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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ṃyutta Nikāya, nidānavaggo n, 1. nidānasaṃyuttaṃ, 4. kaḷārakhattiyavaggo,
2. kaḷārasuttaṃ (SN 12.32)
12:32(4-2) 깔라라캇띠야의 경 [Kaḷārakhattiyasutta]2451)
2451) SN.II. 50 : 중아함 5(大正1, 451a) 참조
♦ 32. sāvatthiyaṃ viharati. atha kho kaḷārakhattiyo bhikkhu yenāyasmā sāri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sāriputtena saddhiṃ sammodi.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kaḷārakhattiyo bhikkhu āyasmantaṃ sāriputtaṃ etadavoca —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그때 수행승 깔라라캇띠야2452)가 존자 싸리뿟따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존자 싸리뿟따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2.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수행승 깔라라캇띠야는 존자 싸리뿟따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2452) Kaḷārakhattiya : 이 경에만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그가 수행승이 되기 이전에 왕족 또는 귀족계급(khattiya)에 속해 있었음을 암시한다.
“moḷiyaphagguno, āvuso sāriputta, bhikkhu sikkhaṃ paccakkhāya hīnāyāvattoti.
na hi nūna so āyasmā imasmiṃ dhammavinaye assāsamalatthāti.
[깔라라캇띠야] “벗이여 싸리뿟따여, 수행승 몰리야 팍구나2453)가 계율을 버리고 환속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곧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안심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2453) Moliya Phagguna : 이 수행승에 관해서는 SN. I.I 12에서 이미 언급했다.
MN. 21에서는 그가 비구니와의 부정 때문에 환속한 것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SN. IV. 52에 나타난 팍구나(Phagguna)와 동일인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tena hāyasmā sāriputto imasmiṃ dhammavinaye assāsaṃ patto”ti?
♦ “na khvāhaṃ, āvuso, kaṅkhāmī”ti.
3. 그런데 존자 싸리뿟따는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안심을 얻습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나는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āyatiṃ, panāvuso”ti?
♦ “na khvāhaṃ, āvuso, vicikicchāmī”ti.
4. [깔라라캇띠야] “그렇다면 벗이여, 미래에도 그렇습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나는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 atha kho kaḷārakhattiyo bhikkhu uṭṭhāyāsan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kaḷārakhattiyo bhikkhu bhagavantaṃ etadavoca —
5. 그러자 수행승 깔라라캇띠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6.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수행승 깔라라캇띠야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āyasmatā, bhante, sāriputtena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깔라라캇띠야] “세존이시여, 존자 싸리뿟따가 말하기를 궁극의 앞을 성취하여2454)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고 했습니다.”
2454) aññā vyākatā : 궁극의 앞을 선언했다.
여기서 궁극적 앎(aññā)은 거룩한 경지[阿羅漢果]와 동의어이다.
수행승이 궁극의 앎의 확립, 즉 거룩한 경지에 올랐는지 점검할 때 위에 인용된 문구를 사용한다.
♦ atha kho bhagavā aññataraṃ bhikkhuṃ āmantesi —
“ehi tvaṃ, bhikkhu, mama vacanena sāriputtaṃ āmantehi —
‘satthā taṃ, āvuso sāriputta, āmantetī’”ti.
“evaṃ, bhante”ti kho so bhikkhu bhagavato paṭissutvā yenāyasmā sāri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ntaṃ sāriputtaṃ etadavoca — “satthā taṃ, āvuso sāriputta, āmantetī”ti.
“evaṃ, āvuso”ti kho āyasmā sāriputto tassa bhikkhuno paṭissu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aṃ kho āyasmantaṃ sāriputtaṃ bhagavā etadavoca —
7. 그때 세존께서 한 수행승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오라, 수행승이여.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싸리뿟따에게 이와 같이
'싸리뿟따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라고 전해라."
그 수행승은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세존께 대답하고 나서
존자 싸리뿟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싸리뿟따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벗이여 싸리뿟따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알겠습니다.”
9. 존자 싸리뿟따는 그 수행승에게 대답하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존자 싸리뿟따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saccaṃ kira tayā, sāriputta,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세존] “싸리뿟따여, 그대가 말하기를 궁극의 앎을 성취하여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고 분명히 안다고 했다는데, 그것이 참말인가?” 2455)
2455)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mī ti :
Srp. II. 62에 따르면, 싸리뿟따가 궁극적인 지혜를 이러한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니고
장로 깔라라캇띠야가 행복하고 기쁜 나머지 그에 대해 이와 같이 진술한 것이다.
