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예술신문 선임기자김태민]“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을 왜곡하여 조선 정벌의 명목을 세웠다. 사까와 탁본을 토대로 역사 조작을 합리화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일본이 과거에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찬구 교수는 지난2월 10일 오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139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진실’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이찬구 교수는 대전대학교 철학박사로 30여 년간 주역, 천부경, 동학(東學) 등을 연구했고, 가톨릭대학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으로 동북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이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죽고 나서 2년 후 부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뿐 아니라 고구려의 기원, 통치시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교수는 먼저 고구려의 기원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고죽국, 북부여, 한사군의 세 가지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의 기원에 대해서 “고구려는 B.C.37년에 갑자기 출현한 나라가 아니다. 난하 하류 고죽국(B.C. 5~3세기)의 멸망 직후 그 터에서 고구려족이 발생했다. 일부는 한사군에 강렬하게 저항하고, 일부는 요동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고주몽)은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후손이다.”라고 말했다.
고구려 멸망 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의 손에 넘어갔다가 발해가 되찾았으나 다시 중국에 넘어가 1880년대에야 발견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비문에 대한 연구를 일본이 먼저 착수했다는 것이다. 1883년 일본 중위 사까와는 탁본(쌍구가묵본)을 참모본부에 전달하고 일본은 이를 5년간 연구했다. 이 비문이 군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모종의 침략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역사 왜곡
광개토대왕릉비의 해석을 놓고 지금까지 한·일 양국 간의 논쟁은 팽팽하다.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이를 문제의 신묘년 기사라고 부른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 )新羅以爲臣民’
일본군부는 이 문장을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학설은 지금까지 일본의 정통학설이 되어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하고 있다. 이런 해석에 반대를 한 분이 정인보이다.
이 교수는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이 문장의 주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여 왔으므로 고구려가 공략하여 왜를 무찔렀다’고 해석했다.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해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달리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국경(강역)을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교수는 본인이 연구한 해석을 덧붙였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단군의 오랜 족속민이다. 고구려는 이들 두 나라와 오래 전부터 조공(선린)관계를 유지해 왔다. 신묘년(391)에 왜적이 (신라를) 내침(來侵)하므로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擊破) 하였으나 백제가 (왜적과 연합하여) 잇달아 신라의 국경(國境)을 쳐서 (자기의)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하므로 영락 6년 병신년(396)에 태왕(太王)은 몸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왜적(倭賊)과 백잔(百殘)을 토벌(討伐)하였다."
지금도 일본은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끈질기게 주장
이 교수는 “일본이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5년 간 연구한 이유는 바로 조선 정벌의 명목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비문을 왜곡하여 야마모토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일본의 왜곡된 해석에도 불구하고 국내 학자들은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식민사학이 뿌리깊게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역사의 진실을 보존하고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민사학자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에도 광개토대왕을 ‘광개토왕’이라고 낮추어 부른다며, 이는 이병도 식민사학이 청산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식민사학의 청산은 오로지 시민의 단결된 민족사관인 ‘얼사관’에 의해서만이 무너뜨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얼사관이란 정인보가 밝힌 조선의 얼에서 인용한 말로 이교수가 평소에 사용하는 표현이다. 최근 이교수는 겨레얼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집을 편찬 발간하였다.
식민사학 청산을 위해 바른 ‘얼사관’이 필요
광개토대왕은 1600년 전 아들 장수왕이 쓴 비문에서 “내가 죽은 뒤에는 묘를 잘 지켜 깨끗이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뜻을 지키지 못했다. 광활한 벌판에 홀로 역사의 진실을 외치고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역사적 진실을 세계 속에 바르게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일제의 위안부 왜곡도 심각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시작된 것이 이 비문의 조작과 왜곡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