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3
3월15일[사순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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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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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BRSS-NNxyk
[예수회 양승환 크리산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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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갑시다!>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만큼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주님 정신, 주님 마음이 우리 영혼 안에 깃들게 될 때, 그분의 정신과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때, 우리는 인간 현실의 옹색함에서 벗어나 광활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특유의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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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2B2e8d5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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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믿음이고 미움도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감정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사는 세상입니다. 고정원 씨는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이 세상이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당연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이 화가 나면 무작정 걸어서 화가 발생한 곳에서 멀어지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미움의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복음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치 이 지상에서 떠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누구는 하느님 나라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삽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로 감정을 발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제 묵상 내용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거울과 오은영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 이 세 가지의 도움으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말썽부리며 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다정함의 과학』, 켈리 하딩 박사는 의사로서 사람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가 의대에 입학해 해부학 교수에게 처음 받았던 것은 한 인물의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9번 테이블: 폴, 공장 노동자, 사망 원인: 폐 암종.”
처음엔 그래도 자신의 테이블에 누워있는 시체가 한 인간의 존엄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르고 쪼개고 분해하고 하다 보니 점점 폴이라는 한 인물의 시신이 아닌 하나의 교육 보조재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환자를 약물과 수술로 치료해야 한다는 물질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인 그녀가 『다정함의 과학』이란 책을 쓰게 된 것일까요? 이 책은 수술과 약물보다 사랑이 인간의 몸까지 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사로서 많은 비판을 받을 만한 내용입니다. 그녀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켈리 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보낼 때 문법을 꼼꼼히 따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인 딸은 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엄마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어머니는 오른 손을 쥐었다 펴는 것 외에는 움직일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켈리는 손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신호를 만들었습니다. “I(꼭 쥐기) LOVE(꼭 쥐기) YOU(꼭 쥐기).”
그날 켈리와 어머니는 수도 없이 서로의 손을 세 번씩 꽉 쥐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걱정하는 딸에게 괜찮다는 엄마만의 리듬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2주 동안 어머니 옆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다가 더는 어머니가 손을 쥘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의사 수업을 할 때 그렇게도 세세하게 해부하던 인간의 육체만 남은 어머니.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 간 걸까? 영혼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켈리의 거의 두 살이 다 된 사랑스러운 아들 제이를 자주 돌봐 주었습니다. 제이는 자신과 놀아주던 할머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켈리가 할머니가 매우 아프다고 말할 때마다 제이는 “할머니는 내 마음 안에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화장하던 날 밤, 제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이를 켈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말을 갓 시작한 제이는 켈리의 품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습니다.
켈리는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며 아들을 더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이가 갑자기 켈리의 손을 잡고 세 번을 꽉 쥐었다 폈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처음 엄마 손을 꽉 쥘 때 엄마는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으며, 세 번째 잡아줄 때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제이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완전히 잠이 달아났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할 때 손을 세 번 꽉 쥐었다 펴는 것은 켈리와 엄마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제이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의 손을 잡는 적도 없었습니다.