“na kho, bhante, etehi padehi etehi byañjanehi attho vutto”ti.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그러한 말과 그러한 표현으로 그 뜻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yena kenacipi, sāriputta, pariyāyena kulaputto aññaṃ byākaroti,
atha kho byākataṃ byākatato daṭṭhabban”ti.
10. [세존] “싸리뿟따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이 궁극의 앎을 얻어
그 설명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시키려면 늘 어떠한 법문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2456)
2456) yena kenacipi, sāriputta, pariyāyena kulaputto aññaṁ byākaroti,
atha kho byākataṁ byākatato daṭṭhabban ti. : Srp. II. 62에 따르면,
세존께서는 '자발적으로 궁극적인 지혜를 선언하지 않았지만 내가 질문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그가 스스로 궁극적인 지혜를 선언하도록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nanu ahampi, bhante, evaṃ vadāmi —
‘na kho, bhante, etehi padehi etehi byañjanehi attho vutto’”ti.
11.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러한 말과 그러한 표현으로 그 뜻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 “sace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jānatā pana tayā, āvuso sāriputta, kathaṃ passatā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 tv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12. [세존]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어떠한 앎과 어떠한 봄으로써2457) 궁극의 앎이 생겨나,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2458)고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2457) kathaṁ jānatā … kathaṁ passatā : 원래 '어떻게 앎으로써 어떻게 봄으로써'의 뜻으로
일체의 통찰을 의미한다.
2458) nāparam itthattāya :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Smv. 225에 따르면,
현재의 존재의 다발의 상속에서부터 미래의 존재의 다발의 상속이 내게 없는 것
(idāni vattamānakkhadhasantānā aparaṁ khandhasantānam mayhaṁ n'atthi)'을 뜻한다.
♦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jānatā pana tayā, āvuso sāriputta, kathaṃ passatā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haṃ ,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13. [싸리뿟따]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어떠한 앎과 어떠한 봄으로써 궁극의 앎이 생겨나 그대가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yaṃnidānā, āvuso, jāti, tassa nidānassa khayā khīṇasmiṃ khīṇāmhīti viditaṃ. khīṇāmhīti viditvā —
khīṇā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벗이여, 태어남의 바탕이 되는 그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고 안다면,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고 앎으로써2459)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고 분명히 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2459) yaṁnidānā āvuso jāti tassa nidānassa khayā
khīṇasmim khīṇām īti viditaṁ. khīṇām īti viditvā :
이 문장은 매우 난해하다. 이 문장에 대한 올바른 번역은 Srp. II. 62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어떤 조건으로 있는 태어남은 그 조건이 소멸되면
소멸된 태어남의 조건에 따라 태어남에 의해 형성된 결과도 소멸한다.
(yaṁ jāti nāma yaṁ paccayā hoti, tassa peccayassa khayā,
khīṇasmiṁ jātiyā paccaye, jātisaṅkhātaṁ phalaṁ khīṇan ti)'
이 문장에 대한 리스 데이비즈 부인의 번역은 아래와 같이 완전히 다르다.
'It is because, friend, in [the word], destroyed,
I have discerned that the basis of birth is destroyed,
through this I know that these thing are ine of me'
Sp IL 2에 따르면, 장로는 질문에 혼란스러워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의도에 당혹해 한 것이다.
그는 어떻게 스승이 거룩한 경지[阿羅漢果]를 선언하길 원했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이 원했던 바인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스승의 의도를 파악했다고 깨달았을 때에 대답이 천백 가지의 방법으로 나타났다.
♦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jāti panāvuso sāriputta,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ti?
evaṃ puṭṭho t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jāti panāvuso sāriputta,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ti?
14. [세존]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태어남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그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 하겠는가?”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jāti kho, āvuso, bhavanidānā bhavasamudayā bhavajātikā bhavappabhavā’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15.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태어남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벗이여, 태어남은 존재를 조건으로 하고 존재를 원인으로 하고 존재를 발생으로 하고
존재를 바탕으로 한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bhavo panāvuso sāriputta, kiṃnidāno kiṃsamudayo kiṃjātiko kiṃpabhavo’ti?
evaṃ puṭṭho tv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bhavo panāvuso sāriputta, kiṃnidāno kiṃsamudayo kiṃjātiko kiṃpabhavo’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bhavo kho, āvuso, upādānanidāno upādānasamudayo upādānajātiko upādānappabhavo’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16. [세존]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존재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17.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존재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벗이여, 존재는 집착을 조건으로 하고 집착을 원인으로 하고 집착을 발생으로 하고
집착을 바탕으로 한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upādānaṃ panāvuso ... pe ...
