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帳面 92 - 이름 없던 봉우리, 로체에 서다 초모룽마 대신 한풀이한 에른스트 라이스, 프리츠 르후징거(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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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3. 10:33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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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이름 없던 봉우리, 로체에 서다
초모룽마 대신 한풀이한 에른스트 라이스, 프리츠 르후징거(1956년)
요약 로체는 세계에서 네 번째 높은 산인데 초모룽마에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관심을 받지 못했다. 스위스의 노먼 다이렌퍼스가 원정대를 짜 첫 목표를 로체, 다음 목표를 초모룽마로 잡았다. 로체 등정 성공 후 초모룽마에 두 번의 공격대가 모두 오르며 스위스대는 7일 동안 세 번의 정상을 밟고 돌아왔다.
로체에 제일 먼저 도전했던 노먼 다이렌퍼스
로체라는 이름은 티베트 말로 '남쪽 봉우리'를 뜻한다. 즉 초모룽마 남쪽에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로체는 초모룽마에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히말라야의 지형을 처음으로 밝힌 1907년의 책에, 로체는 마나슬루와 함께 이름 없는 봉우리로 되어 있었다.
로체라는 이름은 1921년에 영국의 제1차 초모룽마 원정대가 붙인 이름이다. 그들은 초모룽마에 오르는 길을 찾다가 남쪽 봉우리를 보고 남족을 나타내는 '로'와 봉우리를 가리키는 '체'를 합쳐서 지었다.
높이 8,511m로 세계에서 네 번째인 로체에 그보다 더 낮은 마칼루(8,481m)보다 인간의 도전이 늦어진 까닭은, 세계 최고봉 옆에 있다 보니 들러리처럼 보인 탓이다. 마칼루는 초모룽마에서 20km나 떨어진 곳에 우뚝 서서 많은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으니, 초모룽마의 시녀 같은 로체보다 더 그럴듯하고 위엄이 있어 보였을 터이다.
그런데 실상은 로체도 로체샤르(8,383m) · 피크38(7,589m) · 샤르체(7,502m) 따위 고봉들을 당당히 거느린 하나의 큰 산이다. 또 로체의 남쪽 벽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통틀어 제일 높은 벼랑이 있다.
높이가 무려 3,000m나 되는 이 남벽은, 돌이 언제 굴러떨어질지 모르고 눈사태 위험이 있어, 8,000m 봉우리를 오르는 등산로 가운데 가장 오르기 어려운 루트로 꼽힌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도 인간의 발길을 허락지 않은 요새 중에 요새이다.
로체에 처음 도전한 사람은 미국인 노먼 다이렌퍼스이다. 그는 미국 · 오스트리아 · 스위스 등산가들을 모아 국제 원정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1955년 9월 말과 10월 15일 두 차례 정상을 공격했다. 그러나 8,100m까지 오른 그들은 갑자기 날씨가 나빠진 데다 산소 마스크마저 고장나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1956년 스위스가 원정대를 짰다. 마흔세 살인 알베르트 에글러 박사를 대장으로 한 12명은 평균 나이가 서른 다섯 살로, 아주 강력한 팀이었다.(히말라야 등산은 28~35세가 알맞다고 한다. 스무 살쯤 먹은 이는 힘이 좋기는 하지만 높은 곳에서 오래 버티는 힘이 약하다).
스위스대는 첫째 목표를 로체로 삼고 다음 목표를 초모룽마로 잡았다. 왜냐하면 로체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이 초모룽마로 이어지는데, 이 능선에서 가장 낮은 사우스 콜이 7,986m이니, 로체에서 바로 초모룽마로 가면 그만큼 힘을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초모룽마와 로체가 갈라지는 사우스 콜은, 1952년 스위스대가 이곳을 거쳐 초모룽마를 8,595m까지 올랐으므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셰르파 22명과 짐꾼 350명이 합세한 대부대는 3월 21일 초모룽마 어귀의 당보체 마을에 닿았다. 그들은 쿰부 빙하를 거슬러올라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이어서 5,850m에 제1 캠프를 세웠다.
