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52]道를 통한(?) 듯한 위인들의 존엄사
지난 4일 <김학철문학상>를 제정, 첫 시행한 방현석 작가 ‘칭찬’을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역경을 겪고도 2001년 85세때 단식 21일 끝에 존엄사(尊嚴死)한 김학철 선생의 유언 내용에 대해 썼다. “사람들을 부르지 말고, 유골의 절반은 두만강에 뿌리고, 절반은 우편상자에 담아 고향 원산 앞바다로 띄워보내라. 마지막 가는 길에 조선의용군 추모가를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지인선배가 “처음 들어보는, 그런 투철한 독립운동가이자 훌륭한 항일문학가를 알게 해줘 고맙다. 얼마나 대쪽같았으면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을까? 존엄사라는 것에 대해 궁금하다”는 댓글을 보내와 반가웠다. 그렇다. 김학철 선생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말 그대로 ‘대쪽같은 삶’을 살았다. ‘아니면 아닌 것이고 기면 긴’ 고난의 삶을 살았으나, 영혼만큼은 늘 자유로웠던 김 선생은 ‘전사(戰士) 시인’을 자처한 김남주 시인처럼 항일무장투쟁을 작품(최후의 분대장, 격정시대 등)으로 승화시킨 ‘전사 문학가’였다.
# 평화주의자이자 생태주의자 스콧 니어링(1883-1983)은 1세기라는 긴 세월을 살았다. 평생을 자급자족 살면서 소식(小食)과 채식(菜食)을 하고, 아내 헬렌 니어링(1904-1995)과 함께 노동과 명상이 조화를 이루는 『조화로운 삶(T』he Good Life)를 산 그는, 1백 세 생일에 ‘갈 때’를 알고 자신의 의지로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하기로 작정했다. 의도적으로 곡기를 끊고, 모든 약물이나 의료 개입을 거부한 채, 24일만에 단식사한 그의 죽음이야말로 웰 다이잉(Well Dying)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가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고 맑은 의식으로 느끼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저승사자’가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소리를 맑은 의식으로 느끼며 ‘자연처럼 단정하고 자율적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 틀림없다.
# 한국의 석학 이어령(1934-2022) 박사도 2017년 암 진단을 받은 이후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죽음을 직시하고 마주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의 지성인'답게 끊임없이 글을 쓰고, 어느 여성기자(김지수)와 5년 동안 정기적으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어 보시라. '죽음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 다른 곳을 비추는 것'이라며, 평생 살면서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선지식(善知識) 성철 스님같이 도통(道通)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그 결과, 쏟아지는 주옥같은 그의 유작(遺作)들이 어디 한두 권인가. '목마른 이를 위해 우물을 파다 우물가에서 죽는' 걸 당신의 미션으로 안 거장의 죽음에 숙연해진다. 잘 죽는 것(well-dying))이 잘 사는 것(well-being)과 ‘한 꿰미’라는 것을 알면서 ‘분투한’ 그의 글과 문장들은 지금도 그분의 말처럼 인터넷 공간에 남아 계속 숨쉬고 있는 것을.
# 모리 슈워츠(1916-1995)는 미국의 사회학자로 교수였다. 루게릭병을 앓으며 죽음을 인지한 그는 대학시절의 제자 미치 앨봄과 14번에 걸쳐 매주 화요일 만나 누구나 살면서 겪는 세상, 가족, 죽음, 자기 연민, 사랑에 대한 수업하듯 얘기를 나눈다. 사후 베스트셀러가 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실제 주인공으로, 그는 죽음 직전에도 TV에 출연하여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가 남긴 어록을 보라. “Once you learn how to die, you learn how to live”(죽는 법을 배우면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Love each other or perish”(서로 사랑하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 있을 뿐이다) “Death ends a life, not a relationship”(죽는다는 건 삶이 끝내는 것이지, 관계가 끝내는 것은 아니다)
# 나의 어머니는 7남매를 낳아 키우고 가르친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2019년 1월 4일 요양병원에서 "이제 죽을 때가 됐고, 죽어야 한다"며 퇴원을 간청했다. 객사(客死)는 안될 말이었다. 영원한 귀가 이후 모든 약과 곡기를 끊으셨다. 12일만인 16일 오후 자식 품에서 스르르 미끌어지듯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기 하루이틀 전 히말태기(힘) 하나 없는 목소리로 “배고파. 미음 한 숟가락만 달라”하시고, 두어 번 잡순 게 전부였다. ‘배냇똥’을 몇 차례 누웠는데, 그것을 닦아내는 세 딸은 효도를 하게 해줘 고맙다고 했다. 구십 평생, 웰 비잉 끝에 웰 다이빙하신 우리 어머니, 영면하소서.
한 친구가 막판에(죽을 무렵) 돈 3천만원 싸들고 스위스(안락사 허용국가)로 가겠다고 해 웃었지만, 어찌 그게 '장난의 말'이랴. 무지개빛 ‘강철의지’가 없다면, 인간 최대의 본능인 식욕(食慾)을 어찌 스스로 끊을 수 있으랴. 그 다음이 성욕일까? 권력욕일까? 나는 내가 태어난 탯자리에 편백나무 침대를 들여놓고, 귀향한 이후 그 침대에서 종종 잠을 잔다. 그곳은 어머니가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 셋을 낳은 요람(搖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처럼, 때가 되면 그곳에서 나의 의지로 자연사(自然死: 곡기를 끊으니 자연사가 아닌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큰 ‘죽음복’일까. 끊임없이 나 자신을 단련(수양)한다면, 위의 위인들처럼 나도 ‘도통’할 수 있을까. To be or not to be? That is my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