18. [세존]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19.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벗이여,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하고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발생으로 하고
갈애를 바탕으로 한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taṇhā panāvuso sāriputta,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ti?
evaṃ puṭṭho tv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taṇhā panāvuso sāriputta,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taṇhā kho, āvuso, vedanānidānā vedanāsamudayā vedanājātikā vedanāpabhavā’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20. [세존]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갈애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21.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갈애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벗이여,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하고 느낌을 원인으로 하고 느낌을 발생으로 하고
느낌을 바탕으로 한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jānato pana te, āvuso sāriputta, kathaṃ passato
yā vedanāsu nandī sā na upaṭṭhāsī’ti.
evaṃ puṭṭho tv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22. [세존]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
느낌 가운데 환락이 더 이상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2460)
2460). kathaṁ jānato pana te āvuso sāriputta, kathaṁ passato
yā vedanāsu nandī sā na upaṭṭhāsī ’ ti
evaṁ puṭṭho tvaṁ sāriputta, kinti vyākareyyāsī ’ ti? : Srp. II. 63에 따르면, 세존은
싸리뿟따가 그 자신의 경지에서 사자후를 하게 하려고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그는 세 가지 느낌에 대한 파악을 한 뒤에
'제자로서의 궁극적인 지혜 (sāvakapāramīñāṇaṁ)'를 얻었기 때문이다.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jānato pana te, āvuso sāriputta, kathaṃ passato
yā vedanāsu nandī sā na upaṭṭhās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tisso kho imā, āvuso, vedanā. katamā tisso?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imā kho, āvuso, tisso vedanā aniccā.
yadaniccaṃ taṃ dukkhanti viditaṃ , yā vedanāsu nandī sā na upaṭṭhās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23.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
느낌 가운데 환락이 더 이상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벗이여, 세 가지의 느낌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벗이여, 이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알려질 때
느낌 가운데 환락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yā vedanāsu nandī sā na upaṭṭhāsī’ti :
upaṭṭhāsi : (aor. of upatiṭṭhati) stood by; looked after.
(aor. of upaṭṭhāti), waited or attended on; cared for; nursed.
'受는 喜(nandī)'-라고 [法界에 喜樂相(邪念)이] 住하지 않는다(na upatiṭṭhati).
受(樂-苦-非苦非樂)은 無常, 無常한 것은 苦-라고 正念(sati = upaṭṭhāti) ☞ 智見.
♦ “sādhu sādhu, sāriputta.
ayampi kho, sāriputta, pariyāyo, etasseva atthassa saṃkhittena veyyākaraṇāya —
‘yaṃ kiñci vedayitaṃ taṃ dukkhasmin’”ti.
24. [세존]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그 법문은 이와 같이
'무엇이든 느껴진 것은 괴로움에 속한다.'라고 간략하게 설할 수 있다.
♦ “sace pana taṃ, sāriputta,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vimokkhā pana tayā, āvuso sāriputta,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 tvaṃ, sāriputta, kinti byākareyyāsī”ti?
싸리뿟따여, 그런데 만약 그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어떠한 해탈로써2461) 궁극의 앞이 생겨나 그대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2461) kathaṁ vimokkhā : Srp. II. 63에서는
'어떤 두 가지의 해탈을 통해서 (katarene vimokhena)'라고 해석하고 있어
마음에 의한 해탈 (心解脫: cetovimutti)과 지혜에 의한 혜탈(慧解脫 : paññāvimuitti)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sace maṃ, bhante, evaṃ puccheyyuṃ —
‘kathaṃ vimokkhā pana tayā, āvuso sāriputta, aññā byākatā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ṃ —
25.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만약 저에게
‘벗이여 싸리뿟따여, 어떠한 해탈로써 궁극의 앎이 생겨나 그대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ajjhattaṃ vimokkhā khvāhaṃ, āvuso,
sabbupādānakkhayā tathā sato viharāmi
yathā sataṃ viharantaṃ
āsavā nānussavanti,
attānañca nāvajānāmī’ti.
'벗이여, 나는 안으로 해탈하여2462) 모든 집착을 소멸하고 올바른 새김을 확립한다.2463)
올바른 새김을 확립하는 까닭에 번뇌가 따르지 않고 자신을 게을리 관찰하지 않는다.'2464)
라고 대답 하겠습니다.
evaṃ puṭṭhohaṃ, bhante, evaṃ byākareyyan”ti.