여기까지는 별로 힘이 안들었으나, 빙폭 위쪽의 크레바스를 건너는 데 사흘이나 걸렸다. 여기서 준비해 간 폭약의 반을 써버렸다. 스위스대는 1952년 초모룽마에 오를 때, 로체의 서쪽 능선이 너무 가팔라 텐트 칠 곳이 없음을 살펴 두었었다. 그들은 비탈에 굴을 파려고 폭약을 가져갔는데, 엉뚱한 곳에 쓰기는 했지만 아무튼 가장 험난한 곳을 무사히 지났다.
제4 캠프가 6,950m, 제5 캠프가 7,500m, 제6 캠프가 7,870m에 세워졌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겨우 500m. 정상은 손 안에 들어온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제6 캠프를 세우자 돌연 날씨가 나빠졌다.
석 주일이나 맑았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쌓여 있는 눈 위에 새로 눈이 내리면 먼젓번 눈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눈사태가 일어난다. 스위스대가 세운 제6 캠프는 아주 가파른 비탈에 있었다. 대원들은 일단 베이스 캠프로 내려왔다.
날씨 탓으로 물러서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그들은 낮은 곳에서 푹 쉴 수 있었다. 그때에는 몰랐지만, 7,000m 이상에서 사나흘 묵으면 몸이 금세 약해진다. 베이스 캠프에서 며칠 기다려도 날씨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에글러 대장은 그대로 공격하기로 했다. 셰르파들이 산소통을 비롯한 짐들을 제4 캠프까지 져 올렸다. 대원들이 제4 캠프에서 제6 캠프까지 오르는 사이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좋아졌다.
5월 18일 오전 9시. 에른스트 라이스와 프리츠 르후징거 두 사람이 제6 캠프를 떠나 정상으로 향했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지나고 미끄러운 눈비탈을 오르노라니 얼마나 힘든지 산소를 1분에 4리터나 들이마셔도 숨이 가빴다.
두 사람이 기울기 60도인 마지막 비탈을 넘어선 2시 45분. 갑자기 사방이 탁 트였다. 그들은 마침내 로체 정상에 다다랐다. 꼭대기는 너무 뾰족해서 디디고 올라설 수가 없었다. 정상에서 1m쯤 아래 눈덮인 곳을 발로 잘 다져 디딤대를 만들고서야 가까스로 설 수 있었다.
첫 번째 목적을 이룬 스위스대는 곧바로 초모룽마로 향했다. 4년 전 겨우 253m를 남기고 돌아서는 바람에 첫 등정의 영예를 영국에 빼앗긴 스위스대로서는, 한많은 이 봉우리를 기어이 올라야 했다. 그들은 제6 캠프를 사우스 콜로 옯겼다. 거기에는 3년 전 영국대가 남긴 음식물과 산소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에른스트 슈미트와 위르그 마르멧 두 대원이 정상을 공격했다. 8,400m에 제7 캠프를 세운 두 사람은, 무서운 폭풍으로 텐트가 눈에 짜부러지고 갈가리 찢기는 고생을 겪으면서도 5월 23일 오후 2시 역사상 두 번째로 초모룽마에 올랐다. 로체를 정복한 지 닷새 만의 일이었다. 그 다음날에는 아돌프 라이스트와 H. V. 군텐이 또 초모룽마에 올랐다. 그리하여 스위스대는 7일 동안 승리를 세 번 누리고 돌아왔다.
제1봉에 붙어 있어 서러운 제4봉
초모룽마와 로체의 산줄기가 갈라지는 남쪽 안부(鞍部, 사우스 콜)의 높이는 7,986m이다. 여기서 로체 정상까지는 825m. 초모룽마 정상까지는 862m 거리여서, 등산가들은 대개 초모룽마와 로체를 잇달아 오르거나 초모룽마만을 오르려 한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88년 / 정호진 · 박쾌돈 · 박희동 초등 [네이버 지식백과] 이름 없던 봉우리, 로체에 서다 - 초모룽마 대신 한풀이한 에른스트 라이스, 프리츠 르후징거(1956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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