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절한 사죄’ 이끌었던 日 전후역사학 쇠퇴
1955년 일본 사회당의 전성기 당시 전당대회 광경(위 사진). 전후 역사학은 일본 내 진보운동의 우군이었다. 그러나 이론과 교조에 매여 끝내 혁신을 거부한 역사학은, 만년 야당에 만족하다가 결국 몰락한 일본 사회당과 닮았다. 아래 사진은 1960년 규슈의 미쓰이미이케 탄광 쟁의 당시 모습. 필자 제공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소위 ‘의식화 교육’에서 사회과학과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 그중에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시바하라 다쿠지(芝原拓自) 논쟁’이란 게 있었다. 자본주의 이행 문제를 둘러싼 ‘모리스 돕-폴 스위지 논쟁’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일종의 ‘쓰키다시(곁들이찬)’로 논의된 적이 있었다. 요점만 말하자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추동한 힘인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압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논쟁은 1960년대 일본의 이른바 ‘전후(戰後) 역사학자’들이 벌인 것이었다.》
韓 ‘운동권 의식화’ 영향 준 日사학계
전후 역사학을 이끈 대표적 사가인 도야마 시게키. 필자 제공
1980년대라면 도야마(1914∼2011), 시바하라(1935∼) 두 사람 모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웃 나라에서 자신들의 연구가 저렇게 활용(?)되고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저 생몰연대를 보니 일본은 정말 장수의 나라다). 사실 당시 운동권에서 탐독하던 책들은 거의 다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이었다. 영어나 다른 유럽 언어로 쓰인 책들도 일본어를 중역(重譯)한 것들이 많았다. 그 운동권 학생들이 지금은 이 사회의 지배자가 되어 ‘노 저팬’도 하고, 한일 협력 방침에 대해 요란한 현수막도 내걸지만, 그때 ‘문제 서적’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운동권만 그랬던 게 아니라 일부 학계도 그랬다. 일본의 연구 성과에 의지한 글을 쓰면서도 그 정도를 축소하거나 아예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방송 프로그램이나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잠깐 신문사에서 일할 때 선배들은 ‘나와바리(담당구역)’ ‘하리코미(잠복근무)’ ‘미다시(제목)’ 같은 용어를 태연하게 썼다.(지금은 없어졌겠지?) 건설현장에서 쓰이던 ‘도키다시(인조대리석)’ 같은 말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요컨대 전문용어에는 20세기 말까지 ‘일제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말만 남아있었던 게 아니라 그 말이 기반하고 있는 시스템이 다분히 일본식이었다.
왜 그랬을까? ‘문명의 힘’ 때문이다.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집어삼킨다. 그 강함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 노력을 거듭해서 쌓아 올린 것이다. 약한 놈이 아무리 억울해도 그 정도의 축적을 이루지 못하면 강한 놈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러면 그 힘의 축적은 어디서 배우나?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자에게서다. 그게 가장 쉬운, 빠른, 그리고 피하려 해도 피하기 힘든 길이다.
황국사관에 반발한 ‘강좌파’
전후역사학을 얘기하려다 옆으로 많이 샜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의 역사학은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건설, 나아가 제국주의적 팽창을 근저에서 지탱해왔다. 이에 대한 반발은 역사학 바깥,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훗날 ‘강좌파(講座派)’라고 불리게 될 이들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마르크시즘의 역사발전 단계론을 받아들인 후, 메이지유신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했다.
메이지유신을 절대주의 단계에 위치 짓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편찬한 책이 유명한 ‘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다. ‘강좌파’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반면 메이지유신을 불완전하나마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한 것으로 보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그룹이 ‘노농파(勞農派)’다). 이 연구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 공산당원이었으며, 공산당은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 ‘혁명적 실천’, ‘변혁과업’이라는 명분으로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다.
황국사관 수립에 종사한 역사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료 편찬 사업에 매달리며 정치와 거리를 두고 때를 기다렸다. 전후역사학을 이끈 근대사가 도야마가 대표적이다. 그는 24세이던 1938년 유신사료편찬사무국이라는 정부기관의 편찬관보(編纂官補)로 취직했다. 유신사료편찬사무국이 메이지유신과 관련된 방대한 사료편찬 사업을 마무리하고 황국사관에 입각한 통사 ‘유신사(維新史)’(전 5권, 부록 1권) 간행에 착수한 해다.
그는 황국사관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거기서 방대한 양의 사료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3년 후인 1951년, 37세의 나이에, 이제는 고전이 된 ‘메이지유신’을 간행했다. 38세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펴내기 1년 전이었다.
이후 일본 지성계는 이 두 책을 등대 삼아 진보 마르크시즘과 근대주의(리버럴)가 서로 경쟁하며 판도를 양분해왔다. 역사학계는 하루아침에 분리수거된 황국사관을 대신하여 ‘강좌파’를 계승하는 사적 유물론자들이 주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군국주의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 연원을 메이지유신의 절대주의 체제 성립에서 찾았다. 제국 일본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니 피식민지민들에 대해서는 동정적이었다. 소위 ‘양심적 일본지식인’들이다. 역대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에 대해 감히 헛소리를 못 하고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통절한 사죄와 반성’을 표하게 된 데에는 한국 외교관들과 함께 이들의 역할이 컸다.
현실 직시 못하고 활력 상실하다
그런데 지금 그 거대했던 전후역사학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일본 유학 시절 대부분의 일본 학생들은 촌락사 같은 사회경제사를 연구 주제로 삼고 있었다. 사회경제사 전공의 교수조차 ‘좀 다른 주제도 연구하라’며 탄식조로 말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분이 그런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 중 한 명이었겠지만, 그도 걱정할 정도로 연구 풍조가 경직되어 있었다. 학위 통과와 교수 자리를 꿈꾸는 학생들이 알아서 일렬종대로 줄 섰던 것이다.
그때가 1996년,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후였는데도 이런 상태였으니 그 전 상황은 짐작할 만하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에서 과감히 독립하지 못하고, 방법론의 혁신을 거부하며 수십 년간 안주하는 사이에 전후역사학은 서서히 그 활력을 상실해갔다. 일반 사회는 물론이고 인근 학문 분야에도 새바람이 불고 있었거늘 전후역사학은 요지부동, 변화를 거부했다.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소설이 전 국민의 역사 인식을 사로잡는 걸 보면서도 ‘역사학의 주인은 우리’라며 NHK 대하드라마에 점잖게 고증, 자문하는 걸로 만족해했다. 그 모습은 오래된 이론과 교조에 얽매여 혁신을 거부하고 만년 야당을 ‘즐기다’ 몰락한 일본사회당과 닮았다. 역사의 신은 누구의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고 허공에서 팔랑거리는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분리수거를 위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