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화병
장서언
고자기(古磁器) 항아리
눈물처럼 꾸부러진 어깨에
드 팔이 있다.
파랗게 얼었다
늙은 간호부(看護婦)처럼
고적한 항아리
우둔(愚鈍)한 입술로
계절로 이그러진 풀을 담뿍 물고
그 속엔 한 오합(五合) 남은 물이
푸른 산골을 꿈꾸고 있다.
떨어진 화판(花瓣)과 함께 깔린
푸른 황혼의 그림자가
거북 타신 모양을 하고
창 넘어 터덜터덜 물러갈 때
다시 한 번 내뿜는
담담(淡淡)한 향기
[어휘풀이]
-화판(花瓣) : 꽃잎
[작품해설]
이 시는 장서언의 대표작이자 모더니즘 계열의 한 본보기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평범한 꽃병은, 대상을 앞에 놓고 이미지 제시의 연습을 하는 듯한 표현 기교를 통해 독특한 의미와 기품을 부여받음으로써, 마침내 살아있는 하나의 특별한 생명체로서 승화된다.
첫째 연에서부터 시인은 ‘고자기 항아리 / 눈물처럼 꾸부러진 어깨에 / 두 팔이 없다’와 같은 의인법을 사용하여 시적 긴장감과 특유의 이미지 도출에 성공한다. 오랜 세월 숱한 풍상(風霜)을 겪고 난 뒤, 폐허만 남은 듯한 인상과 함께 두툼한 꽃병의 양감(量感)을 시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부분은 마치 ‘토르소’-팔·다리·머리 부분이 없는 몸통만의 조상(彫像)-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둘째 연은 꽃병의 푸른 색채감과 두툼하게 생긴 형상을 제시한다. 마치 파랗게 얼어있는 듯한 고자기의 푸른 빛은 어느 뚱뚱한 ‘늙은 간호부’ 같은 이미지와 함께 꽃병이 겪어온 오랜 세월의 ‘고적함’을 강조한다. 셋째 연은 철 지난 꽃 대궁 몇 개가 꽂혀 있는 꽃병의 모습을 보여 준다. 꽃병에 담겨 있는 ‘한 오합 남은 물’을 통해 꽃병의 크기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는 한편, 꽃밭을 그리워하는 꽃처럼 ‘푸른 산골을 꿈꾸’는 그 속의 물을 보여 줌으로써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화자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넷째 연은 시간적 배경이 되는 부분으로, 떨어진 꽃잎을 어두워 가는 황혼 무렵과 조화시킴으로써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화병’· ‘떨어진 화판’· ‘푸른황혼’· ‘거북’ 등은 모두 회고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사물들로서 고화병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린다.
마지막 연에서는 저녁놀이 질 때, 꽃병이 ‘다시 한 번 내뿜는 / 담담한 향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향기는 단순한 꽃향기가 아니라, 고자기 꽃병의 향기로 고자기가 지나온 오랜 세월의 맑고 아늑한 향기로 볼 수 있다.
[작가소개]
장서언(張瑞彦)
1912년 서울 출생
1930년 『동광』에 「이발사의 봄」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7년 극단 ‘신협(新協)’에 가입하여 연극 활동
1948년 휘문고교 영어 교사 및 홍익공업전문학교 교수
시집 『장서언시집』(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