예물로 무마하려 한다면 그건 예물이 아니라 뇌물일 겁니다. 주님께서 아주 역겨워하시는 모습이지요. 주님께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있는 그 형제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구체적 노력이 우선입니다.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25절)
누군가에게 억울한 마음이 들게 해서 고소를 당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세상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고소한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고 권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행사하는 갑질을 당연히 여기는 세상에서 하느님은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 몸부림으로 꿈틀거리는 이들의 편에 서는 분이십니다.
권력으로든 재물로든 신분으로 스스로 세속에서 칼자루를 쥔 쪽에 가깝다고 여긴다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사고와 언행을 주님 마음에 비추어 세심히 성찰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가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그 길을 충실히 걸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죄인은 죄의 길을 돌이켜 주님을 향함으로써 살 수 있습니다. 불결하고 부정하고 낡은 자아를 벗어버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 입는 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바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한없이 약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약자에 대한 연민의 감수성을 회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 때문에 우리 마음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억울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 다가가고 경청하고 연대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사순절에 화해와 일치로 주님께서 반기실 가장 값진 예물을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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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91년,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운전면허 따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위해 휴학을 했는데, 입대 영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의 군 생활은 30개월이라 휴학 후 6개월 이내에 입대하지 못하면 동기들보다 한 해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기병은 좀 더 일찍 입대할 수 있다는 말에 운전학원에 등록한 것입니다.
필기시험을 쉽게 통과하고 운전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쳐주는 강사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반말과 욕을 섞어 이야기했고, 약간의 실수에도 가차 없이 화를 냈습니다. 이렇게 욕을 먹어가며 학원에 다녀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꾹 참았던 것은 면허를 획득해야 군대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그때 면허를 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갑작스럽게 입대 영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면허를 따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학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군대에 가는데, 가기 전에 그렇게 욕먹으면서 지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강사를 더 이상 보기 싫었습니다. 반말과 욕을 하는 그 강사가 너무나 미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신부가 되고 나서야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만약 1991년에 계속했다면 훨씬 쉽게 면허를 취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움의 감정 때문에, 또 자존심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계속되지 않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또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내세워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의로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의로움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이 의로움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구원받기 싫으면 말아라.”라고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사랑의 의로움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정한 의로움을 간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다가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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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것도 세심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일에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안식일에 주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자,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던 사실 말입니다. 이렇게 세심하기까지 한 그들의 율법 정신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로움은 그들의 율법 사랑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움에 관한 예화로 예물을 바치려는 사람과 법정으로 가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두 예화를 통해 주님은 ‘지금’이라는 말을 힘주어 우리에게 하고 계십니다.
예물을 바치기 전 원망 품은 사람이 생각나면 ‘지금’ 가서 화해하라 하십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 고소한 사람에게 ‘지금’ 타협하라 하십니다.
‘지금’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다면 ‘지금’ 화해하고 타협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미루지 말고 ‘지금’ 사랑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보는 의로움의 기본이며 이런 의로움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안내할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들려주고 있습니다.
‘의로움’ 그것은 ‘지금’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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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란....
인간의 자유는 여러 조건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랑을 담으면 특별해진다 중-
와타나베 가즈코
무엇을 가져야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없어야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대의 환경에서 그대가 그대의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음이 바로 그대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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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오. 5,21-22)
구약성경에서 금지하는 많은 규정을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집약시키심으로써 구약의 말씀을 더욱 심화시키셨습니다. 특히 사랑하는데 걸림돌인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 중의 하나이기에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입니다. 그리고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 단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줄 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 슬픔, 두려움의 감정처럼 우리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건강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불쾌하고 화를 느끼도록 우리는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화는 보통 6세 이전에 경험한 화가 우리 안에 억눌려 있다가 지금 비슷한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게 되면 표출되는 것입니다.
분노 자체는 우리 삶에 필요한 열정과 힘의 원천으로 하나의 선물이지만, 분노를 우리가 억누르거나 파괴적으로 표현하면 사랑스러운 인간관계를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됩니다. 분노를 파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자라면서 어릴 적부터 체득하여 사용하고 있는 유치한 방법들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좌절했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자존감에 위협을 받았거나 혹은 신체,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고 확신하는데서 생깁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나 환경은 그런 우리의 감정 상태를 모르고 관계를 할 뿐입니다.
