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하여 나에게 세우는것을 표상하다 라고 한다. 이 표상하다 라는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서 잘 알려져 있다. 표상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는 중이고 죽기전까지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살아가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생각도 늘고 현실에 대한 해석도 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우리가 어렸을때보다 지금의 우리가 더욱 현명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더 많은 경험을 쌓았고 더 많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어떻게 새로운것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것인가? 여기에서 표상의 개념이 드러나게 된다.
표상하다. 자기 앞에, 그리고 자기에게로 세운다, 대상을. 무엇을 어떻게 세우는가. 쉽게 표현하자면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나 스스로 이해하는것이다. 그런데 외부로부터의 이질적인 정보들을 어떻게 나 스스로 이해할수 있는가? 무엇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이해할수 잇는 잣대가 필요하다. 그런 잣대가 되는것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표상을 이렇게 말한다. 차이를 종속시키는 통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 '먼저 통일성을 정립하고 그 다음에 거기서 점차 멀어저 가는 모든 정도들에로 필연적으로 이행해 가는것' 즉, 다양한 차이는 상위의 통일성에 종속된것.
잣대가 통일성이 되었다. 들뢰즈는 이런 결론 하에 표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 까지 하게 된다. "표상의 개념은 철학을 독살한다." 플라톤의 상기설을 다시 떠올려 보면 좀더 이해가 수월해진다. 개별자의 대지로 나가 그 개별적 다양을 망각했던 하나의 통일성, 절대적 이데아의 세계로 데리고와 종속시킨다. 위와 같은 이데아가 절대기준적이라면 차이란 그 자체로서 존립할수 없고 늘 동일성의 그릇 안에서만 사유될수 있다. 이 말은, 이세상을 살아가는 주체는 바로 나이고, 이세계는 내가 점령할 땅(사유물)이다. 그 누구도 나를 점령할수 없다. 그 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자타의 관계에서 타자란 그저 타자의 껍데기만을 지닌 내 세계의 수동적 존재일뿐이다. 라는 결론에 까지 이를수 있다. 위를 따라 차이란 그저 동일적인 전제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다른 차이 자체는 없는것인가? 위와 같은 표상의 개념은 그런 그 자체로서 다른 측면을 거부한다. 즉, 세계에 대한 해석이 일관되도록 만들어진다. 표상의 개념은 차이 자체를 인정하도록 바뀌어야 한다. 세상에는 나 혼자 살아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절대주의적인 측면은 고려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