증거 중심으로 일하는 의사로서의 켈리는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엄마의 딸로서의 켈리는 “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는 여전히 네 곁에 있어”라고 말하는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소위 ‘토끼 효과’를 발견합니다. 한 사랑 가득한 여성이 준 음식을 먹은 토끼들만 특별히 더 건강하다는 실험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의 환경 안에 살게 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일어나는 병까지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화병이 있는데, 이것은 약물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서만 치유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용서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드라마 중 ‘로스트’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객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며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괴물도 나타나고 이상한 생명체도 나타나지만, 또 그 사람들 안에서 불목과 의심과 미움과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가끔 죽었던 사람들도 등장하고 이전에 지었던 잘못과도 연결되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다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계’였고 여기에서 진짜 선인과 악인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연옥의 역할도 하는데 이 지상에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황당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생존하려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본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자신들이 죽었음을 인정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감정을 털고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죽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이 세상의 미움 속에 남겨집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 감정을 규정합니다. 지옥에 머물며 천국의 감정을 느낄 수 없고 천국에 살며 화를 내거나 음탕한 마음을 품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증거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에 대한 용기 있는 결단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202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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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숭이, 바나나, 판다 곰’을 보여주면서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을 짝지어 보라고 할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판단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양인 대부분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인은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 곰’을 묶어서 생각한다고 합니다. 원숭이와 판다 곰은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인은 종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동양인과 서양인은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인과 서양인은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양인은 순환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가고 오듯이, 윤회와 업보를 생각하며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서양인은 직선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가 더 쉽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는 ‘예포자’ 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신앙인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신앙을 보여주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 성당 창문을 닫고, 하수구의 오물을 걷어내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명절이 되면 어르신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는 분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면 매일 성당에 나오셔서 마당을 치우고, 수녀님을 도와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싸움에 이르려는 순간에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며 용서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살기 위한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위에 높이 세우시고,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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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전하신 율법 해석의 핵심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라는 율법의 말씀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원수들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향하여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노력해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막막하게만 느껴진다면, 자신을 괴롭혔던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때 ‘잠심’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잠심이란 화의 감정을 알되, 그 감정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객관화하여 내면의 감정 문제를 제대로 보고 정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으로 우리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잠심을 훈련하며 기도 안에서 저를 힘들게 하였던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 사람이 쏟아 내었던 말들이 지난날과는 다르게 들렸던 체험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저에게 쏟아 내었던 폭력적인 말들이 사실은 그 사람이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질렀던 비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원망과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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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하느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게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의 영에 더 큰 해를 입힌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 미움이 우리를 더 휘저어 놓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사람보다 우리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해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주님의 법은 모든 법을 뛰어넘는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신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런 사람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주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아드님을 통해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해와 비는 바로 당신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가르침을 따라 당신의 자녀가 되고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절) 친구를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한다. 이때 그는 큰 보물을 지닌 사람이 된다.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이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8절).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복음적 사랑의 법으로 인간적 사랑을 넘어서길 바라신다. 이렇게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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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ㅠ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들을 때마다, ‘원수와도 같은 그 사람’부터 떠올리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너무나도 지키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주님의 사랑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예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외딴섬 같은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곳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늘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간에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고백할 때, 그때 비로소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2)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하는 일’로만 생각하고, ‘받는 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부터 주님에게도, 또 이웃에게도 원수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원수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위선자입니다.
정말로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즉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예수님(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이웃들의 사랑을 깨닫고, 고백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실천하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계명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는 말씀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라는 시편이 연상됩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제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기억해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까?”로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한낱 죄인일 뿐인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나를,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하느님은 살인자 카인도 보호해 주신 분입니다(창세 4,15) 우리는, ‘보잘것없는 나’를 주님께서, 또 이웃들이 변함없이 사랑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꾸짖지 않고 잔치를 벌입니다.(루카 15.24) 말하자면 ‘밥부터 먹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선 먼저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 준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때부터 진짜 회개를 시작하게 되고, 사랑 실천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거나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습니다.(루카 15,28-30)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용서를 실천하지도 않고,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큰아들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4)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너희는 하느님 사랑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무슨 상을 받겠느냐?”라는 말씀과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라는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라는 뜻이고,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과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즉 “죄를 짓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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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를 지키면 주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주님 소유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당신 계명을 충실히 지켜 살면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고자 창조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주님의 참된 규정과 계명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은 구약 성경에 담겨 있는 문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를 통하여 무엇이 진정한 아버지의 뜻인지 알려 주시는데, 오늘 복음도 그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여야 참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분이시며, 당신을 저버리는 불의한 이들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수가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원수라 하더라도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선다면, 그를 기꺼이 맞이하라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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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스라엘 백성의 두 가지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그분의 율법 준수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여정이 끝날 무렵에 모압 평야 너머로 펼쳐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기 6장 4절-6절) [1]
모세는 하느님의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혹시나 잊을까 다시 마음에 새겨 두라고 합니다. 자녀들에게 집에서나 나가서나 잊지 않도록 반복해서 들려 줄 뿐만 아니라 손에 표징으로 묶고, 또 이마에 표지로 붙이고 그리고 문설주에 써 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어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법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아울러 당부합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기 26장 16절) [2]
이스라엘은 자기 동포를 중심으로 하는 결속은 대단합니다. 그 진가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나타납니다. 이미 가나안에 사는 타 민족을 적으로 여겼고 정복하는대로 가축들과 함께 가차없이 죽여 버립니다.
