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풍년 점지하는 기상목…계정숲에 수십그루 자생
▶업인과보 연줄에 얽힌 사연
현대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갑절로 연장되었으나 삶의 질은 몇 곱으로 야박해진 듯하다. 부모와 자식을 버리는 세상 사람들. 기독교에서는 어린아이가 죽으면 때묻지 않은 영혼이라 하여 하나님의 곁 천당으로 가게 돼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모 앞에 죽은 아이는 지옥고를 받는다. 그것은 죽은 자식이 부모의 눈에 늘 밟히고 가슴에 한으로 묻히어 애간장을 끊어 놓는 불효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란다. 업인과보의 연줄에 얽힌 깊은 까닭이야 알 수 없다하더라도 어린아이는 죽어 지옥 중에서도 탑 쌓는 곳으로 끌려가서 매일같이 돌을 주워 모아 엄마돌 아빠돌하면서 불효의 용서를 빌며 탑을 쌓는 것이다. 그곳에도 해가 뜨는지 날이 저물면 감독관 지옥사자가 나타나 참회하는 정성이 부족하다며 힘겹게 쌓아 올린 탑을 발로 탁 차버리니 허물어진 돌탑을 다시 쌓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여 고사리 손발은 피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이승에 사는 사람들도 누구나 절 앞이나 길을 지나다가 돌무더기를 보면 지옥고를 겪고있는 어린 영혼들의 고통을 들어주기 위해 돌 하나를 던져 주는 것이니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서러운 돌무더기 탑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죽으면 돌무덤을 만들어 주었을까.
전북 진안 마령의 옛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죽으면 하얀 쌀밥 같은 꽃이 피는 이팝나무숲 아래 묻는 풍습이 있었다. 아이들의 무덤 터를 이곳에서 아기사리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그곳 아기사리 터는 없어지고 천연기념물 제214호로 지정된 이팝나무 노거수만 남아 아기 영혼들의 슬픈 사연만 전해주고 있다.
가난과 굶주림 쌀밥 한 그릇 배불리 먹여보지 못한 불쌍한 아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쌀밥 보듯 이팝나무 꽃이라도 보라고 그 나무 아래 자식을 묻고 싶어했던 부모마음을 하늘이나 알아줄까. 저승에서는 엄마 아빠 이름을 부르면서 돌을 주워 탑을 쌓는 아이. 그렇다 생사 고해라 했던가.
▶쇠괴기국에 이밥 한 그릇이 소원
태산보다 더 높다던 보리고개. 지난날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음력 4~5월 늦은 봄 이때 나무를 온통 뒤덮으며 귀한 쌀밥을 닮은 허연 이팝나무 꽃이 피어난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의 내력에는 몇 가지 추론이 있다. 24절기 가운데 입하立夏 무렵에 꽃이 핀다하여 전라도 지방에서 입하나무라 하며 입하가 이팝으로 변음되었다는 설. 이 꽃이 못자리를 할 때쯤 피어나서 일부지역에서 기상목氣象木 역할을 한다고 전해오는데 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성글게 피면 흉년이, 시름겹게 피면 가뭄이 심하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풍년이 들어 쌀밥 먹기를 기원하여 이밥나무로 부른 것이 역시 변음 되어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이 꽃이 활짝 피면 입쌀로 지은 하얀 제삿밥을 연상시키므로 이밥나무 즉 이팝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의 유래 추측에는 석연찮은데가 있다. 이팝나무열매가 익으면 흑자색으로 초본식물 팥의 일종인 흑적색의 이팥과 흡사하게 닮았다. 그러므로 이팥나무라 했을 수 있었을 테고, 조선시대 왕족양반 李氏들만 먹는 밥이라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는데 이 꽃이 피었을 때 뽀얀 쌀밥을 퍼부어 놓은 듯하니 이밥나무라고도 하였을 터이다. 그렇다면「이밭나무」와 「이밥나무」이 두 이름의 의미를 살리면서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면「이팝나무」가 되지 않겠는가.
