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 탈출 사건
얼룩말 한 마리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다.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한 얼룩말 ‘세로’에 관한 얘기다. 서울 시내 차도를 달리는 얼룩말 동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왔을 때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목격담이 계속 올라오고 어린이대공원을 탈출한 얼룩말이라는 뉴스를 보고서야 믿을 수 있었다. 특히, 골목길에서 오토바이를 탄 남자와 얼룩말 세로가 마주한 사진은 현대미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경하고 강렬한 이미지였다. 얼룩말 세로는 3시간 30분 동안의 일탈 끝에 마취총을 맞고 어린이대공원으로 복귀했다. 초원을 달려야 하는 얼룩말이 어쩌다 서울 골목길을 헤매게 됐을까. 세로가 어린이대공원을 탈출한 이유가 얼마 전 부모를 잃은 충격 때문일 수도 있다는 사연이 알려지면서 세로를 위로하는 글이 SNS에 많이 올라왔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얼룩말 세로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이대공원을 찾은 부모들 덕분에 주말 어린이대공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얼룩말 세로를 보면서 어린 시절 봤던 드라마 한 편이 떠올랐다. ‘베스트셀러극장’이라는 단막극이었는데 한강에 고래가 나타났다는 설정의 드라마였다. 설정이라기보다는 실제 한강에 고래가 나타났던 적이 여러 번 있다. 조선시대에도 기록이 있고 가까운 근래에는 2006년에 한강 반포지구에서 상괭이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 아무튼 드라마는 한강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이 우연히 고래를 목격하게 된다. 아마도 바다에서 길을 잃은 고래가 한강 상류로 헤엄쳐 올라왔던 것 같다. 연인은 강가에 쓰러져 있는 고래를 강물로 밀어 넣어줬고 고래는 유유히 헤엄쳐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너무 신기한 일이라 주변에 떠들고 다녔는데 아무도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폐쇄회로(CC)TV도 없었으니까 남자는 억울했지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여자 친구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두 사람은 사내연애 중이었고 아직 비밀이었기 때문에 여자는 증인이 되길 거부했다. 남자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왜 이렇게 고래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남자는 자기가 본 사실을 사실이라고 하는데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답답했다.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은 헤어지게 되고 남자는 자신이 본 건 고래가 아니었을 거라고 자신에게마저 거짓말을 하면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어쩌면 이번 얼룩말 세로 탈출 사건도 스마트폰이나 SNS가 없었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집에 가는데 우리 집 앞에서 얼룩말을 만났다니까!”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이렇게 세상이 변했고, 동영상 증거가 있고 CCTV 자료나 증거 사진이 있는데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옛날이 훨씬 살기 좋았다고 얘기하겠지. 그 시절이 거짓말하기도 쉽고 조작이라고 우기기도 편했을 테니까.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