후에 역사를 거듭해오면서 이 국수주의 사상이 바빌론, 아시리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점점 동포애로 발전하여 증대한 적대감으로 지배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을 ‘원수’로 확대했던 것입니다.
당시 지배자 로마제국은 얼핏 보아서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 같아도 태양신을 바탕으로하는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정치적으로도 수모상태인데 종교적으로도 박해를 받는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억압과 박해를 받는 동포를 사랑하고 로마를 포함한 이방인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갖는 것을 당연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와 관련된 옛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오 복음 5장 43절)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오해를 받으실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 이 한마디 말씀은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이웃 사랑에 대해 일침을 놓으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오 복음 5장 46절-47절)
왜 세리를 들어서 말씀하셨을까요? 세리는 자기 공무원인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로마뿐 아니라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잘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며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기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꼭 이스라엘의 그 상황만 바라보시며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원수’라는 뜻에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그 뜻을 너 넓혀 가다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일 하는데, 반대하거나 훼방을 놓은 사람이라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서 복음 선포하시는 일에 간섭하고 반대하는 세력일 수도 있습니다. 크게는 종교지도자들도 있고 하느님 신앙에 박해를 하는 로마 인들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해석대로 그 뜻을 넓혀 가다보면 방해도 되지만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수의 반대는 나와 깊게 관련된 동포, 가족, 친지들과 포함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거기에는 세상 인심도 한 몫을 합니다.
자신에게 이롭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에게 호의적인 것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특히 유교의 영향이 깊은 우리이다 보니 자신이나 식구들 챙기는 것에는 유별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부정한 방법으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려다 법에 걸려 재판에 붙여지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태양과 비에 비유하십니다. 태양은 악인이나 선인에게 똑 같이 햇볕을 비추고, 마찬가지로 비도 누구에게나 골고루 뿌려주는 이치를 들어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복음 5장 45절)
주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고 평등하게 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하느님을 본 받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하느님 외에 사람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결점이 없는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너그럽고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노력하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완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본 받아 ‘완전함으로 나가는 사람’, 지금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함에 일치하려고 사람‘ ’지금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완성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기도하며 희망을 가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 그리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후원하시며 용기를 주십니다.
사막에서 하느님께 반역하고 불순명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참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불평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를 참아주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기를 원하시며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듯이 부활하시어 하느님 오른 편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사랑의 묘약’이라고 할까요? 변하기 쉬운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죽음과 죄와 한결 같지 못하는 우리를 아름다운 삶으로 이끄십니다.