이팝나무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한 낙엽활엽 큰키나무로 높이 30m까지 자란다. 잎은 마주 달리고 계란꼴 타원형. 꽃은 5~6월경 새로 자란 햇순가지 끝에 자잘한 꽃들이 취산화서 꽃 꼬투리 10cm를 이루면서 일개월간 피고 진다. 꽃 지고 가을 1cm가량의 타원형 열매가 보랏빛 검은 자색으로 익는다. 이팝나무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신비롭다. 아름드리 거대한 나무에 흰눈이 퍼부운 듯 꽃들이 피었다가 낙화되어 바람에 휘날릴 때면 장관을 이루어 발길을 멈추게 하는 황홀한 낭만이 있다. 이팝나무의 영문표기 속명 치오난투스Chionanthus라 한 것은 흰눈꽃이라는 뜻. 서양에서 흰눈꽃이라 한 것을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가난에 지치고 배가 고팠으면 쌀밥을 생각했을까. 지금도 밥을 버리는 사람들 그 죄를 다 어찌 할란고.
이팝나무는 일부지방에서 입하목․이암나무․뻣나무라 불리면서 풍년을 점지하는 기상목氣象木. 동리의 안녕을 비는 신목神木. 가난에 죽은 어린 영혼을 위로하는 쌀밥나무로 보호받아 왔으며 지금은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 제36호 전남 승주군 쌍암면 500살쯤 된 노거수를 비롯하여 수 십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자인서림 이팝나무 집단 서식지
「동의보감」제1권 내경편 집례集例에서 어의御醫 허준許浚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에는 약 唐藥과 향약을 함께 실었는데 향약은 향명과 생산지, 채취시기, 양지와 음지에서 말리는 법을 써놓았으니 약을 갖추어 쓰기 쉬워서 멀리서 구하거나 얻기 어려운 폐해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동의보감에는 향리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들을 골라 실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신통한 약이라 할지라도 일반 백성들이 구할 수 없는 약초라면 병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팝나무는 희귀한 식물이다. 그래서인지 약재로서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약성의 기록도 별로 없다.
한방에서 이팝나무를 생약이름 육도목六道木이라 하고 그 열매를 약용한다. 약령시 보존위원회편 「우리 약초꽃」에서 건위, 정장, 활혈맥의 효능이 있다 했고 기억력 감퇴와 그로 인한 수족마비에 쓰며 꽃은 중풍 치료재로 쓰인다. 그리고 위를 튼튼히 하고 설사를 멎게 하며 혈맥을 활발하게 한다. 이팝나무를 중국에서는 유소목流蘇木이라 하며 그 잎을 다엽茶葉 대용으로 녹차를 만들고 어린잎은 끓는 물에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는다고 했으니 독성을 없다고 하겠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팝나무편에 경북 경산군 자인면 서림에는 50여 그루가 집단으로 자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정은 조금 다르다. 한 생의 젊음을 교육계에 몸바치시고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여 고향 경산 용성 곡란리에서 온갖 풀꽃과 나무를 기르며 살고 계시는 김진우金鎭羽 선생님에 의하면 현재 경산 서림에는 12그루 이팝나무가 남아있고 용성 곡란리에 노거목 한 그루가 있다고 하셨다.
현재 경산시가 자인서림의 이팝나무자생지 전통을 이어받듯 경산시에서 자인면까지 이십리길에 가로수로 이팝나무 수 백 그루를 심어 어린 나무들이 벌써 꽃을 피우고 있다. 누구의 제안인지 알 수 없으나 먼 후일을 내다보는 안목이 돋보이는 수종선택을 아주 잘한 일이다. 우리 후대에 이팝나무가 거목으로 자란다면 경산-자인간 도로는 흰꽃들이 물결을 이루고 눈꽃 되어 휘날릴 때 경산의 명소, 환상적인 길이 될 것이다.
이팝나무는 한반도 남쪽지방을 비롯하여 중국, 타이완, 일본에 분포하는 세계적 희귀목이며 긴 잎 이팝나무는 이 나라 제주도에만 살고있는 특산종이다.
<艸開山房/oldm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