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떤 곳인지 잠시 잊었어요
김효선
유성이 베개 밑을 지나갔을 거야 그러니까
삼류 영화관에 흘린 열쇠를 주우러 가지 않았더라면
의도는 잘못 친 빗금 같은 거지만 첫,
단추는 어렵게 교집합을 발견한다
주머니에선 몰래 안개가 시들어가고
오줌을 누던 눈빛이 자주 유령과 마주친다거나
분명 알던 사람인데 모르는 둘이 앉아 있을 때
깜박 졸던 별들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여기가 어딘가요 왜 먼지처럼 쌓여 있는 거죠
가장 먼저 입을 연 검지는 쓸데없이 타협적이라서
눈발에 쓰러지는 러브스토리나 찍자고 말하지만
모르게 흘린 단추처럼 부러진 준 모르는 마음이
천천히 녹슬어 눈치챌 수 없는 수도꼭지처럼
아무도 모르게 똑똑 바닥을 두드려보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가 내가 다녀간 그곳인지 잠시 잊고 있었요
병목현상
길쭉한 가방에 머리를 잔뜩 집어넣었다
그래 봐야 옥수수 알갱이겠지만
잘 말린 문장을 수북하게 집어넣으면
말랑하게 익은 지구를 건져낼 수도 있다
옥수수를 싫어하면 옥수수가 따라온다
그 긴 수염으로 내 발끝까지 핥는 꿈
혓바닥을 실험대상으로 삼은 뱀이
내 팔목을 물었을 때는 그저 바나나 껍질이라고 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왼쪽으로 수군대는 소문들
울지 않는 이파리를 때려서 기어이
계절은 허물어진다
저기 사선으로 미끄럼 타는 지구 불룩한 배를 안고 뒤뚱뒤뚱 끝까지 지구 모서리에 남은 팔을 밀어 넣은 옥수수 밤이 되면 혓바닥은 까맣게 탄 채로 걸어 다닌다 만질수록 가벼워지는 돌맹이를 알고 있어 봄에 내리는 눈이지 날아가면서 몇 룩스의 빛을 먹어 치운 거지? 발등을 볼 수 없어 빙하가 꺼지는 줄도 모르는 지구 지구야
어쩌대 가방은 인형 달린 열쇠고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지퍼 사이로 조그맣게 웃음을 흘리는 치아들 벌린 입들은 폭발 아니면 잠들 수 없는 지구 아, 지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모든 계절이 옥수수를 품은 바나나 껍질이었다
― 계간 《시와문화》 (2022 / 봄호)
김효선
2004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 외.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