한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에 함께 했던 봉봉사중창단의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 노래가 생각납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
아무리 호박꽃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꽃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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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의 마음을 다해서(ḇə·ḵāl-lə·ḇā·ḇə·ḵā)’, ‘그리고 너의 온 영혼을 다해서 ū·ḇə·ḵāl-nap̄·šə·ḵā)’, ‘그리고 너의 온 힘을 다해서(ū·ḇə·ḵāl. 너의 영혼을 다해서 nap̄·šə·ḵā mə·’ō·ḏe·ḵā)‘, 너의 야훼 하느님)’ 사랑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 영혼, 그리고 힘을 구분할 수 없는데 세 번 표현하는 것은 최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변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2] 모세는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이 규정(ha·ḥuq·qîm)’과 ‘이 법규들ham·miš·pā·ṭîm’을 전한다. 그는 이어서 하느님을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신명기 6장 5절)라고 표현대로 다시 ‘온 마음을 다해 (bə·ḵāl lə·ḇā·ḇə·ḵā)’, ‘그리고 온 영혼을 다해ū·ḇə·ḵāl nap̄·še·ḵā)’, ‘그것들(규정과 법규)들을 명심하여 실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보면 ‘하느님’ 자리에 규정과 규범들이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가치와 구원관을 율법실천 쪽으로만 나가서 결국 ‘율법주의자’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율법적인 하느님 사랑과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시려 했다. 신명기 신학에서 보여주는 하느님 사랑은 소외된 이들을 두둔하시는 데에서 드러나신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율법정신을 회복하시려 했으나 굳어버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벽이 너무 두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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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여한준 롯젤로 신부님]
내 사랑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마태오 복음 5장 43-48절)
<허물어야 할 사랑의 경계>
보편적 인류애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도 남의 자녀보다는 내 자녀를 위해 조금 더 많은 헌신을 할 것입니다. 이는 반려동물 같은 생명체나 집과 자동차 같은 물건에도 적용됩니다. 내 강아지가 더 소중하고 내 자동차가 더 귀한 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라는 경계, ‘내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넘지 못할 경계 때문에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만 인사합니다. 만약 이런 경계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면 나는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야말로 그분의 사랑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그 덕에 비록 죄 앞에 쓰러지고 유혹 앞에 흔들리는 나도 햇볕을 쬐고 비를 맞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이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만든 모든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완전하신 아버지처럼 되는 길은 너무나 멀고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꼭 가야하는 길이지요. 그 길에 참행복이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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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타고 놀았던 시소가 생각납니다. 이 시소는 혼자 탈 수 없습니다. 아니 혼자 탈 수는 있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꼭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가만히만 앉아 있으면 재미없어집니다. 내가 내려가면서 상대를 올리고, 또 상대가 내려가면서 나를 올려야 놀이가 됩니다.
이 세상 삶도 시소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가만히만 있으면 재미가 없어지면서 시소 놀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삶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서로 올라가고 내려가고를 반복하는 시소 놀이처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만 높이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무조건 힘을 줘서 아래에서 자기를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가려는 마음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더 편하고 쉬운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 큰 기쁨 속에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라고 그래야 힘센 하느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남을 낮추어 내가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나를 낮추어 주님께서 나를 올리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인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은 사랑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시지요. 또 자기 형제에게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세상의 기준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즉,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담긴 사랑을 통해서만 그 사랑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준에 맞는 사랑의 실천, 자기를 낮추는 사랑의 실천, 이를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커다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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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릴때 책상에 금긋기 해 보셨을까요? 그 시절에는 왜 그리 짝꿍과 싸웠을까요? 지금 만약 제게 짝꿍이 있다면 진짜 잘해줄 텐데 말입니다. 책상 중간에 줄을 그으면서 그것 가지고도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쪽을 조금더 넓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공평함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죠. 지금은 어떨까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공평함을 추구하며 살아갈까요? 아니면 점점 자신의 것만을 생각하며 살아갈까요? 전자도 있겠지만 후자가 더 일반적인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세리들도 다른 민족들도 하는 것 아니냐.’라고….
그러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완전함은 ‘완전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완전함은 보편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의인도 사랑하지만,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모든 만물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똑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를 무시했던 사람과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세상은 말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처럼 보편적 사랑, 즉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보여 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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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리허설
자신과 싸우며 욕구와 감정을 억제하는 것. 이는 자신에게 죽음과도 같은 경험일 것입니다.자신을 죽이고 또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괴롭지만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을 지내고 있습니다. 욕구와 감정의 억제로 우리는 주님 수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수난은 부활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짙은 새벽의 어둠이 떠오르는 태양과 이어지듯 말입니다.
