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마시게
나 모르는 내 가는 길을,
소리꾼 앞세우고
하늘가 흩어지는 요령소리 이끄는
그 어디 으슥한 곳에
지붕도 없이 허름한 땅
한 평 내 집 있겠지.
동지섣달 그믐밤
삼단 같은 긴 머리 풀어 헤치고
울어줄 사람은 없어도
내 가는 길
설익은 보리 밭길에
코스모스는 피지 않겠나!
울지 마시게
살아서 다 못한 말
산조가락 읊조리는 목멤
들려도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나 두고 돌아오는 길에
흩어지는 바람 소리
내 작별 인사인 줄 아시게
푸른 하늘 지붕 삼아 누워
그대가 불러주는
그대 맘 담긴
다정한 노래 한 곡조
들을 수 있으면 족하겠네
그대 다시 만날 때
내 알아볼 만큼만 그리워하시게
망자의 서(書) ㅡ 백제경
그대 떠난 빈 자리에
계절이 물들어간다.
근심이 깊어진 하늘은
퍼렇게 멍들어가고
저녁 해가 뿌려놓은 노을은
가슴 절절한 그리움
한껏 붉은 무거운 가슴 때문에
바다는 끝없이 철렁거려야 했다.
짙어가는 어둠속에선
달빛이 서늘하게 비수를 꽂고
가는 한숨마저 숨을 죽여야만
풀벌레 소리에 묻혀 들리는
적막한 그대 속삭임
이별 앞에선 누구나
벙어리 냉가슴을 꾹꾹 눌러야 한다.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그대 아는가?
우는 것 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웃는 것이란 걸.
이별 앞에서 ㅡ 백제경
넌 내게 밉지 않은 추억
가슴 아픈 미련
웃음소리 귓전에 맴돌고
눈에 밟히는 이름
법당 모퉁이 돌담 햇살 같은데
어느 때인들 잊을까!
그저 생각만 하여도
목메어 먹먹한 가슴
세월 흐를수록
손톱 밑 박힌 아린 가시
잘 있느냐?
내가 없어도 늘 푸르더냐?
바람소리, 물소리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시도 널 잊은 적 없나니
너도 놓지 말아라!
널 생각하면
목젖까지 타는 듯 애련(哀戀)
아! 애별리고(愛別離苦)...
꿈이 멍든 산하여!
그리운 산하에 부침 ㅡ 백제경
산길 돌아서면
저 멀리 아스라한 모습
굽은 허리 곧추세워
이마에 손대고 바라보는
내 어머니 주름살 위로
퍼지던 저녁 놀
보이지 않은지 오랜 뒤에도
차마 돌아서지 못해
서성이며 오가는 걸음걸음
스치는 바람 소리
사위어 가는 촛불 아래
깊어가는 야삼경
옷섶을 적셔가며
기도하는 애처로운 모습
가슴에 박힌 못이 되어
서릿바람 찬 날
한달음에 달려와선
먼발치에 그리움만 쌓아 두고
마지못해 돌아서 가는 뒷모습
섣달그믐 내 마음 같다.
회상 ㅡ 백제경
바다는 잠들고 싶다.
모래톱을 베고
건너편 무인도에
지친 두 다리를 걸쳐두고
헝클어진 머릴 쓸어
갯바위에 말리면서
바다는 언제나
고요히 꿈꾸고 싶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달려와
밀어내도 또 밀려오는
성난 파도 속에서도
바람아래바다 해송에 묻어둔
먼 옛 기억을 회상하며
단잠을 자고 싶다.
잠들지 못한 서해
겨울바다엔
수평선 먼 하늘가
토해놓은 검붉은 노을에
엄동설한의 찬바람도
인적을 끊지 못했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속으로만 울었다
파도 때문에 잠들 수가 없어서
사람들의 발자국에
까맣게 멍든 바위를 안고
깊고 깊은 해조음으로 울었다.
겨울바다에서 ㅡ 백제경
..
제게 있는 몇 안되는 시집들 중에
오늘은 이 시인의 시.. 몇개가
유독 징하게 오늘의 제 가슴에 와닿아
올려봅니다. ...^&^
첫댓글 옴마야..야금야금 잘 토막내 먹어야 하는데 이리 한꺼번에....안개 낀 저녁...슬픈 영혼 그만 길을 잃게 되네요...ㅎ
이 아침 징하게 느껴 지네요....후~ 오늘도 살아야 하는데.....
우는것보다 더 가슴 아픈게 웃음이라는 말이 ....... 가슴 징하게 하네요 .... ^&^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시도 널 잊은 적 없나니 너도 놓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