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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7일 [부활 제5주일]
요한 14,1-12
버티는 삶과 준비하는 삶의 차이
존 존스(Jon Jones)는 목사의 아들로 어렸을 때는 TV나 인터넷도 하지 않고 자라서 천부적인 재능으로 스물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종합격투기 챔피언이 됩니다.
그런데 챔피언이 되고서부터 천천히 자신 안에서 악마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경기 하기 일주일 전에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퇴폐 생활을 합니다.
그래야 만약 경기에 졌을 때도 자기 실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핑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임신부의 팔을 부러뜨리고 도주한다던가,
아니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사고와 범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 성공한 이들이 이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권투선수 타이슨도 그랬고, 영화배우 샤이아 라보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랜스포머의 주인공 샤이아 라보프는 조금 달랐습니다.
처음엔 부모의 이혼으로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만을 믿게 되었고 일찍 영화배우로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폭행과 시비로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결국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을 바꿔준 계기가 있는데 알코올중독 치료사로부터 받은 테이프였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새옹지마’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새옹지마는 지금의 고통도 지나가면 행복이 될 수 있고 지금의 행복도 지나면 고통이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지금의 시간을 버틸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폭력으로 여자가 짐을 싸고 있을 때 이전과는 다르게 친절하게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받아들여 가톨릭 신자가 되고 비오 성인의 영화 주인공도 맡게 됩니다.
우울증을 소재로 한 단편영화 ‘커브’(Curve)는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밑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절벽과 같은 상태에 놓인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버텨보려 안간힘을 쓰는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사람은 나아질 때, 목표가 있을 때 삶의 희망이 생기고 지금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틴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절망이요, 지옥입니다.
삶의 의미가 버티는 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버틸 수 없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수용소에서 버티려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 의미란 수용소 밖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고 나올 때가 72세였습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팔순이 다 되어 남아공의 첫 유색인종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토니 로빈스가 넬슨 만델라에게 “어떻게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만델라는 “난 견뎌냈던 적이 없다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출소하여 더 큰 일을 하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할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우승을 이끈 메시는 우승 직전 “할머니, 오늘이 될 수도 있어요”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메시는 할머니 덕분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몇 번의 은퇴를 결심했었지만, 결국 하늘에 계신 할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정진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아버지께 가서 우리 자리를 마련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견디며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야곱은 20년간 장인 라반 밑에서 노예처럼 일하다 도망하기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에사우를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사우의 축복을 대신 가로채고 그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다면 나중에 에사우를 볼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20년간 살며 노력해서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에게 바치고 자신도 바칩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 인정받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요한 4,12 참조).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7일 [부활 제5주일]
사도행전 6,1-7
베드로 1서 2,4-9
요한 14,1-12
오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있습니까?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 영적 삶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갈망은?
아마도 ‘평생에 걸쳐 단 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을 얼굴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과도한 바람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직접 내 귀로 들어봤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이런 갈망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8절)
아직도 갈길이 먼 필립보 사도,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의 큰 탄식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요한 복음 14장 9~10절)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앙 여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들 머릿속에, 마음 속에, 삶 속에 명료하게 자리잡아야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바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입니다.
두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하느님의 의중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하루에 몇번이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두분은 언제나 상호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신비스런 진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오늘 우리네 신앙 생활 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 명제입니다.
돈보스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던지, 모든 측면에서 모방했던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이 별명을 하나 붙여드렸는데, ‘제2의 돈보스코’ ‘목소리 빼도 돈보스코와 똑같았던 살레시안’이었습니다.
저희 후배 살레시안들은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을 통해 돈보스코를 봤습니다.
또한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은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하고 어눌했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큰 감동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동안 온 몸은 전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곧바로 찾아갔고,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영적 조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말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일>
(2023. 5. 7.)(요한 14,1-12)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들은, 현장에서 곧바로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사도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말씀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일들이나 부족했던 모습들을 솔직하게 기록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정직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5월 7일의 복음 말씀은,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이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후에 우리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었고,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일이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체험한 뒤에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읽어야 예수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부활신앙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 말씀들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도들의 모습은 부활 전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들이 우둔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믿으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그 너머에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신 계획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 1,8).”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도 역시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지상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주 하느님의 권한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생애가 끝난 것으로 보일 텐데, 우리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묵시 1,17-18).”
예수님의 죽음은 ‘당한 일’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암시하신 말씀이고, 또 제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어야 하고, 내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구원과 영생을 얻으려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라는 뜻인데,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목적지가 ‘좋은 곳’이라는 것이 분명할 때, 그곳까지 가는 길이 좋은 길이라면, 즉 쉽고 편안한 길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이라면, 목적지가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고 해도 선뜻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어렵고 힘든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면?
박해 때에 순교자들은 목적지만 생각하면서 목숨을 걸었고, 배교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고난만 생각하면서 목적지를 포기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다는 말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마태 7,26).
그것은 신앙과 ‘삶’이(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는 것, 즉 믿는다고 생각만 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조금만 힘들어도 금방 꺾여버립니다.
반대로,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잘 참고 견디면서, 죽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갑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