‘작은 죽음’으로 부활의 열매를 맛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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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오. 5,45)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는 좋은 사람과 만나기를 원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살면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좋은 부모나 환경 좋은 배우자나 친구, 좋은 동료나 이웃을 만나기를 원하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만 만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모두를 만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도 만나고 불의한 사람도 만나며 살아갑니다. 나쁜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을 피하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피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모두를 만나며 삽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도 됩니다. 어제는 의로운 사람이었다가 오늘은 불의한 사람도 됩니다. 늘 좋거나 의로운 사람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좋은 사람도 되지만 때로는 나쁜 사람도 됩니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때로는 나쁜 사람이 되어 살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는 깨지기 쉽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좋은 사람이었다고 영원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좋은 사람이었다가 나쁜 사람도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또한 한번 나쁜 사람이었다고 영원히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도 나쁜 사람이었다가 좋은 사람도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다른 사람을 우리 마음으로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는 선인과 악인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때로 나쁜 사람들을 만나고, 불의한 사람을 만나고, 우리를 억울하게 한 사람들이나 원수를 만나더라도 우리는 당황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앞으로 그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먼저 우리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인이거나, 악인이었을 때도 변함없이 똑같이 우리에게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십니다. 사순시기는 늘 관대하신 주님의 사랑처럼, 우리가 거부하거나 멀리했던 사람들에게 관대함으로 다가가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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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에게는 ‘원수’가 많았습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침략을 받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자기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공격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그런 ‘악한’ 이들은 미워하고 복수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웃’과 ‘원수’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혹은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만 사랑하는 반쪽짜리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미움과 분노라는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차라리 원수에게 복수하지 말고 참으라고 한다면, 굳이 악에 악으로 맞서지 말고 그냥 원수를 무시하거나 피해 다니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해보려고 노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우리가 성인군자도 아닌데 그런 일을 대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또한 나를 힘들게 만드는 원수를 사랑하느라 지치고 힘이 빠져서, 정작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과 속상함은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사랑의 무게중심을 그들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팔이 안으로 굽는’ 우리 마음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요. 다만 ‘원수’와 ‘이웃’을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여 차별대우했던 그동안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라는 겁니다. 즉 내 마음이 내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즉 나에게 잘 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그렇게 내 사랑이 불완전한 반쪽짜리가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신경쓰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웃과 원수를 차별하지 말고 공평하게 사랑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혹은 내 마음 수양을 위해 즉 내 마음에서 미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부족하다면 부족한 채로, 불편하고 싫다면 그런 채로 사랑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애정을 가지고, 그가 불편하고 싫기 때문에 더 신경써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가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 아니라 치유받아야 할 병자로 보시는 것처럼, 그가 원수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처벌이나 단죄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선함을 닮은 그분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완전함’은 그 어떤 흠결도 단점도 없는 ‘완벽함’과는 다릅니다. 어느 쪽으로도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어, 땅을 가리지 않고 상황을 탓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잘 굴러갈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 빠진 동그라미’들이 서로 상대방의 빠진 이를 사랑과 이해로 채워줌으로써 온전한 동그라미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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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참으로 혁명적인 선언이요 명령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이스라엘인들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는 일입니다.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그가 구원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곧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층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훗날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게 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또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완전해 질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참으로 놀라운 소명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라’고 소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삼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한계와 결함은 우리의 완전함을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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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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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완전한 사랑을 하자!>
오늘 복음(마태5,43-48)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을 능가하여,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서 7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山上說敎)인데, 내용을 보면 어떤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ㄴㄷ)
우리가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는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완전한 사랑이며, 그리고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러니 원수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웬만하면 내가 지는 사랑, 내가 낮아지는 사랑을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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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 44)
우리는
원수를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순간에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하신지요.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가 증오하는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자신의
증오심입니다.
원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언제나
삶의
변함없는
해결책은
사랑입니다.
미움에서
빠져나오는
길 또한
오직
사랑뿐입니다.
고정된
미움의 껍질을
벗는 우리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미움의 악순환은
모든 관계를
파괴하고
영혼을
좀먹습니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박해자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곧 우리자신을
진정 살리고
우리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증오심을
내려놓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 영혼의
사순입니다.
평화로운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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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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