그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2462) ajjhattaṁ vimokkhā : Srp. II. 63에서는
'내적 해탈을 통해서, 즉 자신의 형성(行 : saṅkhāra)을 섭수하여
도달된 거룩한 경지[阿羅漢果]를 통해서란 뜻
(ajjhattavimokkhena ajjhattasaṁkhāre pariggahatvā patt'arahattenā it attho)'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적 해탈이란 자신의 업으로부터의 해탈을 의미한다.
2463) sabbūpādānakkhayā tathāsato viharāmi : 경험적인 것의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① 감각적 쾌락의 욕망(愛 : kāma) ② 잘못된 견해(見 : diṭṭhi)
③ 규범과 금기(戒禁 : sīlabbata) ④ 자아에 대한 이론(我語 : attavāda)
그리고 tathāsato는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른 새김(正念 : sammāsati)과 동의어이다.
2464) attānaṁ ca nāvajānāmi : '자신을 게을리 관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는 어떠한 자아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일역이나 영역에서처럼 번역해서는 안 된다.
Nsm. 93은 '나는 나를 잘못 관찰하지 않는다.
(I also do not view myself wrongly)'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Ggs. II. 79에 의하면 'avajānāmi'는
'게을리 관찰하다. 잘못 관찰하다. 간과하다.'의 뜻으로
싸리뿟따는 자신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언제나
'새김을 갖추고 알아차리는 것(sato saṁpajāno)'에 머문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 “sādhu sādhu, sāriputta.
26 [세존]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싸리뿟따여, 훌륭하다.
ayampi kho sāriputta, pariyāyo etasseva atthassa saṃkhittena veyyākaraṇāya —
그것이 그 뜻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법문이다.
ye āsavā samaṇena vuttā tesvāhaṃ na kaṅkhāmi,
te me pahīnāti na vicikicchāmī”ti.
수행자들이 번뇌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나는 결코 회의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idamavoca bhagavā. idaṃ vatvā sugato uṭṭhāyāsanā vihāraṃ pāvisi.
27.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승원으로 들어가셨다.
♦ tatra kho āyasmā sāriputto acirapakkantassa bhagavato bhikkhū āmantesi —
그러자 존자 싸리뿟따는 세존께서 떠나신 뒤 얼마 되지 않아 수행승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pubbe appaṭisaṃviditaṃ maṃ, āvuso, bhagavā paṭhamaṃ pañhaṃ apucchi,
tassa me ahosi dandhāyitattaṃ.
28. [싸리뿟따] “벗이여, 나는 아직 그분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세존께서 나에게 첫 질문을 하시자 나는 그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2465)
2465) pubbe appaṭisaṁviditaṁ maṁ āvuso bhagavā paṭhamaṁ pañhaṁ apucchi,
tassame ahosi dandhāyitattaṁ : Srp. II. 66에 따르면,
싸리뿟따를 당혹 속으로 몰아넣었던 질문은 §12에서 제시된 질문을 뜻한다.
yato ca kho me, āvuso, bhagavā paṭhamaṃ pañhaṃ anumodi,
그러나 벗이여, 세존께서 나의 첫 질문에 대한 대답에 기뻐하셨으므로
tassa mayhaṃ, āvuso, etadahosi —
divasaṃ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divasam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rattiṃ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rattim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rattindivaṃ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rattindivam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dve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 pe ...
dve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 pe ...
tīṇi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 pe ...
tīṇi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 pe ...
cattāri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 pe ...
cattāri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 pe ...
pañca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 pe ...
pañca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 pe ...
cha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 pe ...
cha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 pe ...
satta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satta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ī”ti.
벗이여, 나는 그에 대해 이와 같이
1) '세존께서 하루 종일 그 의미에2466)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하루 종일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2466) etam attham : 여기서 그 의미란 Srp. II. 66에 의하면,
다양한 형태로 여러 각도에서 언급된 연기의 의미를 뜻한다.