건강하게 분노를 표현한다는 것은, 첫째 우리의 화를 느끼고, 둘째, 느끼는 화의 환경이나 뿌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셋째, 생각한 자신의 한계와 느낌 자체를 말로 이야기하고, 넷째, 나의 상처를 모르고 관계한 형제와 자신의 한계를 수용함으로써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는 만큼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이해하게 됩니다. 형제에게 파괴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만큼 우리는 사랑하는데 미성숙하지만, 건강하게 자신의 분노를 말로 표현할 줄 아는 만큼 우리는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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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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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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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명품 인생>
-사랑-회개-겸손-지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어제는 참 각별했던 체험의 날이었습니다. 강론 제목도 오랜만에 “명품인생”을 선택했습니다. 10년 이상 보관하던, 어느 좋은 분이 선물했던 명품 손목 시계를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수도자 신분상 차기가 불편했고 한번 수리비가 20만원이 들자 놀래어 아예 차기를 포기했다가 차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시계가 아니라 명품시계가 있듯이 똑같은 인생이 아니라 명품인생도 있겠구나, 이제부터 명품인생을 살아야겠다 생각하며 차기 시작했습니다. 아, 또 90전후로 세상을 떠난다 예상했을 때 앞으로 찬다한들 10년 조금 넘을수 있겠다 생각하니 마음도 편안했습니다. 과연 보기도 안정감이 있고 느낌도 이래서 명품시계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어제 마침 옛 초등학교 교사 시절 동료 여교사와 동행한 한 분의 방문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장 퇴임 후도 여전히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마침 전시회를 마치고 “사랑을 노래하리라”라는 아름다운 그림 작품을 배경한 벽걸이 시계도 선물 받아 집무실 벽에 걸어 놓으니 잘 어울렸습니다. 명품 손목시계에 벽걸이 명품시계 그림이 우연의 일치처럼 저를 참 행복하게 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리라(song of love)”라와 연상되어 제가 좋아하는 사제서품미사시 화답송 후렴도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2ㄱ)
수도원 산책시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때 참 행복이요, 말그대로 명품인생의 실현이요 수도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이어 두분 자매님께 드린 격찬의 덕담이 생각납니다.
“두분은 지금까지 명품인생을 사셨음을 축하드립니다! 산대로 살고 산대로 죽습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지금까지 사신대로 살것이고 내일도 그렇게 사시겠고 내일은 걱정안해도 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인생그림으로 하면 완성단계이니 하루하루 명품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마침 ‘사순시기 다짐’이란 글도 ‘명품인생’으로 바꿔 홈페이지 묵상란에 올렸고 집무실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거룩한
사순시기
지상에서
주님의 순례자로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말하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공부하고
많이 나누고
몸은 가볍게
맘은 즐겁게
눈길은 주님께
욕심없이
초연히 영적으로 살자
지상에서 주님의 순례자로”<2025.3.13.>
이렇게 살 때 명품인생이다 싶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사순시기 명품인생을 살아볼 절호의 기회입니다. 명품인생!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누구나 결심하여 실행하면 존엄한 품위의 명품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수도형제들은 물론이요 어제 방문했던 옛 초등학교 친구교사를 비롯하여 명품인생을 살고 있는 도반들도 꽤 많습니다. 이런 명품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을 보면 기분도 좋고 마냥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항구히, 한결같이, 끊임없이, 즐거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면 명품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명품인생을 살라고 선물로 주어진 한번뿐인 인생입니다. 어떻게? 답은 간단합니다. 사랑, 회개, 겸손, 지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회개-겸손-지혜가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회개의 삶이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요 이런 삶이 누적되면서 명품인생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명품인생을 살아가는데 결정적 참고가 됩니다. 복음 서두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사랑과 회개의 삶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때 하늘나라의 명품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체적 삶의 방식으로 여섯 개의 대당명제중 첫째번이 제시됩니다. 사랑의 회개를 통해 순수한 마음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마음이 될 때 성내지 않고, 말로서의 살인과 같은 “바보!”, “멍청이!” 란 말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예물을 바치기전 신속히 형제들과 화해함은 물론 어리석은 소송을 피하고 지혜롭게 화해로 끝맺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말씀도 명품인생의 지혜로운 삶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오늘부터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요 구원의 기회입니다. 과거에 못살았어도 지금 잘 살면 구원의 명품인생이요, 과거에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실패인생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하느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누구에게나 선물같은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느님은 어제의 과거를, 내일의 미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현재를 보십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명품인생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ㄴ).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과 회개, 겸손과 지혜의 명품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는 자타가 인정하는 명품종교요 명품교황에 또 명품성인들도 많습니다. 과연 우리는 명품신자, 명품수도자, 명품사제, 명품주교, 명품수도원, 명품원장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명품신자로서 향기로운 삶을 살 때 성소자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명품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회개, 겸손과 지혜의 명품인생을 사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속이 있네.”(시편 130,7ㄴ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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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사랑 때문에(Propter amorem Dei)>
오늘 에제키엘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아무리 악인이어도 죽는 것을 바라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서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요즘 제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대지 않겠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불안케 하고 불행하게 하는 자들이고, 그들만 없으면 많은 이가 행복할 것이고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회개하고 살게 되기를 바라지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데 니네베인들이 회개하여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요나처럼 저도 그들이 회개해 살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죽게 되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고 다만 내 앞에서 사라져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데 그의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악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압도적이기에 그 죄와 악이 아무리 커도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크지 않으면 우리는 미워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사랑이 그의 악보다 너무나도 작으면 도리어 악에 압도되어 악에서 그를 빼내지 못하고 악과 함께 그마저 없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당신 제자라면 우리 의가 바리사이의 의를 능가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바리사이의 의는 단죄하는 의에 불과하고 죄인을 용서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이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바리사이의 의는 율법의 의를 지키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의는 단죄하는 의일 뿐 아니라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최소한의 사랑은, 누굴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런 죄, 곧 살인과 같은 큰 죄만은 짓지 말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최대한의 사랑은 남에게는 성내거나 욕하는
그런 작은 죄조차도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내게는 원수가 될 정도로 너무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할 때 가능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고, 인간적인 힘으로는 이런 사랑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하느님께서 이런 사랑하기를 원하시니 하려는 마음도 먹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 그 힘으로 할 수도 있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죄를 짓고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 드리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갈 때는 반드시 화해하고 난 뒤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에게 갈 때 동생 돈 떼어먹고 그 돈으로 부모에게 갈비 사서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기 전에 해야 할 화해는 내가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만이 아니라 내게 죄지은 사람과의 화해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내게 너무 큰 죄를 지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다시 말해서 그가 용서를 청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주 얘기하듯 하느님 사랑 때문에(Propter amorem Dei) 하기 싫은 사랑도 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못 할 사랑도 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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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ㄱ)
<능가하는 의로움!>
오늘 복음(마태5,20ㄴ-26)은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던 '율법을 능가하라'는 말씀으로, '율법을 완성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능가하는 의로움!'
'살인 금지 계명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칠죄종의 하나인 '분노와 화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규정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 6,6)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항상 오늘 회개하는 것'입니다. '항상 오늘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어제의 나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 실천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항상 오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한 어제의 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항상 오늘 죄를 뉘우치고 돌아가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항상 오늘 첫째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능가하는 의로움'이라고 묵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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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형제를 다시
바라보는
은총의
사순이다.
새로워지는
삶이란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삶이다.
화해하는 삶을
다시 배우는
화해의
시간이다.
기도의 관계란
다름아닌
화해의 관계이다.
화해가 생활이고
화해가 기도이다.
옳고 그름의
얼어붙은
관계를
다시 녹이는
화해이다.
하느님 나라의
희망은 화해로
흘러간다.
화해는
과거 안에
갇힌 우리가
과거에서
빠져나와
오늘의 사람을
다시 만나는
현실의
기쁨이다.
비로소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은총이다.
모든 사랑의
역사에는
화해가 있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화해를 일깨워
주신다.
정지한 마음이
다시 흘러가는
화해이다.
마음과
사람을 다시
얻는 화해이다.
화해는
마음을
건드리기에
실패와
어울리지
않는다.
복음의 심장은
화해의 심장이다.
화해는 심장 뛰는
하느님의 것이다.
화해의
뜨거운 눈물이
십자가의
화해처럼
아름답고 기쁜
소식임을 믿는다.
사람과 사람
형제와 형제
사이에는
하느님을 닮은
화해가 있다.
화해보다
더 큰 기도와
마음은 없다.
다시 찾고
다시 살게하는
인격과 인격의
소중하고
진실된
화해가 우리가
갚아야 할
가장 뜨거운
마지막 한 닢이다.
마지막 한 닢의
화해가 서로를
살리는 공동체의
심장임을 믿는다.
다시
화해는 형제를
향하고 형제는
다시 화해를
향한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화해의
기도이다.
하느님의
방향은
옳고 그름까지
내려놓는
사랑의
화해이다.
화해가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임을
믿는다.
화해를
지고가는
사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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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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