2) 세존께서 밤새도록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밤새도록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3) 세존께서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4) 세존께서[55] 이틀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 하시면,
나 역시 이틀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5) 세존께서 사흘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사흘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6) 세존께서 나흘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나흘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7) 세존께서 닷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닷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8) 세존께서 엿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엿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9) 세존께서 이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이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 atha kho kaḷārakhattiyo bhikkhu uṭṭhāyāsan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kaḷārakhattiyo bhikkhu bhagavantaṃ etadavoca —
20. 그때 수행승 깔라라캇띠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아 수행승 깔라라캇띠야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āyasmatā, bhante, sāriputtena sīhanādo nadito —
pubbe appaṭisaṃviditaṃ maṃ, āvuso, bhagavā paṭhamaṃ pañhaṃ apucchi,
tassa me ahosi dandhāyitattaṃ.
yato ca kho me, āvuso, bhagavā paṭhamaṃ pañhaṃ anumodi, tassa mayhaṃ, āvuso, etadahosi —
divasaṃ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divasam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rattiṃ cepi ... pe ... rattindivaṃ cepi maṃ bhagavā ... pe ...
dve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 pe ... tīṇi... cattāri... pañca... cha...
satta rattindivāni cepi maṃ bhagavā etamatthaṃ pucch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satta rattindivānipāhaṃ bhagavato etamatthaṃ byākar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ī”ti.
[깔라라] “세존이시여, 존자 싸리뿟따가 이와 같이
'벗이여, 나는 아직 그분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 하지 못하여
세존께서 나에게 첫 질문을 하시자 나는 그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그러나 벗이여, 세존께서 나의 첫 질문에 대한 대답에 기뻐하셨으므로
벗이여, 나는 그에 대해 이와 같이
만약 세존께서 하루 종일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하루 종일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밤새도록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밤새도 록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혹은 이틀 밤낮으로, 혹은 사흘 밤낮으로, 나흘 밤낮으로,
닷새 밤낮으로, 엿새 밤낮으로, 이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씀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질문하시면,
나 역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세존께 대답할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사자후를2467) 했습니다.”
2467) sīhanado : 사자후란 당당하고 의미있는 선언을 뜻한다.
Theg. 175에서는 '궁극의 앎(aññā)'에서 사자후가 나온다고 밝히고 있다.
♦ “sā hi, bhikkhu, sāriputtassa dhammadhātu suppaṭividdhā,
30. [세존] “수행승이여, 싸리뿟따는 법계에 잘 통달했기 때문이다.
yassā dhammadhātuyā suppaṭividdhattā
divasaṃ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divasam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그가 법계에 잘 통달했기 때문이다.
1) 내가 하루 종일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하루 종일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rattiṃ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rattim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 pe ...
rattindivaṃ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rattindivam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dve rattindivāni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dve rattindivāni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tīṇi rattindivāni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tīṇi rattindivāni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cattāri rattindivāni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cattāri rattindivāni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pañca rattindivāni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pañca rattindivāni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cha rattindivāni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cha rattindivāni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satta rattindivāni cepāhaṃ sāriputtaṃ etamatthaṃ puccheyyaṃ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i,
satta rattindivānipi me sāriputto etamatthaṃ byākareyy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pariyāyehī”ti.
2) 내가 밤새도록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밤새도록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3) 내가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하루 낮과 하루 밤 동안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4) 내가 이틀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이틀 밤낮으로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5) 내가 사흘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사흘 밤낮으로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6) 내가 나흘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나흘 밤낮으로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7) 내가 닷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닷새 밤낮으로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엿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엿새 밤낮으로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9) 내가 이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싸리뿟따에게 질문을 한다면,
싸리뿟따 역시 이레 밤낮으로 그 의미에 관하여
언제나 다른 말과 다른 방편으로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
dutiyaṃ. ∴
첫댓글
[내적 해탈이란 자신의 업으로부터의 해탈
(ajjhattaṁ vimokkhā)] = 지금까지 누겁 동안의
잘못된 기억(삿된 기억) 을
바른 기억(삼마 - 사띠)로 바꾸는 과정이
4념처 수행.
그 결과는
세상에서 경험한 잘못된 판단이 없어지고
나 자신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면.....
결국 心문제는 受(苦...)로 귀결?
사두 ᆢ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
‘ajjhattaṃ vimokkhā khvāhaṃ, āvuso,
sabbupādānakkhayā tathā sato viharāmi
yathā sataṃ viharantaṃ
āsavā nānussavanti,
attānañca nāvajānāmī’ti.
'벗이여, 나는 안으로 해탈하여 모든 집착을 소멸하고 올바른 새김을 확립한다.
올바른 새김을 확립하는 까닭에 번뇌가 따르지 않고 자신을 게을리 관찰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 하겠습니다.//
안으로 법수관과 의성신으로 지견. 닙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